병자호란 홍이포 수량 파악 2부(완료) 병자호란 이야기

병자호란에서 청이 가져온 홍이포의 수량을 알아보고자 하는데요.

1편을 통해 후금은 최초로 1631년 8월의 대릉하성 공방전에 홍이포를 사용하였습니다.

1631년까지 보유 홍이포는 6문으로 추정되며, 대장군포는 54문으로 추정됩니다.


병자호란 홍이포 수량 파악 1부 https://cafe.naver.com/booheong/168136


그럼 계속하여 1637년까지의 청실록의 홍이포 기사를 모두 모아 1차 초벌번역해 보겠습니다.


3. 홍이포 자체 제작에 성공하다


1633년 3월 19일 기사中

○以王天相創鑄紅衣礮功。及金世昌繼造不用蠟輒鑄成。俱陞備禦。授董成功為千總

○왕천상(王天相)을 비로소 쇠를 부어 홍의포(紅衣礮)를 만든 공으로써

김세창(金世昌)과 더불어 계속(繼)하여 제조(造)하게 하였다.

납(蠟)을 사용(用)하지 않고 쉽게 주성(鑄成/주조함)하였다.

모두 비어관(備禦)으로 승(陞/올림)하였고, 동성공(董成功)을 천총(千總)으로 삼아 제수(授)하였다.


1633년 10월 7일 기사中

○丙寅。大閱。時滿洲行營兵未出。八旗護軍、舊漢人馬步軍、滿洲步軍俱集。分八旗護軍為左右翼。

舊漢人馬步軍為一營。滿洲步軍為一營。俱四面環列。前設紅衣礮三十位。及各種大小礮。隊伍既成。乃奏聞。

○병인일(丙寅)에 대열(大閱/황제의 군 사열)하였다.

이때 만주(滿洲)의 행영병(行營兵)은 미출(未出)하였고, 8기(旗)의 호군(護軍/바야라), 

구한인(舊漢人) 마보군(馬步軍), 만주(滿洲) 보군(步軍)이 모두 집(集)하였고,

8기(旗)의 호군(護軍)을 나눠 좌우익(左右翼)으로 삼았고,

구한인(舊漢人) 마보군(馬步軍)을 1영(營)으로 삼았으며,

만주(滿洲) 보군(步軍)을 1영(營)으로 삼았고, 모두 4면(面)으로 환열(環列)하였고,

앞에는 홍의포(紅衣礮) 30위(位)와 더불어 각종(各種) 대소(大小) 포(礮)를 설치(設)하여

대오(隊伍)가 이미 성(成)하자 이윽고 주문(奏聞)하였다.


1633년 10월 17일 기사中

授丁啟明為二等參將。啟明係明末弁。被擒收養。因善鑄紅衣礮故授是職

정계명(丁啟明)을 이등참장(二等參將)으로 삼아 제수(授)하였다.

정계명(啟明)은 명(明) 말변(末弁)에 관계(係)되어, 피금(被擒/포로로 잡힘)하고 수양(收養/거둬 돌봄)하였는데,

홍의포(紅衣礮)를 잘 주조(鑄)함으로 인(因)하여 이런 연고(故)로 이 직(職)을 제수(授)하였다.


→ 마침내 1633년이 되자 한족 왕천상, 김세창, 정계명 등의 기술자들이 홍이포 자체 제작에 성공합니다.

   기술자들은 모두 승진하였습니다.

→ 1633년 10월 7일에 홍 타이지가 군을 사열하였는데 이 자리에 홍의포 30문까지 배치되었네요.

   2년 만에 6문에서 30문으로 수량이 크게 늘었습니다.



4. 우전 초오하(한족군)에게 18문 이동수레 제작을 명하다.


1634년 5월 19일 기사中

又諭漢軍甲喇章京圖瞻達爾漢曰。

朕因爾等誠信。特令留守。新附官員。可時加防範。

一切軍器宜加意修整。隨營紅衣礮一十八位。俱速令造車完備。

또 한군(漢軍) 갑라장경(甲喇章京) 도첨달이한(圖瞻達爾漢)에게 유지(諭)하여 말하길

짐(朕)이 너희들의 성신(誠信)으로 인(因)하여, 유수(留守)를 특령(特令)하여, 관원(官員)을 신부(新附)하였으니,

가히(可) 이때 방범(防範/방비의 계책)을 가(加)하고,

일체(一切)의 군기(軍器)는 의당(宜) 수정(修整/수선함)을 가의(加意/특별히 중시함)하여야 하며,

수영(隨營)은 홍의포(紅衣礮) 18위(位)는 모두 신속(速)히 조거(造車/수레를 만듦)를 완비(完備)해야만 한다.


→ 이 기록을 토대로 한군(우전 초오하)가 보유한 홍이포가 30문이고,

   이중 18문은 이동식이라고 추정하였나 봅니다.



5. 병자호란(홍이포 수송)


홍이포를 수송할 청의 6차 부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두두 : 1니루당 갑사3명, 여진족+내번몽고족 약 960명~990명

2. 석정주 한족 부대(우전 초오하) : 약 1만

3. 한족 3왕(공유덕,경중명,상가희) : 1340명

→ 총합 12300~12330명


1636년 12월 9일 기사中

○是日命多羅安平貝勒杜度恭順王孔有德 、懷順王耿仲明 、智順王尚可喜 、昂邦章京石廷柱、馬光遠等、

率每旗梅勒章京一員。每牛彔甲士三人。及石廷柱旗下漢軍在後。護送紅衣礮、將軍礮。法熕鳥鎗車牌、輜重等物

○이날에 명(命)하여 다라안평패륵(多羅安平貝勒/도로이 얼어훈 버이러) 두도(杜度/두두),

공순왕(恭順王) 공유덕(孔有德), 회순왕(懷順王) 경중명(耿仲明), 지순왕(智順王) 상가희(尚可喜),

앙방장경(昂邦章京/암반 장긴) 석정주(石廷柱), 마광원(馬光遠) 등(等)은

매(每) 기(旗)마다 매륵장경(梅勒章京/머이런 장긴) 1원(員)과

매(每) 우록(牛彔/니루)의 갑사(甲士) 3인과 더불어 석정주(石廷柱) 기(旗) 관하(下) 한군(漢軍)을 인솔(率)하여,

재후(在後/뒤에 남음)하여 홍의포(紅衣礮), 장군포(將軍礮), 법궁(法熕), 조창(鳥鎗), 차패(車牌), 치중(輜重) 

등(等)의 물건(物)을 호송(護送)하라!


1636년 12월 16일 기사中

大軍所帶紅衣礮、將軍礮、火器戰車、爾寧不之見耶。朕若速回、胡為攜此重器而來。

대군(大軍)이 소대(所帶)한 홍의포(紅衣礮), 장군포(將軍礮), 화기전차(火器戰車)를

너는 어찌 보지 못하였느냐?

짐(朕) 만약(若) 속회(速回/빨리 돌아감)한다면 이 중기(重器)를 어찌 끌고 왔겠느냐?


1637년 1월 10일 기사中

○是日、多羅安平貝勒杜度等護送紅衣礮將軍礮、火藥重器等車至。奏言、初六日、遣人往視臨津江渡口回報云冰已盡解。

即步行亦難。臣意此非架橋之時輜重何由得渡心甚憂之。及將至渡口之前一夜。天氣清朗。忽然陰翳。

雨雪交作寒甚。冰既泮復凝正月初七日。至臨津江向以徒步不可行者數萬軍士。坦然徑渡矣

上曰禎祥洊至。皆天意也

○이날에, 다라(多羅) 안평패륵(安平貝勒) 두도(杜度) 등(等)이 홍의포(紅衣礮)와 장군포(將軍礮) 및

화약(火藥) 중기(重器) 등(等)의 차(車/수레)를 호송(護送)하여 이르렀다.

주언(奏言/아뢰어 말함)하길

   <초(初) 6일에, 견인(遣人/사람을 보냄)하여 임진강(臨津江) 도구(渡口/나루터)를 왕시(往視/가서 봄)하게 하였는데,

    회보(回報/돌아와서 보고함)하여 말하길 얼음이 이미(已) 모두 녹아,

    곧 보행(步行) 역시(亦) 난(難/어려움)하다 하였습니다.

    신(臣)의 생각에 이는 가교(架橋/다리를 놓음)의 때가 아니라면 

    치중(輜重/군수품)을 어떤 도리로 득도(得渡/건넘을 얻음)하겠는가? 하며 

    마음이 심히(甚) 우(憂/근심함)하였습니다.

    도구(渡口/나루터)의 앞에 이르러 하룻밤을 보내니, 천기(天氣)가 청랑(清朗/맑음)하였는데,

    홀연히(忽然) 음예(陰翳/하늘에 구름이 덮여 어두움)하였고, 

    우설(雨雪/눈과 비)이 교작(交作/썪여 내림)하여 한심(寒甚/매우 추움)하였고,

    얼음이 이윽고 반(泮/물가)이 복응(復凝/다시 얼어붙음)하였습니다.

    정월(正月) 초(初) 7일에, 임진강(臨津江) 방향(向)에 이르러 

    도보(徒步)로 건너지 못하던 수만(數萬) 군사(軍士)가 탄연(坦然/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음)하게 

    경도(徑渡/가로질러 건넘)하였나이다.>

상(上/임금, 청 태종)이 말하길

   <정상(禎祥/상서로운 조짐)이 천지(洊至/연거푸 이름)하였으니, 모두 천의(天意/하늘의 뜻)이로다!>


1637년 1월 22일 기사中

○壬戌。往取江華島和碩睿親王多爾袞遣納敏代音楚興格內來奏云我軍至島朝鮮有兵船四十餘於渡口迎戰

我軍用紅衣礮攻擊。敵不能當東西逃散黎明我軍乘船進攻。入江華島殺鳥鎗手百人又擊殺伏兵千餘

○ 임술일(壬戌)에, 강화도(江華島)에 왕취(往取/가서 취함)한 화석(和碩)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이 보낸

납민(納敏), 대음초(代音楚), 흥격내(興格內)가 내주(來奏/와서 아룀)하여 말하길

   <아군(我軍)이 섬에 이르니 조선(朝鮮)의 병선(兵船) 40여 척이 있어

    도구(渡口/나루터)에서 영전(迎戰/맞아 싸움)하였습니다.

    아군(我軍)이 홍의포(紅衣礮)를 사용(用)하여 공격(攻擊)하니,

    적(敵)이 당(當)함이 불능(不能)하여 동서(東西)로 도산(逃散/도망쳐 흩어짐)하였습니다.

    여명(黎明/동틀 무렵)에 아군(我軍)이 승선(乘船/배를 탐)하고 진공(進攻/공격하여 나아감)하여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조총수(鳥鎗手) 100인을 살(殺)하였고,

    또 복병(伏兵) 천여(千餘)를 격살(擊殺/공격하여 죽임)하였습니다.>


1637년 2월 2일 기사中

○壬申。

上自朝鮮班師命和碩睿親王多爾袞多羅安平貝勒杜度、率滿洲蒙古漢人大軍。攜所俘獲在後行又命貝子碩託、

恭順王孔有德 、懷順王耿仲明 、智順王尚可喜 、率每牛彔甲士四人及三王下全軍舁紅衣礮。十六位。

並朝鮮戰船五十艘往取明皮島

○임신일(壬申)에, 상(上)이 조선(朝鮮)으로부터 반사(班師/회군)하였다.

명(命)하여 화석예친왕(和碩睿親王/호쇼이 머르건 친왕) 다이곤(多爾袞/도르곤),

다라안평패륵(多羅安平貝勒/도로이 얼허운 버이러) 두도(杜度/두두)는

만주(滿洲), 몽고(蒙古), 한인(漢人)의 대군(大軍)을 인솔(率)하고

부획(俘獲/포로)를 휴(攜/끎)하고 후미(後)에서 행군(行)하게 하였다.

또 명(命)하여 패자(貝子/버이서) 석탁(碩託/쇼토), 공순왕(恭順王) 공유덕(孔有德), 회순왕(懷順王) 경중명(耿仲明),

지순왕(智順王) 상가희(尚可喜)는 매(每) 우록(牛彔/니루)마다 갑사(甲士) 4인(人)과 더불어

3왕(王) 예하(下) 전군(全軍)을 인솔(率)하여, 

홍의포(紅衣礮) 16위(位)와 아울러 조선(朝鮮) 전선(戰船) 50소(艘) 를 거(舁/듦)하고

명(明) 피도(皮島/가도)를 왕취(往取/가서 취함)하게 하였다.


1637년 2월 5일 기사中

令八旗造小船八十艘。遣和碩睿親王多爾袞多羅安平貝勒杜度。率每牛彔甲士十人。取朝鮮王妻子所居之江華島。

和碩睿親王等。於正月二十二日。至江華島。我舟師將渡海時。江華島敵船。約有百艘。列為兩翼。

我舟師從中衝入。連發紅衣礮。敵船兵役。不能抵敵、逃去。於是我兵登岸。朝鮮兵來迎。敗之又擊敗其兵約千人。

8기(旗)로 하여금 소선(小船) 80소(艘)를 건조(造)하게 하였고,

화석예친왕(和碩睿親王) 다이곤(多爾袞)과 다라안평패륵(多羅安平貝) 두도(勒杜)를 보내

매(每) 우록(牛彔/니루) 갑사(甲士) 10인을 인솔(率)하여 도(度/건넘)하여,

강화도(江華島)에 거주(居)하는 조선왕(朝鮮王)의 처자(妻子)를 취(取)하게 하였다.

화석예친왕(和碩睿親王) 등(等)이 1월 22일에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러,

아군(我)의 주사(舟師)가 장차(將) 도해(渡海/바다를 건넘)할 때에, 

강화도(江華島)의 적석(敵船)은 약(約) 100소(艘)가 양익(兩翼)으로 배열(列)해 있었다.

아군(我)의 주사(舟師)가 쫓아 가운데로 충입(衝入/공격하여 들어감)하여 홍이포(紅衣礮)를 연발(連發)하니, 

적선(敵船)의 병역(兵役)이 저적(抵敵/대적함)이 불능(不能)하여 도거(逃去/도망쳐 가버림)하였다.

이에 아병(我兵)이 등안(登岸/해안가에 올라감)하니 조선병(朝鮮兵)이 내영(來迎/맞이하여 옴)하였는데 

패(敗/깨트림)하였고, 또 其 그 병(兵) 약(約) 1000인을 격패(擊敗/공격하여 깨트림)하였다.


→ 석정주의 우전 초오하(한족군)가 보유한 홍이포 18문

→ 한족3왕이 가도 공격에 동원한 홍이포 16문

   하여 총합 34문이라고 추정하였다고 생각합니다.


2부 결론

1. 1633년 후금은 홍이포 자체 생산에 성공한다.

2. 1636년 병자호란 직전 후금의 홍이포 보유량은 총 46문 정도이다.

3. 병자호란에 동원한 홍이포는 우전 초오하(한족군) 18문+한족3왕 16문 총합 34문이다.


-끝-


2차 선봉대 병력 규모를 통한 청군5만 증명 병자호란 이야기



만문노당 1636년 12월 3일 기사中

○ ice ilan de. boigon i jurgan i aliha amban mafuta.

○ 이처 이란 더. 보이곤 이 주르간 이 아리하 암반 마푸타.

○ 초 3 에. 호 의 부 의 승 정 마푸타.

gabsihiyan coohai amban loosa xongkoro baturu i jergi ambasa de ilan tanggv cooha afabufi.

갑시햔 초오하이 암반 로오사 숑코로 바투루 이 저르기 암바사 더 이란 탕우 초오하 아파부피.

선봉 군대의 암반 로오사 숑코로 바투루 의 직위 암반들 에 3 100 군대 맡기고.

juleri hvdai niyalma arame holtome dobori inenggi akv genefi 

주러리 후다이 냘마 아라머 홀토머 도보리 이넝이 아쿠 거너피

앞에 장사의 사람 만들며 속이며 밤 낮 없게 가서

solho i wang ni tehe wang ging hecen be ka seme unggihe.

솔호 이 왕 니 터허 왕 깅 허천 버 카! 서머 웅이허.

고려 의 왕 이 사는 왕 경 성 을 포위하라! 하며 보냈다.

mafuta. loosa xongkoro baturu sei sirame hoxoi erke cin wang.

마푸타. 로오사 숑코로 바투루 서이 시라머 호쇼이 어르커 친 왕.

마푸타. 로오사 숑코로 바투루 등의 다음 호소이 예(豫) 친 왕.

gvsai beise xoto. nikan de bayarai cooha emu minggan afabufi.

구사이 버이서 쇼토. 니칸 더 바야라이 초오하 어무 밍안 아파부피.

기의 버이서 쇼토. 니칸 에 바야라의 군대 1 천 맡기고.

solho i wang ging hecen be ka seme unggihe.

솔호 이 왕 깅 허천 더 카! 서머 웅이허.

고려 의 왕 경 성 을 포위하라! 하며 보냈다.


 (1636년 12월) 3일에 호부의 승정 마푸타와 선봉 군대의 암반 로오사 숑코로 바투루의 

동급 암반들에 300 군대 맡기고 앞에 장사의 사람 만들며 속이며 밤낮 없게 가서

   <고려의 왕이 사는 왕경성(한양)을 포위하라!>

하며 보냈다.

마푸타와 로오사 숑코로 바투루 등의 다음에는 호소이 예친왕(도도)와 기의 버이서 쇼토 및 니칸에

바야라의 군대 1천 맡기고

   <고려의 왕경성(한양)을 포위하라!>

하며 보냈다.


1차 선봉대 마푸타+로오사 300명

2차 선봉대 도도+쇼토+니칸 바야라 1천

이라고 분명히 기록하였습니다.


만주어 만문노당은 1636년 12월이 마지막이므로 한문 청실록 1월 16일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청실록 태종문황제 1637년 1월 16일

○丙辰命碩翁科羅巴圖魯勞薩及吳拜等齎敕率前鋒全軍還盛京諭留守和碩鄭親王濟爾哈朗多羅武英郡王阿濟格

多羅饒餘貝勒阿巴泰等曰去年十二月初八日首隊前鋒兵已渡義州鎮江初九日黎明和碩豫親王多鐸率每牛彔甲士三名

多羅貝勒岳託率每牛彔甲士五名並以次相繼而渡初十日朕率大軍渡江首隊前鋒兵於十二月十四日將至朝鮮王京城

○병진일(丙辰)에 명(命)하여 석옹과라(碩翁科羅) 파도로(巴圖魯) 로살(勞薩)은 

오배(吳拜) 등(等)과 더불어 재칙(齎敕/칙서를 지님)하여 전봉(前鋒/선봉)의 전군(全軍)을 인솔(率)하여

성경(盛京)으로 귀환()하여 유수(留守/남아 지킴)하는 화석정친왕(和碩鄭親王) 제이합랑(濟爾哈朗),

다라무영군왕(多羅武英郡) 아제격(阿濟), 다라요여패륵(格多羅饒餘貝勒) 아파태(阿巴泰) 등(等)에게 

유지(諭)를 내려 말하길

거년(去年/지난해) 12월 초 8일에 수대(首隊/1차 선봉대)와 전봉(前鋒/선봉)의 병(兵)이 

이미(已) 의주(義州)의 진강(鎮江/압록강)을 도(渡/건넘)하였고,

초 9일 여명(黎明/동틀 무렵)에 화석예친왕(和碩豫親王) 다탁(多鐸)이 매(每) 우록(牛彔) 갑사(甲士) 3명씩을 

인솔(率)하고,

다라패륵(多羅貝勒) 악탁(岳託)은 매(每) 우록(牛彔) 갑사(甲士) 5명씩을 인솔(率)하고,

나란히 이차(以次/순서대로)로 상계(相繼/서로 이어나감)하여 도(渡/건넘)하였다.

짐(朕)은 초 10일에 대군(大軍)을 인솔(率)하여 도강(渡江)하였다.

수대(首隊/1차 선봉대)와 전봉(前鋒)의 병(兵)은 12월 14일에 장차(將) 조선(朝鮮) 왕경성(王京城)에 이르니


○ 1637년 1월 16일에 명을 내려 석옹과라 파도로(숑코로 바투루) 로살(로오사)은 오배(우바이) 등과 더불어

칙서를 지니고 선봉의 전군을 인솔하여 성경(청의 수도 심양)으로 귀환하게 하였다.

본국에 남아 수비하던 화석정친왕(호쇼이 우전 친왕) 제이합랑(지르갈앙), 다라무영군왕(도로이 바투루 균왕) 

아제격(아지거), 다라요여패륵(doroi bayan beile) 아파태(아바타이) 등에게 유지를 내려 말하길

   <지난해 12월 8일에 수대(1차 선봉대, 마푸타의 300기병)와 선봉의 병력이 이미 의주의 진강(압록강)을 건넜고 

    9일 동틀 무렵에 화석예친왕(호쇼이 어르커 친왕) 다탁(도도)이 1 우록(니루)당 갑사 3명씩을 인솔하고

    다라패륵(도로이 버이러) 악탁(요토)은 1 우록당 갑사 5명씩을 인솔하고 나란히 순서대로 서로 이어나가 

    강을 건넜다.

    짐은 10일에 대군을 인솔하여 도강하였다.

    수대와 선봉의 군대는 12월 14일에 장차 조선 왕경성(서울)에 이르렀는데


2차 선봉대 도도가 1니루당 갑사 3명씩 인솔했다고 나옵니다.


1병자호란 청군5만? 만주족+몽고족 정규군(요토의 병력 동원 명령장) 연구 

https://cafe.naver.com/booheong/167997


를 살펴보면 당시 청의 총 니루수가 320~330니루라 추정하였지요.

이를 갑사3명씩으로 계산하면 960~990명입니다.

만문노당 12월 3일 기사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즉 병자호란 청의 전군은 요토의 병력 동원령에 의해 총합 5만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당시 니루는 2차 선봉대 도도의 1니루 3갑사를 통해 약 333니루 정도였음이 확인되죠.

덤으로 갑사는 갑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야라(호군)도 포함됨으로 병종만을 뜻하지 않고

정규군을 뜻한다고 볼수있습니다.

또한 3차 선봉대 요토와 양구리의 총합이 3천인데,

요토는 1니루 갑사5명씩임으로 333니루라 생각하면 1665명,

3차 선봉대 양구리의 병력은 약 1335명이라고 추정됩니다.

물론 320니루라 하면 요토는 1600, 양구리는 1400명이 되네요.

이를 통해 광교산 전투 당시 전사한 양구리(양고리)의 병력도 얼추 계산이 됩니다.



결론 : 병자호란 청나라 군은 약5만이 거의 확실하다고 증명된다.



병자호란 홍이포 수량 파악 1부 병자호란 이야기

홍이포(홍의포) 명나라가 네덜란드 대포를 본따 만든 화포로

이미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은 그 위력에 쓴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후금은 홍이포를 보유하고자 하였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46문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하더군요.

병자호란 당시 청은 6차 부대인 두두, 한족3왕, 한족군(우전 초오하)에게 이 홍이포 수송을 맡겼고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홍이포를 빨리 수송하라 독촉하기도 하였습니다.

홍이포가 도착하자 홍 타이지는 인조에게 이런 말도 하였지요.


<중요한 홍이포도 들고 왔다! 내가 그냥 돌아갈 것 같으냐?

 군사를 풀어 8도를 유린하겠다! 조선 왕 너는 바다로 들어가라!>


홍이포를 수송할 청의 6차 부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두 : 1니루당 갑사3명, 여진족+내번몽고족 약 960명~990명

석정주 한족 부대(우전 초오하) : 약 1만

한족 3왕 : 1340명

→ 총합 12300~12330명


당시 수송된 홍이포의 수량은 다음과 같다고 추정합니다.


수송 홍이포 총합 34문

1. 우전 초오하 보유 30문 중 18문 동원

2. 한족 3왕 보유 16문 총동원


어떤 논문에 병자호란 당시 청이 동원한 홍의포(홍이포)의 수량은 34문이며
이중 한족 3왕이 이끄는 한족 군대(천우병, 천조병)가 보유한 홍이포가 16문이고,
우전 초오하(중요한 군대/8기 한족 군대)가 보유한 홍이포가 30문중 18문이 동원되었다고 하더군요.
이 18문은 수레에 올려놓고 이동 가능한 홍이포이며 나머지 12문은 수비를 위해 성에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하여 병자호란 당시 홍이포 수량을 파악하기 위해 청실록의 1637년 까지의 모든 홍이포 기사를 
발췌하여 1차 초벌 번역를 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재밌는 내용들이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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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이 홍이포를 이용하여 선제공격하다!

청실록 태종 1630년 5월 13일 기사中

明兵復發紅衣礮、擊壞灤州城垛。城樓焚。

명병(明兵)이 다시 홍의포(紅衣礮)를 발사(發)하여 

난주성(灤州城)의 타(垛/벽)을 격괴(擊壞/공격하여 무너짐)하였고, 성누(城樓)는 분(焚)하였다.


태종 1630년 5월 23일 기사中

令每牛彔撥護軍三名。甲兵二十名。駐守其地。兵數較前更多。特命貝勒阿敏、碩託、眾大臣。

為之統率。及明兵來攻灤州。凡三日。用紅衣礮、破垛口二座。城樓被焚。我兵少卻。

매(每) 우록(牛彔)으로 하여금 호군(護軍/바야라) 3명(名)과 갑병(甲兵) 20명(名)을 발(撥)하여,

그 땅을 주수(駐守)하였는데, 병수(兵數)가 전(前)과 비교(較)하여 갱다(更多)하였다.

특명(特命)하여 패륵(貝勒) 아민(阿敏), 석탁(碩託)과 대신(大臣)무리가 통솔(統率)케 하게 하였다.

명병(明兵)과 난주(灤州)를 내공(來攻)함에 이르러,

무릇 3일간 홍의포(紅衣礮)를 사용(用)하여 타구(垛口) 2좌(座)를 파(破)하였고,

성누(城樓)는 피분(被焚)하였고, 아병(我兵)이 소각(少卻)하였다.


→ 1630년 5월 13일 명이 홍이포를 이용하여 난주를 선제공격하였다.

→ 당시 후금의 난주에는 아민, 쇼토를 대장으로 1니루당 23명, 대략 6440명(노예병 제외)이 수비하고 있었다.



2. 마침내 후금이 홍이포를 보유하게 되다!


청실록 태조 1631년 7월 18일 기사中

○庚寅。上御殿。集諸貝勒大臣。議設統兵將帥。每固山額真下、兩翼各設梅勒額真一員每甲喇、

各設甲喇額真一員。

其隨營紅衣礮、大將軍礮四十位及應用挽車牛騾。皆令總兵官佟養性管理

○경인일(庚寅)에, 상(上)이 어전(御殿)에서 여러 패륵(貝勒)과 대신(大臣)을 집(集)하여,

통병(統兵) 장수(將帥)의 설치(設)를 의논(議)하였는데,

매(每) 고산액진(固山額真/궈사 어전) 이하(下) 양익(兩翼)은 

각각(各) 매륵액진(梅勒額真/머이런 어전) 1원(員)을 설치(設)하고,

매(每) 갑라(甲喇/잘안)는 각각(各) 갑라액진(甲喇額真/잘안 어전) 1원(員)을 설치(設)하였고,

그 수영(隨營) 홍의포(紅衣礮)와 대장군포(大將軍礮) 40위(位)와 더불어

응당(應) 우라(牛騾/소와 노새)를 이용(用)하여 차(車/수레)를 만(挽/끎)하였는데,

모두 총병관(總兵官) 퉁양성(佟養性)이 관리(管理/감독관)하였다.


1631년 8월 7일 기사中

總兵官額駙佟養性、率舊漢兵載紅衣礮、將軍礮

총병관(總兵官) 액부(額駙/어푸) 퉁양성(佟養性)은 구(舊) 한병(漢兵)을 인솔(率)하여,

홍의포(紅衣礮)와 장군포(將軍礮)를 싣고


1631년 8월 12일 기사中

○是日。我軍攻城。以紅衣礮擊西南隅一臺。穿其雉堞擊死一人。臺兵驚懼遂降。隨令我軍列車盾於臺下。

以紅衣礮、大將軍礮攻城之南面壞其雉堞四。敵樓二

○이날에 아군(我軍)이 공성(攻城)하여, 홍의포(紅衣礮)로써 서남(西南) 모퉁이 1대(臺)를 공격(擊)하여,

그 치첩(雉堞/성가퀴)를 천(穿/뚫음)하여 1인이 격사(擊死)하였고,

대병(臺兵)이 경구(驚懼/놀라고 두려워함)하여 마침내 항복(降)하였다.

곧바로 아군(我軍)으로 하여금 대하(臺下)에 거순(盾/수레와 방패)을 열(列/벌려놓음)하게 하여

홍의포(紅衣礮)와 대장군포(大將軍礮)로써 남면(南面)을 공성(攻城)하였고,

그 치첩(雉堞/성가퀴) 넷과 적루(敵樓) 둘을 파괴(壞)하였다.


1631년 8월 15일 기사中

大貝勒代善、貝勒濟爾哈朗、額爾克楚虎爾貝勒多鐸、率兵三千。以紅衣礮大將軍礮、圍攻其臺。

대패륵(大貝勒/암바 버이러) 대선(代善)과 패륵(貝勒) 제이합랑(濟爾哈朗), 

액이극초호이(額爾克楚虎爾), 패륵(貝勒) 다탁(多鐸)이 병(兵) 3천을 인솔(率)하여,

홍이포(紅衣礮)와 대장군포(大將軍礮)로써 그 대(臺)를 위공(圍攻)하였다.


1631년 10월 9일 기사中

○己酉。遣官八員。率兵五百人、及舊漢兵全軍。載紅衣礮六位。將軍礮五十四位。往攻于子章臺。

○기유일(己酉)에 관리(官) 8원(員)을 보내 병(兵) 500인(人)과 더불어 구한병(舊漢兵) 전군(全軍)을 인솔(率)하여,

홍의포(紅衣礮) 6위(位)와 장군포(將軍礮) 54위(位)를 싣고 자장대(子章臺)에 왕공(往攻)하였다.


→ 1631년 7월 홍 타이지는 조대수의 대릉하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퉁양성(시 울이)를 한족 대장으로 삼아 홍이포+장군포 40문을 소와 노새를 이용해 수송하게 하였습니다.

   대릉하성에 당도한 홍이포는 곧장 대릉하성 공격에 투입되었습니다.

→ 이후 명나라 자장대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한번 홍이포 6문과 장군포 54문이 동원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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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결론 : 후금은 1631년 마침내 명에서 노획한 홍이포를 전장에서 쓰기 시작한다.

            관할 부대는 한족으로 이뤄진 퉁양성의 부대이다.

            1631년까지 후금의 홍이포 보유량은 6문으로 보인다.


-2부에서 계속-


식인 생지옥도가 펼쳐진 명 대릉하 공방전 병자호란 이야기

1631년 8월 조대수는 보병 7천, 기병 7천, 부역자 8천, 장사꾼 2천을 이끌고 대릉하성을 쌓고 있었습니다.

이 정보를 들은 홍 타이지는 1니루당 60갑 동원령을 내리고, 이중 20갑은 요동 방어를 나머지 40갑은 대릉하로 진군합니다.

대략 동원 갑병은 11200명, 여기에 몽고 8부족(코르친/아루/자뤁/바린/아오한/나이만/카라친/투멑) 2만 명도 참전합니다.

여기에 퉁양성(시 울이)이 이끄는 홍이포를 동원한 한족부대도 대략 8800명이 종군합니다.

하여 총 4만 대군이 대릉하성으로 진군합니다.

여기에 노예병 쿠툴어들도 약 1만명이 종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릉하성 공방전으로 살펴본 후금 갑병 동원 https://cafe.naver.com/booheong/168126


당시 대릉하성에는 성을 한참 만들다가 후금이 들이닥쳤기 때문에 

여자들이나 아이들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홍 타이지는 공성을 하다 병력이 많이 손상될까 염려되어

무려 3개월 동안 대릉하성을 포위하고 구원오는 명나라 군을 격파합니다.

3개월 동안 대릉하 성은 그야말로 생지옥도가 펼쳐졌는데요.

군량이 다하자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지옥도가 펼쳐졌고

부역자 8천, 장사꾼 2천은 모조리 죽었고 병사들도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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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완전 포위(1631.08.07)


만문노당 1631년 8월 7일 기사中

hoton i duin dere be akvmbume ulan fetehengge. xurdeme gvsin ba. hoton ulan i siden ilan ba bi.

성 의 4 면 을 모두 구덩이 판것. 둘레 30 리. 성 해자 의 사이 3 리 이다.

ulan xumin juwe da. onco juwe da fetefi. ulan i tulergi gencehen be. den juwe da.

구덩이 깊이 2 다(두팔 벌린 길이). 폭 2 다 파고. 구덩이 의 바깥 테두리 를. 높이 2 다.

keremu arame fu sahafi. terei dorgi juwan da i dubede. onco emu da. xumin emu da emu gala ulan fetefi.

성가퀴 만들며 벽 쌓고. 그의 안 10 다 의 끝에. 폭 1 다. 깊이 1 다 1 팔 구덩이 파고.

oiloi xuxu orho birefi boihon sisafi. xurdeme akvmbume ing iliha.

표면 수수 풀 펴서 흙 뿌리고. 주변 모두 영 세웠다.

ing ni tulergi de xumin emu da. onco emu da ulan fetehe.

영 의 바깥 에 둘레 1 다. 폭 1 다 구덩이 팠다.

tuttu bekilefi dorgi niyalma tucici ojorakv. tulergi niyalma dosici ojorakv obume kaha.

그와같이 견고하게 안 사람 나가자니 되지않고. 바깥 사람 들어가자니 되지않게 되며 포위했다.


성의 4면을 모두 구덩이 판 것이 둘레 30리, 성과 해자의 사이 3리이다.

구덩이 깊이는 2다(두팔 벌린 길이), 폭은 2다 파고 구덩이의 바깥 테두리를 높이 2다 성가퀴 만들며 벽 쌓고

그 안 10다의 끝에 폭 1다, 깊이 1.5다 구덩이 파고 표면은 수수풀 펴서 흙 뿌리고 주변 모두 영 세웠다.

영의 바깥에 둘레 1다, 폭 1다 구덩이 팠다.

그와 같이 견고하게 성안의 사람 나가자니 되지 않고 바깥사람 들어가자니 되지 않게 되며 포위했다.



2. 성안에 2만4천명의 남자가 있다!(1631.08.18)


만문노당 1631년 8월 18일 기사中

fonjici moringga cooha nadan minggan. yafahan cooha inu nadan minggan bi sembi.

물으니 기 병 7 천. 보 병 또한 7 천 있다 한다.

weilere niyalma jakvn minggan. hvdai niyalma juwe minggan bi sere.

일할 사람 8 천. 장사의 사람 2 천 있다 한다.


물으니 기병 7천, 보병 또한 7천 있다 한다.

부역자는 8천, 장사꾼은 2천 있다 한다.


→ 후금군은 대릉하성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담을 쌓아 완전히 포위합니다.

   산해관을 비롯한 주변 성들에게 계속하여 원군이 이르렀지만 후금군은 이를 모조리 격파합니다.

   마침내 8월 30일이 되자 대릉하성의 명나라 군도 포위를 뚫기 위해 성문을 열고 뛰쳐나왔으나 모조리 격퇴당하지요.

   이때 포로로 잡힌 명군을 심문하니

   이미 대릉하성은 군량이 모두 바닥나고 말 또한 7000마리 중 3/4이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3. 식량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하다(1631.08.30)


만문노당 1631년 8월 30일 기사中

hoton i dorgi mejige be fonjici. alban weilere niyalma jeku wajifi bucembi.

성 의 안 소식 을 물으니. 부역 일할 사람 양식 끝나고 죽는다.

coohai niyalma inu jeku wajihabi sembi.

군대의 사람 또한 양식 끝났다 한다.

nadan minggan morin omihon de ubu bucehe. tubi bi. bisire morin yaluci ojorakv sembi.

7 천 말 굶주림 에 일부 죽었다. 1/4 있다. 있는 말 타자니 되지않는다 한다.


성안 소식을 물으니 부역자들 양식 떨어져 죽는다. 병사 또한 양식 떨어졌다 한다.

말 7천 마리가 굶어죽고 1/4만(2천) 있다. 있는 말도 타지 못한다.



4. 포위 44일째 사람들이 말을 다 잡아 먹었다(1631.09.20)


만문노당 1631년 9월 20일 기사中

jai orin de dalingho hoton i niyalma be jafafi fonjici.

다시 20 에 대릉하 성 의 사람 을 잡아서 물으니.

jeku emu hontoho bulun. ainci nikan hule i emu tanggv hule bi sembi.

양식 1 짚더미. 아마 한족 석 으로 1 100 석 있다 한다.

nadan minggan morin buceme wajifi. ergen bisirengge juwe tanggv.

7 천 말 죽으며 끝나고. 목숨 있는것 2 100.

yaluci ojorongge nadandu isime bi sere.

타자니 되는것 70 이르며 있다 한다.

alban weilere niyalma dulin bucehe sere.

부역 일할 사람 반 죽었다 한다.

erei majige tafi bisirengge. ainci morin i jalin de tahabi.

이의 조금 연명하고 있는것. 아마 말 의 때문 에 연명한다.


다시 9월 20일에 대릉하성의 사람을 잡아서 물으니

양식 1 짚더미, 아마 한족 석으로는 100석 있다 한다.

말 7천 마리 죽고 목숨이 남은 것은 200마리며 탈수 있는 말은 70마리에 이른다 한다.

부역꾼은 반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조금 연명하고 있는 것은 아마 말 때문에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5. 마지막 원군 4만이 도착하다!(1631.09.27)


만문노당 1631년 9월 27일 기사中

nikan i yafaha morin i cooha duin tumen funceme ginjeo hecen ci orin duin de tucifi.

한족의 보 기 의 군대 4 만 남짓 금주 성 으로부터 20 4 에 나가서.

orin sunja de xolingho bira be doofi.

20 5 에 소릉하 강 을 건너서.

(중략)

orin nadan de nikan i cooha dobori duici ging ni debede axxafi dalingho i baru jime.

20 7 에 한족 의 군대 밤 4 경 의 끝에 이동하고 대릉하 로 향하여 오며.

tofohon ba i debede isinjiha be karun i niyalma safi alanjiha manggi.

15 리 의 끝에 이름 을 염탐 의 사람 알고 알린 뒤에.

han. amba beile. manggvltai beile. degelei taiji. ajige taiji. erke cvhvr.

한. 암바 버이러. 망월타이 버이러. 더걸어이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어르커 춰훠르.

xoto age. juxen monggo i cooha. si uli efu i cooha.

쇼토 공자. 여진 몽고 의 군대. 시 울이 어푸 의 군대.

uheri juwe tumen isirakv cooha be gamame genefi tuwaci.

모두 2 만 이르지않는 군대 를 데려가며 가서 보니.


명나라의 보기병 4만 남짓이 금주서으로부터 24일에 나와서 25일에 소릉하 강을 건넜고

(중략)

27일에 명나라 군은 밤 4경에 이동하여 대릉하로 향하여 와서 15리 끝에 이른 것을 염탐병이 보고 알린 뒤에

한(홍 타이지)은 암바 버이러(다이샨), 망월타이 버이러, 더걸어이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어르커 춰훠르,

쇼토 공자, 여진과 몽고의 군대, 시 울이 어푸의 (한족) 군대 모두 2만 이르지 않는 군대를 데려가며 가서 보니



6. 명 4만 원군 vs 후금 2만[여진족1만5천+나머지 5천(몽고+한족]


만문노당 1631년 9월 27일 기사中

tere afaha de tob seme henduci.

그 싸움 에 정확히 한다 말하면.

nikan i cooha duin tumen. juxen i cooha emu tumen sunja minggan bihe.

한족 의 군대 4 만. 여진 의 군대 1 만 5 천 있었다.

ere gisun dabaha ekiyehe ambula akv.

이 말 지나침 부족함 크지 않다.

nikan be dailame deribuhei yaya mudan ci tere mudan de ambula waha.

한족 을 정벌하며 시작함으로 어떤 때 로부터 그 때 에 많이 죽였다.


그 싸움에 정확히 한다 말하면

한족(명)의 군대 4만, 여진의 군대 1만 5천 있었다.

이 말 지나치거나 부족함 크지 않다.

한족(명)을 정벌하며 시작함으로 어떤 때로부터 그때에 많이 죽였다.



7.포위 77일째 희망은 없다! 잡아 먹히기 전에 투항하라!(1631.10.23)


만문노당 1631년 10월 23일 기사中

tere inenggi. sirdan de bithe arafi hoton i dolo gabtaha bithei gisun

그 날. 화살 에 글 써서 성 의 안 쏜 글의 말.

(중략)

te suweni dorgi niyalma gemu hutu ofi niyalma wame jembi kai.

지금 너희의 안 사람 모두 귀신 되고 사람 죽여 먹는다 하느니라.

neneme suwe tere be wafi jembi dere.

먼저 너희 그 를 죽이고 먹었던 것이니라.

amala gvwa suwembe wafi jeterakv sindambio.

뒤에 타인 너희를 죽이고 먹지않고 풀어주겠느냐?


10월 23일 그날 화살에 글 써서 성안에 쏜 글의 말

(중략)

지금 너희의 안 사람은 모두 귀신 되고 사람 죽여 먹는다 하느니라.

먼저 너희가 그를 죽이고 먹었던 것이니라.

뒤에 다른 사람이 너희를 죽이고 먹지 않고 풀어주겠느냐?



8. 생지옥도! 먼저 백성을 잡아먹고 이젠 병사끼리 잡아먹는다(1631.10.24)


만문노당 1631년 10월 24일 기사中

orin duin de dalingho hoton ci jang i fu gebungge niyalma ukame jihe.

20 4 에 대릉하 성 으로부터 장 익 보 이름난 사람 도망치며 왔다.

tede fonjici. orin sunja. orin ninggun de nukcimbi sembi.

그에 물으니. 20 5. 20 6 에 탈출한다 한다.

neneme alban weilere niyalmai yali jembihe.

앞서 부역 일할 사람의 고기 먹었다.

te meni meni ing ni niyalma yali jembi.

지금 제각 각 영 의 사람 고기 먹는다.

coohai niyalma de bele akv.

군대의 사람 에 쌀 없다.

ambasa hafasa de emte moro juwete moro bele bi seme alaha.

대신 관리 에 각1 승 각2 승 쌀 있다 하며 알렸다.


10월 24일에 대릉하성으로부터 장익보라는 사람이 도망쳐 왔다.

그에게 물으니 (명나라군이) 25일과 26일에 탈출한다 한다.

앞서는 부역자들의 고기 먹었다.

지금은 제각각 영의 병사들의 고기 먹는다.

병사에 쌀 없다. 대신과 관리에게는 각각 1승, 2승씩 쌀 있다 하며 알렸다.



9. 포위 82일째 투항(1631년 10월 28일)


마침내 3달간 성을 지킨 조대수는 항복을 결심하고 이를 말린 부장 하가강(何可綱)을 죽이고 

그 시체를 명나라 병사들이 앞다퉈 잡아먹다.


其尸体被城中饥民分食。事后祖大寿伪报朝廷:“可纲慰阁部,献身为食

그 시체(尸体)는 성중(城中)의 기민(饥民/굶주린 백성)이 분식(分食/나눠 먹음)하였고,

사후(事后) 조대수(祖大寿)가 조정(朝廷)에 위보(伪报/거짓으로 보고함)하길

   <하가강(可纲)이 각부(阁部)를 위로(慰)하기 위해 헌신(献身/몸을 바침)하여 식(食)하게 하였다.>



-이날 조대수는 투항하여 홍 타이지를 알현하고 자신을 금주성으로 보내주면

금주성을 무혈점령하게 해주겠다고 홍 타이지를 안심시키고 단신으로 금주성으로 들어가 후금에 대한 항전을 계속한다.

홍 타이지는 10년 후 다시 금주를 포위하였고 금주성은 다시 한번 지옥도가 펼쳐지게 된다.

결국 조대수는 홍 타이지에게 투항하였고, 청의 무장들은 모두 조대수의 처형을 원하였으나

홍 타이지는 조대수를 용서하였고 조대수는 진심으로 청에 투신하여 조국 명과의 전쟁에 나서게 된다.


-한편 식인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대릉하성 병사들은 후금의 충실한 병사들이 되어 조국 명나라 동족들을 죽인다.



-끝-


대릉하성 공방전으로 살펴본 후금 갑병 동원 병자호란 이야기

1631년 8월 대릉하성 전투에 후금 홍 타이지는 1니루당 갑병 60의 동원령을 내렸고

40명은 출정, 20명은 본국 수비에 동원하였습니다.


당시 후금의 니루가 총 280여 개였으니

동원 총 병력은 16800명, 이중 대릉하로 진군한 병력은 11200명, 본국 수비는 5600명이 담당한 셈입니다.


한편 당시 외번 몽고 8개 부족에서 동원되어 후금군에 종군한 몽고군은 보기병 2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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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문노당 1631년 7월 27일 기사中

nadan biyai orin nadan de. nikan be dailame muduri erin de cooha juraka.

나단 뱌이 오린 나단 더. 니칸 버 다이라머 무두리 어린 더 초오하 주라카.

7 월의 20 7 에. 한족 을 정벌하며 용 때 에 군대 출발했다.

hecen tuwakiyame dudu taiji. sahaliyen taiji. hooge taiji be tebuhe.

허천 투와캬머 두두 타이지. 사하롄 타이지. 호오거 타이지 버 터부허.

성 지키며 두두 타이지. 사하롄 타이지. 호오거 타이지 를 남겼다.


(1631년) 7월 27일에 한족(명나라)를 정벌하러 용때(07~09시)에 군대 출발했다.

성 지키며 두두 타이지, 사하롄 타이지, 호오거 타이지를 남겼다.



만문노당 1631년 8월 1일 기사中

jakvn biyai ice de. fe liyoo yang ni bira de isinjifi.

자쿤 뱌이 이처 더. 퍼 료오 양 니 비라 더 이신지피.

8 월의 초 에. 옛 요 양 의 강 에 이르러서.

emu indeme. golo goloi monggo i cooha be boljofi acaha.

어무 인더머. 고로 고로이 몽오 이 초오하 버 볼조피 아차하.

1 잠자고. 지방 지방의 몽고 의 군대 를 기한정하고 만났다.

korcin. aru. jarut. barin. aohan. naiman. karacin. tumet.

코르친. 아루. 자루트. 바린. 아오한. 나이만. 카라친. 투머트.

코르친. 아루. 자루트. 바린. 아오한. 나이만. 카라친. 투머트.

ere jakvn goloi monggo i yafahan moringga cooha juwe tumen funceme bi.

어러 자쿤 고로이 몽오 이 야파한 모링아 초오하 줘 투먼 푼처머 비.

이 8 지방의 몽고 의 보병 기 병 2 만 남짓 이었다.


(1631년) 8월 초에 옛 요양강에 이르러서 하룻 밤 자고 

곳곳의 몽고 군대를 기한 정하고 만났다.

코르친, 아루, 자뤁, 바린, 아오한, 나이만, 카라친, 투멑

이 8 지방의 몽고의 보기병은 2만 남짓이었다.


당시 몽고군의 병력 동원령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3병자호란 청군5만? 외번 몽고족 병력 연구 https://cafe.naver.com/booheong/168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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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시 팔기군 1니루당 40갑병 동원한 대릉하 공방전 팔기 11200명에 몽고 2만을 합하면

총합 31200명이 되겠습니다.

당시 대릉하 공방전에 투입된 후금의 총병력은 다음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만문노당 1631년 8월 2일 기사中

tereci cooha faksalafi juwe jugvn i dosire de.

터러치 초오하 팤사라피 줘 주군 이 도시러 더.

그로부터 군대 나누고 2 길 로 들어갈 때에.

juwe tumen cooha be degelei taiji. yoto taiji. ajige taiji.

줘 투먼 초오하 버 더거러이 타이지. 요토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2 만 군대 를 더거러이 타이지. 요토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suwe gaifi. i jeo i golo be dosifi. ginjeo i dalingho i siden be kame ili.

숴 가이피. 이 저오 이 고로 버 도시피. 긴저오 이 다링호 이 시던 버 카머 이리!

너희 가지고. 의 주 의 지방 을 들어가고. 금주 의 대릉하 의 사이 를 포위하며 서있어라!

be. be tu cang ni golo be dosifi. guwangning ni amba jugvn be genembi.

버. 버 부 창 니 고로 버 도시피. 구왕닝 니 암바 주군 버 거넘비!

내. 백 토 창 의 지방 을 들어가고. 광녕 의 큰 길 을 가겠다!

ice ninggun de dalingho de acaki.

이처 닝운 더 다링호 더 아차키!

초 6 에 대릉하 에서 만나자!


그로부터 군대 나누고 2길로 들어갈 때에

2만 군대를 더걸어이 타이지, 요토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너희가 가지고 의주 지방을 들어가고 금주의 대릉하의 사이를 포위하며 서있어라!

내 백토창의 지방을 들어가고 광녕의 큰 길을 가겠다!

(8월) 초 6일에 대릉하에서 만나자!


군을 두개로 나누었는데 더걸어이+요토+아지거에게 2만을 주어 의주를 통해 대릉하로 보냅니다.

홍 타이지는 나머지 군을 이끌고 백토창을 통해 대릉하로 갑니다.

하면 홍 타이지가 이끄는 부대도 약2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한명기 교수도 대릉하 공방전에 후금이 4만을 동원했다고 하더군요.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130026004


게다가 만문노당에는 당시 동원된 여진족의 수를 매우 정확하게 다시 한번 강조하여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한 번 보시죠!!!


만문노당 1631년 9월 27일 기사中

tere afaha de tob seme henduci.

터러 아파하 더 톱 서머 헌두치.

그 싸움 에 정확히 한다 말하면.

nikan i cooha duin tumen. juxen i cooha emu tumen sunja minggan bihe.

니칸 이 초오하 두인 투먼. 주션 이 초오하 어무 투먼 순자 밍안 비허.

한족 의 군대 4 만. 여진 의 군대 1 만 5 천 있었다.

ere gisun dabaha ekiyehe ambula akv.

어러 기순 다바하 어켸허 암부라 아쿠.

이 말 지나침 부족함 크지 않다.

nikan be dailame deribuhei yaya mudan ci tere mudan de ambula waha.

니칸 버 다이라머 더리부허이 야야 무단 치 터러 무단 더 암부라 와하.

한족 을 정벌하며 시작함으로 어떤 때 로부터 그 때 에 많이 죽였다.


그 싸움에 정확히 한다 말하면

한족(명)의 군대 4만, 여진의 군대 1만 5천 있었다.

이 말 지나치거나 부족함 크지 않다.

한족(명)을 정벌하며 시작함으로 어떤 때로부터 그때에 많이 죽였다.


1631년 9월 27일 후금이 대릉하성을 완전히 포위한 지 2달째

마침내 영원성에서 출발한 명 원군 4만은 소릉하를 거쳐 대릉하성에 육박합니다.

이때 홍 타이지는 2만 명은 대릉하성을 방비하게 하고 2만 명을 이끌고 요격에 나섭니다.

그리고는 4만 명의 명나라 군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리지요.

이 전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만문노당에는 전에 없는 전과라며

여진의 군대가 정확하게 1만5천 있었고 명나라의 군대가 4만 있었다고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정확하게 기록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진병력이 1만5천이고, 나머지 몽고군+한족군이 5천인 셈입니다.

헌데 동원된 여진 갑병이 11200, 그렇다면 나머지 여진족 3800명은 누구일까요?

아마 여진 노예병(쿠툴어)들이 아닐까 싶네요.


당시 동원된 한족군은 퉁양성(佟養性), 만주 이름은 시 울이(si uli)가 이끌고 있었는데

이 전투에 후금 최초로 홍이포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종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631년 8월 대릉하성 공방전에 동원된 후금 팔기갑병 11200,

외번 몽고 2만, 한족군 8800 총 4만

여기에 종군한 노예병인 쿠툴어까지 합산하면 총 5만으로 추산됩니다.

당시 홍 타이지의 쿠툴어 발언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4병자호란 청군5만? 노예병(쿠툴어) 병력 연구 https://cafe.naver.com/booheong/168090



결론 : 

후금 갑병 동원으로 인한 실질 병력 추산은 비교적 정확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1니루당 32 갑병 동원으로 인한 

참전 청군은 약5 만이 실제에 가까우며, 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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