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 고종 국역 21부-전함을 건조하라! 송사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송사 휘종, 흠종 본기를 국역하였는데요, 틈틈히 남송 1대 황제 고종의 본기도 국역코자 합니다.


01부-천하병마 대원수부를 열고 근왕병을 이끌다!

02부-북송멸망&괴뢰국 대초&근왕병 백만명

03부-강왕에게 몰려드는 북송의 신하들

04부-남송(南宋) 건국

05부-무너진 나라를 재정비하다.

06부-대초 황제 장방창을 참역죄로 유배보내다!

07부-96만 명의 군인을 편성하다

08부-고종<중원에 남아 금과 결전하겠노라!>

09부-휘종<아들아 나를 구해다오>

10부-충의지사 유생을 죽이다.

11부-계속되는 반란과 금의 재침공

12부-장방창 사사와 악비의 등장

13부-걷잡을 수 없는 반란군과 도주하는 고종

14부-반란군을 선참후계하라!

15부-파죽지세 금군의 재침과 반란군 진압

16부-다시 무너지는 송나라

17부-황제여 개봉으로 돌아오소서!

18부-지방관에게 편의종사권을 부여하다

19부-패착! 문가사에서 대패하다

20부-불가피한 화전양면책


송사 흠종 조환 국역 1부~17부


송사 고종 원문 출처 :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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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乙卯,權罷邛州鑄錢,增印錢引。
癸亥,建州卒葉濃等作亂,寇福州。
甲子,親慮囚。
乙丑,張俊至秀州,殺趙叔近,執徐明斬之。
甲戌,葉濃陷福州。
丁丑,詔江、浙沿流州軍練水軍,造戰艦。
京畿、淮甸蝗。
是月,以知延安府王庶節制陝西六路軍馬,涇原經略使統制官曲端為節制司都統制。
永興軍經略使郭琰逐王擇仁,擇仁奔興元。

6월 을묘일(乙卯)에, 공주(邛州)의 주전(鑄錢/돈을 주조함)을 권파(權罷/잠시 멈춤)하였고,

전인(錢引/북송말 유통되던 어음, 수표)을 증인(增印/늘려서 인쇄함)하였다.

계해일(癸亥)에, 건주(建州)의 졸(卒) 엽농(葉濃) 등(等)이 작난(作亂/난을 일으킴)하였는데,
복주(福州)를 구(寇/도적질함)하였다.
갑자일(甲子)에, 친히(親) 여수(慮囚/천재지변시 죄수를 사면함)하였다.
을축일(乙丑)에, 장준(張俊)이 수주(秀州)에 이르러, 조숙근(趙叔近)을 살해(殺)하고,
서명(徐明)을 집(執/사로잡음)하여 참(斬)하였다.
갑술일(甲戌)에, 엽농(葉濃)이 복주(福州)를 함락(陷)하였다.
정축일(丁丑)에, 조(詔)하여 강(江)과 절(浙)의 연류(沿流/강변, 해변)하는 주군(州軍)은 
수군(水軍)을 훈련(練)하고, 전함(戰艦)을 건조(造)하였다.
경기(京畿)와 회전(淮甸)에 황충(蝗/메뚜기떼)이 들었다.
이달에, 지연안부(知延安府) 왕서(王庶)에게 섬서(陝西) 육로(六路)의 군마(軍馬)를 절제(節制/통제)하게 하였고,
경원(涇原) 경략사(經略使) 통제관(統制官) 곡단(曲端)을 절제사(節制司) 도통제(都統制)로 삼았다.
영흥군(永興軍) 경략사(經略使) 곽염(郭琰)이 왕택인(王擇仁)을 축출(逐)하자,
왕택인(擇仁)이 흥원(興元)으로 분(奔/달아남)하였다.


1128년 6월 02일에 공주에서 돈을 주조하는 것을 잠시 멈추게 하고 전조에서 유통하던 어음을 늘려서 인쇄하였다.

6월 10일에 건주의 졸병 엽농 등이 반란을 일으켜 복주를 도적질하였다.
6월 11일에 친히 죄수를 사면하였다.
6월 12일에 장준이 수주에 이르러 조숙근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던 서명을 사로잡아 참하였다.
6월 21일에 반란군 엽농이 복주를 함락하였다.
6월 24일에 조서를 내려 강과 절의 강변에 있는 지역은 수군을 훈련하고 전함을 건조하게 하였다.
경기와 회전에 메뚜기떼가 들었다.
이달에 지연안부 왕서에서 섬서 육로의 군마를 절제하게 하였고,
경원 경략사 통제관 곡단을 절제사 도통제로 삼았다.
영흥군 경략사 곽염이 왕택인을 축출하자 왕택인이 흥원으로 달아났다.


요약.
1128년 6월 동전 주조를 일시 멈추고 북송 말에 유통되던 어음을 쓰기 시작했다.
여전히 각지에서 반란군이 날뛰고 있었다.
금에 함락되었던 영흥군을 왕택인이 수복하였는데 영흥군 경략사 곽염이 왕택인을 쫓아내는 코미디도 연출되었다.
한편 고종은 수전을 대비하기 위해 수군 훈련과 전함 건조를 명하였다.

-22부에서 계속-

악비의 전공은 뻥인가? 1부<악비가 나타났다!> 금초+요말+북송말 이야기

송사 고종 본기를 번역하고 있는데요.

역시나 악비가 본기에 출현한지 2번째 만에 악비열전하고 심각하게 충돌하는 부분이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일전에도 악비 열전은 항간에 악비의 후손이 쓴 악왕행실편년(鄂王行實編年)이 기초가 되었으며

여러 사서의 내용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고 글을 쓴 적이 있었지요.


금 철부도 중장보병설+괴자마 연환돌격 허구설+악비 언성대첩 전공 부풀리기

악비 마찰도로 금 중기병 괴자마를 박살내다!


독자분께서 직접 송사 본기와 악비 열전을 비교해 보시고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


송사 고종 1129년 1월 기사中

乙未,杜充遣岳飛、桑仲討其叛將張用於城南,其徒王善救之,官軍敗績。
庚子,張用、王善寇淮寧府,守臣馮長寧卻之。

을미일(乙未)에, 두충(杜充)이 악비(岳飛)와 상중(桑仲)을 보내 

그 반장(叛將/반란군 장수) 장용(張用)을 성남(城南)에서 토벌(討)하게 하였는데,

그 도(徒/무리) 왕선(王善)이 구원(救)하니, 관군(官軍)이 패적(敗績/패전)하였다.

경자일(庚子)에, 장용(張用)과 왕선(王善)이 회녕부(淮寧府)를 구(寇/약탈함)하니,

수신(守臣) 풍장녕(馮長寧)이 각(卻/물러남)하게 하였다.


1129년 1월 16일에 두충이 악비와 상중을 보내 반란군 장수 장용을 성남에서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 무리 왕선이 구원하니 관군이 패전하였다.

1월 21일 장용과 왕선이 회녕부를 약탈하니 수신 풍장녕이 퇴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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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가 송사 악비 열전으로 가면 다음과 같이 변형됩니다.


송사 악비 열전 中

三年,賊王善、曹成、孔彥舟等合衆五十萬,薄南薰門。

飛所部僅八百,衆懼不敵,飛曰:

「吾為諸君破之。」

左挾弓,右運矛,橫衝其陣,賊亂,大敗之。

又擒賊杜叔五、孫海于東明。

借補英州刺史。

王善圍陳州,飛戰于清河,擒其將孫勝、孫清,授真刺史。

[건염(建炎/남송 1대 황제 고종의 #1연호)] 3년(1129년)에,

도적(賊) 왕선(王善)과 조성(曹成) 및 공언주(孔彥舟) 등(等)이 합중(合衆/무리를 합함)하여 50만(萬)이었는데,

남훈문(南薰門)을 육박(薄)하였다.

악비(飛)의 소부(所部/소속 부대)가 근(僅) 800이었는데, 

무리가 부적(不敵/대적하지 못함)을 구(懼/두려워함)하니, 악비(飛)가 말하길

「내가 제군(諸君)을 위하여 파(破/깨트림)하겠다!」

좌측(左)으로 협궁(弓/활을 낌)하고, 우측(右)으로 운모(運矛/창을 휘두름)하여,

그 진(陣)을 횡충(橫衝/가로질러 찌름)하니, 적(賊)이 난(亂/어지러움)하여,

대패(大敗/크게 깨트림)시켰다.


1129년에 도적 왕선과 조성, 공언주 등이 무리를 합하여 50만에 이르렀는데 남훈문을 육박하였다.

악비의 소속 부대가 근 800이었는데 무리가 대적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니

악비가 말하길

<내가 제군들을 위하여 적을 깨트리겠노라!>

좌측에는 활을 끼고 우측에는 창을 휘두르며 그 적진을 가로질러 들어가니

적이 혼란에 빠졌고 크게 깨트렸다.


이 남훈문 전투를 20세기 초 발간된 악비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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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50만 vs 800도 모자라 50만의 적진속으로 창 하나만 들고

단독으로 돌진하여 그 진을 깨부수고 50만을 대패시켰다고 합니다.

존재만으로 50만 명쯤이야!!!

그러나 송사 본기에는 1월 16일에 분명히 악비가 패전한데다가

오히려 반란군은 1월 21일 회녕부를 약탈까지 합니다.

이 반란군을 패퇴시킨 것은 풍장녕이었고요.

게다가 50만 명이면 이건 뭐 나라를 세울 수준이네요.....


-1부 끝-


p.s) 송사 본기를 번역하다가 또 악비 열전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으면 소개해 드릴게요.

     물론 기약은 없습니다.^^;


송사 고종 국역 20부-불가피한 화전양면책 송사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송사 휘종, 흠종 본기를 국역하였는데요, 틈틈히 남송 1대 황제 고종의 본기도 국역코자 합니다.


01부-천하병마 대원수부를 열고 근왕병을 이끌다!

02부-북송멸망&괴뢰국 대초&근왕병 백만명

03부-강왕에게 몰려드는 북송의 신하들

04부-남송(南宋) 건국

05부-무너진 나라를 재정비하다.

06부-대초 황제 장방창을 참역죄로 유배보내다!

07부-96만 명의 군인을 편성하다

08부-고종<중원에 남아 금과 결전하겠노라!>

09부-휘종<아들아 나를 구해다오>

10부-충의지사 유생을 죽이다.

11부-계속되는 반란과 금의 재침공

12부-장방창 사사와 악비의 등장

13부-걷잡을 수 없는 반란군과 도주하는 고종

14부-반란군을 선참후계하라!

15부-파죽지세 금군의 재침과 반란군 진압

16부-다시 무너지는 송나라

17부-황제여 개봉으로 돌아오소서!

18부-지방관에게 편의종사권을 부여하다

19부-패착! 문가사에서 대패하다


송사 흠종 조환 국역 1부~17부


송사 고종 원문 출처 :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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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乙酉,許景衡罷。
孫琦犯德安府。
丙戌,命參酌元祐科舉條制,立詩賦、經義分試法。
戊子,以翰林學士朱勝非為尚書右丞。
辛卯,以金兵渡河,遣韓世忠、宗澤等逆戰。
甲午,曲赦河北、陝西、京東路。
福建轉運判官謝如意執張員等六人,誅之。
丙申,復命宇文虛中為資政殿大學士,充金國祈請使。
賊靳賽寇光山縣。
戊戌,河北制置使王彥部兵渡河,屯滑州之沙店。
癸卯,張愨薨。
甲辰,金帥婁宿陷絳州。
丁未,復置兩浙、福建提舉市舶司。
己酉,秀州卒徐明等作亂,執守臣朱芾,迎前守趙叔近復領州事。
命禦營中軍統制張俊討之。
癸丑,罷借諸路職田。

5월 을유일(乙酉)에, 허경형(許景衡)을 파직(罷)하였다.

손기(孫琦)가 덕안부(德安府)를 범(犯)하였다.
병술일(丙戌)에, 명(命)하여 원우(元祐/북송 7대 황제 철종의 #1연호)의 과거(科舉) 조제(條制/법규와 제도)를 
참작(參酌/참고하여 알맞게 헤아림)하여,
시부(詩賦/시와 문체)와 경의(經義/경서의 뜻)를 나누어 시법(試法/과거시험법)을 세우게 하였다.
무자일(戊子)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주승비(朱勝非)를 상서우승(尚書右丞)으로 삼았다.
신묘일(辛卯)에, 금(金)이 병(兵)으로써 도하(渡河/황하를 건넘)하니,
한세충(韓世忠)과 종택(宗澤) 등(等)을 보내 역전(逆戰/역습하여 싸움)하였다.
갑오일(甲午)에, 하북(河北), 섬서(陝西), 경동로(京東路)를 곡사(曲赦/한 지역의 죄인을 사면함)하였다.
복건(福建) 전운판관(轉運判官) 사여의(謝如意)가 장원(張員) 등(等) 6인을 집(執/사로잡음)하여,
주살(誅)하였다.
병신일(丙申)에, 다시 명(命)하여 우문허중(宇文虛中)을 자정전(資政殿) 대학사(大學士)로 삼고,
금국(金國) 기청사(祈請使/빌고 청하는 사신)에 충원(充)하였다.
도적(賊) 근새(靳賽)가 광산현(光山縣)을 구(寇/도적질함)하였다.
무술일(戊戌)에, 하북(河北) 제치사(制置使) 왕언(王彥)의 부병(部兵/소속 부대)이 도하(渡河/황하를 건넘)하여,
활주(滑州)의 사점(沙店)에 주둔(屯)하였다.
계묘일(癸卯)에, 장각(張愨)이 훙(薨)하였다.
갑진일(甲辰)에, 금수(金帥/금의 원수) 누수(婁宿/완안누실)이 강주(絳州)를 함락(陷)하였다.
정미일(丁未)에, 다시 양절(兩浙)과 복건(福建)의 제거시박사(提舉市舶司)를 두었다.
기유일(己酉)에, 수주(秀州)의 졸(卒) 서명(徐明) 등(等)이 작난(作亂/난을 일으킴)하였는데,
수신(守臣) 주비(朱芾)를 집(執/사로잡음)하였고, 
전수(前守) 조숙근(趙叔近)을 영(迎/맞이함)하여 주사(州事/주의 공무)를 복령(復領/다시 거느림)하게 하였다.
명(命)하여 어영중군통제(禦營中軍統制) 장준(張俊)에게 토벌(討)하게 하였다.

계축일(癸丑)에, 제로(諸路/여러 지역)의 직전(職田/관료에게 벼슬하는 동안에 한정하여 지급한 토지)을 

차(借/빌림)함을 파(罷)하였다.


1128년 5월 02일에 허경형을 파직하였다.
반란군 손기가 덕안부를 범하였다.
5월 03일에 명하여 철종조 과거 제도를 참고하여 시부와 경서를 나누어 과거시험 법을 세우게 하였다.
5월 05일에 한림학사 주승비를 상서우승으로 삼았다.
5월 08일에 금나라 군이 황하를 건너니 한세충과 종택 등을 보내 역습하게 하였다.
5월 11일에 하북, 섬서, 경동 지역의 죄인을 사면하였다.
복건 전운판관 사여의가 반란군 장원 등 6명을 사로잡아 죽였다.
5월 13일에 다시 명하여 우문허중을 자정전 대학사로 삼고 금국 화친 기청사에 충원하였다.
도적 근새가 광산현을 도적질하였다.
5월 15일에 하북 제치사 왕언의 소속부대가 황하를 건너 활주의 사점에 주둔하였다.
5월 20일에 장각이 죽었다.
5월 21일에 금의 원수 누수(완안누실)이 강주를 함락하였다.
5월 24일에 다시 양절과 복건의 제거시박사를 두었다.
5월 26일에 수주의 졸병 서명 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수신 주비를 사로잡고
전수 조숙근을 맞이하여 주의 공무를 다시 거느리게 하니
명을 내려 어영중군통제 장준에게 토벌하게 하였다.
5월 30일에 여러 지역에서 관료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를 멈추게 하였다.

 

요약.

1128년 5월 금의 재침과 더불어 각지에서는 반란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반란군 손기는 덕안부를 공격하였고, 수주에서는 병사가 난을 일으켜 지방관을 제멋대로 바꾸는 일까지 발생했다.

한편 금군이 황하를 건너 개봉을 공격하려 하자 고종은 다시 한세충을 북으로 보내 종택과 함께 막게 하였다.

고종은 우문허중을 금나라 군에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도모하였다.


-21부에서 계속-


선조 당시 어느 9품 말단의 클라스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때는 1603년 누르하치가 동으로는 동해여진(야인여진)의 패권을 두고 울아의 부잔타이와 슬슬 격전을 벌이고,

북쪽으로는 예허의 나림불우, 부자이

서쪽으로는 호이파의 바인다리와 한참을 치고받고 있던 시절


저기 조선 평안도 운두리라는 마을에 말단 9품 관리 권관 박내성이 살고 있었습니다.

권관이란 변경의 진보에 있던 종9품 최하위 무관직이었습니다.

박내성은 1603년 갑자기 조정에 상소를 보냈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전방 초소에 근무하는 소위가 대통령한테 보고서를 올린 셈이었습니다.


박내성은 축성에 관한 상당한 전문지식과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척계광의 병서인 기효신서도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 놀라운 것이 당시 여진 누르하치와 해서여진간의 대치 현황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조선 영토를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던 시절이고 

간첩이나 사신 한 명 보내기도 거의 불가능한 시기였습니다.

박내성은 누르하치와 해서여진간에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음으로

조선은 그 사이에 창주성을 튼튼하게 만들어 훗날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내성은 오나라가 합비에서, 촉나라가 진창에서 압도적인 병력으로도 성 하나를 점령하지 못하고

패전한 것을 예로 들기도 하였지요.


조선왕조실록 1603년 3월 28일 기사中

평안도 운두리의 권관 박내성의 상소

평안도 운두리(雲頭里)의 권관(權管) 박내성(朴乃成)이 상소하기를,

“각 진보(鎭堡)의 성자(城子)를 중국 제도에 따라 벽돌을 구워 수축(修築)하였는데 

 창주성(昌州城) 동서 2면은 지세(地勢)가 평이하여 돌을 운반하기가 매우 쉽지만 동쪽에서 북쪽까지는 산을 따라 수축하는 

 것이라서 큰 돌을 써야 하는데 사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벽돌을 구워 수축하려고 정월 보름 후로 

 입방(入防)한 제군(諸軍)과 수영패(隨營牌) 등이 힘을 합해 땔나무를 베어다 1만여 바리를 쌓아놓았습니다.

 현재 벽돌을 찍어 굽게 하는데 들어가야 할 석회(石灰)를 방졸(防卒)의 다과(多寡)에 따라 열진(列鎭)에 분정하여 인력을 

 허비하지 않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성신(城身)을 돌로 1장 남짓 쌓았는데 대략의 높이는 3장입니다. 축성하는 궐군(闕軍)의 

 원액(元額)이 무려 6~7백 명인데, 그 중에 도망하거나 옮겨가서 족린(族隣)이 없는 자를 열읍(列邑)의 보고에 의하여 

 다 감소시킨다면 들어와야 할 숫자는 불과 2백여 명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장마가 지기 전에 굽게 하려면, 

 이 봄에 성을 쌓아야 하는데 농사에 방해가 됩니다. 벽돌을 구워서 쌓는 것은 또 우리 나라의 평소 관습이 아닌데, 

 그렇다고 겨울이 되기를 기다린다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추위에 결코 손을 대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벽돌을 굽는 데에는 어는 것을 꺼리고 장마가 방해로운데도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성제(城制)에 의하면 

 벽돌로 쌓는 것을 제일이라고 풀이하였으니, 지금 이곳에 시험해 보아서 열진(列鎭)의 시범으로 보이는 것이 

 실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들이 떠들어대는 것으로 즉시 역사를 정지시킨다면 

 이미 도착한 군대가 왕래하느라 날짜를 허비했을 뿐만 아니라 쌓아놓은 땔나무 또한 장마철을 지나 썩어버리면 

 1천 인의 10일간의 역사(役事)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이니, 매우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분정(分定)한 석회에 대해서 싫어하는 자가 많습니다만 아이보(阿耳堡)에 분정한 것이 큰 진(鎭)보다 많은데도 

 만호(萬戶) 고득종(高得宗)이 가장 먼저 다 마련하여 바야흐로 운반해 내려 하니, 사람을 부리는 방법은 창솔하는 자가 

 마음을 다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에 따라 일이 성취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머지 힘이 약하다는 것으로 

 핑계대면서 회피하려고만 하여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면서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 자들도 어찌 그들의 힘이 정말로 부족한 

 것이겠습니까. 모두 국사에 뜻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변방을 굳게 지키고 나라를 보호하는 것은 신자(臣子)의 직분인데 

 방수를 싫어하고 부역을 회피하는 것은 완악한 백성들의 평소 작태이니, 작은 폐단 때문에 대사(大事)를 폐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노추(老酋)가 나리(羅里)ㆍ배은달(裵隱達)ㆍ부양고(夫陽古)ㆍ보랑고(甫郞古) 등과 힘을 겨루어 세력을 

 다투느라 군대를 일으켜 원망을 맺는 것이 오랠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노추는 당원(黨援)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데 나리는 멋대로 침탈하고 있으니 노추가 돌격해 올 겨를이 없을 것은 

 또한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오랑캐가 형세상 병립할 수는 없는데 하나로 되어버리면 그 환란이 반드시 

 우리에게 미칠 것이므로 화가 반드시 클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서로 노리고 있을 적에 우리는 성지(城池)를 수선하고 

 기계(器械)를 수리하여 주밀한 준비에 힘쓴다면, 첫째로는 싸우지 않고도 상대의 병력을 굴복시킬 수 있고 

 다음으로는 편히 앉아서 지친 적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오(吳)나라의 전체 병력이 합비(合淝)에서 패하고 촉(蜀)나라 전체가 공격하고 포위했어도 진창(陳倉)에서 패하였으니, 

 옛부터 한 성을 지키고 한 지방을 수호한 것이 한둘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더구나 창주진(昌州鎭)은 한 도(道)의 요충지로 주장(主將)의 성패(成敗)가 여기에 달려 있으니 수선하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외람되이 은총을 입고 있으면서도 털끝만큼도 은혜를 갚지 못하였으므로 대중의 노여움과 

 뭇 비방을 달게 받고 있으니, 또한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벽돌을 구워 쌓는 것은 진실로 중국에서 이미 시험해 본 좋은 방책입니다. 본도에서 뜻을 다져 해보려고 땔나무를 이미 많이 

 쌓아놓았다고 하니 형세가 중지시킬 수 없습니다. 성의 제도를 창설하여 제진(諸鎭)의 시범이 된다면 이로움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전에 계하하신 대로 입방군(入防軍)과 수영패 등을 편리에 따라 독책하여 일을 끝낼 것을 기하고 있는데 

 궐군은 당사자가 현존한 경우가 아니면 인족(隣族)을 징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원망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어사의 장계에 의하면 조용(調用)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입계하니, 윤허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그 상소의 내용을 보건대 남의 손을 빈 것이 아니라면 필시 유능하고 유식하고 수단이 있는 자일 것이다. 

묘당(廟堂)에 만약 이 같은 견식과 이 같은 의논과 이 같은 수단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중흥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서사(書史)를 공부한 자가 녹록하게 도리어 내성(乃成)만도 못하니 애석하다.


사관은 지방 하급관의 식견이 중앙 조정의 정승들보다도 낫다고 평하고 있네요.


                 말단 군바리 클라스좀 보소!

                 정승놈들 싹 갈아치워야 함!!



홍타이지가 미화되는 사서의 편찬 과정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일전에 누르하치 당시에 어르더니 밬시에 의해 쓰인 필기체 만문원당과 

이를 똑같이 인쇄체로 베껴 편찬한 만문노당.

그리고 미화하고 윤색한 만주실록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서의 일화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누르하치 약탈/학살/친족살해 구만주당/만문노당/만주실록의 차이점

만문원당에서 만문노당으로의 필사 과정

누르하치 [만주실록][태조고황제실록][태조무황제실록] 편찬시기

강희제 <감히 누르하치라고 써?>

강희제의 태조 미화는 최고네요

과연 누르하치는 계모를 죽였을까요?

누르하치 <아빠 너무한거 아니예요?>


때는 1619년 8월 누르하치는 여진통일의 마지막 전쟁 예허 침공전을 단행합니다.

누르하치가 동원한 병력은 팔기군 4만, 이에 예허가 동원 가능한 병력은 고작 1만이었지요.

당시 예허는 동예허의 긴타이시와 서예허의 부양워가 다스리고 있었는데요.

부양워는 암바 버이러(대패륵)인 다이샨의 처남이고 긴타이시는 두이치 버이러(넷째 패륵)인 홍 타이지의 외삼촌이었습니다.


누르하치는 4명의 버이러(다이샨, 아민 타이지, 망월타이 타이지, 홍 타이지)에게 서예허를 포위공격하게 하였고

누르하치 자신은 직속 병력을 이끌고 동예허를 포위하였습니다.

누르하치의 직속군이 동예허성을 함락하자 긴타이시는 처자와 함께 누대에서 최후의 항전을 개시하였습니다.




누르하치가 사람을 보내 항복하라고 하자 긴타이시는 자신의 조카인 홍 타이지가 오면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지요.

이에 누르하치는 서예허성을 포위하고 있던 홍 타이지를 소환합니다.


동예허에 도착한 홍 타이지는 곧장 긴타이시에게 갑니다.

그런데 사실 긴타이시는 홍 타이지를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지요.

하여 긴타이시는 <니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다!> 말합니다.


이를 누르하치 당시 무권점 만문으로 쓰인 원초적 사서 만문원당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지요.


<홍 타이지를 데려온 후 한(누르하치)이 말하길

 [너의 외삼촌이 네 말을 듣는다 해서 너를 오라 한 것이니라.

  너 가서 외삼촌을 누대에서 내려오게 하라!

  내려오지 않으면 우리 병사로 누대를 쓰러뜨려라!]

 홍 타이지가 가니 외삼촌이 말하길

 [내 조카 홍 타이지를 내 알아보지 못한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에 홍 타이지가 말하길

 [너희와 화친하고자 우리가 파견한 네 아들 덜거르 타이지의 젖 먹인 할머니를 불러와서 내가 진짜인지 알아보게 하라!]

 성주 긴타이시가 말하길

 [내 조카 홍 타이지가 맞다면 네가 나를 살려준다 하는 좋은 말을 해준다면 외삼촌 내 내려가리!]>


이를 만문노당에서는 피휘를 위해 <홍 타이지>를 모두 <넷째 버이러>로 바꿉니다.

그 외에는 내용이 완전히 똑같지요.

헌데 윤색된 만주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추가됩니다.


<한이 ○○○○ 버이러를 불러와 말하길

 [네 외삼촌이 네가 오면 누대에서 내려온다 하니 너 가서 내려오게 하라!

 내려오지 않으면 우리 군대가 누대를 쓰러뜨려라!]

 ○○○○ 버이러가 가니 긴타이시가 말하길

 [내 조카 ○○○○ 버이러를 내 알아보지 못한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에 만주 군대의 암반 피옹돈, 다르한 햐가 말하길

 [너 사람의 모습을 어찌 알아보지 못하느냐?

  보통 사람이 이와 같이 빛나고 힘 있게 생겼느냐?

  너의 사신 보냈던 사람이 알린 말을 듣지 못한 것이냐?

  믿지 못한다면 너에게 화친하고자 우리가 파견한 네 아들 덜거르 타이지의 젖 먹인 유모를 불러와서 알아보게 하라!]>


즉 원문에는 없던 피옹돈과 다르한 햐의 추임새가 추가되었습니다.

팔기군 최고위 장수들이 홍 타이지를 추켜 세우며

 <이처럼 빛나고 힘 있게 생긴 분을 어찌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유모를 데려오라고 지시하는 것도 고귀한 홍 타이지가 아니고,

홍 타이지는 가만히 있고 피옹돈이 유모를 데려와라고 대신 말하는 것까지 추가되었습니다.


물론 만주실록에는 <홍 타이지> 혹은 <넷째 버이러>라는 말도 모두 삭제되고

아예 황첨을 붙여 항목 자체를 빈칸으로 만들어 놨지요.


*만문원당, 만문노당에는 긴타이시를 서예허, 부양워를 동예허로 기록하였는데

 이후의 사서에는 반대로 긴타이시를 동예허, 부양워를 서예허로 기록하였고

 병자호란 이후 청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측근이 쓴 심양일기에는

 역시 긴타이시를 동예허, 부양워를 서예허로 기록하였지요.

 대부분의 자료에서 긴타이시를 동예허, 부양워를 서예허로 보니

 제 짐작으로는 만문원당을 작성한 어르더니 밬시가 착각을 해서 쓴 것을

 후대에 정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긴타이시와 부양워의 조선, 청, 명의 한자명

 1. 긴타이시[gintaisi]

    : 김태석(金台石), 금태습(錦台什), 김태습(金台什), 김태길(金台吉), 김소석(金召石), 김태시(金台時), 김타실(金他實)

 2. 부양워[buyanggv]/부양구

    : 포양고(布揚古), 백양고(白羊古), 백양고(白羊高), 백양골(白羊骨), 부양고(夫陽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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