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 토산전투 청군의 규모 병자호란 이야기

*주의 : 2018년 7월 22일에 작성된 글로 현재는 많이 수정되어 있습니다.

최근 글은 https://blog.naver.com/gil092003 를 참고하세요.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병자호란사>는 완벽하게 병력수에 오차가 있다는 사실이 

이전에 서술한 여러 근거로 증명되었습니다.

또한 만문노당이나 청실록을 살펴보면 도르곤과 호오거가 이끄는 청나라 좌익군은 

결코 2만 2천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좌익에 경중명이 참여했다는 것 또한 완벽한 오류입니다.

심지어 도르곤의 좌익군을 우익군이라고 전제부터가 오류였지요.

마푸타의 1차 선봉대는 고작 300명에 불과한데 이를 6천 기병이라 서술하였지요.

국방부 전사 편찬 위원회의 내용은 병력 구성과 대장 배치부터 모조리 오류 투성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거의 상상력으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당시 좌익군은 도르곤+호오거 만주3기(정백, 양백, 정람)+몽고3기+좌익 외번몽고로 이루워졌고

진군로는 병자호란 조선의 첫 반격과 청 좌익군 진군로 https://cafe.naver.com/booheong/157631

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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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르곤+호오거가 이끄는 좌익군의 총병력을 추산해 볼까 합니다.

우선 당시 청의 총 니루수는 320~330로 구범진의 논문에는 나오는데,

2차 선봉대 도도의 1니루 3갑병 1000 바야라 동원으로 계산하면 333.3니루입니다.

이를 토대로 계산하면 1기당 41.6니루로 계산됩니다.

당시 병부 상서 요토의 명령장에 의하면 1니루당 32갑병 동원령이 발령됩니다.

좌익 정백, 양백, 정람 3기의 총 니루는 124.8니루, 동원된 총 병력은 3994명입니다.

여기에 외번 몽고의 좌익이 추가되었습니다.

당시 동원된 외번 몽고군은 11995명입니다.

외번 몽고가 좌우익으로 나뉘었으므로 좌익 외번 몽고는 5998명으로 계산됩니다.


병자호란 당시 4군 좌익군의 구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장 : 도르곤+호오거

-동원 군단 : 만몽3기(정백,양백,정람)+외번몽고 좌익

-만몽3기 갑병 : 2509명

 a. 정원 : 만몽3기 총니루 124.8니루, 총병력 3994명

 b. 1,2,3,6차 부대에서 빼간 병력 : 1485명(바야라 487, 기병 624, 보병 374)

-외번 몽고 좌익 갑병 : 5998명

-쿠투러 : 4254명(팔기 1255 + 외번 몽고 좌익2999)

-총합 : 12761명(팔기갑병2509 + 외번몽고좌익5998 + 쿠투러(4254)


※1/2/3/6차 부대에 할당되어 모든 니루에서 빼간 병력을 생각 해야겠지요.

   a. 1차 선봉대 : 1니루당 0.9명씩 바야라 동원된 것으로 추정

   b. 2차 선봉대 : 1니루당 3명 바야라 동원

   c. 3차 선봉대 : 1니루당 5명 갑병 동원(기병 위주가 아닐까 추정됨)

   d. 6차 후미대 : 1니루당 3명 갑병 동원(보병 위주가 아닐까 추정됨)

   총 1니루당 11.9명(바야라 3.9 + 기병 5 + 보병 3 할당된 것으로 추정됨)

   따라서 동원된 청군 총 병력에서 바야라 1299명, 기병 1665명, 보병 1000명이 동원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도르곤+호오거는 1월 2일경 수안에 도착하였는데

도원수 김자점이 정방산성의 병력 5천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내려갔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도르곤은 일부 병력을 뽑아 삼시카에게 맡겨 김자점을 추격합니다.

이때 김자점을 추격한 병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만주 양백, 정백 2기의 바야라+기병

2. 만주 3기(양백, 정백, 정람)의 1니루당 갑병5

3. 몽고 양백, 정백 1니루당 갑병5


요토의 징발 명령서에 따르면 1니루당 보병 10, 기병 15, 바야라(친위군) 7 명입니다.

1. 만주 2기의 바야라+기병

 → 총 83.2니루의 바야라와 기병 징발은 바야라 582명, 기병 1248명

 → 총합 1830명 입니다.

 → 바야라는 기본적으로 누르하치대에는 수은갑병이며 모두 기병입니다.

    친위군으로 홍 타이지대에도 기병으로 생각됩니다.

 ☞ 1,2,3군 차출 병력 740명(바야라 324 + 기병 416)

 ☞ 따라서 추격군 기병 1090명(바야라 258 + 832)


2. 만주 3기의 1니루당 갑병5

 → 1의 바야라+기병과 구분하여 2번째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보병으로 생각됩니다.

 → 당시 여진족 니루와 내번 몽고족 니루의 비율은 3:1입니다.

    즉 만주3기의 총 니루는 124.8니루*3/4 = 93.6 니루로 추정됩니다.

 → 총 93.6니루의 만주 보병 징발은 936명

☞ 6군 차출 병력 281명(보병)

☞ 따라서 추격군 만주보병 655명


3. 몽고 2기의 1니루당 갑병5

 → 몽고 2기 = 83.2니루*1/4 = 20.8 니루로 추정됩니다.

 → 즉 동원된 총병력은 208명으로 추정됩니다.

☞ 6군 차출 병력 62명(보병)

☞ 따라서 추격군 내번 몽고 보병 146명


4. 노예병인 쿠투러는 빠른 추격을 위해 제외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김자점을 추격한 선발된 좌익군 총합은

여진 기병 1090명 + 여진 보병 655명 + 내번 몽고병 146명

= 만몽 팔기군 1891 + 쿠투러 946)


즉 팔기군의 병력 75%를 김자점을 추격하라 보냈고,

도르곤은 남은 병력 갑병 약 6600명(팔기군 600 + 외번 몽고 6천)+쿠투러 4200

총합 10800 여명을 이끌고 남진을 계속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청실록 태종문황제 1637년 1월 10일

○庚戌和碩睿親王多爾袞多羅貝勒豪格等率左翼軍來會奏稱。我軍既入朝鮮境長山昌州城軍民。知不能禦。

皆棄城奔山立寨我正白鑲白正藍三旗護軍騎兵。攻克之值朝鮮安州總兵黃州元帥率兵五百出寧邊城。

臣等親軍敗之於城下又安州兵二百。亦為臣等護衛所敗尋寧邊城李元帥率參將三員。遊擊四員備禦十五員率馬兵七百。

步兵三百來戰為蒙古固山額真額駙蘇納。梅勒章京吳塔齊宜木圖陶海得馨德阿蘭都。

昂阿代吳巴什額墨爾齊古魯虎桑噶爾寨等所敗。生擒李元帥時我軍五十人。

至宣屯村於朝鮮下營處捉生問之云彼元帥與黃州總兵聞伊國王為大軍所圍率兵一萬五千前往救援已去三日

是夜即選鑲白旗正藍旗兩旗護軍騎兵每牛彔下甲士五名蒙古兩旗每牛彔下甲士五名行一晝夜至日出。

追及之乘其未覺。遂擊敗之至於率兵擊敵則鑲白旗梅勒章京薩穆什喀護軍參領陳泰崇阿正藍旗梅勒章京席爾都。

護軍參領俄羅塞臣宜成格蒙古梅勒章京吳塔齊正藍旗候痕巴圖魯額參等也

○1637년 1월 10일에 화석예친왕(호쇼이 머르건 친왕) 다이곤(도르곤)과 다라패륵(도로이 버이러) 호격(호오거) 등이 
좌익군을 인솔하여 와서 만났다.
아뢰어 말하길
   <아군이 이윽고 조선 땅 장산과 창주성에 들어가니 조선군과 백성들이 방어가 불능함을 알고 
    모두 성을 버리고 산으로 달아나 목책을 세웠습니다.
    우리 정백, 양백, 정람 3기의 호군(바야라군)과 기병이 공격하여 함락하였습니다.
    그 즈음 조선 안주총병(유림)과 황주원수(김자점)가 병력 500을 인솔하여 영변성(철옹산성)을 나왔는데 
    신등의 친위군이 성 아래에서 깨트렸고 
    또한 안주의 병력 200 역시 신등의 호위군으로 하여금 깨트리게 하였습니다.
    잇달아 영변성 이원수가 참장 3명, 유격 4명, 비어 15명을 인솔하고 기병 700과 보병 300을 인솔하여 싸우러 왔는데
    몽고 고산액진(구사 어전/기주) 액부(어푸/사위) 소납과 매륵장경(머이런 장긴) 오탑제, 의목도도해, 득형덕, 
    아란도, 앙아대오 파십(밬시), 액묵이제 고로호, 상갈이채 등이 깨트리고 이원수를 생포하였습니다.
    이때 아군 50인이 선둔촌에 이르렀는데 조선군이 떠난 곳에서 
    착생(적의 백성을 포로로 삼아 심문하는 행위)하여 심문하니 말하길
    저쪽 원수(김자점)가 황주총병과 함께 그들 국왕이 대군에 의해 포위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병력 1만 5천을 인솔하여 구원하기 위해 앞으로 간지 이미 3일이라 하였습니다.
    그 밤에 곧 양백기와 정람기 양기의 호군(바야라)과 기병, 매 우록(니루)의 예하의 갑사 5명씩,
    몽고 (양백, 정람) 양기의 매 우록 예하 갑사 5명씩을 선발하여,
    하루 밤낮으로 행군하여 해가 뜰 때쯤 뒤쫓아서 따라붙어 그들이 알아채지 못한 틈을 타서 마침내 공격하여 깨트렸습니다.
    병력을 인솔하고 공격하여 깨트린 자들을 말하자면
    곧 양백기 매륵장경 살목십객과 호군참령 진태숭아,
    정람기 매륵장경 석이도와 호군참령 아라새신의성격,
    몽고 매륵장경 오탑제와 정람기 후흔파도로 액참 등이옵니다.>
 
내국사원당 1637년 1월 10일 기사中
 (1637년 1월) 10일에 좌익의 군대를 가지고 장산(창성)의 곳으로 들어간
호쇼이 머르건 친왕(도르곤)과 도로이 호오거 버이러가 5번 (조선) 군대를 격파하고
이 원수(부원수 신경원)를 산채로 잡아서 군대 가져오며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호쇼이 머르건 친왕(도르곤)과 도로이 호오거 버이러가 성스러운 한(홍 타이지)에 올린[아뢴] 말.
   <우리의 [대청국의] 군대가 들어가는 것을 장산과 창주성(창성)의 군대와 백성이 듣고서
    맞아 싸우자니 이기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산위에 산채 세운 것을
    정백의 바야라, 양백의 바야라, 정람의 바야라, 효기(아리하 초오하/기병)가 싸우며 취했다.
    안주의 총병관(유림)과 황주의 원수(홍명구)가 5백 군대를 가지고 영변성으로부터 나가는 것을
    호쇼이 머르건 친왕(도르곤)과 도로이 호오거 버이러의 고치카 바야라(친위 바야라)로만 성에 이르도록 격파했다.
    안주의 2백 군대를 조우하고 왕(도르곤)의 시위들과 버이러(호오거)의 시위들로만 격파했다.
    영변성에 이원수(신경원)와 3 참장, 4 유격, 15 비어관의 기병 7백과 보병 3백을
    몽고기의 어전 수나 어푸, 머이런의 장긴 우타치, 임투, 토오하이, 더힌다이, 아란두, 앙가다이, 
    우바시, 어멀치, 굴우후, 상가르자이 등이 격파하고 이 원수(신경원)를 산채로 잡았다.
    우리의 군대 50갑사였다.>
선촌(선둔촌)에 이른 날 고려(조선)의 군대의 숙영하고 간 무리를 알고
헐언(착생) 잡아서 물으니 원수(김자점)와 황주의 총병관(홍명구)
각자 왕(인조)을 대청국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하며 듣고서
1만 5천 군대 가져가며 각자 왕에 도우러 가서 3일째 날 되었다! 하며 알린 뒤에
그 밤 군대 뽑아서 양백, 정람 2기의 바야라와 효기의 1니루의 갑사 5명씩,
몽고 2기의 1 니루의 갑사 5명씩을 가져가며 1일 가서
그 밤 지새우고 다음 날 해 뜨니 추격하고 그(김자점군)들이 깨닫지 못함에 곧바로 격파했다.
이에 군대를 가지고 싸운 자는 양백의 머이런 장긴 삼시카, 바야라의 잘인 장긴 천터이와 충가,
정람 효기의 머이런 장긴 실두, 바야라의 자란 장긴 올오서첨과 이청거,
몽고 머이런 장긴 우타치, 정람의 어선 허오호언 바투루 등이 싸웠다.

길공구의 결론 : 1월 3일 도르곤은 총병력 약 12761명(갑병 8507)중 

                  김자점의 5천 병력을 추격하기 위해 갑병 1891 정도를 보냈다.

                  결과는 1월 5일 토산전투!


*좌익군이 남하하면서 조선군과의 전투에서 생긴 사상자는 알 수 없기에 제외하였습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강화도를 함락한 청나라군 규모를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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