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광교산에서 전사한 양고리(양우리/yangguri)는 후금과 청의 1.5세대 개국공신이었습니다.
누르하치가 거병한 초기부터 함께 전장을 누빈 5대 공신인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워, 훠르한과 달리
양고리는 14세에 누르하치를 따라 종군하면서 누르하치의 사위가 됩니다.
용맹했던 양고리는 누르하치를 따라 온갖 전장을 누비며 건주, 후금에 이어 청나라 돌격대장이었습니다.
양고리가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은 조선의 기록에도 나타납니다.
조선왕조실록 1621년 9월 10일 정충신의 보고서 中
드디어 신은 호차(胡差) 소롱귀(小弄貴) 등과 길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오랑캐의 진영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침 노추(老酋) 탕천관(湯泉館)에 가고 없어 신은 남성(南城) 밖에서 머물렀습니다.
이튿날 호장 언가리(彦加里)가 탕천관으로부터 왔는데, 추장의 귀여움을 받는 행신(幸臣)이었습니다.
누르하치의 귀여움을 받는 총애하는 신하 양고리
그는 병자호란 당시 1500명의 병사를 받아 전쟁에 참여했다가
광교산에서 조선군의 조총 사격에 전사하고 맙니다.
병자호란 청실록 5부-조선의 반격 광교산 전투와 양고리 전사!
누르하치의 돌격대장 양고리를 평하다!(불곰 같은 장수다!)
청사고 양고리 열전 국역 9부-영원한 돌격대장으로 남다!(완결)
14세에 원수의 코와 귀를 씹어먹은 누르하치의 사위 양고리
청실록 태종문황제 1637년 1월 8일 기사中
이날에 양고리의 시신을 마주 들고 이르니 상(홍 타이지)이 곡하고 애통해하니
뭇 신하가 누차 그만하시라 권하였으나 그치지 않았다.

당시 양고리는 모든 문무 신하의 위에 있는 초품 일등공이었고,
그가 전사하자 청 태종 홍 타이지는 목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하였습니다.
홍 타이지는 회군 후에 양고리를 무훈왕(武勳王)에 봉작합니다.
저는 양고리의 청나라 서열은 아이신 교로, 즉 황족들만이 오를 수 있었던
황제(한)-친왕-군왕-버이러-버이서 다음 직위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서를 뒤적이다 보니 양고리의 생전 위차는 버이서보다 높았더군요.
누르하치의 사위로 외척이긴 하나 엄격히 황족들과는 신분적인 격차가 있었을 터인데
양고리는 예외였습니다.
서열 | 계급 | 이름 | 신분 | 비고 | |
1 | 한 | 홍 타이지 | 황족 | ||
2 | 친왕 | 다이샨 | 황족 | ||
3 | 지르갈앙 | 황족 | 형부 장관 | ||
4 | 도르곤 | 황족 | 이부 장관 | ||
5 | 도도 | 황족 | |||
6 | 호오거 | 황족 | 호부 장관 | ||
7 | 요토 | 황족 | 병부 장관 | ||
8 | 군왕 | 아지거 | 황족 | ||
9 | 버이러 (패륵) | 두두 | 황족 | 예부 장관 | |
10 | 아바타이 | 황족 | 공부 장관 | ||
11 | 초품 1등공 | 양우리/양고리 | 개국공신 +누르하치 사위 | ||
12 | 버이서 (패자) | 쇼토 | 황족 | ||
13 | 니칸 | 황족 | 몽고 아문승정 | ||
퍙워 | 황족 | 구사어전 | |||
보호토 | 황족 | ||||
로토 | 황족 | ||||
아이두리 | 황족 | ||||
마잔 | 황족 | ||||
툰치 | 황족 | ||||
볼오 | 황족 | ||||
호토 | 황족 | ||||
두르후 | 황족 | ||||
자카나 | 황족 | ||||
툰치카 | 황족 | ||||
무르후 | 황족 | ||||
3등공 | 화이본(和爾本) | 외척 | |||
광태(光泰) | 외척 |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위차는 한족 3왕 다음이며 기주(구사어전)와 의정대신의 위에 있군요.
아마 누르하치가 건국한 이후 양고리급의 장수가 전장에서 죽은 것은 양고리가 거의 최초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광교산에서 양고리를 저격한 조선 병사는 자신이 어느 급의 대장을 죽였는지 과연 알았을까요?
김준룡의 묘명
이에 공은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올라가 그 봉우리를 빼앗았다.
그때 오랑캐 장수 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
적군이 모두 통곡하였으므로 어떤 장수가 죽었는데 저처럼 통곡을 하는가 하고 괴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한흥일(韓興一)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청나라 사람들이
‘동국과의 전쟁에서는 광교산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여 백양고라(白羊高羅)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백양고라라는 자는 관직이 높고 또 용략(勇略)이 있어 무오년(1618, 광해군10)에 요동을 함락시킨 자였다.
김준룡의 신도비명
오랑캐 가운데 갑옷을 입고 깃발을 잡고 있던 자가 봉우리 위로 말을 타고 올라가 서더니
큰 깃발을 세우고 군사들에게 호령을 내리자 군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공이 그자를 가리키며,
“저놈을 죽이지 못하면 적들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하면서 더욱 싸움을 독려하여 총포를 일제히 쏘아 대게 하니,
깃발을 잡고 군사들에게 호령을 내리던 자와 좌우에 서 있던 추장들 가운데 함께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여러 명이었고
오랑캐 군사들 가운데 죽은 자들이 즐비하여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김준룡의 비문을 살펴보면 김준룡이 양고리가 군사를 지휘하는 것을 보고
병사들에게 양고리 주변을 집중 사격하라 지시하였고,
양고리가 죽자 청나라 군사들이 대성통곡을 하자
어떤 장수인데 저리 통곡하는 거지? 라고 의아해 했다고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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