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남송의 간신 진회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간신 열전>
<인물 열전>
한세충, 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 고구, 송강, 장방창, 황잠선, 묘부(유정언), 진회
왕올당, 왕고, 다이샨[대선], 태조 누르하치, 추옝[저영], 슈르하치[서이합제], 야르하치[아이합제]
피옹돈[비영동], 호호리[하화례], 어이두[액역도], 안퍙워[안비양고], 훠르한/호이한, 푸차 군다이[부찰씨]
잉월다이[영아이대/용골대], 어르더니 밬시[액이덕니], 양우리[양고리], 보르진[박이진], 특금, 마심[마친] 캉칼아[강객라]
송서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5%AE%8B%E5%8F%B2/%E5%8D%B7473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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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金主既死,撻懶主議,卒成其和。
二月,復資政殿學士,仍舊宮祠。
六月,除觀文殿學士、知溫州。
六年七月,改知紹興府。
尋除醴泉觀使兼侍讀,充行宮留守;孟庾同留守,並權赴尚書、樞密院參決庶事。
時已降詔將行幸,檜乞扈從,不許。
帝駐蹕平江,召檜赴行在,用右相張浚薦也。
十二月,檜以醴泉觀兼侍讀赴講筵。
七年正月,何蘚使金還,得徽宗及寧德后訃,帝號慟發喪,即日授檜樞密使,恩數視宰臣。
四月,命王倫使金國迎奉梓宮。
九月,浚求去,帝問:
「誰可代卿?」
浚不對。
帝曰:
「秦檜何如?」
浚曰:
「與之共事,始知其暗。」
帝曰:
「然則用趙鼎。」
鼎於是復相。
台諫交章論浚,安置嶺表。
鼎約同列救解。
與張守面奏,各數千百言,檜獨無一語。
浚遂謫永州。
始,浚、鼎相得甚,浚先達,力引鼎。
嘗共論人才,浚劇談檜善,鼎曰:
「此人得志,吾人無所措足矣!」
浚不以為然,故引檜,共政方知其暗,不復再薦也。
檜因此憾浚,反謂鼎曰:
「上欲召公,而張相遲留。」
蓋怒鼎使擠浚也。
檜在樞府惟聽鼎,鼎素惡檜,由是反深信之,卒為所傾。
鼎與浚晚遇於閩,言及此,始知皆為檜所賣。
[소흥(남송 1대 황제 고종의 #2연호)] 5년(1136년)에, 금주(金主)가 이미(既) 사(死)하였는데,
달라(撻懶)가 주의(主議)하였고, 마침내 그 화(和)를 성(成)하였다.
2월에,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를 회복(復)하였고, 곧 구궁사(舊宮祠)가 되었다.
6월에,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와 지온주(知溫州)에 제수(除)되었다.
[소흥(남송 1대 황제 고종의 #2연호)] 6년(1137년) 7월에, 지소홍부(知紹興府)로 개(改)하였다.
거듭 예천관사(醴泉觀使) 겸(兼) 시독(侍讀)에 제수(除)하였고, 행궁유수(行宮留守)로 충(充)되었다.
맹유(孟庾)는 같은 유수(留守)와 아울러 권부상서(權赴尚書)로 삼아
추밀원(樞密院)의 서사(庶事/여러가지 일)를 참결(參決/참여하여 결정함)하게 하였다.
이때 이미 항조(降詔)하여 장차(將) 행행(行幸/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둥함)하고자 하였는데,
진회(檜)가 호종(扈從)을 걸(乞)하니, 불허(不許)하였다.
제(帝)가 평강(平江)에 주필(駐蹕/임금의 행차가 잠시 멈춘 곳)하여,
진회(檜)를 소(召)하여 행재(行在)에 부(赴)하게 하였는데, 우상(右相) 장준(張浚)의 천거(薦)하여 기용(用)한 것이었다.
12월에, 진회(檜)가 예천관(醴泉觀) 겸(兼) 시독(侍讀)으로써 부(赴)하여 강연(講筵)하였다.
[소흥(남송 1대 황제 고종의 #2연호)] 7년(1138년) 정월에, 하선(何蘚)이 사신(使)으로 금(金)에서 환(還)하였는데,
휘종(徽宗)과 더불어 영덕후(寧德后)의 부고(訃)를 득(得)하니,
제(帝)가 호통(號慟/통곡)하며 발상(發喪)하였고, 즉일(即日)에 진회(檜)에게 추밀사(樞密使)를 제수(授)하였으며,
은수(恩數/임금이 베푸는 은혜)로 재신(宰臣)을 시(視/엿봄)하였다.
4월에, 명(命)하여 왕륜(王倫)은 금국(金國)에 사신(使)으로 가
재궁(梓宮/임금과 황후의 관)을 영봉(迎奉/받들어 맞이함)하게 하였다.
9월에, 장준(浚)이 구거(求去/물러나길 청함)하니, 제(帝)가 묻기를
「누가 경(卿)을 대신할 만 하오?」
장준(浚)이 부대(不對/대답하지 않음)하였다.
제(帝)가 말하길
「진회(秦檜)는 어떠한가?」
장준(浚)이 말하길
「더불어 공사(共事/함께 일함)하니, 비로소 그 암(暗/어리석음)을 알게 되었나이다.」
제(帝)가 말하길
「그러하다면 즉 조정(趙鼎)을 기용(用)하겠소.」
조정(鼎)이 이에 재상(相)을 회복(復)하였다.
대간(台諫) 교장(交章)이 장준(浚)을 논(論)하여, 영표(嶺表)에 안치(安置)하였다.
조정(鼎)이 동렬(同列/같은 반열)로 구해(救解/구하여 풀어줌)를 약조(約)하였는데,
장수(張守)와 함께 면주(面奏/면대하여 상주함)하여 각각(各) 수천백(數千百) 말하였으나, 진회(檜) 혼자 일언(一語)도 없었다.
장준(浚)이 마침내 영주(永州)에 적(謫/귀양 감)하였다.
처음에 장준(浚)과 조정(鼎)이 재상(相)의 득(得)함이 심(甚)하였는데,
장준(浚)이 선달(先達/먼저 도달함)하여 조정(鼎)을 역인(力引/힘써 끌어줌)하였다.
일찍이 인재(人才)를 공론(共論)하여, 장준(浚)이 진회(檜)의 선(善)을 극담(劇談/희롱하여 말함)하였는데,
조정(鼎)이 말하길
「이사람이 득지(得志/뜻을 이룸)하면, 나는 무소조족(無所措足/발을 둘 곳이 없음)하다!」
장준(浚)이 그러하다 생각하지 않았고, 이런 연고(故)로 진회(檜)를 인(引)하였는데,
공정(共政/함께 정치함)하니 바야흐로 그 암(暗)을 지(知)하였고, 다시 재천(再薦/재차 천거함)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진회(檜)가 이로 인(因)하여 장준(浚)에게 감(憾/섭섭함)하였는데, 도리어 조정(鼎)에게 일컬어 말하길
「상(上)이 공(公)을 소(召)하여 장상(張相/재상을 베풂)하고 지류(遲留/오랫동안 머무름)하고자 합니다.」
대개(蓋) 조정(鼎)을 노(怒)하게 하여 장준(浚)을 제(擠/배척함)하고자 함이었다.
진회(檜)가 추부(樞府)에 있으면서 오직 조정(鼎)을 청(聽/들어줌)하였는데,
조정(鼎)이 본디 진회(檜)를 악(惡)하여,
이런 연유(由)로 도리어 심신(深信/깊이 믿음)하게 되었고 마침내 소경(所傾/마음을 기울임)하게 되었다.
조정(鼎)이 장준(浚)과 함께 민(閩)에서 만우(晚遇/말년에 만남)하였는데,
말이 이에 미치자, 비로소 진회(檜)의 소매(所賣/속임수)하였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
1136년에 금 황제(태종)가 이미 죽었는데 달라가 의논을 주도하여 마침내 화의가 이뤄졌다.
2월에 자정전학사를 회복하였고 곧 구궁사가 되었다.
6월에 관문전학사와 지온주에 제수되었다.
1137년 7월에 지소홍부로 고쳐 임명하였다.
거듭 예천관사 겸 시독에 제수하였고 행궁유수로 충원되었다.
맹유를 같은 유수와 아울러 권부상서로 삼아 추밀원의 여러가지 일을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이때 이미 조서를 내려 장차 궁 밖으로 거둥하고자 하니 진회가 호종을 애걸하였는데 불허하였다.
황제가 평강에 잠시 머물러 진회를 불러 행재에 이르게 하였는데 우상 장준(문관)이 천거하여 기용한 것이었다.
12월에 진회가 예천관 겸 시독으로써 나아가 강연하였다.
1138년 정월에 하선이 사신으로 금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휘종과 더불어 영덕후의 부고를 알리니
황제가 통곡하며 발상하였고 그날에 진회에게 추밀사를 제수하니 은혜로 재상을 엿보았다.
4월에 명을 내려 왕륜을 금나라 사신으로 삼아 휘종과 영덕후의 관을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9월에 장준(문관)이 물러나길 청하니 황제가 묻기를
「누가 경을 대신할 만 하오?」
장준(문관)이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가 말하길
「진회는 어떠한가?」
장준(문관)이 말하길
「더불어 함께 일해 보니 비로소 그 어리석음을 알게 되었나이다.」
황제가 말하길
「그러하다면 즉 조정을 기용하겠소.」
조정이 이에 재상을 회복하였다.
대간 교장이 장준(문관)을 탄핵하니 영표에 안치하였다.
조정이 동렬로써 구해주기로 약조하였는데 장수와 함께 황제를 알현하고 각각 수백 수천번 말하였으나
진회는 혼자 한 마디도 없었다.
장준(문관)이 마침내 영주로 귀양을 갔다.
처음에 장준(문관)과 조정이 재상의 다툼이 심하였는데 장준(문관)이 먼저 재상이 되어 조정을 힘써 천거하였다.
일찍이 인재를 함께 의논하였는데 장준(문관)이 진회가 선하다 가벼히 말하였는데
조정이 말하길
「이사람이 뜻을 이룬다면 나는 발 둘 곳이 없소!」
장준(문관)이 그러하다 생각하지 않았고 이런 연고로 진회를 천거하였는데
함께 정치를 하다보니 그 어리석음을 알게 되었고 다시 천거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진회가 이로 인하여 장준(문관)에게 섭섭해 하였는데 도리어 조정에게 일컬어 말하길
「상께서 공을 불러 재상으로 오랫동안 삼고자 합니다.」
대개 조정을 노하게 하여 장준(문관)을 배척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진회가 추밀원에 있으면서 오직 조정을 말을 모두 들어주었는데 조정이 본디 진회를 미워하였으나
이런 연유로 도리어 깊게 믿게 되었고 마침내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
조정이 장준(문관)과 함께 민주에서 말년에 만났는데
말이 이에 미치자 비로소 진회가 속였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
-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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