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패한 김화전투 재구성 2부-중요한 김화전투 생존자 진술 번역 병자호란 이야기

김화 전투를 현장에서 목격한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생생히 구현함


대패한 김화전투 재구성 1부 https://cafe.naver.com/booheong/170481


1. 실록에 기록된 총 5천(홍명구 3천, 유림 2천)은 거짓!!!

→ 생존자의 증언 : 홍명구 1천, 유림 1천~2천

→ 1~2일 거리를 1달 동안 이동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탈영이나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한...


2. 통상 알려진 백동+탑동 전투는 거짓!!!

→ 백동+탑동 위치 추정 : 1986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병자호란사> 현 북쪽 백동+탑동 비정

→ 생존자의 증언+여러 기록 : 구 김화현 남쪽 홍명구는 탑곡, 유림은 백전

   탑곡은 충렬사비에서 100보이내, 백전은 그 동쪽 언덕



定齋集 記金化栢田之戰

甲子夏。大旱汔秋。朝廷遣使致祭于金化戰塲以禱雨。余從伊川得營牒。赴金化將執事壇下。因詢邑之老人。得官奴繼弘。

問以戰事。自陳今年七十五歲。方二十七。遭丙子之難。隨縣監李徽祚。入縣南幞頭山蠶谷以避兵。時洪監司,柳兵使。

擧兵於平安道。同行赴難。由兎山而東。以丁丑正月十六日。至縣。洪監司軍可千餘。以鴛鴦陣行。柳兵使軍較多。行爲圓陣。

止爲方營。兩軍至縣。遇賊不得進。縣有積穀可館。縣南有高岡。下有井泉可以箚營。遂留壁。洪監司壁背山據岡。

連延山麓陂陀之地。柳兵使壁於東岡。所謂栢田者。卽四面縣絶。兩壁相去數百步。連樹木柵。時蒙古之自南漢歸者。

將由咸鏡道渡江而北。至縣止。陣於縣南三十里土城之野。玄甲蔽地。不知其數。柳兵使急謂洪監司曰。大敵在前。

不就我合陣。事將敗矣。屢强之。洪監司終不聽。十八日。賊留老弱及俘虜者守營。三道發軍。一道由東山下。

一道由大路並進。至前野。兩枝相拱。若合襟然。一道由山西。疾趍洪監司陣後。洪監司見敵自前來。殊不慮其後。

山西伏兵。見賊猝至。急歸報。未及而賊已踰山。以鐵騎馳下峻坂掩我軍。我軍與胡騎接腋摩肩。蹭蹬同下。至平地。

賊始亂射叢斫。頃之盡殲洪監司軍。柳兵使左營。在洪監司陣下。亦同潰。亂軍赴柳兵使陣。柳兵使堅閉壁門逆擊之。

使不得入。賊旣破洪監司。乘勝仰攻柳兵使。柳兵使軍萬砲齊發。賊之顔行盡斃。乃少退。俄復進。進輒中丸。

終日不得陷。暮乃解歸。柳兵使孤軍無繼。知不可久。乃夜懸燭籠於高枝。多縛火砲於樹。結火繩於火門。遂棄柵宵遁。

入狼川山中。繩有長短。火及火門。有先後砲聲。終夜相繼。賊竟不知其爲虗壁。明日整軍復進。則柳兵使去已遠矣。

是戰也。賊兵死者。不可勝紀。賊盡收其屍。燒之三日而後畢。乃去。我軍之死者。亦被原滿壠。得洪監司屍於積屍中。

刃傷額及左眉。死於井泉之傍。盖去將壇百許步云。洪監司名命耈。柳兵使名琳。

갑자년(甲子/1684년) 여름에 대한(大旱/큰 가뭄)이 있어 가을까지 흘(汔/마름)하였다.

조정(朝廷)이 견사(遣使)하여 금화(金化) 전장(戰塲)에서 치제(致祭)하였고 이로써 도우(禱雨/기우제)하게 하였다.

나는 이천(伊川)을 따라 영첩(營牒)을 득(得)하였고 금화(金化)에 이르러 장차 단하(壇下)를 집사(執事)하니

이로 인하여 읍(邑)의 노인(老人)에게 순(詢)하고자 하였는데,

관노(官奴) 계홍(繼弘)을 득(得)하여 전사(戰事)로써 문(問)하니 자진(自陳)하길

금년(今年)에 75세인데, 바야흐로 27세에 병자(丙子)의 난(難)을 조(遭)하였다.

현감(縣監) 이휘조(李徽祚)를 수(隨)하여 현남(縣南) 복두산(幞頭山) 잠곡(蠶谷)으로 들어가 이로써 피병(避兵)하였다.

이때 홍(洪) 감사(監司)와 유(柳) 병사(兵使)가 평안도(平安道)에서 거병(擧兵)하여,

동행(同行)하고 토산(兎山)을 경유(由)하여 동쪽(東)으로 부난(赴難/난을 구하기 위해 달려감)하였는데,

정축년(丁丑) 정월(正月) 16일에, 현(縣)에 이르렀다.

홍(洪) 감사(監司)의 군(軍)은 가히(可) 천여(千餘)였고 원앙진(鴛鴦陣)으로써 행군(行)하였으며,

유(柳) 병사(兵使)의 군(軍)은 교다(較多/비교하여 많음)하였는데 원진(圓陣)으로 하여 행군(行)하였는데,

지(止)하고 방영(方營)으로 하였다.

양군(兩軍)이 현(縣)에 이르러, 우적(遇賊)하고는 득진(得進)하지 못하였다.

현(縣)은 적곡(積穀/쌓아둔 곡식)이 있어 가관(可館/묵을 수 있음)하였고,

현남(縣南)은 고강(高岡/높은 언덕)이 있고 아래는 정천(井泉/우물과 샘)이 있어 이로써 차영(箚營)할 수 있으니,

마침내 유벽(留壁/군루를 머묾)하였다.

홍감사(洪監司)의 벽(壁/군루)은 배산(背山/산을 등짐)하고 강(岡/산등성이)에 근거(據)하였는데,

연연(連延/이어져 길게 뻗음)한 산록(山麓/산기슭)과 파타(陂陀/경사짐)의 땅이었다.

유병사(柳兵使)의 벽(壁)은 동강(東岡)에 있었고, 소위(所謂) 백전(栢田)이란 곳으로,

곧 사면(四面)이 현(縣)과 절(絶)하였다.

양벽(兩壁)은 상거(相去)가 수백보(數百步)였고, 목책(木柵)을 연수(連樹/잇닿아 심음)하였다.

이때 몽고(蒙古)가 남한(南漢)으로부터 귀환(歸)하는 자(者)들이, 

장차(將) 함경도(咸鏡道)를 경유(由)하여 도강(渡江)하고 북(北)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현(縣)에 이르러 정지(止)하여 현(縣) 남쪽(南) 30리(里) 토성(土城)의 야(野)에 진(陣)하였다.

현갑(玄甲/검은 갑옷)이 폐지(蔽地/땅을 덮음)하였는데, 그 수(數)는 부지(不知)하였다.

유병사(柳兵使)가 급히(急) 홍감사(洪監司)에게 위(謂)하여 말하길

   <대적(大敵)이 재전(在前)하니, 우리가 합진(合陣)을 취(就/이룸)하지 않는다면,

    사(事)가 장차(將) 패(敗)할 것입니다.>

누차(屢) 강지(强之)하였으나, 홍감사(洪監司)는 끝내 불청(不聽)하였다.

18일에 적(賊)이 노약(老弱)과 더불어 부로자(俘虜者/포로)를 남겨 수영(守營)하고는,

3도(道)로 발군(發軍)하였는데,

1도(道)는 동산(東山) 아래를 경유(由)하였고,

1도(道)는 대로(大路)을 경유(由)하여 병진(並進)하다가 야전(前野)에 이르러,

두지(兩枝/두 나뭇가지)가 상공(相拱/서로 팔짱 낌)하였고, 마치 합금(合襟/옷깃을 합침)하는 것과 같았다.

1도(道)는 산(山) 서쪽(西)을 경유(由)하여 홍감사(洪監司)의 진후(陣後)로 질추(疾趍/급히 달림)하였다.

홍감사(洪監司)가 적(敵)이 전(前)으로부터 래(來)함을 보고는, 유달리 그 후(後)는 불려(不慮/생각 못함)하였다.

산(山) 서쪽(西)의 복병(伏兵)이 적(賊)의 졸지(猝至/갑자기 이름)함을 보고는 급(急)히 귀보(歸報/돌아가 보고함)하였는데,

미급(未及/이르지 못함)하였는데 적(賊)이 이미(已) 유산(踰山/산을 넘음)하여,

철기(鐵騎)로써 준판(峻坂/가파른 언덕)을 치하(馳下/질주하여 내려옴)하여 아군(我軍)을 엄습(掩)하였다.

아군(我軍)이 호기(胡騎/오랑캐 기병)와 함께 접액(接腋/겨드랑이를 접함)하고 마견(摩肩/어깨를 문지름)하여,

층등(蹭蹬/비틀거림)하여 동하(同下/함께 내려옴)하였는데,

평지(平地)에 이르니, 적(賊)이 비로소 난사(亂射)하고 총작(叢斫/어지럽게 벰)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홍감사(洪監司)의 군(軍)을 진섬(盡殲/모두 죽임)하였다.

유병사(柳兵使)의 좌영(左營)은 홍감사(洪監司) 진하(陣下)에 있었는데,

역시(亦) 동궤(同潰)하였고, 난군(亂軍)이 유병사(柳兵使)의 진(陣)으로 부(赴/다다름)하니,

유병사(柳兵使)가 벽문(壁門/군루문)을 견폐(堅閉/굳게 닫음)하고 역격(逆擊/반격)하게 하여

입(入)을 부득(不得)하게 하였다.

적(賊)이 이윽고 홍감사(洪監司)를 격파(破)하고, 승승(乘勝)하여 유병사(柳兵使)를 앙공(仰攻/머리를 들고 공격함)하였는데,

유병사(柳兵使)의 군(軍)이 만포(萬砲/많은 총포)를 제발(齊發/일제히 발사함)하자

적(賊)의 안행(顔行/앞장서 감)이 진폐(盡斃/모두 자빠짐)하였다.

이에 소퇴(少退/조금 물러남)하였다가 갑자기 복진(復進)하였다.

진(進)하면 번번이 중환(中丸/탄환에 명중됨)하였고 종일(終日) 함(陷)을 부득(不得)하였고,

모(暮/날이 저뭄)하자 곧 해귀(解歸/해산하여 돌아감)하였다.

유병사(柳兵使)의 고군(孤軍)이 무계(無繼/이어나갈 것이 없음)하고 지(久)함이 불가(不可)함을 지(知)하여,

곧 밤에 현(懸) 고지(高枝/높은 나뭇가지)에 촉롱(燭籠/촛불을 켜 드는 채롱)하고,

수(樹/나무)에 화포(火砲)를 다박(多縛/많이 묶어 놈)하고 화문(火門)에 화승(火繩/화약심지 노끈)을 결(結)하여,

마침내 기책(棄柵/목책을 버림)하고 소둔(宵遁/야밤에 달아남)하여 낭천산중(狼川山中)으로 입(入)하였다.

승(繩/노끈)이 장단(長短)이 있어 불이 화문(火門)에 이르면 선후(先後)로 포성(砲聲)이 있었고,

종야(終夜/하룻밤 사이) 상계(相繼/서로 이어짐)하니, 

적(賊)이 도리어 그 위허벽(爲虗壁/꾸며놓은 빈 주둔지)을 부지(不知)하였고,

명일(明日)에 정군(整軍/군을 정비함)하고 복진(復進)하였는데 곧 유병사(柳兵使)는 이미 멀리 가버렸다.

이 전투(戰)는 적병(賊兵)의 사자(死者)가 불가승기(不可勝紀/셀수 없이 많음)하였는데,

적(賊)이 그 시신(屍)을 진수(盡收)하여 소(燒/불사름)하였고, 3일 후(後)에 필(畢)하고는 곧 가버렸다.

아군(我軍)의 사자(死者)는 역시(亦) 원래(原) 만농(滿壠/언덕에 가득참)을 피(被/당함)하였는데,

홍감사(洪監司)의 시신(屍)은 적시(積屍/쌓인 시체) 중(中)에서 득(得)하였고,

칼에 액(額/이마)과 좌미(左眉/왼쪽 눈썹)을 상(傷)하였고, 정천(井泉/우물샘)의 방(傍/곁)에서 죽었다.

대개(盖) 장차(將) 단(壇)과의 거리(去)가 백허보(百許步/백여보)라 한다.

홍감사(洪監司)의 이름은 명구(命耈)이고, 유병사(柳兵使)의 이름은 림(琳)이다.


1683년 여름에 큰 가뭄이 있었는데 가을까지도 이어졌다.

조정이 사신을 보내 금화 전장에서 치제하고 이로써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나는 이천에 따라 영첩을 얻었고 금화에 이르러 장차 단 아래의 일을 맡아보았는데

이로 인하여 읍의 노인에게 묻고자 하니 관노 계홍을 얻어 전쟁의 일을 물어보니

스스로 진술하길

   <금년에 75세인데 바야흐로 27세에 병자의 난을 만났다.

    현감 이휘조를 따라 현 남쪽 복두산 잠곡으로 들어가 적병을 피하였다.

    이때 홍감사와 유병사가 평안도에서 거병하여 동행하고 토산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난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1637년 1월 16일에 현에 이르렀다.

    홍감사의 군은 가히 천여 명이었고 원앙진으로 행군하였고

    유병사의 군은 이보다 많았는데 원진으로 하여 행군하였는데 멈추고는 방영(방진)으로 하였다.

    양군이 현에 이르러 적을 만나니 진군하지 못하였다.

    현은 쌓아둔 곡식이 있어 묵을 수 있었고 현 남쪽은 높은 언덕이 있고 아래로는 우물과 샘이 있어

    이로써 주둔할 수 있으니 마침내 군루를 세우고 주둔하였다.

    홍감사의 군루는 산을 등지고 산등성이에 근거하였는데 산기슭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경사진 땅이었다.

    유병사의 군루는 동쪽 언덕에 있었고 소위 백전이란 곳으로 곧 4면이 현과 끊어져 있었다.

    양 군루는 서로 간의 거리가 수백 보였고 목책을 잇닿아 심었다.

    이때 남한산성으로부터 돌아오는 몽고인들이 장차 함경도를 경유하여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현에 이르러 멈추고는 현 남쪽 30리 토성의 들판에 진을 세웠다.

    검은 갑옷이 땅을 덮었는데 그 수는 알지 못하였다.

    유병사가 급히 홍감사에게 일컬어 말하길

    [큰 적이 앞에 있으니 우리가 진을 합하지 않는다면 일이 장차 패할 것입니다!>

    누차 강하게 말하였으나 홍감사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18일에 적이 노약자와 더불어 포로를 영에 남겨두어 지키게 하고는 

    세 길로 군을 출발하였는데 첫 번째 길은 산 동쪽 아래를 경유하였고,

    두 번째 길은 큰길을 경유하여 같이 진군하다가 앞 들판에 이르러

    두 나뭇가지가 서로 팔짱 끼듯이 오더니 마치 옷깃을 합치는 것과 같았다.

    세 번째 길은 산 서쪽을 경유하여 홍감사 진 후방으로 급히 달려갔다.

    홍감사가 적이 앞으로부터 오는 것을 보고는 유달리 그 후방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산 서쪽의 복병이 적이 갑자기 이른 것을 보고는 급히 돌아가 보고하고자 하였는데

    이르기도 전에 적이 이미 산을 넘어 철기로써 가파른 언덕을 질주하여 내려와 아군을 기습하였다.

    아군이 오랑캐 기병과 함께 겨드랑이를 접하고 어깨를 문지르는 것처럼 비틀거리며 함께 내려왔는데

    평지에 이르니 적이 비로소 어지럽게 쏘고 베니 잠깐 사이에 홍감사의 군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유병사의 좌영은 홍감사 진 아래에 있었는데 역시 함께 흩어졌고

    어지럽게 유병사의 진영에 다다르니 유병사가 군문을 굳게 닫고 반격하게 하여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적이 이윽고 홍감사를 격파하고 승세를 타 머리를 들고 유병사를 공격하였는데

    유병사의 군이 많은 총포를 일제히 발사하자 적의 선두가 모두 자빠져 죽었다.

    이에 조금 물러났다가 갑자기 다시 진군하였다.

    진군하면 번번이 탄환에 명중되었고 종일 함락하지 못하고 날이 저물자 곧 해산하여 돌아갔다.

    유병사는 외로운 군대가 이어나갈 것이 없고 오래 버틸 수가 없음을 알고는

    곧 밤에 현의 높은 가지에 채롱을 달아놓고 나무에 화포를 다수 묶어놓고는 화문에 노끈 심지를 묶어놨다.

    마침내 목책을 버리고 야밤에 달아나 낭천산 속으로 들어갔다.

    노끈이 길고 짧음이 있어 불이 화문에 이르면 앞뒤로 포성이 울렸고

    하룻밤 사이에 서로 이어지니 적이 도리어 그 허장성세를 알지 못하였다.

    다음날에 적이 군을 재정비하여 다시 진군하였는데 곧 유병사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이 전투는 적병의 전사자가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적이 그 시신을 모두 모아 3일 동안 불살랐고 마치자 곧 가버렸다.

    아군의 전사자 또한 원래 언덕에 가득 찼는데 홍감사의 시신은 쌓인 시체 중에 찾았다.

    칼에 이미와 왼쪽 눈썹을 상하였고 우물샘의 곁에서 죽었다.

    대개 단과의 거리가 백여보다.> 하였다.

홍감사의 이름은 명구이고, 유병사의 이름은 림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김화(金化)의 전장(戰場)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다

내가 계해년(1683, 숙종9) 3월에 성은(聖恩)을 입어 치사(致仕)하고, 4월에 병든 누이동생을 보기 위해 

16일 김화(金化)에 당도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나재(懶齋 홍명구(洪命耉)) 홍 감사(洪監司)의 사우(祠宇)를 배알하고, 

이어 전장(戰場)에 올라가서 당시의 일을 물었다. 하리(下吏) 10여 명 가운데 그 일을 아는 자가 없었는데, 

다만 관노(官奴)인 유계홍(劉溪弘)이, 산곡(山谷) 사이에 몸을 숨겨 당시 승패의 상황을 목격하였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어느 날 평안도(平安道)의 감사와 병사(兵使) 두 군대가 읍내에 와서 묵었습니다. 

어느 날 감사가 객사(客舍)의 서남쪽 산기슭에 진(陣)을 쳤는데 양진(兩陣 감사의 진과 병사의 진)이 나란히 진을 치면서도 

서로 연(連)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해가 막 돋을 때 적(賊)이 그 앞에다 진을 치고, 군사를 잠복시켜 양진(兩陣)의 뒷산으로 올라갔으나, 

양진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오직 앞쪽만을 수비하였습니다. 드디어 적기(賊騎)가 크게 함성을 지르면서 

충돌하여 내려오더니, 한 부대는 우리 양진의 사이를 횡단하고, 한 부대는 우리 감사의 진을 곧바로 침범하였습니다. 

흰 칼날이 번쩍거리며 잠깐 동안 접전이 벌어진 끝에 아군(我軍)은 크게 패하였고 적(賊)은 아군을 뒤쫓아가면서 

창ㆍ칼로 마구 찍었는데 그러고 한참 만에 싸움이 끝났습니다.

병사(兵使)는 먼저 이미 측백나무를 꺾어 꽂아 울[柵]을 만들었는데 그 울 밖에 있는 전영(前營)은 이미 처음에 짓밟혔습니다. 

감사의 남은 군대가 적과 서로 섞여서 울 밖에 이르자, 병사의 포와 화살이 난발하여 적과 아군이 함께 섬멸되었습니다. 

이때 해는 벌써 미시(未時 오후 한 시경부터 세 시경까지임)가 되었습니다.

적이 또 병사의 진을 향해 돌진하여 곧장 울 밖 10여 보(步) 거리에 도달하자, 병사의 진에서 수많은 포(砲)를 일제히 발사하니,

적은 일시에 비로 쓴 듯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되었습니다. 하루종일 이렇게 싸워 적군의 사망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적은 마침내 패잔병을 수습하여 달아났는데, 그 수가 처음에 비교하면 10분의 1도 못 되었습니다.”

대체로 듣건대, 홍공(洪公)은 자신이 서도(西道)의 책임을 맡고서도 적을 방어하지 못해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하여 자신의 허물을 통분하게 여겨 필사(必死)의 계책을 도모하였다. 본현(本縣) 뒷산에 자못 험절(險絶)한 성(城)이 

있으므로 어떤 이가 이곳에 진을 치고 적을 방어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공(公)은 물이 없는 것을 칭탁하고 일부러 산기슭 

낮은 곳에 진을 쳐서 그 뜻을 이루었으니, 충성스럽고도 장렬하다 이를 만하다. 내가 그 사우(祠宇)를 배알하자, 

그 고을 선비 10여 명이 그 재(齋)를 지키면서,

“우리들은 공의 의(義)를 존모(尊慕)하여 항상 서로 교대하여 수직하고 감히 떠나지 못합니다.”

하기에, 나는 그들과 뜰에서 서로 읍하고 물러 나왔다. 때는 4월 17일이었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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