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교전비 53783 vs 10 리얼?(송산전투) 홍타이지 이야기

팔기군의 경이로운 교전비에 대해서 https://cafe.naver.com/booheong/171831


이자성을 뚜까패던 명나라 최후 영혼까지 탈탈 끌어모은 홍승주의 13만 대군.....

청의 매복군은 장수 2명, 장교 8명, 병사 약 1만7천, 쿠투러 약 8천 = 약 2만 5천.....


송산대전

명군 13만 vs 청군 2만5천

전사자 53783 vs 0(부상자 10명)

청나라 부상자를 전사자라고 생각한다 치면 교전비 약 5378배.......


그렇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압도적인 교전비로 조선군을 탈탈 털던 그 모습은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청실록 1641년 8월 29일 기사中

○壬申。多羅貝勒多鐸等還營。又命內大臣超品公塔贍、伊爾登、率八旗護軍參領各一員。每旗精兵五十名。往高橋設伏。

方出營。遇明步兵千人。自杏山潰遁。為我前鋒兵所追。塔瞻、伊爾登等。復率兵協追。俱斬之。

遂至高橋設伏。遇明騎兵八十、步兵六百、自杏山逃遁。塔瞻、伊爾登等盡殲之。是役也。計斬殺敵眾、五萬三千七百八十三。

獲馬七千四百四十四。駱駝六十六。甲冑九千三百四十六副。明兵自杏山。南至塔山。赴海死者甚眾。所棄馬匹甲冑、以數萬計。

海中浮屍漂蕩。多如鴈鶩。

上神謀勇略。制勝出奇。破明兵一十三萬。如摧枯拉朽。指顧而定。因於昏夜中、我軍誤傷者止八人。廝卒二人。餘無挫衄者。

其被我軍圍於松山者、總督洪承疇、巡撫邱民仰、兵道張斗、姚恭、王之禎、通判袁國棟、朱廷榭、同知張為民、嚴繼賢、

總兵王廷臣、曹變蛟、與祖大樂等。士卒不過萬餘。城內之糧且絕。勢益窮蹙。我軍復掘外壕困之。總兵吳三桂、王樸、

白廣恩、馬科、李輔明、唐通、郎中張若麒等。各路潰竄。其餘亦間有一二潜遁。未有成隊而出者。於是復撰敕諭。

遣筆帖式查布海、渾達等、至盛京。宣布捷音

○임신일(壬申)에, 다라패륵(多羅貝勒) 다탁(多鐸) 등(等)이 환영(還營)하였다.

또 명(命)하여 내대신(內大臣) 초품공(超品公) 탑섬(塔贍)과 이이등(伊爾登)은 

8기(旗)의 호군(護軍) 참령(參領) 각(各) 1원(員)과 매기(每旗)의 정병(精兵) 50명(名)을 인솔(率)하여,

고교(高橋)로 왕(往)하여 설복(設伏)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출영(出營)하자 명(明) 보병(步兵) 천인(千人)을 우(遇)하였는데,

행산(杏山)으로부터 궤둔(潰遁)하니, 아군(我) 전봉(前鋒)의 병(兵)으로 추격(追)하게 하였다.

탑첨(塔瞻)과 이이등(伊爾登) 등(等)이 다시 솔병(率兵)하여 협추(協追/협동하여 추격함)하여 모두 참(斬)하였다.

마침내 고교(高橋)에 이르러 설복(設伏)하였고, 명(明) 기병(騎兵) 8천과 보병(步兵) 6백을 조우(遇)하였는데,

행산(杏山)으로부터 도둔(逃遁)하였는데, 탑첨(塔瞻)과 이이등(伊爾登) 등(等)이 진섬(盡殲)하였다.

이 역(役)에서 참살(斬殺)한 적중(敵眾)을 계(計)하니 53783명이고,

획마(獲馬)는 7444필이고, 낙타(駱駝)는 66필이고, 갑주(甲冑)는 9346부(副)하였다.

명병(明兵)이 행산(杏山) 남(南)으로부터 탑산(塔山)에 이르기까지 부해(赴海)한 사자(死者)가 심중(甚眾)하였고,

소기(所棄)한 마필(馬匹)과 갑주(甲冑)는 수(數)로써 만계(萬計)하였다.

해중(海中)의 부시(浮屍/물에 뜬 시체)가 표탕(漂蕩/넓게 떠다님)하였고, 다(多)함이 안목(鴈鶩/기러기와 집오리)과 같았다.

상(上)의 신모(神謀)한 용략(勇略)과 제승(制勝出奇/상대방이 생각하지 못한 특출한 전략)으로

명병(明兵) 13만(萬) 격파(破)하였고,

최고납후(摧枯拉朽/마른 나무 꺾기와 썩은 나무 부러뜨리기)와 같았다.

지고(指顧/신속하게 지시함)하고 정(定)하니 이로 인(因)하여 혼(昏/어두움)한 야중(夜中)에 

아군(我軍)의 오상(誤傷/잘못하여 다침)한 자(者)가 8인과 시졸(廝卒/쿠투러) 2인에 지(止)하였다.

나머지는 좌뉵(挫衄/부러지고 코피남)한 자(者)가 없었다.

그 송산(松山)에서 아군(我軍)의 포위(圍)를 피(被)한 자(者)는,

총독(總督) 홍승주(洪承疇), 순무(巡撫) 구민앙(邱民仰), 병도(兵道) 장두(張斗), 요공(姚恭), 왕지정(王之禎),

통판(通判) 원국동(袁國棟), 주정사(朱廷榭), 동지(同知) 장위민(張為民), 엄계현(嚴繼賢), 총병(總兵) 왕정신(王廷臣),

조변교(曹變蛟)와 더불어 조대수(祖大樂) 등(等)이었고,

사졸(士卒)은 만여(萬餘)에 불과(不過)하였다.

성내(城內)의 양식(糧)이 또한 절(絕)하자 세(勢)가 궁축(窮蹙/곤궁이 극에 달함)이 익(益)하였다.

아군(我軍)이 다시 외호(外壕)를 굴(掘/팜)하고 곤지(困之/지치게 함)하였는데,

총병(總兵) 오삼계(吳三桂), 왕박(王樸), 백광은(白廣恩), 마과(馬科), 이보명(李輔明), 당통(唐通),

낭중(郎中) 장약기(張若麒) 등(等)이 각로(各路)로 궤찬(潰竄/흩어져 달아남)하였고,

그 여(餘) 역시(亦) 하루 이틀 사이에 잠둔(潜遁/몰래 달아남)하였고,

완성(成)되기 전에 마침내 탈출한 자들이었다.

이에 다시 칙유(敕諭)를 찬(撰)하여 필첩식(筆帖式) 사포해(查布海)와 혼달(渾達) 등(等)을 견(遣)하여

성경(盛京)에 이르게 하여 첩음(捷音)을 선포(宣布)하게 하였다.


○1641년 8월 29일에 도로이 버이러 도도 등이 영으로 돌아왔다.

또 명을 내려 내대신 초품공 탑섬과 이이등은 8기의 바야라 잘안 장긴 각 1인과 매 니루의 정병 50명을 인솔하여

고교로 가서 매복을 설치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영을 나오자 명 보병 1천인과 조우하였는데 행산으로부터 무너져 달아나니

아군 전봉(갑시햔 초오하)의 군사로 추격하게 하였다.

탑첨과 이이등 등이 다시 군을 인솔하여 함께 추격하여 모두 참하였다.

마침내 고교에 이르러 매복을 설치하였고 명 기병 8천과 보병 6백을 조우하였는데

행산으로부터 도주하여 달아나니 탑첨과 이이등 등이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역에서 참살한 적의 무리를 헤아리니 53783명이었고,

획득한 말은 7444필, 낙타는 66필, 갑주는 9346벌이었다.

명군이 행산 남쪽으로부터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다다라 죽은 자가 심히 많았고

버리고 간 마필과 갑주의 수는 만을 헤아렸다.

바다에 뜬 시체가 넓게 떠다녔는데 그 많은 것이 기러기와 집오리 떼 같았다.

상의 신모한 용략과 특출난 전략으로 명군 13만을 격파하기가 마르고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았다.

신속하게 정하고 지시하니 이로 인하여 어두운 밤중에 

아군이 잘못하여 다친 자가 병사 8명과 쿠투러 2명에 그쳤다.

나머지는 부러지고 코피 난 자도 없었다.

그 송산에서 아군의 포위를 당한 자는 총독 홍승주, 순무 구민앙, 병도 장두, 요공, 왕지정,

통판 원국동, 주정사, 동지 장위민, 엄계현, 총병 왕정신, 조변교와 더불어 조대수 등이었고 사졸은 만여 명에 불과하였다.

성내의 양식이 또한 떨어지자 세가 곤궁함이 극에 달했다.

아군이 다시 밖의 해자를 파고 지치게 하였는데 

총병 오삼계, 왕박, 백광은, 마과, 이보명, 당통, 낭중 장약기 등이 여러 길로 흩어져 달아났고

그 나머지 역시 하루 이틀 사이에 몰래 달아났으니 완성되기 전에 마침내 탈출한 자들이었다.

이에 다시 칙서를 써서 빝허시 사포해와 혼달 등을 보내 성경(심양)에 이르게 하여 승전보를 선포하게 하였다.




열하일기 일신수필 1780년 7월 18일 일기 中

“숭덕(崇德) 6년(1633) 8월에 명의 총병 홍승주(洪承疇)가 구원병 13만 명을 송산에 모으니, 

태종(太宗)이 곧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려 할 때 마침 코피를 쏟았는데, 일이 시급하자 증세가 더욱 심하여 사흘 만에 겨우 그쳤다.

제왕(諸王)과 패륵(貝勒)들이 천천히 행군하기를 청했으나 태종은 싸움에 이기려면 행군을 빨리해야 한다 하고는, 빨리 달려서 엿새 만에 송산에 이르러 군사를 송산ㆍ행산 사이에 풀어서 한길을 가로 막았다. 이에 명의 총병 여덟 명이 전봉을 범하는 것을 

모두 쳐 무찌르고 그들이 필가산(筆架山)에 쌓아둔 양식을 빼앗고, 해자를 파서 송산ㆍ행산의 길을 끊었다.

이날 밤 명의 여러 장수가 칠영(七營)의 보병을 거두어 와서 송산성(松山城) 가까이 진을 쳤다. 이에 태종이 여러 장수들에게 

오늘 밤 들어 적병이 반드시 도망치리라 하고, 이내 호군(護軍) 오배(鼇拜) 등으로 사기(四旗)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봉과 

몽고 군사가 함께 나란히 진을 펴고 곧 바닷가에 닿게 하고, 또 몽고 고산액진(固山額眞) 고로극(固魯克 액진의 이름인 듯하다) 

등에게 명하여 행산 길에 매복하였다가 적을 맞아서 치게 하고, 예군왕(睿郡王)을 시켜서 금주로 가서 탑산 한길에 이르러 

가로질러 적을 치게 하였다.

이날 밤 초경(初更)에 명의 총병 오삼계(吳三桂 명말의 이름 높던 장수) 등이 바닷가로 도망치는 것을 서로 잇대어 추격하고, 

또 파포해(巴布海 청 태조의 열한째 아들) 등을 시켜서 탑산 길을 끊고,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제격(阿濟格)에게 명하여 

역시 탑산으로 가서 적을 쳐부수게 하며, 패자(貝子) 박락(博洛 청 태조의 손자)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상갈이채(桑噶爾寨)에 

가서 적을 쳐부수게 하고, 고산액진 담태주(譚泰柱)를 시켜서 소능하에 가서 바닷가까지 이르러 적의 돌아가는 길을 끊게 하며,

매륵장경(梅勒章京) 다제리(多濟里 매륵장경의 성명)에게 명하여 패하여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게 하고, 

또 고산액진 이배(伊拜) 등을 보내어 행산의 사방에서 명병(明兵)이 행산으로 도망하여 들어오는 것을 치게 하고, 

몽고 고산액진 사격도(思格圖) 등을 보내어 그들의 도망하는 군사를 추격(追擊)하게 하며, 

국구(國舅) 아십달이한(阿什達爾漢 청 태종의 장인인 듯하다) 등에게 명하여 행산의 병영을 가 보아서 

만일 그곳이 좋지 못하거든 다른 곳을 골라서 옮기게 하며, 그 이튿날 예군왕과 무영군왕을 시켜 

탑산의 사대(四臺)를 에워싸고 홍의포(紅衣礮 대포의 일종)로 쳐서 이겼다.

명의 총병 오삼계와 왕박(王樸 명말의 장수)이 행산으로 달아나니, 이날 태종은 군사를 송산으로 옮기고 해자를 파서 

에우려 하였다. 이날 밤 총병 조변교(曹變蛟)가 진을 버리고 에워싼 것을 뚫고 나가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하므로 다시 

내대신(內大臣) 석한(錫翰) 등과 사자부락(四子部落) 도이배(都爾拜 사자부락 군대의 장수)에게 명하여 각기 정병 2백 50명을 

거느리어 고교보(高橋堡)와 상갈이보(桑噶爾堡)에 매복시키고는 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교보 동쪽에 이르러 

패륵 다탁(多鐸)으로 하여금 군사를 매복시켰다. 오삼계와 왕박이 패하여 고교보에 이르니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겨우 

몸을 빼쳐 도망하였다. 

이 싸움에서 명병 5만 3천 7백 명을 죽이고, 말 7천 4백 필, 낙타 60필, 갑옷과 투구 9천 3백 벌을 노획하였다. 

행산의 남쪽으로부터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로 뛰어들어가 죽은 자도 심히 많아서 

시체가 마치 물오리와 따오기처럼 물에 둥둥 떴으나 

청군은 잘못하여 다친 자가 겨우 여덟일 뿐, 그 나머지는 코피도 흘리지 않았다.

한다. 아아, 슬프다. 이것이 이른바 송산ㆍ행산의 싸움이다. 각라(覺羅 청 태조 애친각라(愛親覺羅))는 관외(關外)의 

이자성(李自成)이요, 이자성은 역시 관내(關內)의 각라였으니, 명이 비록 망하지 아니한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에 13만의 많은 군사로 각라의 수천 명에게 에워싸인 바 되어서 잠시 동안에 마치 마른 나무가 꺾이듯이, 

썩은 새끼 끊기듯이 되어버리고, 홍승주와 오삼계같이 슬기 있고 용맹스러움이 천하에 대적할 자 없는 이들이건만 

한번 각라를 만나자 곧 혼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져 그의 거느린 13만의 군사가 마치 지푸라기나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 지경에 이르면 어찌할 수 없이 운수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겠다.

전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지은 《송계집(松溪集)》을 읽자니까,

“청병이 송산을 에워쌌을 때에 마침 효종 대왕(孝宗大王 이호(李淏)의 묘호)께옵서 세자의 몸으로 인질(人質)이 되어 

청의 진중(陣中)에 계시더니 잠깐 다른 곳으로 막차(幕次)를 옮긴 사이에 영원총병(寧遠摠兵) 오삼계가 거느린 만 명의 기병이 

포위를 뚫고 달려 나오니 애초에 막차이던 곳이 바로 그 길목이었다.”

하였으니, 이야말로 왕령(王靈)이 계신 곳에 천지의 신명이 힘을 합하여 도우신 밝은 증험이 아니겠는가.


연원직지 출강록 임진년 12월 中

이 싸움에서 명 나라 군사를 죽인 것이 5만 3700명, 말의 노획이 7400필, 낙타의 노획이 60필, 갑옷이 9300벌이다. 

행산에서 남으로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떠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표류하는 것이 마치 기러기와 따오기가 떠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청 나라 군사는 부상자가 여덟 명일 뿐, 나머지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하였다. 그 말은 너무나 과장한 것이지만, 청 나라가 이처럼 갑자기 흥한 것은 역시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할 만하다.


송나라 병사 2천 vs 여진 기병 17기 그 처절한 패배 https://cafe.naver.com/booheong/8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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