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거<한족 다 죽이고 심양으로 돌아가자> 홍타이지 이야기

청나라가 산해관 전투에서 이자성을 격파하고 북경에 들어오자

명나라 관리들과 백성들은 만세를 부르며 청군을 해방군처럼 맞이하였습니다.

청군 또한 약탈 금지령을 내리고 구 명나라 관리들을 그대로 등용시켰지요.

도르곤은 즉각 북경으로의 천도를 선언하며 순치제를 오게 합니다.

치발령도 즉각 명령하였으나 북경 한족들은 이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였고요.

하여 이례적으로 도르곤은 치발령 연기를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북경은 이자성군이 대대적인 약탈을 개시하여 당장 백성들 식량도 매우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도르곤은 본국에 요청하여 내탕금 100만냥을 긴급 공수하여 빈민을 구제코자 하였습니다.


이때 도르곤의 친형 아지거는 천도를 반대하며 북경 한족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본군은 회군하고 왕을 배치하여 다스리는 것이 후환이 없다고 말합니다.

즉 공포를 통한 통치를 하자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출병한 군사들에게 마땅히 시행시켜야 할 약탈을 금지시키고, 막상 약탈할 것도 없자 

그냥 한족들을 다 죽여버리고 회군하자는 것이었지요.


또한 당시 북경은 생필품 부족으로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강도들이 들끓었는데,

이 와중에 유언비어가 나돌았는데

하나는 북경의 모든 한족을 포로로 잡아 심양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북경 한족을 모조리 죽이고 어린아이만 남겨놓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몽고가 중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행한 악행이 연상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44년 8월 2일 기사中

상이 이르기를,

“팔왕(八王)은 북경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런가?”

하니, 이래가 아뢰기를,

“팔왕이 구왕에게 말하기를 

맨 처음 요동(遼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을 살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이 요동 백성들에게 많이 살해되었으니, 

 지금은 의당 이 군대의 위세를 타서 크게 살륙을 자행한 다음, 제왕(諸王)들을 유치시켜서 

 연도(燕都)를 진정시키고, 대군(大軍)은 심양을 다시 가서 지키기도 하고, 혹 물러가서 

 산해관을 보호하기도 해야만이 후환을 없앨 수 있다.’ 

하니, 구왕이 말하기를 

‘선 황제(先皇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일 북경을 얻으면 즉시 도읍을 옮겨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취하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인심이 안정되지 못했으니, 여기를 버리고 동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하여, 

두 왕의 논의가 서로 맞지 않아서 이로 인해 틈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였다.



청사고 도르곤 열전 中
북경의 백성들이 가을 7, 8월경에 장차 동쪽(심양)으로 천도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도니
왕이 유지를 내려 마땅히 북경을 도읍으로 세울 것이니 유언비어를 믿어 의심하고 흔들리지 말라 타일렀다.
얼마 안 있어 또 유언비어가 나돌길
   <상이 북경에 이르면 장차 청군을 풀어 약탈하고 노년과 장년을 모두 살육하고 어린아이만 남길 것이다!> 하였다.
왕이 다시 유지를 내려 말하길
   <백성은 곧 나라의 근본인데 너희 무리가 이미 성심으로 복종하여 귀순하였으니 다시 어떤 죄로써 도륙하겠는가?
     너희 무리는 살피고 생각하라!>

치평요람 송(宋) 영종(寧宗) 中

몽고(蒙古)의 군대가 금(金)나라의 보주(保州)를 함락하고 주민들을 다 몰아냈는데, 

(중략) 

이날 저녁에 명령을 내려서 노인들을 죽이라고 하였는데, 군졸은 명령을 듣고서 죽이는 일을 즐겨하였다.

(중략)

2일 뒤에 명령이 다시 내렸는데, 노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다 죽이라고 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도르곤의 친동생 도도가 남명을 공격하기 위해 양주로 내려갑니다.

이곳에서 흔히 말하는 <양주10일 대학살전>이 펼쳐졌고요.

당시 청나라 병사들은 무기며 식량이며 모두 스스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출병하면 반드시 약탈로 이를 보상해주는 게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반면 황제 놀이하고 있는 도르곤은 한족 학살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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