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대학살 1부-도르곤<사가법 선생! 같이 갑시다!> 홍타이지 이야기

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당시 살인, 약탈, 강간, 목숨거래, 여진족들이 한족을 바라보는 시선 등등 

그 당시 여진족들의 약탈행위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었더군요.

또한 알려진 것과 달리 양주 대학살은 청나라 한족부대(우전초오하, 한족3왕)는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만몽8기가 주력이더군요.

물론 이들을 따라 종군한 노예병(쿠투러) 한족은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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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다이곤(多爾袞) 열전 中

명 복왕 주유숭(남명 홍광제)이 강녕에서 황제를 칭하고 그 대학사 사가법을 양주로 보내 군사를 감독하게 하였고,
강북의 4진을 설치하고 회와 서를 따라 둔영을 설치하였다.
왕이 사가법에게 서신을 보내 말하길
   <내가 지난번 심양에 있을 때 곧 연경(북경)에 명망이 높은 자를 알아보니 모두 사마를 추천하였다.
    후에 입관하여 도적을 격파하고 도읍의 인사들과 더불어 교류하다 보니
    그대가 청렴한 선비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일찍이 손수 글을 써서 안부를 묻는다 핑계를 대고
    정중하게 간절한 마음을 보냈는데도 살펴보지 않으니 어느 때에 얻을 수 있겠는가?
    빈번히 듣자 하니 도로가 뒤숭숭하다 하고 많은 이들이 말하길 금릉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
    임금의 원수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하는 법이다.
    (주자가 말하길) 춘추의 도리에 도적이 있어 토벌하지 못하면 곧 죽은 임금에게 장(葬)이란 글을 못쓰고
    새로운 임금은 즉위란 글자를 쓰지 못한다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난신적자를 막는 법이 지엄한 것이니라.
    틈적 이자성이 거병하여 궐을 범하고 임금을 손수 죽였는데도 중국의 신민은 이를 듣고서도 
    화살 하나 더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평서왕 오삼계는 동쪽 모퉁이에 끼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포서의 통곡을 본받으니 (청나라) 조정이 감동하였다.
    역대의 오래된 친분을 생각하면 요사이의 작은 의심을 버리고 이에 맹수를 정돈하여 개와 쥐를 몰아내 없애도록 하자!
    북경에 들어간 날 황제와 황후의 시호를 올렸고 산릉에 장사 지냄에 있어 모두 황실의 예와 같게 하였다.
    친왕, 군왕, 장군 이하까지 일체 명조가 봉한 것을 따르고 고치거나 깎지 않았다.
    공신의 가문과 문무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 조정에 있게 하는 은총을 내렸다.
    농촌과 도시의 백성을 놀라게 하지 않았고 추호도 소란스럽게 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가늘 하늘이 높고 날씨가 좋은 때를 헤아려 장수를 보내 서쪽(이자성)을 정벌하겠노라!
    강남에 격서를 전하고 하삭에 연이어 군사를 보내고 전방의 군대를 정비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곧 임금의 원수를 갚고 우리 조정의 덕을 드러낼 것이노라!
    어찌 남쪽 지역의 여러 군자들의 생각은 아침저녁의 일시적인 안일만을 탐하고,
    일의 중요한 기틀을 살피지 않으며 허명을 즐기고 실제의 손해를 까맣게 잊고 있으니 나는 심히 번뇌한다.
    국가가 연경(북경)을 안정시킨 것은 틈적(이자성)에게 얻은 것이지 명조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니다.
    도적이 명조의 신주를 훼손하고 역대 황제를 욕보임에 이르니 우리나라는 백성의 부세가 늘어나는 노고를 꺼리지 않고
    우리의 군대를 모조리 동원하여 대신 치욕을 씻게 하였으니 
    효자와 어진이는 마땅히 은혜에 보답하기를 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에 역적의 토벌을 같이 논의하고 군대를 잠시 쉬게 하자!
    끝내 강남에 웅거하여 앉아서 어부지리를 누리려 하는가?
    여러 정리를 헤아리면 어찌 평안하다 일컫겠는가?
    (그대가) 장차 (장강이) 천연의 험지라 날아서 건널 수가 없다 생각하여도 (우리가) 채찍을 던져 강을 막지 못하겠는가?
    대저 틈적(이자성)은 단지 명조에게 재앙의 빌미가 되었으나 일찍이 우리나라에는 죄를 짓지 않았다.
    그러나 (산해관에서) 바다에 이르도록 같은 원수라 하여 특별히 대의를 펼친 것이다!
    지금 만약 황제라 칭하며 그(홍광제)를 옹립한다면 이는 곧 하늘에 해 두 개가 굳세게 대적하는 것이니
    나는 장차 서쪽으로 행군할 정예를 가려 깃발의 방향을 바꿔 동정할 것이노라!
    또한 죄의 경중을 헤아려 저쪽(이자성)을 용서하고 명하여 향도로 삼을 것이노라!
    대저 중화가 전력으로도 좁은 땅(요동)도 지키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강 좌측 한 모퉁이로써 대국(청)을 지탱하고자 한다면
    승부의 수는 그대들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노라!
    내가 듣자 하니 군자는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나 소인은 곧 백성을 방치한다고 한다.
    여러 군자가 과연 때와 천명을 알아 옛 임금(숭정제)을 도탑게 기억하고 현왕(복왕 주유숭)을 깊이 생각한다면 
    마땅히 (황제의) 칭호를 삭제하고 (청나라에) 번국으로 귀부하여 복록을 영원히 누리도록 권해야 할 것이니라.
    조정은 마땅히 (복왕을) 우임금의 손님으로 대우하고 예물을 계승하여
    황하와 태산이 없어지도록 맹세하여 위차는 여러 왕후의 위에 있게 할 것이니
    바라건대 조정이 도의를 펼쳐 도적을 토벌한다는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흥멸과 끊어지는 것을 다시 잇는다는 초심이 남쪽 지방의 선비들에게 이르러
    나는듯 거동하여 오면 곧 너는 공작이고, 너는 후작이라 하여 작위를 베풀고 땅을 나눌 것이니
    이는 평서왕(오삼계)의 전례가 있으니 오직 사실을 가지고 이로움을 도모하라!
    근래에 사대부들은 높은 나무같이 명분만을 좋아하고 나라의 위급은 돌보지 아니하여
    매번 대사가 있을 때만 문득 모여 일을 처리하였다.
    옛날 송나라 사람은 의논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적군이 이미 도하하였으니 이를 경계로 삼는 것이 옳다!
    선생은 명류의 영수로 지극한 계획을 주관하여 필시 처음과 끝을 깊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차마 시류를 쫓겠느냐만은, 따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응당 깊게 생각하여 정하도록 하라!
    출병이 임박하였으니 서쪽으로 갈 수도 있고 동쪽으로 갈 수도 있다.
    남국의 안전과 위급이 이 일거에 달렸다.
    원하건대 여러 군자가 한마음으로 도적을 토벌하자!
    일순간의 한몸의 영화를 탐하거나 고국(명나라)의 무궁한 화를 거듭하여 난신적자가 비웃게 하지 말라!
    내가 진실로 간절히 바라는 것이노라!
    예기에 이르기를 오직 선인만이 능히 진언을 받는다고 한다.
    진심을 정중하게 드러냈으니 밝은 가르침을 기다리겠노라!
    멀리 하늘과 강을 바라보며 발돋움하고 목을 빼 기다리겠노라!
    서신에 뜻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였노라!>
사가법이 빠르게 사람을 보내 답서를 보내왔는데 말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말이 많았다.




요약.

입관 후 청의 섭정왕 도르곤은 남경에서 즉위한 남명 홍광제의 병부상서로 양주를 수비하던 사가법에게 회유서신을 보낸다.

사가법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당시 도르곤의 3형제 중 아지거는 한족을 모조리 학살하고 심양으로 돌아가자 주장하였고

도르곤은 오히려 본국의 내탕금 100만냥을 풀어 북경 한족을 구휼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남명을 토벌하기 위해 막내인 도도가 만몽 팔기군을 이끌고 남진한다.

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를 자랑하던 도르곤의 회유를 수차례 거절한 것은 

남명 토벌군 대장 도도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위였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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