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부-도르곤<사가법 선생! 같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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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실록 1645년 5월 28일 기사中
○정국대장군 호쇼이 어르커 친왕 도도 등이 보고하여 아뢰길
<대군이 4월 5일에 귀덕부로부터 출발하여 강을 따라 가니 군읍이 모두 이미 투항하였나이다.
13일에 사주 20리로 이동하여 구사어전 아산으로 하여금 몽고 구사어전 마라희, 부라극탁과 더불어
장졸을 인솔하여 사북 회화교를 앞서 가서 빼앗게 하였나이다.
그 사주 수장인 총병이 다리를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아군이 마침내 밤에 회(淮)를 건넜고
다음날에 50여리를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나이다.
17일에 상서 종실 한대와 머리언 장긴 이이덕, 호군통령 아지거, 니칸, 호군통령 서리 두이덕 등을 보내
군사를 인솔하여 양주성 북쪽에 이르러 배 100여척을 획득하였습니다.
다음날에 대군이 양주성 20리 거리에 영을 진열하였고
영을 내려 호군통령 서리 고납대, 이이도제, 비양고, 오라선, 머이런 장긴 아합니감, 매륵장경 서리 격패고 등은
군사를 인솔하여 양주성 남쪽으로부터 배 200여척을 획득하였습니다.
18일에 대군이 양주성 아래에 육박하여 그 양주 수장 각부 사가법,
한림학사 위윤문과 더불어 4 총병관, 2 도원 등을 초유하였는데, 따르지 않았습니다.
25일에 영을 내려 바인투, 투라이, 아산 등은 양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게 하였고 그 각부 사가법을 얻어 군전에서 참하였나이다.
그 성을 근거로 하여 명을 어긴 자는 모두 주살하였습니다.
5월 5일에 진군하여 양자강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위(가짝) 복왕의 부하 진해백 정홍달이 수군을 이끌고 과주를 수비하였고,
조총병이 수군을 이끌고 의지신지를 수비하였습니다.
6일에 아군이 북쪽 강가에 진열하여 3일을 서로 대치하였습니다.
8일 해질녘에 영을 내려 바인투, 투라이, 아산은 수군을 인솔하여 운하를 통해 은밀히 남쪽 강가에 이르게 하였고
강 서쪽 과주 15리 거리에 진열하였습니다.
9일에 다시 영을 내려 머이런 장긴 이솔태는 수군을 인솔하여 5경(03~05시)에 상륙하여 여명에 도강하였고
관병이 계속하여 이끌어 도강하였습니다.
영을 내려 좌익의 수군은 북쪽 강가에 정박하고 적이 이르면 곧 화포로써 협공하게 하였습니다.
10일에 듣기로 복왕이 마사영과 더불어 여러 태감을 인솔하여 은밀히 달아났다 하였나이다.
15일에 아군이 남경에 이르렀는데 흔성백 조지룡이 위국공 서주작, 보국공 주국필, 융평후 장공일, 임회후 이조술,
회녕후 손유성, 영벽후 탕국조, 안원후 류조창, 영강후 서홍작, 정원후 등문유, 항성백 상응준,
대흥백 추순익, 영진백 류윤기, 남화백 방일원, 동녕백 초몽웅, 안성백 장국재, 낙중백 황주정,
성안백 가조영, 부마 제찬원, 내각대학사 왕탁, 한림 정정규, 장거, 예부상서 전겸익,
병부시랑 주지신, 양운구, 한적안, 이작, 급사중 임유본, 육랑, 왕지진, 서방래, 장칙경과 더불어
도독 16인, 순포제독 1인, 부장 55인과 아울러 성내 관민을 인솔하여 맞이하여 항복하였나이다.
그 도중에 귀부한 자들은 흥평백 고걸자, 고원조, 광창백 류량좌, 제독 이본심, 총병 호무정, 장사원, 곽호,
양승조, 이중성, 하응창, 적명복, 왕지강, 이우춘, 장천록, 장천복, 이성동, 이서봉 등 23인이고,
감군 도장건, 가기봉 2인, 부장 47인, 참장과 유격은 모두 합하여 86인이며,
마보병은 모두 합하여 23만 8천3백이옵나이다.>
청실록 1645년 6월 8일 기사中
○1646년 6월 8일에 남경을 평정함으로써 상이 전각에 거둥하였고
섭정왕 도르곤이 여러 왕, 버이러, 버이서, 공작과 더불어 문무신하를 인솔하여 표문을 올리고 경하례를 행하였다.
이날에 호부상서 잉굴다이를 보내 원구에 고하고 제사하였다.
예부상서 랑코는 방택에 고하고 제사하였고, 예부상서 궁아다이는 태묘에 고하고 제사하였고,
내대신 하락회는 사직에 고하고 제사하였다.
원구의 축문에 말하길
<신이 천명을 우러러 받들어 정국대장군 어르커 친왕 도도 등을 보내
군을 통솔하여 적을 토벌하고 섬멸하였으며 도적떼를 탕평하였고,
삼진을 평정하였으며 황하 이남은 바라만 봐도 투항하였나이다.
양회의 관민은 성심으로 귀순하였는데
오직 양주만이 명을 거스르고 복종하지 않으니 빠르게 공격하여 함락하였나이다.
강동의 장졸들이 새가 놀라고 물고기가 흩어지듯 투항한 자가 23만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달아나 숨었나이다.
이로부터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넜고 대군이 금릉을 곧장 들이치니
복왕 주유송은 달아났고 관민은 뛸듯이 춤추며 나와 영접하였나이다.
잠깐 사이에 남방이 마침내 평정되었으니 이는 모두 상천이 보우한 까닭이나이다.
공경하게 경사로운 예를 행하며 고하여 제사하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흠향하소서!>
나머지도 이 축문과 동일하였다.

요약.
1645년 2월 8일 순치제는 서쪽을 정벌하러 간 도도에게 동관이 함락되었으니 이제 강남 남명과 이자성을 토벌하라 명한다.
3월 7일 호뢰관에 당도한 도도는 군을 3로로 나누어 귀덕까지 진군하며 성들을 투항시킨다.
마침내 4월 5일 남명을 섬멸하기 위해 도도는 귀덕부를 출발하여 4월 18일 양주에 도착한다.
도도는 사가법에게 형 도르곤이 보낸 서신을 언급하며 회유하였으나 사가법은 끝내 결사항전을 결의한다.
도도는 이전에 순순히 투항했던 남방의 성들과 달리 양주만이 유독 투항을 거부하자 이를 도륙 내기로 결정한다.
성은 4월 25일 함락되었는데 4월 26,27,28,29, 5월 1,2,3,4,5 총 10일 동안 양주에서는 대약탈과 대학살이 펼쳐진다.
도도는 5월 28일 순치제에게 승전보를 보고하면서 유독 양주성만이 순순히 투항하지 않아
성을 근거로 명을 어긴 자들을 모조리 도륙냈다고 보고한다.
당시 양주성민은 약 1백만으로 추정된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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