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대학살 3부-함락 하루 전...잔치를 벌이다 홍타이지 이야기

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부-도르곤<사가법 선생! 같이 갑시다!>

2부-도도<반항하는 양주성을 도륙 냈나이다!>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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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 中

乙酉年四月十四日,督鎮史可法從白洋河失守,踉蹌奔揚州,堅閉城以禦敵,至廿四日未破。

城前禁門之內,各有兵守,予宅西城,楊姓將守焉。吏卒棋置,予宅有二卒,左右鄰舍亦然,踐踏無所不至,供給日費錢千餘。

將不能繼,不得已共謀為主者觴,予更謬為恭敬,酬好漸洽;主者喜,誡卒稍遠去。主者喜音律,善琵琶,思得名妓以娛軍暇;

是夕,邀予飲滿,擬縱歡,忽督鎮以寸紙至,主者覽之色變,遽登城,予眾亦散去。

을유년(乙酉年) 4월 14일에 독진(督鎮) 사가법(史可法)이 백양하(白洋河) 실수(失守)를 종(從)하여,

양창(踉蹌/급히 움직임)하여 양주(揚州)에 분(奔)하였고, 굳게 폐성(閉城)하여 이로써 어적(禦敵)하였는데,

24일에 이르러 미파(未破)하였다.

성전(城前) 금문(禁門)의 내(內)에는 각각(各) 병수(兵守)가 있었고,

여댁(予宅)은 서성(西城)이었는데, 양성(楊姓)의 장수(將守)였다.

이졸(吏卒)이 기치(棋置/배치함)하였는데, 여댁(予宅)은 2졸(卒)이 있었는데, 좌우(左右)의 인사(鄰舍) 역시(亦) 그러하였고,

천답(踐踏/짓밟음)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전(錢) 천여(千餘)를 공급(供給)하여 일비(日費)하였다.

장차(將) 계(繼)함이 불능(不能)하여, 부득이(不得已) 공모(共謀)하여 주자(主者)를 위해 상(觴/잔을 냄)하였고,

나는 다시 유(謬/속임)하여 공경(恭敬)으로 하였고, 수호(酬好/좋게 접대함)하니 점흡(漸洽/점점 흡족해함)하였다.

주자(主者)가 희(喜)하니, 계졸(誡卒/졸병을 훈계함)하여 점차 원거(遠去/멀리 가버림)하였다.

주자(主者)가 음률(音律)을 희(喜)하였고, 비파(琵琶)를 선(善)하였는데,

명기(名妓)를 사득(思得/얻기를 생각함)하였는데 이로써 군가(軍暇/군사가 한가함)를 오(娛/즐김)하고자 하였다.

이밤에, 나를 요(邀/부름)하여 음만(飲滿/만취)하였는데, 종환(縱歡/아첨)을 의(擬/흉내 냄)하였고,

갑자기 독진(督鎮)이 촌지(寸紙/짧은 편지)가 이름으로써, 주자(主者)는 람(覽)하고는 색변(色變)하였고,

급히 등성(登城)하였는데, 여중(予眾) 역시(亦) 산거(散去)하였다.


1645년 4월 14일에 독진 사가법이 백양하를 지키지 못함에 따라 급히 움직여 양주로 달아나

굳게 성을 닫고 이로써 적을 막았는데 24일에 이르기까지 깨지지 않았다.

성 앞 금문 안에는 각각 지키는 군사가 있었고 내 집은 서성이었는데 양씨 성의 장수가 지켰다.

관리와 병졸을 배치하였는데 내 집에는 졸병 두 명이 있었고 좌우의 옆집 또한 그러하였는데,

짓밟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하루에 1천여 전을 공급하여 소비하였다.

장차 계속할 수가 없게 되자 부득이 함께 모의하여 장수를 위해 잔치를 벌였고

나는 다시 공경하는 듯 속여 좋게 대접하니 점점 흡족해 하였다.

장수가 기뻐하여 졸병을 훈계하여 점차 멀리 쫓아냈다.

장수가 음률을 좋아하였고 비파를 잘하였는데 명기를 얻기를 생각하며 이로써 군사가 한가할 때 즐기고자 하였다.

이 밤에 나를 불러 만취하였는데 나는 아첨하는 듯 흉내냈다.

홀연히 독진(사가법)의 짧은 편지가 이르니 장수가 보고는 안색이 변하여 급히 성에 올라갔고 우리 무리 또한 흩어져 가버렸다.


요약.

1645년 4월 14일 백양하를 지키던 사가법이 양주로 되돌아왔다.

마침내 어르커 친왕(예친왕) 도도가 이끄는 청군은 배 300척을 탈취하고 도강하여 4월 18일 양주성에 도착한다.

도르곤은 사가법에게 투항을 다시 권유하였으나 사가법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마침내 7일간의 공성전이 펼쳐졌고 양주성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다.

양주 서성안에서 사는 왕수초(王秀楚)는 서성에 주둔한 장수 양씨 휘하의 병졸 2명과 함께 머물게 되었다.

다른 집들도 모두 병졸들이 나누어 거처하였다.

서성에서만 병졸들이 빼앗고 소비하는 돈이 매일 1천냥이 되어가자 왕수초 등 주민들은 장수 양씨를 찾아가

잔치를 벌이고 아첨한다.

이들의 아첨에 흡족한 양씨는 병졸들의 행패를 멈추게 하였다.

4월 24일 함락 하루전 장수 양씨는 왕수초 등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한다.

만취할 때까지 마신 양씨는 음악을 즐기며 기생을 요청하는등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이때 사가법이 내린 군령 서신이 도착하자 양씨의 안색이 변해 자리를 박차고 급히 성위로 올라간다.

왕수초도 무리들과 흩어져 집으로 향한다.


-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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