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어 만문노당 486부-아이타 조선인 52명을 사로잡다! 만문노당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만문노당은 누르하치의 일대기를 기록한 무권점 만문 사서 [만문원당/구만주당]을 
건륭조에 권점을 넣고 일부 내용을 변경하여 편찬하였습니다.
기 연재했던 내국사원당이 만주의 시조 부쿠리용숀부터 1584년 9월까지만 기록되어 있는데
만문노당은 1607년부터 기록이 시작됩니다.



만주어의 한글 발음은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하겠습니다.
만주어 문법을 이제 갓 배우고 있으며,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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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실 분은 그림을 클릭하시고 원문보기를 누르세요>


nadanju sunja weihu i cooha jihe be afafi. gabtame nadan niyalma be waha.

나단주 순자 워이후 이 초오하 지허 버 아파피. 갑타머 나단 냘마 버 와하.

70 5 작은배 의 군대 왔음 을 공격하고. 쏘며 7 사람 을 죽였다.


tere cooha be bederebuhe.

터러 초오하 버 버더러부허.

그 군대 를 물러나게했다.


aita emu tanggv susai niyalma be gaifi. weihu de tefi amcara jakade.

아이타 어무 탕우 수사이 냘마 버 가이피. 워이후 더 터피 암차라 자카더.

아이타 1 백 50 사람 을 가지고. 작은배 에 타고 추격할 적에.


burulame amcaburakv ofi. amasi bederehe.

부루라머 암차부라쿠 오피. 아마시 버더러허.

도망가며 추격하지못하게 되어서. 뒤로 물러났다.


jai nikan i han lin yuwan. gi xi jung hafasa. solho i han de etuku beneme genehengge be.

자이 니칸 이 한 린 유완. 기 스 중 하파사. 솔호 이 한 더 어투쿠 버너머 거너헝어 버.

또 한족 의 한 림 원. 급 사 중 관리들. 고려 의 한 에 옷 보내며 간것 을.


solho i juwe dzung bing guwan. emu xilang. amasi beneme.

솔호 이 줘 중 빙 구완. 어무 시랑. 아마시 버너머.

고려 의 2 총 병 관. 1 시랑. 뒤에 보내며.


orin juwe jaha i mederi be geneme. edun baharakv ginjeo i ergi dalin i tun de jihebi seme.

오린 줘 자하 이 머더리 버 거너머. 어둔 바하라쿠 긴저오 이 어르기 다린 이 툰 더 지허비! 서머.

20 2 나룻배 로 바다 를 가며. 바람 얻지못하고 금주 의 쪽 옆 의 섬 에 왔었다! 하며.


ninggun biyai ice nadan de donjifi. aita gvsin niyalma be gaifi geneci.

닝운 뱌이 이처 나단 더 돈지피. 아이타 구신 냘마 버 가이피 거너치.

6 월의 초 7 에 듣고서. 아이타 30 사람 을 가지고 가니.


hafasa weihu de teme jabdufi bahakv.

하파사 워이후 더 터머 잡두피 바하쿠.

관리들 작은배 에 머물며 정렬하고 얻지못하였다.


weihu de teme jabduhakv susai juwe solho. uyunju nikan. menggun duin

워이후 더 터머 잡두하쿠 수사이 줘 솔호. 우윤주 니칸. 멍운 두인

작은배 에 머물며 정렬하지못한 50 2 고려. 90 한족. 은 4


*han lin yuwan[한 린 유완] : 한림원(翰林院), 관청명.

*gi xi jung[기 스 중] : 급사중(给事中), 관직명.


(명나라 산동 등주의) 75척 작은 배의 군대가 온 것을 공격하고 쏘며 7사람을 죽였다.

그 군대를 물러나게 했다.

아이타가 150명을 데리고 작은 배에 타고 추격할 적에 도망가 추격하지 못하게 되어서 뒤로 물러났다.

또 한족의 한림원과 급사중 관리들이 고려(조선)의 한(광해군)에 옷 보내러 간 것을

고려의 2 총병관과 1 시랑이 뒤에 돌려보내며 22척의 나룻배로 바다를 가며 

바람 얻지 못하고 금주의 쪽 옆의 섬에 왔었다! 하며 (1621년) 6월 7일에 듣고서

아이타가 30명을 데리고 가니 관리들은 작은 배에 머물며 정렬하고 얻지 못하였다.

작은 배에 머물며 정렬하지 못한 52 고려인과 90 한족과 은 4


요약.

1621년 4월 다시 명나라 산동 등주에서 75척의 배가 온 것을 발견한 아이타(유해)

150명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명군 7명을 죽이고 퇴각하게 한다.

한편 명나라에서 조선 광해군에게 선물을 보냈는데 광해군은 총병관 2명과 시랑 1명에게

이들을 배웅하게 한다.

22척의 배로 구성된 사신단이 바람을 잘 못 타 금주 인근의 섬에 정박하자

이 소식을 들은 아이타는 1621년 6월 7일 30명을 이끌고 섬을 공격한다.

예상 밖 공격에 당황한 조선인 52명과 한족 90명은 모두 사로잡힌다.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잡힌 조선인들은 요양성으로 끌려가 모두 살해당했다.



*조선의 이 당시 기록 검토

1. 1621.04.21

   → 사신 유홍훈(劉鴻訓), 양도인(楊道寅) 한양 도착

   → 칙서+비단 하달

2. 해상으로 중국으로 간 조선 사신단 사망 사건

   → 요동의 육로가 끊기자 처음으로 해상으로 사신을 보내기 시작함.

   → 북경에 갔던 박이서, 유간이 되돌아오다 4월 13일 폭풍을 만나 익사함

   → 뒤를 이어 갔던 강욱, 정응두도 익사함.

3. 1621.05.01

   → 사신단 귀환

   → 사신단 접대 및 뇌물에 나라의 재정이 고갈됨

4. 1621.05.26

   → 평안감사 박엽 23일 사신단 미곶도에서 출항했다 보고

5. 1621.06.23

   → 광해군 중국 사신단과 조선 수행단의 행방이 모연하다며 알아보라 지시

6. 조선 수행단 최응허의 보고

   → 배가 침몰하여 유홍훈과 자신만 살아남음, 공물 대부분 유실.


*광록도에서 사로잡힌 조선인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1621년 9월 3일 기사中

조선의 사신이 포로가 된 사건을 알아내도록 용천, 의주 부사 등에 명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이형원(李馨遠)이 전후로 올린 장계를 보건대, 모 도사(毛都司)의 말에 

‘내가 나올 때 들으니, 조선의 사신들이 탄 배가 광록도(廣鹿島)에서 부서져 일행이 가달(假㺚)의 포로가 되어 

지금 구류 상태에 있다.’

고 하였으며, 또 

‘귀국의 사람들 가운데 적의 포로가 된 자들이 요성(遼城)에 이르렀는데, 적이 회자(回咨)를 보고 성을 내며 죽였는데, 

그 수효가 47명이나 된다.’

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배가 부서져 포로가 되었다는 것과 요성에 이르러 피살되었다는 것은, 

전일 박경룡(朴景龍)의 일 같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조선의 사신’이라고 하였으니, 역관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박이서(朴彛叙) 일행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회자’도 우리 나라에서 중국에 보내는 것을 말한 것인지 모르겠으며, 

‘지금 구류되어 있다.’는 것과 ‘성을 내며 살해하였는데, 그 수효가 47명이나 된다.’는 것도 

전일 도망해 온 자가 공초한 80명이라는 수효와 다르니, 이 말이 옳은지 저 말이 옳은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곡절을 접반관으로 하여금 다시 상세하게 〈도사 아문(都司衙門)에서〉 

탐색하여 일일이 치계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도사가 말한 일들을 용천과 의주에서도 반드시 모두 탐문해야 할 것이니, 

이런 뜻을 이형원ㆍ정준ㆍ이상길이 있는 곳에 아울러 하유하실 것을 감히 아룁니다.〉 ”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속잡록 1621년 6월 기록中

6월 수로정탐관(水路偵探官) 황박(黃珀)이 미곶(彌串)을 떠난 지 5ㆍ6일에 순풍을 타고 광록도(光鹿島)에 도착하여 치계하기를, 

“사후선(伺候船)을 보냈는데, 수로가 비록 험악하였으나 무사히 나갔습니다. 섬에는 각기 사람들이 살고 있으므로 

은(銀) 10냥을 주고 안내인을 사서 장차 등주(登州)로 가려고 하는데, 

명 나라 사신이 20일 배로 이미 우리 나라 지방을 떠났으며, 일행의 배는 22척으로 요계(遼界)의 여순(旅順) 어귀를 지나다가 

밤에 풍파를 만나 11척이 파선하였고, 싣고 있던 짐바리들은 모두 침수되어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21년 10월 21일 기사中

박이서ㆍ유간ㆍ강욱ㆍ정응두 등 익사한 역관들에게 증직과 휼전을 명하다

도승지 이덕형(李德泂)이 아뢰기를,

“신 등이 진위사(陳慰使) 권진기(權盡己)가 올린 장계를 보니, 진향사(進香使) 유간(柳澗)과 서장관 정응두(鄭應斗)는 

배가 침몰하여 익사하고 강욱(康昱)은 섬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재신이나 시종관으로서 명을 받고 

중국에 갔다가 불행하게 모두 바닷물에 빠져 죽었으니, 소식을 들은 사람치고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박이서(朴彛叙)는 소식이 전혀 없는데 물에 빠져 죽은 것이 확실하니 휼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박이서ㆍ유간ㆍ강욱ㆍ정응두 등 및 물에 빠져 죽은 역관들은 나라 일을 위하여 위험한 길을 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니, 

매우 놀랍고 슬픈 일이다. 

자급을 뛰어넘어 증직(贈職)하고 휼전을 두터이 베풀 것이며, 그 가족들에게 월봉(月俸)을 헤아려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체로 이때에 와서 사신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확실한 통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1621년 6월 3일 기사中

의주 부윤이 소호들을 타일러서 돌려보낼 것에 대하여 장계하다

의주 부윤이 장계하였다.

“이 소호(小胡)들이 겉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의향을 보이면서 오로지 우리 나라 군사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진강(鎭江)으로 통하면서 왕래를 그치지 않고 있으니, 

처리하기 어렵게 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다만 저들의 본래의 의도는 편지를 전하는 데에 있지 않고 

동태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당신네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서 나가고 물러갈 것을 결정하겠다.’고 말을 하면서 오랫 동안 버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별로 좋지 않은 말이 오고 가는 것도 없습니다. 

타일러서 돌려보내도록 하는 일을 화급하게 결정하도록 하고 말할 내용도 함께 지시를 하면 

당일에 진위(陳慰)하는 행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진위사 〈당상〉 역관 김성남(金聖男)의 말이 ‘중국의 수군 장수가 이미 광록도(廣鹿島)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의주부에서 이틀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수군 백만 명이 이미 정비를 마쳤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데, 장차 바다를 끼고 있는 여러 섬들에 특별히 배치하면 형세상 

곧바로 우리 압록강에 연결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비록 확실하지 않으나 감히 들은 바를 아룁니다. 

또한 이능복(李能福)과 한춘립(韓春立)이 광녕(廣寧)으로부터 가지고 온 자문은 속히 회답하도록 하소서.〉 ”


결론 : 광록도에서 사로잡힌 조선인 50여 명은 모두 요양성으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487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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