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도르곤 열전 16부-죽자마자 역적이 되다!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청나라의 입관을 성공시킨 섭정왕 도르곤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소년 대장 전사(다이칭)가 되다!

2부-옥새 획득, 칭왕, 병자호란 참전!

3부-4차 북경포위전(산해관 따위!!!)
4부-명나라 마지막 야전! 송금지전!

5부-홍 타이지 급사! 피튀기는 권력 다툼!

6부-명나라 멸망! 산해관으로 진격!

7부-마침내 입관, 산해관 전투!

8부-여진족 430년 만에 자금성을 차지하다!

9부-신수도 북경(연경)! 치발령 연기!

10부-자칭 남명의 사가법에 보내노라!

11부-장강을 믿느냐? 채찍을 던져 강을 막겠노라!

12부-어찌 너희를 도륙하겠는가? 이미 100만냥을 풀었노라!

13부-만인지상! 사실상 황제!

14부-태종 장남 호오거를 죽이다!

15부-황부 섭정왕 39세에 죽다!(황제로 추존)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송서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18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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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다이곤(多爾袞) 열전

王無子,以豫親王子多爾博為後,襲親王,俸視諸王三倍,詔留護衛八十員。

又以王近侍蘇克薩哈、詹岱為議政大臣。

二月,蘇克薩哈、詹岱訐告王薨時,其侍女吳爾庫尼將殉,請以王所製八補黃袍、大東珠素珠、黑貂褂置棺內。

王在時,欲以兩固山駐永平,謀篡大位。

固山額真譚泰亦言王納肅王福金,復令肅王子至第較射,何洛會以惡言詈之。

於是鄭親王濟爾哈朗、巽親王滿達海、端重親王博洛、敬謹親王尼堪及內大臣等疏言:

「昔太宗文皇帝龍馭上賓,諸王大臣共矢忠誠,翊戴皇上。

  方在沖年,令臣濟爾哈朗與睿親王多爾袞同輔政。

  逮後多爾袞獨擅威權,不令濟爾哈朗預政,遂以母弟多鐸為輔政叔王。

  背誓肆行,妄自尊大,自稱皇父攝政王。

  凡批票本章,一以皇父攝政王行之。

  儀仗、音樂、侍從、府第,僭擬至尊。

  擅稱太宗文皇帝序不當立,以挾制皇上。

  搆陷威逼,使肅親王不得其死,遂納其妃,且收其財產。

  更悖理入生母於太廟。

  僭妄不可枚舉。

  臣等從前畏威吞聲,今冒死奏聞,伏願重加處治。」

詔削爵,撤廟享,並罷孝烈武皇后諡號廟享,黜宗室,籍財產入官,多爾博歸宗。

十二年,吏科副理事官彭長庚、一等精奇尼哈番許爾安各疏頌王功,請復爵號,下王大臣議,長庚、爾安坐論死,詔流寧古塔。

왕(王)이 무자(無子)하였는데, 예친왕(豫親王)의 아들 다이박(多爾博)으로써 후계(後)로 삼아,

친왕(親王)을 습(襲)하였고, 봉시(俸視/녹읍)는 제왕(諸王)의 삼배(三倍)였고,

조(詔)하여 호위(護衛) 80원(員)을 유(留)하게 하였다.

또 왕(王)의 근시(近侍) 소극살합(蘇克薩哈)과 첨대(詹岱)를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삼았다.

2월에, 소극살합(蘇克薩哈)과 첨대(詹岱)가 왕(王)의 훙시(薨時)를 알고(訐告/들추어 고함)하였고,

그 시녀(侍女) 오이고니(吳爾庫尼)를 장차(將) 순(殉)하였는데, 

청(請)하여 왕(王)이 소제(所製)한 팔보황포(八補黃袍), 대동주소주(大東珠素珠), 흑초괘(黑貂褂/검은 담비가죽 마고자)를 

관내(棺內)에 치(置)하였다.

왕(王)이 있을 때에, 양(兩) 고산(固山)으로써 영평(永平)에 주(駐)하여, 대위(大位)를 모찬(謀篡/찬탈을 꾀함)하고자 하였다.

고산액진(固山額真) 담태(譚泰) 역시(亦) 왕(王)이 숙왕(肅王)의 복김(福金)을 납(納)하였다 말하였고,

다시 숙왕(肅王) 아들로 하여금 지제(至第/궁궐)에서 교사(較射/활쏘기 대회)하도록 하여,

하락회(何洛會)가 악언(惡言)으로써 리(詈/매도함)하였다 하였다.

이에 정친왕(鄭親王) 제이합랑(濟爾哈朗)과 손친왕(巽親王) 만달해(滿達海), 단중친왕(端重親王) 박락(博洛), 

경근친왕(敬謹親王) 니감(尼堪)과 더불어 내대신(內大臣) 등(等)이 소언(疏言)하길

「옛날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의 용어(龍馭/천자의 거가)가 상빈(上賓/하늘의 손님이 됨, 승하)하자,

  여러 왕(王)과 대신(大臣)은 충성(忠誠)을 공시(共矢/함께 맹세함)하여,

  황상(皇上)을 익대(翊戴/정성을 다하여 윗사람으로 떠받듦)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충년(沖年)에 있으니, 신(臣) 제이합랑(濟爾哈朗)으로 하여금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과 함께 같이 

  보정(輔政)하게 하였나이다.

  체후(逮後) 다이곤(多爾袞)은 위권(威權/권세)을 독천(獨擅)하고, 제이합랑(濟爾哈朗)으로 하여금 

  예정(預政)하지 못하게 하였고, 마침내 모제(母弟) 다탁(多鐸)을 보정숙왕(輔政叔王)으로 삼았나이다.

  배서(背誓)하고 사행(肆行)하였고, 망자존대(妄自尊大/망령되이 자기만 잘났다고 남을 업신여김)하였고,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을 자칭(自稱)하였나이다.

  무릇 본장(本章/상소문의 중요한 항목)를 비표(批票/평하여 표시함)하자면, 

  황부(皇父) 섭정왕(攝政王)으로써 행(行)한 것이 일(一)입니다.

  의장(儀仗), 음악(音樂), 시종(侍從), 부제(府第)는 지존(至尊)을 참의(僭擬)하였나이다.

  천칭(擅稱)하길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께서 부당(不當)하게 위(立)하였다 서(序/서술함)하였고,

  이로써 황상(皇上)을 협제(挾制/억누름)하였나이다.

  구함(搆陷/모함하여 얽어 만듦)하고 위핍(威逼/위협)하여 숙친왕(肅親王)으로 하여금 부득이 죽게 하였고,

  마침내 그 비(妃)를 납(納)하였으며, 또한 그 재산(財產)을 수(收)하였나이다.

  다시 패리(悖理/도리나 이치에 어긋남)하여 태묘(太廟)에 생모(生母)를 입(入)하였나이다.

  참망(僭妄/참람되고 망령됨)이 매거(枚舉/낱낱이 들추어 냄)함은 불가(不可)하나이다.

  신등(臣等)은 종전(從前)까지 외위(畏威/위엄을 두려워함)하고 탄성(吞聲/소리를 삼킴)하였는데,

  지금(今) 모사(冒死)하여 주문(奏聞)하니, 복원(伏願)컨대 처치(處治)를 중가(重加)하소서!」

조(詔)하여 삭작(削爵)하고, 묘향(廟享)을 철(撤)하였고,

아울러 효열무황후(孝烈武皇后)의 시호(諡號)와 묘향(廟享)을 파(罷)하였고,

종실(宗室)을 출(黜)하였으며, 재산(財產)을 적몰(籍)하여 입관(入官)하였고, 

다이박(多爾博)은 귀종(歸宗/양자 갔던 사람을 본가로 돌려보냄)하였다.

[순치] 12년에, 이과부리사관(吏科副理事官) 팽장경(彭長庚), 일등정기니합번(一等精奇尼哈番) 허이안(許爾安)이 

각각(各) 왕(王)의 공(功)을 소송(疏頌/상소를 올려 칭송함)하여,

작호(爵號)를 청복(請復)하니, 왕(王)과 대신(大臣)의 의(議)를 하(下)하여,

팽장경(長庚)과 허이안(爾安)을 좌(坐)하고 논사(論死)하였고, 조(詔)하여 영고탑(寧古塔)에 유(流)하였다.


왕은 아들이 없었는데 예친왕 도도의 아들 도르보를 후계로 삼아 친왕을 세습하였고 녹읍은 여러 왕의 3배였다.

조서를 내려 호위 80명을 남기게 하였다.

또 왕의 근시 숰사하와 첨대를 의정대신으로 삼았다.

2월에 숰사하와 첨대가 왕이 훙할 때의 일을 들추어 고하였는데 

그 시녀 오이고니를 장차 순장할 때에 청하여 왕이 만든 팔보황보, 대동주소주, 흑초쾌를 관 안에 두게 하였고,

왕이 있을 때에 2기를 영평에 주둔하여 대위를 찬탈하고자 하였다고 하였다.

구사어전 탄타이 또한 왕이 숙왕 호오거의 푸진을 거둬들였다 말하고

다시 숙왕 호오거의 아들로 하여금 궁궐에서 활을 쏘게 하고 이를 하락회가 나쁘게 말하고 매도하였다 하였다.

이에 정친왕(우전 친왕) 지르가랑과 손친왕 만다하이, 단중친왕 보로, 경근친왕 니칸과 더불어 내대신들이 상소하여 말하길

   <예전 태종 문황제의 거가가 하늘의 손님이 되자 여러 왕과 대신은 충성을 함께 맹세하여 

    황상을 충심으로 모시기로 하였나이다.

    바야흐로 상께서 어리시니 신 지르가랑으로 하여금 예친왕(머르건 친왕) 도르곤과 함께 같이 보정하게 하였나이다.

    그후 도르곤은 권력을 홀로 제멋대로 흔들고 지르가랑으로 하여금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복형제 도도를 보정숙왕으로 삼았나이다.

    맹세를 어기고 멋대로 행동하였으며 망령되이 스스로를 존대하였고 황부 섭정왕을 자칭하였나이다.

    무릇 상소문의 가장 중요한 항목을 꼽아보자면 제1은 황부 섭정왕을 행한 것이옵나이다.

    또 의장, 음악, 시종, 부와 저택은 지존을 참람되이 모방하였나이다.

    멋대로 칭하길 태종 문황제께옵서 부당하게 즉위하셨다 서술하였고 이로써 황상을 압박하였나이다.

    모함하고 위협하여 숙친왕 호오거를 부득이하게 죽게 만들었고 마침내 그 비를 거둬들였으며 

    또한 그 재산을 몰수하였나이다.

    다시 패역하게 태묘에 생모를 들였나이다.

    참람되고 망령됨을 낱낱이 들추어 내자면 이루 말할 수가 없나이다.

    신들은 지금까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소리를 삼켰으나

    지금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오니 바라옵건대 중한 처벌을 내리소서!>

조서를 내려 작위를 삭탈하고 묘향을 철거하였으며 아울러 효열무황후(孝烈武皇后)의 시호와 묘향을 멈추게 하였고

종실에서 파내었으며 재산을 몰수하여 관으로 들였고 도르보는 본가로 돌려보냈다.

1655년에 이과부리사관 팽장경, 일등정기니합번(1등 징키니 하판) 허이안이 각각 왕의 공을 상소를 올려 칭송하여

작호를 회복해달라 청하니 왕과 대신이 의논을 내려 팽장경과 허이안를 논죄하여 사형에 처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닝구타(영고탑)에 유배하였다.


요약.

황제를 넘보는 권세를 자랑한 도르곤이 돌연사하자 순치제는 도르곤을 황제로 추존한다.

그러나 도르곤이 죽고 2달이 지나자 도르곤의 최측근이었던 숰사하와 첨대가 도르곤의 죄를 고발한다.

바로 도르곤이 2기를 동원하여 제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순치제를 옹립했던 탄타이 또한 도르곤이 호오거의 부인을 푸진으로 삼고

호오거의 아들을 일부러 궁에서 활을 쏘게 하고 죽일죄라고 욕을 하게 하였다며 도르곤을 비판하였다.

여기에 보정대신에 해임되었던 지르가랑도 내대신들을 대동하고 순치제에게 상소를 올려

도르곤이 자신을 해임하고 국정을 독단했다고 비판하며

스스로 황부 섭정왕을 칭하고 황제와 같은 의장과 저택을 꾸몄으며

태종의 즉위가 부당했다 말하였고 순치제를 압박하여 호오거를 죽였으며 그 부인을 거두고 재산을 몰수하였고,

그 모친 우라 아바하이를 감히 누르하치의 태묘에 합장하였다 강도높게 비판한다.

이에 순치제는 곧장 도르곤의 작위를 삭탈하고 종실에서 추방했으며 재산을 모조리 몰수한다.

5년 후 팽장경, 허이안이 도르곤에게 공이 있었으니 작위를 회복해 달라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일설에는 도르곤의 시신이 부관참시되었다고 하나 청과 조선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는 와전된 것으로

도르곤의 무덤에서 부장되었던 금은의 그릇이 파내어지고 질그릇으로 대체되어 묻혔다.

또한 이후 건륭제 때까지 무덤은 방치되어 풀이 무성하였다고 한다.



<도르곤 사후 반란죄 관련 조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효종 2년 1651년 2월 18일 기사中

이시방과 정유성이 섭정왕의 왕위 찬탈 음모와 의순 공주의 거취를 알리다

-“신들이 정명수(鄭命壽)에게 묻기를 (중략)

또 비밀히 말하기를 ‘섭정왕이 살았을 때 은밀히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뜻을 품고 황포(黃袍)를 미리 준비하여 반역의 형상이 

이미 드러난 데다가 또 그 사실을 고한 자가 있어서 청주가 크게 노하여 존호를 삭탈하고 태묘에서 축출하였으며 

그 가산(家産)을 관아에 적몰하고 그 여인들은 제왕(諸王)에게 나눠줬는데, 

의순 공주(義順公主)도 백양왕(百陽王)의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51년 3월 2일 기사中

진향사 유정량 등이 우가장에 도착하여 섭정왕의 모역 사건을 알리다

-“섭정왕이 모역으로 태묘(太廟)에서 축출된 것은 정명수가 말한 그대로이며 

섭정왕의 장지(葬地)에 묻은 금은(金銀)의 기물 등을 파내고 질그릇으로 대체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승지를 불러 이르기를,

“저쪽 나라가 섭정왕에 대하여 이미 모역으로 단죄하였으니 그 초상을 위해 진향(進香)하는 행차를 어찌 그대로 보낼 수 있는가.”

하니, 승지들이 급히 비국으로 하여금 사신에게 통보하여 행차를 중지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51년 3월 17일 기사中

청사를 인정전에서 접견하고 섭정왕의 모반 내용이 있는 칙서를 받다

상이 서교에 행행하여 칙사를 마중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칙서는 다음과 같다.

“정친왕(鄭親王)ㆍ손친왕(巽親王)ㆍ단중친왕(端重親王)ㆍ경근친왕(敬謹親王)이 시위 대신(侍衛大臣)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아뢰기를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승하하셨을 때 제왕(諸王)ㆍ패륵(貝勒)ㆍ대신(大臣) 등이 한 마음으로 나라를 굳게 

지키자고 목숨을 걸어 명세하고 황상을 붙들어 세웠습니다. 그 당시 신들은 모두 섭정왕을 세우려고 한 의논은 없었고 오직 

그의 아우 예군왕(豫郡王)이 선동하여 권해 올렸습니다. 그때는 황상께서 아직 어리셨기 때문에 일찍이 국정을 

그와 정친왕(鄭親王)에게 맡겨 함께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그뒤에 혼자서 권력을 독차지하여 정친왕은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고 마침내 자기의 친아우 예군왕으로 보정(輔政)을 삼았습니다. 숙왕(叔王)으로서 맹세를 어기고 권력을 자행하며 

스스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 부르면서 황상을 붙들어 세운 공을 전부 자기의 공으로 삼는가 하면, 또 태종문황제께서 

평소에 은혜로 보살핀 제왕(諸王)ㆍ대신(大臣)ㆍ관병(官兵) 들이 우리 황상을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성을 공격하고 적을 깨뜨려 적구(賊寇)를 초멸한 공을 조정에 돌리지 않고 전부 자기의 공으로 삼았습니다. 

그 의장(儀仗)ㆍ음악ㆍ시위(侍衛)하는 사람을 다 황상과 똑같이 하고 저택을 만든 것도 황상의 궁전과 다름이 없었으며, 

관아 창고의 재물을 제 마음대로 소비하여 나라에서 짠 비단과 은냥(銀兩) 등 보물을 황상에게 주지 않고 

그가 임의대로 썼습니다.

또 황상(皇上)의 시신(侍臣)인 의이등(宜而登)ㆍ진태(陳泰) 일족 및 우록(牛彔)에 소속한 강림(剛林) 일족, 파이달칠(把爾達七) 

일족을 전부 자기의 기(旗) 아래로 거두어 들였으며, 

또 황궁(皇宮)의 원내(院內)로 직접 가서 ‘태종문황제의 자리는 원래 찬탈하여 들어선 것이다.’라는 말로 황상의 시신들을 

을러대고 억눌렀습니다. 또 결점을 꼬치꼬치 찾아내어 숙친왕(肅親王)을 몰아서 죽이고 또 그의 비(妃)를 차지하였는가 하면, 

관병(官兵)의 호구(戶口)와 재산 등을 이미 황상께 주었다가 도로 회수하여 스스로 제몸을 풍부하게 하였습니다. 

또 황상의 시신 액이극알청(厄而克歹靑)을 자기편으로 돌리기 위하여 오배(吳拜)ㆍ노십(勞什)ㆍ강림(剛林)ㆍ기충격(祈充格)을 

그에게 보내 후작(侯爵)으로 봉했다가 알청이 자기를 따르지 않자 다시 후작의 봉호를 파기하였습니다. 또 노십(勞什)을 보내 

황상의 시신 십락복고(什諾卜庫)에게 말을 전하고 꾀이기를 ‘나는 너를 몹시 아끼는데 너는 알고 있는가?’ 하여 일체의 

정사(政事)와 비표(批票)를 쓰지 않고 일률적으로 황부섭정왕지(皇父攝政王旨)를 썼는가 하면, 또 도리를 거스르고 

생모(生母)를 태묘(太廟)에 들여넣었습니다.

대체로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관직에 적합하지 않은 자라도 턱없이 올려주고 그의 마음에 맞지 않은 자는 턱없이 강등시키며, 

또 그의 아내를 스스로 추봉(追封)하였습니다. 또 제왕ㆍ패륵(貝勒)ㆍ패자(貝子)ㆍ공(公) 등에게 황상을 사후(伺候)하지 

못하게 하고 마침내 조정을 자기가 차지하여 그들로 하여금 매일 자기의 관아 앞에서 사후하게 하였습니다. 

어제는 그의 근시(近侍) 액극심(額克沁)ㆍ오배(吳拜)ㆍ속배(速拜)ㆍ노십(勞什)ㆍ발라회(鉢羅會)가 망왕(亡王)의 

유지(遺旨)라고 하며 국정을 어지럽히려다가 단중친왕(端重親王)ㆍ경근친왕(敬謹親王) 및 시위 대신들의 공동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십과 발라회는 법에 따라 처결하고 액극심ㆍ오배ㆍ속배는 무겁게 치죄하였는데, 

이러한 일로 생각해 볼 때 분명히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신들은 모두 그 세력이 두려워 소리를 삼키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나 이와 같은 실상은 황상께서 모르시기 때문에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제 그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태묘에 부향(祔享)하였는데 이러한 일체 어긋나고 잘못된 일들은 다 신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순종한 까닭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황상께서는 무겁게 처치하여 그들 모자(母子)의 

묘향(廟享)을 파기하소서.’ 하였다.

짐은 그에 따라 조정에 있는 대신에게 명하여 자세히 회의하게 하였는데 모든 사람의 말이 다 같았다. 

반복하여 생각해 볼 때 제왕과 대신들이 어찌 헛소리를 하겠는가. 그런데 뜻밖에 그의 근시 

소사합점대목궤륵(蘇沙哈占代木几勒)이 자수하기를 ‘주인이 비밀히 황제의 의복을 만들고 황제가 쓰는 주옥 등 보물을 

숨겨 두었으며, 일찍이 하라회(何羅會)ㆍ오배(吳拜)ㆍ속배(速拜)ㆍ노십(勞什)ㆍ발라회(鉢羅會)에게 상의하고

 황상을 배반하기 위해 그가 관장하는 두 고산(固山)을 영평부(永平府)로 이주시켰습니다.’ 하고, 

또 자수하기를 ‘하라회가 일찍이 옛 주인 숙친왕(肅親王)의 아들을 만나 「마땅히 죽일 놈」이라는 등의 말로 욕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짐은 그 말을 듣고서 즉시 제왕ㆍ대신으로 하여금 상세히 심문하게 하였더니 하나하나가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에 

하라회를 법에 따라 처하였다.

이와 같은 사적을 근거로 볼 때 찬탈을 모의한 일은 과연 진실이었으므로 삼가 이를 천지ㆍ종묘ㆍ사직에 고하고 그들 모자와 

아내에 대한 추봉(追封)을 파기하고 묘향(廟享)을 철회하며 그에 따른 은사(恩赦)를 중지한다. 

이상의 일을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들어 알도록 하노라.”


<도르곤에게 시집갔던 조선 의순공주>

조선왕조실록 1662년 8월 14일 기사中

상이 정원에게 하교하여 금림군의 딸의 초상에 쓸 물품을 넉넉히 주도록 하다

-대개 효종조에 청국(淸國)의 구왕(九王)이 우리 나라와 혼인하려고 하여 사신을 보내 공주를 요구하였다. 

효종이 그 요청을 어기기 어려워 종실인 금림군 이개윤(李愷胤)의 딸을 의순 공주(義順公主)라 하여 구왕에게 보내었다. 

구왕이 죽자 대신 다른 친왕(親王)에게 보내졌는데, 친왕이 또 죽어버렸다. 개윤이 마침 봉명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정문(呈文)하여 돌려줄 것을 청하니, 청인이 허락하여 보내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사하니, 

상이 불쌍히 여겨 이런 명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1672년 12월 25일 기사中

이때 큰 화란이 터지려 하여 나라 안이 흉흉하자, 이에 개윤의 딸을 의순 공주(義順公主)로 봉하여 보냈는바, 

구왕(九王)이 【 즉 섭정왕(攝政王)이다.】 6만의 무리를 데리고 요동 접계(接界)에 나와 아내를 삼았다. 

이때부터 개윤이 누차 사명(使命)을 받들어 연경(燕京)에 들어갔고, 

구왕이 죽은 뒤 청국(淸國)이 그를 역률(逆律)로 논죄하니, 공주 또한 몰입(沒入)되어 번왕(藩王)에게 재가(再嫁)하였는데, 

번왕이 죽자 공주가 본국에 돌아가게 해주기를 간청하였고, 돌아온 뒤 종신토록 녹을 지급하였는데, 

이때 와서 개윤이 졸한 것이다. 상이 특별히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1650년 3월 도르곤과 결혼하기 위해 청나라게 갔다가 12월 남편 도르곤 사망, 일가 멸망.

황족이던 보로(甫老)에게 재가. 보로 또한 얼마 안 있어 사망.

1656년 이개윤이 청나라에 갔다가 딸을 보고 불쌍하여 청국에 보내달라 애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6년만에 사망함.


-17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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