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청나라의 입관을 성공시킨 섭정왕 도르곤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3부-4차 북경포위전(산해관 따위!!!)
4부-명나라 마지막 야전! 송금지전!
12부-어찌 너희를 도륙하겠는가? 이미 100만냥을 풀었노라!
<인물 열전>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 후르한, 푸차 군다이
잉굴다이, 어르더니 밬시, 양구리, 보르진, 특금, 마심, 캉카라
한세충, 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 고구, 송강, 장방창, 황잠선, 묘부(유정언), 진회
송서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18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
청사고 다이곤(多爾袞) 열전
乾隆三十八年,高宗詔曰:
「睿親王多爾袞攝政有年,威福自專,歿後其屬人首告,定罪除封。
第念定鼎之初,王實統眾入關,肅清京輦,檄定中原,前勞未可盡泯。
今其後嗣廢絕,塋域榛蕪,殊堪憫惻。
交內務府派員繕葺,並令近支王公以時祭掃。」
四十三年正月,又詔曰:
「睿親王多爾袞掃蕩賊氛,肅清宮禁。
分遣諸王,追殲流寇,撫定疆陲。
創制規模,皆所經畫。
尋奉世祖車駕入都,成一統之業,厥功最著。
歿後為蘇克薩哈所搆,首告誣以謀逆。
其時世祖尚在沖齡,未嘗親政,經諸王定罪除封。
朕念王果萌異志,兵權在握,何事不可為?
乃不於彼時因利乘便,直至身後始以歛服僭用龍袞,證為覬覦,有是理乎?
實錄載:
『王集諸王大臣,遣人傳語曰:
「今觀諸王大臣但知媚予,鮮能尊上,予豈能容此?
昔太宗升遐,嗣君未立,英王、豫王跪請予即尊,予曰:
『若果如此言,予即當自刎。』
誓死不從,遂奉今上即位。
似此危疑之日,以予為君,予尚不可;
今乃不敬上而媚予,予何能容?
自今後有忠於上者,予用之愛之;
其不忠於上者,雖媚予,予不爾宥。」
且云:
「太宗恩育予躬,所以特異於諸子弟者,蓋深信諸子弟之成立,惟予能成立之。」』
朕每覽實錄至此,未嘗不為之墮淚。
則王之立心行事,實為篤忠藎,感厚恩,明君臣大義。
乃由宵小奸謀,搆成冤獄,豈可不為之昭雪?
宜復還睿親王封號,追諡曰忠,配享太廟。
依親王園寢制,修其塋墓,令太常寺春秋致祭。
其爵世襲罔替。」
多爾博歸宗封貝勒,命仍還為王後,以其五世孫輔國公淳穎襲爵。
四世祖鎮國公蘇爾發、曾祖輔國公塞勒、祖輔國恪勤公功宜布先已進封信郡王,至是與淳穎父信恪郡王如松並追封睿親王。
嘉慶五年,淳穎薨。
諡曰恭。
子寶恩,襲。
七年五月,薨,諡曰慎。
弟瑞恩,襲。
道光六年,薨,諡曰勤。
子仁壽,襲。
道光九年,上巡盛京謁陵,追念忠王,推恩賜三眼花翎。
同治三年,薨,諡曰僖。
子德長,襲。
光緒二年,薨,諡曰慤。
子魁斌,襲。
건륭(乾隆/청 6대 황제 고종의 #1연호) 38년에, 고종(高宗)이 조(詔)하여 말하길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의 섭정(攝政) 유년(有年)에, 위복(威福/위압과 복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킴)하고
자전(自專/멋대로 결정하여 처리함)하였고, 몰후(歿後/죽은 후)에 그 속인(屬人)이 수고(首告/먼저 고함)하였고,
정죄(定罪)하여 제봉(除封)하였다.
다만 정정(定鼎/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함)의 초(初)를 념(念)하면,
왕(王)이 실로(實) 통중(統眾)하여 입관(入關)하였고, 경련(京輦/서울)을 숙청(肅清/어지러운 상태를 바로잡음)하였고,
중원(中原)을 격정(檄定/빠르게 평정함)하였으니, 전로(前勞)가 진민(盡泯/모두 망함)할 수는 없다.
지금(今) 그 후사(後嗣)가 폐절(廢絕)하였고, 영역(塋域/산소)가 진무(榛蕪/풀이 무성함)하니,
수감(殊堪/견디기가 힘듦)하고 민측(憫惻/불쌍하고 측은함)하다.
내무부(內務府)는 교(交)하여 파원(派員)하고 선즙(繕葺/보수)하고,
아울러 근지(近支/가까운 동족) 왕공(王公)으로 하여금 때마다 제소(祭掃/벌초하고 제사 지냄)하게 하라!」
[건륭] 43년 정월에, 또 조(詔)하여 말하길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은 적분(賊氛/도적과 재앙)을 소탕(掃蕩)하였고, 궁금(宮禁/궁궐)을 숙청(肅清)하였다.
제왕(諸王)을 분견(分遣)하여, 유구(流寇)를 추섬(追殲)하여, 강수(疆陲/변방)를 무정(撫定/안무하고 안정시킴)하였다.
규모(規模/규범)를 창제(創制)하였고, 모든 곳을 경화(經畫/경계를 구분함)하였다.
잇달아 세조(世祖)의 차가(車駕)를 봉(奉)하여 입도(入都)하여, 일통지업(一統之業)을 성(成)하여,
그 공(功)이 최저(最著/으뜸으로 나타남)하였다.
몰후(歿後/죽은 뒤)에 소극살합(蘇克薩哈)가 소구(所搆/일을 엮음)하여, 수고(首告)하여 모역(謀逆)으로써 무(誣/모함)하였다.
그 때 세조(世祖)가 또한 충령(沖齡/나이가 어림)하시어, 친정(親政)을 미상(未嘗)하시었고,
제왕(諸王)을 경(經)하여 정죄(定罪)하고 제봉(除封)하였다.
짐(朕)이 염(念)하니 왕(王)이 과연(果) 이지(異志/딴 마음)를 몽(萌/있음, 시작됨)하였다면,
병권(兵權)이 재악(在握/손아귀에 쥠)하였는데, 하사(何事)가 불가(不可)하였겠는가?
이에 인리승편(因利乘便/이로움으로 인하여 형세를 탐)한 저때에 하지 않고,
신후(身後/사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참용(僭用/참람하게 사용함)하게 용곤(龍袞/천자의 옷)을 복(服)하길 탐(歛)하였고,
기유(覬覦/야심을 가지고 기회를 엿봄)하였다는 증(證)이라 하니, 이것이 이치(理)에 맞겠느냐?
실록(實錄)에 재(載)하길
『왕(王)이 제왕(諸王)과 대신(大臣)을 집(集)하여, 견인(遣人)하고 전언(傳語)하여 말하길
「지금(今) 여러 왕(王)과 대신(大臣)을 관(觀)하니, 단지(但) 나에게 미(媚/아첨)할 줄만 알지,
거의 존상(尊上)하지 않으니, 내가 어찌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
옛 태종(太宗)께서 승하(升遐)하시고, 사군(嗣君/후사)이 미립(未立)하였고,
영왕(英王)과 예왕(豫王)이 나의 즉존(即尊)을 궤청(跪請)하였는데,
내가 말하길
『만약(若) 과연 이말과 같다면, 나는 곧 마땅히 자문(自刎/자결)할 것이다!』하여
서사(誓死)하고 부종(不從)하였고, 마침내 금상(今上)의 즉위(即位)를 봉(奉)하였다.
이 위의(危疑/의심이 나서 마음이 불안함)의 날과 사(似/같음, 닮음)하여, 나로써 군(君)으로 삼고자 하니,
내가 더욱이 불가(不可)하다.
지금(今) 곧 상(上)을 불경(不敬/공경하지 않음)하고 나에게 미(媚)하니, 내가 어찌 얼굴을 들수 있겠느냐?
금후(今後)으로부터 상(上)께 유충(有忠)한 자(者)는, 내가 용(用)하고 애(愛)하겠노라!
그 상(上)께 불충(不忠)한 자(者)는, 비록 나에게 미(媚)하여도, 내가 너희를 유(宥/용서함)하지 않겠노라!」
또한 말하길
「태종(太宗)께옵서 여궁(予躬/나 자신)을 은육(恩育/은혜로 보육함)하였고,
여러 자제(子弟)인 자(者)들보다 특이(特異/특별히 우대함)한 까닭으로,
대개 심신(深信/깊이 믿음)한 여러 자제(子弟)가 성립(成立)할 수 있었음에도, 오직 나를 성립(成立)하셨다!」하였다.
짐(朕)이 매번(每) 이에 이르러 실록(實錄)을 관(覽)하면, 미상불(未嘗不/아닌게 아니라 과연) 타루(墮淚/눈물을 흘림)한다.
즉 왕(王)의 입심(立心)과 행사(行事)는 실(實)은 충신(忠藎/나라 일에 충성을 다함)을 독(篤/도타움)한 것이고,
후은(厚恩)에 감(感)하여,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명(明)한 것이다.
이에 소소(宵小/소인배)가 간모(奸謀/간사한 모략)로 유(由)하여, 원옥(冤獄/원통하게 옥에 갖힘)을 구성(搆成)하였으니,
어찌 소설(昭雪/누명을 벗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마땅히 예친왕(睿親王)의 봉호(封號)를 복환(復還)하고, 추시(追諡)하여 충(忠)이라 말하고,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라!
친왕(親王)의 원침제(園寢制/능침에 관한 제도)에 의(依)하여, 그 영묘(塋墓/묘지)를 수(修)하고,
태상사(太常寺)로 하여금 춘추(春秋)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그 작(爵)의 세습(世襲)은 망체(罔替/불변)하노라!」
다이박(多爾博)은 귀종(歸宗)하여 패륵(貝勒)을 봉(封)하였고, 명(命)하여 이에 환(還)하여 왕후(王後)로 삼았으며,

요약.
1773년 건륭제는 도르곤 사후 120년만에 도르곤의 작위를 복권한다.
건륭제는 도르곤의 사후 황위 찬탈죄로 모함을 받았다며
도르곤은 순치제의 옹립에 공이 있었고 또한 입관하여 중원을 평정하였다며
도르곤이 찬탈할 마음이 있었다면 생전에 충분히 가능했으나 실행치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아부하는 신하들에게 순치제를 뵐 낫이 없다며
순치제에게 충성하라 말한 구절을 들며 소인배들의 모함에 빠진 것이라 말한다.
또한 도르곤은 이복 형이던 태종 홍 타이지가 자신을 친왕에 임명한 것을
늘 고맙게 생각하였다며 도르곤이 태종의 즉위가 부당하였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을 일축한다.
실제 만문노당을 살펴보면 홍 타이지는 어린 동생 도르곤을 친자식처럼 대하였고
어린 도르곤이 전장에 나갔다 위험에 빠졌다 돌아오자 눈문을 흘리며
만약 도르곤에게 자그만한 상처라도 입었다면 휘하 장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고 말한 구절도 있다.
홍 타이지가 이복 동생들 중 도르곤을 유독 아낀 것은 사실이다.
건륭제는 도르곤의 친왕의 작위를 복원하고 무덤을 손질하였으며
도르곤이 생전에 양자로 들였던 친조카 도르보를 다시 버이러에 추봉하고 그 후손들로 하여금 도르곤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건륭제는 도르곤이 태종 홍 타이지의 은혜에 감복한 대목이 실린 실록을 보다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끝-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