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도르곤 열전 17부-머르건 친왕은 죄가 없노라! 복권(연재 종료)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청나라의 입관을 성공시킨 섭정왕 도르곤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소년 대장 전사(다이칭)가 되다!

2부-옥새 획득, 칭왕, 병자호란 참전!

3부-4차 북경포위전(산해관 따위!!!)
4부-명나라 마지막 야전! 송금지전!

5부-홍 타이지 급사! 피튀기는 권력 다툼!

6부-명나라 멸망! 산해관으로 진격!

7부-마침내 입관, 산해관 전투!

8부-여진족 430년 만에 자금성을 차지하다!

9부-신수도 북경(연경)! 치발령 연기!

10부-자칭 남명의 사가법에 보내노라!

11부-장강을 믿느냐? 채찍을 던져 강을 막겠노라!

12부-어찌 너희를 도륙하겠는가? 이미 100만냥을 풀었노라!

13부-만인지상! 사실상 황제!

14부-태종 장남 호오거를 죽이다!

15부-황부 섭정왕 39세에 죽다!(황제로 추존)

16부-죽자마자 역적이 되다!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송서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18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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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다이곤(多爾袞) 열전

乾隆三十八年,高宗詔曰:

「睿親王多爾袞攝政有年,威福自專,歿後其屬人首告,定罪除封。

  第念定鼎之初,王實統眾入關,肅清京輦,檄定中原,前勞未可盡泯。

  今其後嗣廢絕,塋域榛蕪,殊堪憫惻。

  交內務府派員繕葺,並令近支王公以時祭掃。」

四十三年正月,又詔曰:

「睿親王多爾袞掃蕩賊氛,肅清宮禁。

  分遣諸王,追殲流寇,撫定疆陲。

  創制規模,皆所經畫。

  尋奉世祖車駕入都,成一統之業,厥功最著。

  歿後為蘇克薩哈所搆,首告誣以謀逆。

  其時世祖尚在沖齡,未嘗親政,經諸王定罪除封。

  朕念王果萌異志,兵權在握,何事不可為?

  乃不於彼時因利乘便,直至身後始以歛服僭用龍袞,證為覬覦,有是理乎?

  實錄載:

  『王集諸王大臣,遣人傳語曰:

   「今觀諸王大臣但知媚予,鮮能尊上,予豈能容此?

     昔太宗升遐,嗣君未立,英王、豫王跪請予即尊,予曰:

    『若果如此言,予即當自刎。』

     誓死不從,遂奉今上即位。

     似此危疑之日,以予為君,予尚不可;

     今乃不敬上而媚予,予何能容?

     自今後有忠於上者,予用之愛之;

     其不忠於上者,雖媚予,予不爾宥。」

  且云:

 「太宗恩育予躬,所以特異於諸子弟者,蓋深信諸子弟之成立,惟予能成立之。」』

  朕每覽實錄至此,未嘗不為之墮淚。

  則王之立心行事,實為篤忠藎,感厚恩,明君臣大義。

  乃由宵小奸謀,搆成冤獄,豈可不為之昭雪?

  宜復還睿親王封號,追諡曰忠,配享太廟。

  依親王園寢制,修其塋墓,令太常寺春秋致祭。

  其爵世襲罔替。」

多爾博歸宗封貝勒,命仍還為王後,以其五世孫輔國公淳穎襲爵。

四世祖鎮國公蘇爾發、曾祖輔國公塞勒、祖輔國恪勤公功宜布先已進封信郡王,至是與淳穎父信恪郡王如松並追封睿親王。

嘉慶五年,淳穎薨。

諡曰恭。

子寶恩,襲。

七年五月,薨,諡曰慎。

弟瑞恩,襲。

道光六年,薨,諡曰勤。

子仁壽,襲。

道光九年,上巡盛京謁陵,追念忠王,推恩賜三眼花翎。

同治三年,薨,諡曰僖。

子德長,襲。

光緒二年,薨,諡曰慤。

子魁斌,襲。

건륭(乾隆/청 6대 황제 고종의 #1연호) 38년에, 고종(高宗)이 조(詔)하여 말하길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의 섭정(攝政) 유년(有年)에, 위복(威福/위압과 복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킴)하고 

  자전(自專/멋대로 결정하여 처리함)하였고, 몰후(歿後/죽은 후)에 그 속인(屬人)이 수고(首告/먼저 고함)하였고, 

  정죄(定罪)하여 제봉(除封)하였다.

  다만 정정(定鼎/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함)의 초(初)를 념(念)하면,

  왕(王)이 실로(實) 통중(統眾)하여 입관(入關)하였고, 경련(京輦/서울)을 숙청(肅清/어지러운 상태를 바로잡음)하였고,

  중원(中原)을 격정(檄定/빠르게 평정함)하였으니, 전로(前勞)가 진민(盡泯/모두 망함)할 수는 없다.

  지금(今) 그 후사(後嗣)가 폐절(廢絕)하였고, 영역(塋域/산소)가 진무(榛蕪/풀이 무성함)하니,

  수감(殊堪/견디기가 힘듦)하고 민측(憫惻/불쌍하고 측은함)하다.

  내무부(內務府)는 교(交)하여 파원(派員)하고 선즙(繕葺/보수)하고,

  아울러 근지(近支/가까운 동족) 왕공(王公)으로 하여금 때마다 제소(祭掃/벌초하고 제사 지냄)하게 하라!

[건륭] 43년 정월에, 또 조(詔)하여 말하길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은 적분(賊氛/도적과 재앙)을 소탕(掃蕩)하였고, 궁금(宮禁/궁궐)을 숙청(肅清)하였다.

  제왕(諸王)을 분견(分遣)하여, 유구(流寇)를 추섬(追殲)하여, 강수(疆陲/변방)를 무정(撫定/안무하고 안정시킴)하였다.

  규모(規模/규범)를 창제(創制)하였고, 모든 곳을 경화(經畫/경계를 구분함)하였다.

  잇달아 세조(世祖)의 차가(車駕)를 봉(奉)하여 입도(入都)하여, 일통지업(一統之業)을 성(成)하여, 

  그 공(功)이 최저(最著/으뜸으로 나타남)하였다.

  몰후(歿後/죽은 뒤)에 소극살합(蘇克薩哈)가 소구(所搆/일을 엮음)하여, 수고(首告)하여 모역(謀逆)으로써 무(誣/모함)하였다.

  그 때 세조(世祖)가 또한 충령(沖齡/나이가 어림)하시어, 친정(親政)을 미상(未嘗)하시었고,

  제왕(諸王)을 경(經)하여 정죄(定罪)하고 제봉(除封)하였다.

  짐(朕)이 염(念)하니 왕(王)이 과연(果) 이지(異志/딴 마음)를 몽(萌/있음, 시작됨)하였다면,

  병권(兵權)이 재악(在握/손아귀에 쥠)하였는데, 하사(何事)가 불가(不可)하였겠는가?

  이에 인리승편(因利乘便/이로움으로 인하여 형세를 탐)한 저때에 하지 않고,

  신후(身後/사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참용(僭用/참람하게 사용함)하게 용곤(龍袞/천자의 옷)을 복(服)하길 탐(歛)하였고, 

  기유(覬覦/야심을 가지고 기회를 엿봄)하였다는 증(證)이라 하니, 이것이 이치(理)에 맞겠느냐?

  실록(實錄)에 재(載)하길

  『왕(王)이 제왕(諸王)과 대신(大臣)을 집(集)하여, 견인(遣人)하고 전언(傳語)하여 말하길

    「지금(今) 여러 왕(王)과 대신(大臣)을 관(觀)하니, 단지(但) 나에게 미(媚/아첨)할 줄만 알지,

      거의 존상(尊上)하지 않으니, 내가 어찌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

      옛 태종(太宗)께서 승하(升遐)하시고, 사군(嗣君/후사)이 미립(未立)하였고,

      영왕(英王)과 예왕(豫王)이 나의 즉존(即尊)을 궤청(跪請)하였는데,

      내가 말하길

     『만약(若) 과연 이말과 같다면, 나는 곧 마땅히 자문(自刎/자결)할 것이다!』하여

      서사(誓死)하고 부종(不從)하였고, 마침내 금상(今上)의 즉위(即位)를 봉(奉)하였다.

      이 위의(危疑/의심이 나서 마음이 불안함)의 날과 사(似/같음, 닮음)하여, 나로써 군(君)으로 삼고자 하니,

      내가 더욱이 불가(不可)하다.

      지금(今) 곧 상(上)을 불경(不敬/공경하지 않음)하고 나에게 미(媚)하니, 내가 어찌 얼굴을 들수 있겠느냐?

      금후(今後)으로부터 상(上)께 유충(有忠)한 자(者)는, 내가 용(用)하고 애(愛)하겠노라!

      그 상(上)께 불충(不忠)한 자(者)는, 비록 나에게 미(媚)하여도, 내가 너희를 유(宥/용서함)하지 않겠노라!」

    또한 말하길

   「태종(太宗)께옵서 여궁(予躬/나 자신)을 은육(恩育/은혜로 보육함)하였고,

     여러 자제(子弟)인 자(者)들보다 특이(特異/특별히 우대함)한 까닭으로,

     대개 심신(深信/깊이 믿음)한 여러 자제(子弟)가 성립(成立)할 수 있었음에도, 오직 나를 성립(成立)하셨다!」하였다.

    짐(朕)이 매번(每) 이에 이르러 실록(實錄)을 관(覽)하면, 미상불(未嘗不/아닌게 아니라 과연) 타루(墮淚/눈물을 흘림)한다.

    즉 왕(王)의 입심(立心)과 행사(行事)는 실(實)은 충신(忠藎/나라 일에 충성을 다함)을 독(篤/도타움)한 것이고, 

    후은(厚恩)에 감(感)하여,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명(明)한 것이다.

    이에 소소(宵小/소인배)가 간모(奸謀/간사한 모략)로 유(由)하여, 원옥(冤獄/원통하게 옥에 갖힘)을 구성(搆成)하였으니,

    어찌 소설(昭雪/누명을 벗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마땅히 예친왕(睿親王)의 봉호(封號)를 복환(復還)하고, 추시(追諡)하여 충(忠)이라 말하고,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라!

    친왕(親王)의 원침제(園寢制/능침에 관한 제도)에 의(依)하여, 그 영묘(塋墓/묘지)를 수(修)하고,

    태상사(太常寺)로 하여금 춘추(春秋)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그 작(爵)의 세습(世襲)은 망체(罔替/불변)하노라!」

다이박(多爾博)은 귀종(歸宗)하여 패륵(貝勒)을 봉(封)하였고, 명(命)하여 이에 환(還)하여 왕후(王後)로 삼았으며,

그 5세손(世孫) 보국공(輔國公) 순영(淳穎)으로써 습작(襲爵)하게 하였다.
사세조(四世祖) 진국공(鎮國公) 소이발(蘇爾發)과 증조(曾祖) 보국공(輔國公) 새륵(塞勒),
조(祖) 보국가근공(輔國恪勤公) 공의포선(功宜布先)은 이미(已) 신군왕(信郡王)으로 진봉(進封)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순영(淳穎)의 부(父) 신각군왕(信恪郡王) 여송(如松)도 아울러 예친왕(睿親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가경(嘉慶/청 7대 황제 인종의 #1연호) 5년에, 순영(淳穎)이 훙(薨)하였는데, 시(諡)는 공(恭)이라 말하였고, 아들 인수(寶恩)가 습(襲)하였다.
[가경] 7년 5월에, 훙(薨)하니, 시(諡)는 신(慎)이라 말하였고, 제(弟) 서은(瑞恩)이 습(襲)하였다.
도광(道光/청 8대 황제 선종의 #1연호) 6년에, 훙(薨)하니, 시(諡)는 근(勤)이라 말하였고, 자(子) 인수(仁壽)가 습(襲)하였다.
도광(道光) 9년에, 상(上)이 성경(盛京)을 순(巡)하여 알릉(謁陵)하였는데, 염충왕(念忠王)을 추(追)하였고,
추은(推恩/은혜를 베풂)하여 삼안(三眼) 화령(花翎/청대 관모 뒤에 늘이는 공작 꼬리)을 사(賜)하였다.
동치(同治/청 10대 황제 목종의 #1연호) 3년에, 훙(薨)하였고, 시(諡)는 희(僖)라 말하였고, 자(子) 덕장(德長)이 습(襲)하였다.
광서(光緒/청 11대 황제 덕종의 #1연호) 2년에, 훙(薨)하였고, 시(諡)는 각(慤)이라 말하였고, 자(子) 괴빈(魁斌)이 습(襲)하였다.
 

1773년에 고종(건륭제)이 조서를 내려 말하길
   <예친왕(머르건 친왕) 도르곤이 섭정하던 당시에 위압과 복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고 멋대로 국사를 결정하고 처리하였는데,
    죽은 후에 그 휘하 사람들이 먼저 고하여 죄를 정하고 작위를 박탈하였다.
    다만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 초기를 생각하자면 왕이 실로 무리를 통솔하여 입관하였고
    북경의 어지러운 상황을 바로잡았으며 중원을 빠르게 평정하였으니 전의 공로가 모두 없어졌다 할 수는 없다.
    지금 그 후사가 끊기고 무덤에는 풀이 무성하니 견디기가 힘들고 불쌍하며 측은하다.
    내무부는 함께 인원을 파견하여 보수하고 아울러 가까운 혈족 왕공으로 하여금 때마다 벌초하고 제사 지내게 하라!>
1778년 1월에 또 조서를 내려 말하길
   <예친왕(머르건 친왕) 도르곤은 도적의 기운을 소탕하였고 궁궐을 청소하였다.
    여러 왕을 나누어 보내어 유구(이자성)를 추격하여 섬멸하게 하였고 변방을 안정시켰다.
    규범을 만들었으며 모든 곳의 경계를 구분하였다.
    잇달아 세조의 어가를 받들어 도읍으로 들어와 일통지업을 이뤘으니 그 공이 으뜸이다 할 것이노라!
    죽은 뒤에 숰사하가 일을 엮어 먼저 고발하여 역모로써 모함하였다.
    그 당시 세조(순치제)께서 또한 나이가 어리시어 미처 친정하지 못하시어 여러 왕을 통해 죄를 정하고 
    작위를 박탈하게 하였다.
    짐이 생각하니 왕이 과연 딴 마음이 있었다면 병권을 쥐고 있을 때 어찌 불가능하였겠는가?
    이에 유리한 그때에 하지 않고 죽은 뒤에 이르러 비로소 참람되게 곤룡포를 입기를 탐하고 
    야심을 가지고 기회를 엿본 증거라 하니 이것이 이치에 맞겠느냐?
    실록에 실리길
    [왕이 여러 왕과 대신을 소집하여 사람을 보내 전하여 말하길
    「지금 여러 왕과 대신을 보아하니 단지 나에게 아첨할 줄만 알지 거의 상을 높이질 않으니 내가 어찌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
      옛날 태종께서 승하하시고 후사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영왕 아지거와 예왕 도도는 나의 즉위를 무릎꿇고 청하였는데 
      내가 말하길
     『만약 과연 이런 말을 한다면 나는 곧 마땅히 자결할 것이다!』하여
      죽음을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고 마침내 금상의 즉위를 받들었다.
      그날과 같이 지금 나를 임금으로 삼고자 의심이 드니 내가 더욱이 불가하다.
      지금 이에 상을 공경하지 않고 나에게 아첨하니 내가 어찌 얼굴을 들수 있겠느냐?
      지금부터는 상께 충성하는 자는 내가 등용하고 사랑하겠노라!
      반면에 상께 불충하는 자는 비록 나에게 아첨하여도 그들을 용서치 않겠노라!」
     또한 말하길
    「태종께옵서 나를 은혜로써 길러 주시고 여러 아들과 동생보다 특별히 우대한 까닭으로
      대개 깊게 신뢰할 여러 아들과 동생들을 친왕으로 세울수 있었음에도 오직 나를 세우셨느리라!」
    짐이 매번 실록을 보다 여기에 이르면 아닌게 아니라 과연 눈물을 흘렸다.
    즉 왕이 마음을 세우고 일을 행한 것은 실은 충심이 두터운 것이였고, 
    후한 은혜에 감동하여 임금과 신하의 대의를 밝힌 것이었다.
    그런데도 소인배의 간사한 모략으로 인하여 원통하게 역모에 휘말렸으니 어찌 누명을 벗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마땅히 예친왕(머르건 친왕)의 봉호를 다시 회복하고 충(忠)이라 추시하며 태묘에 배향하라!
    친왕의 능침에 관한 제도에 의거하여 그 묘지를 수리하고 태상사로 하여금 봄 가을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며 
    그 작위의 세습은 불변하게 하라!>
도르보는 다시 종실로 들여 버이러에 봉하였고 명하여 돌아가 왕의 후사로 삼았으며 
그 5세손 보국공 순영으로 작위를 세습하게 하였다.
4세조 진국공 소이발과 증조 보국공 새륵, 조부 보국가근공 공의포선은 이미 신군왕으로 올려 봉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순영의 부친 신각군왕 여송도 아울러 예친왕(머르건 친왕)으로 추봉하였다.
1800년에 순영이 훙하였는데 시호는 공이라 하고 아들 인수가 세습하였다.
1802년 5월에 인수가 훙하니 시호는 신이라 하고 동생 서은이 세습하였다.
1826년에 서은이 훙하니 시호는 근이라 하고 아들 인수가 세습하였다.
1829년에 상이 성경을 순행하여 능을 알현하였는데 염충왕을 더하고 은혜를 베풀어 삼안화령을 하사하였다.
1864년에 인수가 훙하였고 시호는 희라 하고 아들 덕장이 세습하였다.
1876년에 덕장이 훙하였고 시호는 각이라 하고 아들 괴빈이 세습하였다.


요약.

1773년 건륭제는 도르곤 사후 120년만에 도르곤의 작위를 복권한다.

건륭제는 도르곤의 사후 황위 찬탈죄로 모함을 받았다며

도르곤은 순치제의 옹립에 공이 있었고 또한 입관하여 중원을 평정하였다며

도르곤이 찬탈할 마음이 있었다면 생전에 충분히 가능했으나 실행치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아부하는 신하들에게 순치제를 뵐 낫이 없다며

순치제에게 충성하라 말한 구절을 들며 소인배들의 모함에 빠진 것이라 말한다.

또한 도르곤은 이복 형이던 태종 홍 타이지가 자신을 친왕에 임명한 것

늘 고맙게 생각하였다며 도르곤이 태종의 즉위가 부당하였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을 일축한다.

실제 만문노당을 살펴보면 홍 타이지는 어린 동생 도르곤을 친자식처럼 대하였고

어린 도르곤이 전장에 나갔다 위험에 빠졌다 돌아오자 눈문을 흘리며 

만약 도르곤에게 자그만한 상처라도 입었다면 휘하 장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고 말한 구절도 있다.

홍 타이지가 이복 동생들 중 도르곤을 유독 아낀 것은 사실이다.

건륭제는 도르곤의 친왕의 작위를 복원하고 무덤을 손질하였으며

도르곤이 생전에 양자로 들였던 친조카 도르보를 다시 버이러에 추봉하고 그 후손들로 하여금 도르곤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건륭제는 도르곤이 태종 홍 타이지의 은혜에 감복한 대목이 실린 실록을 보다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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