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무황제 노아합기 국역 73부-누르하치<황명을 어찌 어기리오? 허나 내가 언제까지 참으리오?> 무황제실록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청 개국 후 태종 숭덕조 1636년에 편찬된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을 틈틈이 국역코자 합니다.
무황제실록은 강희제에 의해 다듬어지고 변경된 청실록 고황제실록의 원본으로
태조 누르하치의 일대기를 있는 그대로 투박하게 기록한 사서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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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年正月,蒙古廓兒沁部空戈落貝勒,送女與太祖為妃,迎接,設大宴,以禮受之。

三月二十八日寅時,天有黃色,人面映之皆黃,太祖升殿,至辰時方明。

四月,於城東阜上建佛寺、玉皇廟、十王殿,共七大廟,三年乃成。

是時,萬曆皇帝命廣寧總兵張承胤巡邊,承胤奉命巡邊回,遣通使董國胤曰:

「今欲更立石碑,以汝居處為吾地,其釵哈、法納哈、三七拉三處所種之田勿獲,可收汝人民退居。」

太祖日:

「吾世世祖居耕種之地,今令棄之,想爾心變,故出此言也。

吾聞古人云:

海水不溢,王心不變,帝今反常,護助夜黑,吾國所種之田,又不容收穫而令退居,吾豈敢違王命?

然不願治平,而頓起惡念,吾小國若受小害,汝大國自受大害矣。

吾非大國,欲退即退,試看汝大國何以收拾?若成仇敵,非吾一身之患,汝以兵眾國大欺凌我也。

然大國成小,小國成大,皆出於天,汝若一城屯兵一萬,城自煩擾,若止屯兵一千,城中軍民皆為吾俘物矣。」

通使董國胤曰:

「 此言太過矣」

,遂去.自此,大明遂侵佔疆土,立石碑於邊外甚多。

六月,初,夜黑布羊姑以妹許太祖,受其聘禮,又欲與蒙古胯兒胯部蟒孤兒太台吉乃八哈搭兒憨子也,諸王臣曰:

「聞夜黑將汗聘之女欲與蒙古,所可恨者莫過於是,當此未與之先,可速起兵,若已與之,乘未嫁時,攻其城而奪之。

況此女汗所聘者,非諸王可比,既聞之,安得坐視他適?」

皆力諫興兵不已。

太祖曰:

「或有大事可加兵於彼,以違婚之事興兵則不可。

蓋天生此女非無意也,因而壞哈達、輝發、兀喇,使各國不睦,干戈擾攘至此。

大明助夜黑,令其女不與我而與蒙古,是壞夜黑,釀大變,欲以此事激我忿怒,故如是也。

今儘力征之,雖得其女,諒不久而亡,反成災患。

無論與何人,亦不能久,啟釁壞國已極,死期將至矣。」

諸王臣反覆諫之,必欲興兵。

太祖曰:

「吾以怒而興師,汝等猶當諫之,況吾所聘之女為他人娶,豈有不恨之理,予尚棄其忿恨,置身局外以罷兵,

  汝等反苦為讎校,令吾怨怒何也?聘女者不恨,汝等深恨何為,豈因忿遂從汝等之言乎?汝等且止。」

言畢,令調到人馬皆回。

其女聘與蒙古未及一年果亡。

諸王臣奏曰:

「此女迄今三十三歲,已受聘二十年矣。

被大明遣兵為夜黑防禦,夜黑遂倚其勢,轉嫁與蒙古,今可侵大明。」

太祖不允曰:

「大明以兵衛夜黑,自有天鑒之,任彼悠久。

滿洲與夜黑均異國也,大明白以為君臨天下,是六合之主,何獨為吾一身之主?不審是非,恃勢橫加侵奪,如逆天然。

夜黑乃天不佑之國也,既遣兵為之衛,吾且聽之,汝等急何為也?若侵大明合乎天,天自佑之,天既佑,則可得矣。

但我國素無積儲,雖得人畜,何以為生,無論不足以養所得人畜,即本國之民且待斃矣。

及是時先治其國,固疆圉,修邊關,務農事,裕積貯。」

遂不動兵。

乃諭各牛祿,每十人出牛四隻,於曠野處屯田,造倉積糧。

於是設倉官十六員,吏八員,執掌出入。

을묘년(乙卯年/1615년) 정월(正月)에, 몽고(蒙古) 곽아심부(廓兒沁部) 공과락(空戈落) 패륵(貝勒)이

송녀(送女)하여 태조(太祖)와 더불어 혼인(妃)하게 하니, 영접(迎接)하여 대연(大宴)을 설(設)하였고,

예(禮)로써 수지(受之)하였다.

3월 28일 인시(寅時)에, 하늘에 황색(黃色) 있었고, 인(人)의 면영(面映/얼굴에 비침)이 모두 황(黃)이니,

태조(太祖)가 승전(升殿)하여, 진시(辰時)에 이르러 바야흐로 명(明)하였다.

4월에, 성(城) 동쪽(東) 부상(阜上/언덕 위)에 불사(佛寺)와 옥황묘(玉皇廟), 십왕전(十王殿) 등 

모두 합하여 7 대묘(大廟)를 건(建)하였고, 3년이 지나 성(成)하였다.

이때에, 만력황제(萬曆皇帝)가 광녕(廣寧) 총병(總兵) 장승윤(張承胤)에게 명(命)하여 순변(巡邊)하게 하였는데,

장승윤(承胤)이 봉명(奉命)하여 순변(巡邊)하고는 회(回)하여, 통사(通使) 동국윤(董國胤)을 보내 말하길

「지금(今) 석비(石碑)를 경립(更立)하고자 하여, 너의 거처(居處)로써 오지(吾地)로 할 것이니,

  그 채합(釵哈), 법납합(法納哈), 삼칠랍(三七拉) 3곳에 소종(所種)한 밭을 획(獲)하지 말라!

  너의 인민(人民)을 수(收)하여 퇴거(退居)함이 옳도다!」

태조(太祖)가 말하길

「우리가 세세(世世)로 조거(祖居/조상 대대로 삶)한 경종(耕種/농사 지음)한 땅인데,

  지금(今) 영(令)하여 탈지(棄之)하니, 생각건대 너는 심변(心變)하였고,

  이런 연고(故)로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내가 고인(古人)이 운(云)하는 것을 문(聞)하니,

  해수(海水)는 부일(不溢/넘치지 않음)하고, 왕심(王心)은 불변(不變)한다 하였는데,

  제(帝)가 지금(今) 반상(反常/이치에 어긋남)하여, 야흑(夜黑)을 호조(護助/원조)하고,

  오국(吾國)의 소종(所種)의 전(田)을 또 수확(收穫)을 불용(不容)하고 영(令)하여 퇴거(退居)하게 하니,

  내가 어찌 감히(敢) 왕명(王命)을 위(違)하리오?

  분명히 치평(治平/태평)을 불원(不願)하였고 갑자가 악념(惡念/악한 생각)을 기(起)하니,

  나의 소국(小國)이 만약(若) 소해(小害)을 수(受)한다면, 너의 대국(大國)은 스스로 대해(大害)를 수(受)할 뿐이니라!

  나는 대국(大國)이 아니니, 퇴(退)하고자 한다면 즉퇴(即退)하겠고,

  너의 대국(大國)이 어찌 수습(收拾)할 것이지 시간(試看/지켜봄)하겠소!

  만약(若) 구적(仇敵/원수)이 성(成)한다면, 나의 일신(一身)의 환(患)만이 아니며,

  너는 병중(兵眾)하고 국대(國大)하다 나를 기릉(欺凌/업신여김)하는 것이다!

  분명히 대국(大國)이 성소(成小)하든, 소국(小國)이 성대(成大)하든 모두 하늘에서 출(出)하는 것이니,

  너희가 만약(若) 일성(一城)에 병(兵) 1만(萬)을 둔(屯)한다면, 성(城)은 스스로 번요(煩擾/시끄러움)할 것이고,

  만약(若) 병(兵) 1천(千)을 둔(屯)함에 지(止)한다면, 성중(城中)의 군민(軍民)은 모두 나의 부물(俘物)이 될 것이오!」

통사(通使) 동국윤(董國胤)이 말하길

「이 말은 태과(太過/너무 지나침)하오!」

마침내 가버렸고, 이로부터 대명(大明)이 마침내 강토(疆土)를 침점(侵佔/침노하여 차지함)하였고,

변외(邊外)에 석비(石碑)를 입(立)함이 심다(甚多)하였다.


1615년 1월에 몽고 코르친부 콩고르 버이러가 딸을 보내 태조와 혼인하게 하니

영접하여 대연회를 베풀었고 예로써 받아들였다.

3월 28일 오전 3~5시에 하늘에 황색이 있었는데 사람의 얼굴로 비쳐 모두 황색이 되었는데

태조가 전각에 올라 오전 7~9시에 이르러 바야흐로 밝아졌다.

4월에 성 동쪽 언덕 위에 불사, 옥황묘, 십왕전 등 모두 합하여 7 대묘를 건설하였고 3년이 지나 완성되었다.

이때에 만력황제가 광녕 총병 장승윤에게 명하여 변경을 돌게 하였는데

장승윤이 명을 받들고 변경을 순행하여 돌아와서 통사 동국윤을 보내 말하길

「지금 석비를 다시 세우고자 하니 너희가 머무르는 땅을 우리의 땅으로 할 것이니,

  그 차이하, 파나하, 산차라 3곳에 파종한 밭을 수확하지 말라!

  너의 인민을 거둬 퇴거하는 것이 옳도다!」

태조가 말하길

「우리가 조상 대대로 농사지은 땅인데 지금 영을 내려 빼앗아 가려하니

  생각건대 너의 마음이 변하여 이런 연고로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내가 옛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바닷물은 넘치지 않고 왕의 마음은 불변한다!] 하였는데

  황제가 지금 비정상적으로 예허를 원조하고 우리나라의 파종한 밭의 수확을 용인하지 않고

  영을 내려 퇴거하게 하니 내가 어찌 감히 왕명을 어기리오?

  분명히 태평을 원하지 않고 갑자기 악한 생각을 일으키니

  나의 소국이 만약 작은 해를 받는다면 너의 대국은 스스로 큰 해를 받을 뿐이니라!

  나는 대국이 아니니 물러나라 한다면 즉시 물러날 것이니 너의 대국이 어찌 수습할 것이지 지켜보겠노라!

  만약 원수가 된다면 나의 일신만의 우환이 아닐 것이다!

  너의 병력이 많다! 나라가 크다 하여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분명히 대국이 작게 되든, 소국이 크게 되든 모두 하늘에서 내는 것이니,

  너희가 만약 한 성에 병력 1만을 주둔시킨다면 성은 스스로 번거롭고 요란하게 될 것이고

  만약 병력 1천을 주둔함에 그친다면 성안의 군민은 모두 나의 포로가 될 것이니라!」

통사 동국윤이 말하길

「이 말은 너무 지나치오!」

하고는 마침내 가버렸고, 이로부터 대명이 마침내 강토를 침노하여 차지하였고

변경 바깥에 석비를 심히 많이 세웠다.



요약.
1615년 1월 계속된 몽고 부족들과의 혼인 동맹에 이어 코르친 콩고르는 딸을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냈다.
한편 만력제의 누르하치 모욕은 계속되었는데 결정적인 토지 강탈사건이 1615년 4월에 벌어진다.
명나라는 국초 영락제 이후 요동과 여진 땅에 대한 경계를 세웠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요동과 여진 사이의 땅에는 수많은 여진족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만력제는 누르하치가 4~5만의 병력으로 여진 통합전을 가속화하자 이를 경계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예허를 원조하였고 더욱 강한 압박을 위해 광녕 총병 장승윤을 시켜 옛 문서를 토대로 국경선을 측량하였다.
이를 토대로 장승윤은 역관 동국윤을 보내 차이하, 파나하, 산차라는 본시 명나라의 영토라며 
이곳에 살고 있는 모든 여진족을 즉시 퇴거시키라 누르하치에게 명한다.
누르하치는 조상 대대로 농사짓고 살고 있던 땅에서 파종한 곡식도 수확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자
극도로 분노하여 대국 황제의 옹졸함을 비꼰다.
그러나 자신의 만주국은 소국이니 참겠다고 말하며 앞으로 명나라가 어찌할 것인지 지켜보겠노라 말한다.
만약 계속 자신을 업신여긴다면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으며
만주국이 피해를 입는다 하여도 대명국은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 말한다.
또한 요동 성마다 1만명씩 주둔시킨다면 그로 인해 혼란하게 될 것이고
1천명씩을 주둔시킨다면 모두 자신의 포로가 될것이라 호언장담한다.
이에 동국윤은 말이 불손하다며 화를 내며 가버렸고 누르하치는 3곳의 여진족을 즉각 퇴거시킨다.
명나라는 새롭게 획정한 국경선에 석비를 세워 명의 영토임을 분명히 한다.
이 토지 강탈 사건은 7대한(七大恨) 중 5번째에 해당된다.

-7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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