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도도 열전 3부-병자호란 광교산 전투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누르하치의 15남으로 입관을 성공시키고 양주에서 대학살극을 벌인 도도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산해관을 무시하고 북경을 포위하다!

2부-조선은 화친하였으니 침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18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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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다탁(多鐸)

崇德元年四月,封豫親王,掌禮部事。

從伐朝鮮,自沙河堡領兵千人繼噶布什賢兵,至朝鮮都城。

朝鮮全羅、忠清二道援兵至南漢山,多鐸擊敗之,收其馬千餘。

揚古利為殘兵所賊,捕得其人,斬以祭。

三年,伐錦州,自蒙古扎袞博倫界分率巴牙喇及土默特兵入明境,克大興堡,俘其居民,道遇明諜,擒之。

詔與鄭親王濟爾哈朗軍會,經中後所,大壽 以兵來襲,我軍傷九人,亡馬三十。

多鐸且戰且走,夜達鄭親王所,合師薄中後所城。

上統師至,敵不敢出。

四年五月,上御崇政殿,召多鐸戒諭之,數其罪,下諸王、貝勒、大臣議,削爵,奪所屬入官。

上命降貝勒,罰銀萬,奪其奴僕、牲畜三之一,予睿親王多爾袞。尋命掌兵部。

十月,伐寧遠,擊斬明總兵金國鳳。

숭덕(崇德/청2대 황제 태종의 #2연호) 원년(元年/1636년) 4월에, 예친왕(豫親王)으로 봉(封)하였고, 

예부사(禮部事)를 장(掌)하게 하였다.

조선(朝鮮)을 종벌(從伐)하였는데, 사하보(沙河堡)로부터 병(兵) 천인(千人)을 영(領)하여 

갈포십현(噶布什賢/갑시햔, 선봉)의 병(兵)에 계(繼)하여, 조선(朝鮮) 도성(都城)에 이르렀다.

조선(朝鮮)의 전라(全羅), 충청(忠清) 2도(道)의 원병(援兵)이 남한산(南漢山)에 이르렀는데,

다탁(多鐸)이 격패(擊敗)하였고, 그 말 천여(千餘)를 수(收)하였다.

양고리(揚古利)가 잔병(殘兵/패잔병)에 의해 소적(所賊/해침)하였는데,

그 사람을 포득(捕得)하여 참(斬)하고 이로써 제(祭)하였다.

3년에, 금주(錦州)를 벌(伐)하였는데, 몽고(蒙古) 찰곤박륜(扎袞博倫)의 경계(界)로부터 

파아라(巴牙喇/바야라)와 토묵특(土默特) 병(兵)을 분솔(分率)하여 명경(明境)으로 입(入)하여,

대흥보(大興堡)를 극(克)하였고, 그 거민(居民)을 부(俘)하였으며, 명첩(明諜)을 도우(道遇)하니, 금(擒)하였다.

조(詔)하여 정친왕(鄭親王) 제이합랑(濟爾哈朗)과 함께 군회(軍會)하여, 중후소(中後所)를 경(經)하게 하였는데,

조대수(大壽)가 병(兵)으로써 내습(來襲)하니, 아군(我軍) 9인이 상(傷)하고 말 30이 망(亡)하였다.

다탁(多鐸)이 또한 전(戰)하고 또 주(走)하였고, 야(夜)에 정친왕(鄭親王)의 소(所)에 달(達)하여,

합사(合師)하여 중후소성(中後所城)을 박(薄)하였다.

상(上)이 통사(統師)하여 이르자, 적(敵)이 감히(敢) 출(出)하지 못하였다.

4년 5월에, 상(上)이 숭정전(崇政殿)에 어(御)하여, 다탁(多鐸)을 소(召)하여 계유(戒諭)하였는데,

그 죄(罪)가 수(數)하니, 여러 왕(王), 패륵(貝勒), 대신(大臣)의 의(議)를 하(下)하게 하니,

삭작(削爵)하였고, 소속(所屬)을 탈(奪)하고 입관(入官)하였다.

상(上)이 명(命)하여 패륵(貝勒)으로 항(降)하고, 은(銀) 만(萬)을 벌(罰)하였으며,

그 노복(奴僕)과 생축(牲畜) 3분의 1을 탈(奪)하고,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에게 여(予)하였다.

심명(尋命)하여 병부(兵部)를 장(掌)하게 하였다.

10월에, 영원(寧遠)을 정벌(伐)하였는데, 명(明) 총병(總兵) 김국봉(金國鳳)을 격참(擊斬)하였다.


1636년 4월에 어르커 친왕(예친왕豫親王)으로 봉하였고 예부를 주관하게 하였다.

조선 정벌 전에 종군하였는데 사하보로부터 병력 1천을 거느리고 갑시햔 초오하(갈포십현/선봉)에 이어 조선 도성에 이르렀다.

조선의 전라, 충청 2도의 원군이 남한산에 이르렀는데 도도가 격파하였고 그 말 1천여 마리를 거뒀다.

양구리(양고리)가 패잔병에 의해 전사했는데 그 사람을 사로잡아 참하고 이로써 제를 지냈다.

1638년에 금주를 정벌하였는데 몽고 찰곤박륜의 경계로부터 바야라(파아라)와 투머트(토묵특) 군사를 

나누어 인솔하고 명의 국경으로 들어가 대흥보를 함락하였고 그 거주민을 사로잡고 명의 염탐병을 길에서 만나 사로잡았다.

조서를 내려 호쇼이 우전 친왕(정친왕鄭親王) 지르가랑(제이합랑)과 함께 합군하여 중후소를 경유하게 하였는데

조대수가 군을 이끌고 습격하니 아군 9명이 상하고 말 30마리가 죽었다.

도도가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달아났는데 밤에 호쇼이 우전 친왕이 있는 곳에 도달하여 

합병하여 중후소성을 압박하였다.

상이 군을 통솔하여 이르자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1639년 5월에 상이 숭정전에 행차하여 도도를 불러 엄히 훈계하고,

그 죄가 여럿이니 여러 왕, 버이러, 암반(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여 봉작을 삭감하였고 휘하 소속을 빼앗아 관에 들였다.

상이 명하여 버이러로 내리고 벌금 은 만냥을 취하고 그 노복과 가축 1/3을 빼앗아 

호쇼이 머르건 친왕(예친왕睿親王) 도르곤(다이곤)에게 주었다.

거듭 명하여 병부를 주관하게 하였다.

10월에 영원을 정벌하였는데 명 총병 김국봉을 공격하여 참하였다.


*갈포십현(噶布什賢/갑시햔) 갈라의(噶喇依/가라이) 앙방(昂邦/암반)

 : gabsihiyan galai amban[갑시햔 가라이 암반], 전봉통령(前鋒統領), 선봉대 지휘관

  직역은 선봉 손의 암반, 전봉익 대신.



<병자호란 당시 청 2차 선봉대 대장으로 참전한 도도>

시기별 남한산성 포위 병력 현황


12월 15일 : 1차 선봉대 마푸타+로오사+우바이 300(바야라)

12월 16일~17일 : 2차 선봉대 도도+쇼토+니칸 1천

                     3차 선봉대 요토+양구리 3천

12월 25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 4300 여명

12월 25일 : 홍 타이지 본군(우익)에서 보낸 증원군

            -대장 : 바야라 독주 궁가다이, 바부라이, 바두리

            -병력 : 장교 8명 + 갑병 832명 + 쿠투러 400여명 = 1240여명

12월 25일 : 강화도 염탐부대 대장 콩코+바야라 50명

12월 27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 5500 여명

12월 27일 : 조선 근왕병 요격 병력 : 쇼토 1천, 서러8백, 로오사 3백

12월 28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 3400 여명

12월 29일 한양약탈 병력 총 1만1천명 (만몽팔기 1450여명 + 쿠투러 700여명 + 외번 몽고 우익 9천명)

12월 29일 남한산성에 도착한 홍 타이지의 본군 3200 여명(바야라 437, 보병 1457, 쿠투러 1300여명)

12월 29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 8700 여명

1월 4일 한족3왕 1300여명 도착, 김옥화 예하 우전 초오하 도착

1월 10일 도르곤+호오거 좌익 1만 3천 도착, 두두 6차 후미대 1천 도착, 석정주 우전 초오하 1만 도착

1월 10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 3만4천, 한양 약탈병력 1만1천.

1월 16일 로오사+우바이 1차 선봉대 300 본국 귀환명령

1월 18일 강화도 함락군 도르곤+두두 5천(갑병3300+쿠투러1600) 남한산성 출발 강화도로 감

1월 23일 강원도-함경도-와르카 정벌군 니칸 3700명 남한산성 출발(만주팔기군100+외번몽고109부족 3600)

1월 23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한양 약탈군도 이전에 회군명령 내림)

44000-300-5000-3700 = 약 3만 5천 (한산무갑, 보오이, 불법동원병력, 살상자 등 고려 안 함)


홍 타이지의 본군이 오기 전의 남한산성 포위 상황

12월 23일까지 남한산성 포위 병력 4300명

1조 5~10명/10~20명, 남한산성 둘레 7.4km에 나누어 주둔

조선군이 나타나면 3~4조 정도가 합병

밤에는 1조당 1인만 경계를 서고 나머지는 흩어져서 마을로 자러 감

반면 조선군은 밤새 성벽에서 감시하면서 야외에서 추위에 떨며 쪽잠


<광교산 전투와 양구리 전사>


1. 광교산에 조선군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도도(1천5백), 양구리(1천5백)

   1월7일 새벽에 광교산 밑에 도착함

2. 눈이 많이 내리고 안개도 끼고 매우 흐려서 시야가 매우 안 좋음

3. 조선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청군은 군사를 풀어 조선군을 찾음

4. 산 밑 기슭에 포진한 조선군 전방 부대를 발견함

5. 도도와 양구리 조선군 공격 시작, 하루 종일 싸움

6. 산 밑의 조선군 산 위의 본영으로 도주 시작

7. 해 질 무렵 도도군이 산 정상 포진

   1637년 1월 7일(양력2월1일) 해지는 시각 17:53분

8. 도도 산 정상에 있는 조선 본군을 상대하기 위해 소라고동 불어 양구리 소환

9. 양구리 소라고동 소리를 듣고 산 정상으로 올라감

10. 산 밑에서 도주하여 언덕 틈에 숨어 있던 조선 조총병 양구리 저격, 청군 양구리 시신 수습 못함

11. 21시경 도도 산 밑으로 퇴각

12. 청군이 물러나자 김준용 횃불 키고 말 묶어놓고 야영하는 것처럼 꾸미고 수원 방면으로 하산 퇴각.



<1636년 4월 경 청나라 서열>

서열계급이름신분비고
1홍 타이지황족 
2친왕다이샨황족 
3지르가랑황족형부 장관
4도르곤황족이부 장관
5도도황족 
6호오거황족호부 장관
7요토황족병부 장관
8군왕아지거황족 
9버이러
(패륵)
두두황족예부 장관
10아바타이황족공부 장관
11초품 1등공양구리/양고리개국공신
+누르하치
 사위
 
12버이서
(패자)
쇼토황족 
13니칸황족몽고
아문승정
 퍙구황족구사어전
 보호토황족 
 로토황족 
 아이두리황족 
 마잔황족 
 툰치황족 
 보로황족 
 호토황족 
 두르후황족 
 자카나황족 
 툰치카황족 
 무르후황족 
 3등공화이본(和爾本)외척 
 광태(光泰)외척 

 

요약.

1636년 4월 청이 개국하자 도도는 어르커 친왕에 봉작되고 예부를 주관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 당시 2차 선봉대 1천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다.

12월 16~17일 남한산성에 도착한 도도는 요토, 양구리와 함께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 근왕병을 격파한다.

12월 29일 남한산성에 도착한 홍 타이지는 1637년 1월 2일 요토에겐 경상도 근왕병

도도와 양구리에게는 충청+전라도 근왕병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요토는 병력 1500을 이끌고 쌍령으로, 도도는 1000, 양구리는 1500을 이끌고 광교산으로 향한다.

1월 7일 새벽 광교산에 도착한 도도와 양구리는 조선군 수색작업에 돌입하고 산 밑에 포진한 조선군을 격파한다.

도도는 휘하 군을 이끌고 광교산 정상으로 향하였고 해질 무렵 정상에 포진한 김준룡이 이끄는 조선 본군을 발견한다.

이에 도도는 소라고동을 불어 양구리를 소환하였고 양구리는 정상으로 향하던 도중 매복한 조선군에 저격당해 즉사한다.

양구리가 오질 않자 도도는 21시경 산 밑으로 퇴각한다.

이틈에 조선군은 야영하는 것처럼 꾸미고 말 1140마리를 남겨두고 수원 방면으로 퇴각한다.

이튿날 산을 수색해 양구리의 시신을 수습한 도도는 곧장 남한산성으로 퇴각한다.

양구리의 시신이 도착하자 홍 타이지는 통곡하며 이틀 동안 물도 먹지 않았다.

양구리는 14세에 누르하치를 따라 활약하면서 늘 전투의 선봉을 앞장선 맹장이자 누르하치의 사위로 외척이었다.

누르하치의 5개국 공신이 모두 죽은 후 1.5세대 개국공신으로 신하 중에 계급이 가장 으뜸이었으며

심지어 황족들인 버이서들보다도 위였고 청나라 서열은 황족 포함 11위였다.

양구리의 전사는 병자호란 최대의 전과로 손꼽힌다.

청사고에는 양구리를 저격한 조선 패잔병을 도도가 사로잡아 참하여 양구리를 위해 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양구리의 시신을 당일 수습못한 도도가 다음날 조선 저격병을 잡았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또한 김준룡의 묘비명 등에는 김준룡이 직접 사격을 명했다고는 하나

산 위에서 도도군과 대치한 김준룡이 산으로 올라오던 양구리를 저격했다고는 보기 어렵고 후일 전과를 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도도는 1639년 죄를 받아 친왕에서 버이러로 강등되었고 휘하 속민 압수형, 은자 1만냥 벌금형을 받았고,

노비 1/3을 친형 도르곤에게 양도해야만 했다.


-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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