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도도 열전 5부-입관 그리고 양주 대학살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누르하치의 15남으로 입관을 성공시키고 양주에서 대학살극을 벌인 도도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산해관을 무시하고 북경을 포위하다!

2부-조선은 화친하였으니 침공할 필요가 없나이다.

3부-병자호란 광교산 전투

4부-명의 마지막 희망을 소멸시키다! 송산전투!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18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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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다탁(多鐸)

順治元年四月,從睿親王多爾袞入關,破李自成 ,進親王。

命為定國大將軍,南征,定懷慶。

進次孟津,遣巴牙喇纛章京圖賴率兵先渡,自成 守將走,沿河十五寨堡皆降。

再進次陝州,克靈寶。

再進,距潼關二十里,自成 兵據山列營,噶布什賢噶喇依昂邦努山及圖賴、鄂碩等擊破之。

二年正月,自成 親率步騎迎戰,師奮擊,殲其步卒,騎卒奔潰。

及夜,屢犯屢北,鑿重壕,立堅壁。

師進,發巨砲迭戰,自成 兵三百騎衝我師,貝勒尼堪、貝子尚善等躍馬夾擊,屢破敵壘,尸滿壕塹,

械冑彌山野,自成 精銳略盡,遁歸西安,其將馬世堯率七千人降。

入潼關,獲世堯所遣致自成 書,斬以徇。

進次西安,自成 先五日燬室廬,挈子女輜重,出藍田口,竄商州,南走湖廣。

二月,詔以陝西賊付英親王阿濟格,趣多鐸自河南趨淮、揚。

師退徇南陽、開封,趨歸德,諸州縣悉降。

所至設官吏,安集流亡。

詔褒多鐸功,賜嵌珠佩刀、鋄金鞓帶。

四月,師進次泗州,渡淮趨揚州,遣兵部尚書漢岱等先驅,得舟三百餘,圍七日,克之,殺明大學士史可法 。

五月,師再進,次揚子江北岸,明將鄭鴻逵等以水師守瓜洲、儀真。

師列營相持,造船二百餘,遣固山額真拜音圖將水師薄南岸,復遣梅勒額真李率泰護諸軍渡江。

明福王由崧走太平。

師再進,明忻城伯趙之龍等率文武將吏,籍馬步兵二十三萬有奇,使迎師。

순치(順治) 원년(元年) 4월에,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을 종(從)하여 입관(入關)하여,

이자성(李自成)을 파(破)하였고, 친왕(親王)으로 진(進)하였다.

명(命)하여 정국대장군(定國大將軍)으로 삼았으며, 남정(南征)하여 회경(懷慶)을 정(定)하였다.

맹진(孟津)으로 진차(進次)하였고, 파아라(巴牙喇) 독장경(纛章京) 도뢰(圖賴)를 보내 솔병(率兵)하여 선도(先渡)하게 하였고,

이자성(自成)의 수장(守將)이 주(走)하였고, 연하(沿河) 15 채보(寨堡)가 모두 항(降)하였다.

다시 섬주(陝州)로 진차(進次)하였고, 영보(靈寶)를 극(克)하였다.

다시 진(進)하여, 동관(潼關) 20리(里) 거(距)에서 이자성(自成)의 병(兵)이 거산(據山)하고 열영(列營)하였는데,

갈포십현(噶布什賢/갑시햔) 갈라의(噶喇依/가라이) 앙방(昂邦/암반) 노산(努山)과 더불어 

도뢰(圖賴), 악석(鄂碩) 등(等)이 격파(擊破)하였다.

[순치] 2년 정월에, 이자성(自成)이 보기(步騎)를 친솔(親率)하여 영전(迎戰)하였는데,

사(師)가 분격(奮擊)하여 그 보졸(步卒)을 섬(殲)하였고, 기졸(騎卒)은 분궤(奔潰)하였다.

밤에 이르러, 누범(屢犯)하고 누배(屢北)하니, 중호(重壕)를 착(鑿)하고, 견벽(堅壁)을 입(立)하였다.

사진(師進)하자, 거포(巨砲)를 발(發)하여 질전(迭戰/번갈아 가며 싸움)하니,

이자성(自成)의 병(兵) 3백기(騎)가 아사(我師)로 충(衝)하였는데,

패륵(貝勒) 니감(尼堪)과 패자(貝子) 상선(尚善) 등(等)이 약마(躍馬/말을 빨리 달림)하고 협격(夾擊)하여,

적루(敵壘)를 누파(屢破)하였고, 시(尸)가 호참(壕塹/해자)에 만(滿)하였고,

계주(械冑/무기와 갑주)가 산야(山野)에 미(彌/가득 참)하였고,

이자성(自成)은 정예(精銳)가 약진(略盡/거의 죽음)하니 서안(西安)으로 둔귀(遁歸)하였고,

그 장(將) 마세요(馬世堯)가 7천인을 인솔(率)하여 항(降)하였다.

동관(潼關)을 입(入)하여, 마세요(世堯)가 이자성(自成)에게 보낸 서신(書)을 획(獲)하니, 참(斬)하고 이순(以徇)하였다.

서안(西安)으로 진차(進次)하였고, 이자성(自成)이 5일 먼저 실려(室廬/가옥)를 훼(燬)하고,

자녀(子女)와 치중(輜重)을 설(挈/거느림)하고, 람전구(藍田口)로 출(出)하였고, 상주(商州)로 찬(竄)하였고,

남쪽 호광(湖廣)으로 도주(走)하였다.

2월에, 조(詔)하여 섬서(陝西)의 적(賊)으로써 영친왕(英親王) 아제격(阿濟格)에게 부(付)하였고,

다탁(多鐸)을 재촉(趣)하여 하남(河南)으로부터 회(淮)와 양(揚)으로 촉(趨/달려감)하였다.

사(師)가 퇴(退)하여 남양(南陽)과 개봉(開封)을 순(徇)하였고, 귀덕(歸德)으로 추(趨)하였는데, 

여러 주현(州縣)이 모두 항(降)하였다.

소지(所至)마다 관리(官吏)를 설(設)하고, 유망(流亡)을 안집(安集)하였다.

조(詔)하여 다탁(多鐸)의 공(功)을 포(褒/칭찬함)하고, 감주패도(嵌珠佩刀), 맘김정대(鋄金鞓帶)를 사(賜)하였다. 

4월에, 사진(師進)하여 사주(泗州)에 차(次)하였고, 회(淮)를 도(渡)하여 양주(揚州)로 추(趨)하였고,

병부상서(兵部尚書) 한대(漢岱) 등(等)을 보내 선구(先驅/먼저 빨리 달려감)하게 하였고,

주(舟) 300여를 득(得)하였으며, 7일을 위(圍)하고 극(克)하였고, 명(明) 대학사(大學士) 사가법(史可法)을 살(殺)하였다.

5월에, 사(師)가 재진(再進)하여 양자강(揚子江) 북안(北岸)에 차(次)하였는데,

명(明) 장(將) 정홍규(鄭鴻逵) 등(等)이 수사(水師)로써 과주(瓜洲)와 의진(儀真)을 수(守)하였다.

사(師)가 열영(列營)하여 상지(相持)하였는데, 200여를 조선(造船)하였고,

고산액진(固山額真) 배음도(拜音圖)를 보내 수사(水師)를 장(將)하여 남안(南岸)을 박(薄)하였고,

다시 매륵액진(梅勒額真) 이솔태호(李率泰)를 보내 제군(諸軍)을 호(護)하여 도강(渡江)하였다.

명(明) 복왕(福王) 주유숭(由崧)이 태평(太平)으로 주(走)하였다.

사(師)가 재진(再進)하였는데, 명(明) 흔성백(忻城伯) 조지룡(趙之龍) 등(等)이 문무장리(文武將吏)를 인솔(率)하고,

마보병(馬步兵) 23만 남짓을 적(籍)하여, 이로 하여금 영사(迎師)하였다.


1644년 4월에 호쇼이 머르건 친왕 도르곤을 따라 입관하여 이자성을 격파하였고 친왕으로 승진하였다.

명하여 정국대장군으로 삼았으며 남정하여 회경을 평정하였다.

맹진으로 진군하여 주둔하였고 바야라 투 장긴 두라이(도뢰)를 보내 군을 이끌고 먼저 건너게 하니,

이자성의 수장이 달아났고 연하 15 채와 보가 모두 항복하였다.

다시 섬주로 진군하여 주둔하였고 영보를 함락하였다.

다시 진군하여 동관 20리 거리에서 이자성의 병력이 산을 근거하여 영을 벌이고 있었는데

갑시햔 가라이 암반 노산과 더불어 두라이, 어슈오(악석) 등이 격파하였다.

1645년 1월에 이자성이 보기병을 친히 인솔하고 반격하였는데 군사가 분격하여 그 보병을 섬멸하였고 기병은 흩어져 달아났다.

밤에 이르러 누차 공격하고 누차 달아나니 해자를 깊게 파고 벽을 굳건하게 세웠다.

군사가 진군하자 대포를 발사하여 번갈아 가며 싸우니 이자성의 군사 3백기가 우리군으로 돌격하였는데

버이러 니칸과 버이서 상선 등이 말을 빨리 달려 협공하여 적의 누를 여러 번 돌파하니

시신이 해자에 가득 찼고 무기와 갑주는 산과 들에 가득 찼는데

이자성은 정예병이 거의 죽자 서안으로 달아나 돌아갔고 그 장수 마세요가 7천 명을 인솔하여 투항하였다.

동관으로 들어가 마세요가 이자성에게 보낸 서신을 얻으니 참하고 조리돌렸다.

서안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니 이자성이 5일 먼저 가옥을 헐고 자녀와 치중을 거느리고 람전구를 나아가

상주로 숨었다가 남쪽 호주와 광주로 달아났다.

2월에 조서를 내려 섬서의 적 때문에 영친왕(英親王) 아지거(아제격)에게 붙게 하니 

도도가 재촉하여 하남으로부터 회주와 양주로 달려갔다.

군을 물려 남양과 개봉을 돌아 귀덕으로 달리니 여러 주현이 모두 투항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관리를 두고 유랑민을 안전하게 모이도록 하였다.

조서를 내려 도도의 공을 칭찬하고 감주 달린 패도와 금도금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4월에 진군하여 사주에 주둔하였고 회를 건너 양주로 달려갔고 병부상서 한대 등을 보내 먼저 빨리 달려가게 하여 

배 300척을 얻었으며 7일을 포위하고 함락시켰으며 명 대학사 사가법을 죽였다.

5월에 군사가 재차 진군하여 양자강 북쪽 해안에 주둔하였는데 명 장수 정홍규 등이 수군으로 과주와 의진을 수비하였다.

군사가 영을 벌여 서로 의지하여 배 200척을 건조하여 기주(구사 어전) 바인투(배음도)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남쪽 해안을 압박하였고 다시 머이런 어전(매륵액진) 이솔태호를 보내 여러군을 호위하여 강을 건너게 하였다.

명 복왕 주유숭이 태평으로 달아나니 군사가 재차 진군하였는데

명 흔성백 조지룡 등이 문무관리를 인솔하고 보기병 23만을 등록하여 이로 하여금 군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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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관>


*산해관 전투 당시 청군의 병력 추정
1. 총동원령
조선왕조실록 1644년 4월 23일 기사中
저번에 구왕이 중국의 본좌(本坐)가 텅 비었다는 말을 듣고 며칠 사이에 급히 병마를 거두어 떠났는데 
남정(男丁)으로서 70세 이하 10세 이상은 종군하지 않은 자가 없다. 성패의 판가름은 이번 일에 달렸다.

조선왕조실록 1644년 8월 23일 기사中
상이 이르기를,
“적병과 호병(胡兵)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보기에는 호병이 유적보다 갑절이나 된 듯하였는데, 
 청나라 사람도 ‘전후에 걸쳐 군대를 일으킨 것이 오늘날처럼 대규모인 적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2. 총동원 가능한 병력 현황
팔기 만주 갑병 : 5만
팔기 몽고 갑병 : 2만5천
우전 초오하+한족 3왕 : 2만
쿠투러 : 통상 갑병의 50% 동원, 약 4만
총합 약 12~14만 추정.

*별동대 외번 몽고 : 2~3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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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대학살>

양주대학살 https://cafe.naver.com/booheong/188429


청실록 1645년 5월 28일 기사中

18일에 대군이 양주성 아래에 육박하여 그 양주 수장 각부 사가법, 
한림학사 위윤문과 더불어 4 총병관, 2 도원 등을 초유하였는데, 따르지 않았습니다.
25일에 영을 내려 바인투, 투라이, 아산 등은 양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게 하였고 그 각부 사가법을 얻어 군전에서 참하였나이다.
그 성을 근거로 하여 명을 어긴 자는 모두 주살하였습니다.
5월 5일에 진군하여 양자강에 이르렀습니다.


청실록 1645년 6월 8일 기사中

신이 천명을 우러러 받들어 정국대장군 어르커 친왕 도도 등을 보내

군을 통솔하여 적을 토벌하고 섬멸하였으며 도적떼를 탕평하였고, 

삼진을 평정하였으며 황하 이남은 바라만 봐도 투항하였나이다.

양회의 관민은 성심으로 귀순하였는데

오직 양주만이 명을 거스르고 복종하지 않으니 빠르게 공격하여 함락하였나이다.

강동의 장졸들이 새가 놀라고 물고기가 흩어지듯 투항한 자가 23만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달아나 숨었나이다.

이로부터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넜고 대군이 금릉을 곧장 들이치니

복왕 주유송은 달아났고 관민은 뛸듯이 춤추며 나와 영접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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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44년 4월 마침내 산해관을 입성하고 이자성의 대순군을 대파하여 입관에 성공한 도도는 다시 친왕으로 승진한다.

도도는 정국대장군이 되어 이자성과 남명 토벌을 위해 남하한다.

이자성을 쫓아 동관까지 추격한 도도는 이자성군을 격파하자 이자성은 남서부 광주로 달아난다.

도르곤은 친형 아지거와 친동생 도도에게 명을 내려 남명 토벌을 명하였고 

도도는 군을 이끌고 회뢰관-개봉-귀덕-사수를 거쳐 양주로 향하면서 모든 성을 투항시킨다.

1644년 4월 18일 양주에 도착한 도도는 양주를 지키는 남명 대학사 사가법을 회유하나 사가법은 결사항전한다.

도도는 본보기로 양주를 도륙내기로 결정하고 7일간 맹공격을 퍼붓는다.

마침내 4월 25일 양주성은 함락되고 도도는 저항하는 모든 한족을 약탈하고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

4월25일에서 5월 5일간 10일동안 양주성안에서는 대약탈과 대학살이 펼쳐진다.

도도는 5월 28일 순치제에게 승전보를 보고하면서 유독 양주성만이 순순히 투항하지 않아

성을 근거로 명을 어긴 자들을 모조리 도륙냈다고 보고한다.

당시 양주성민은 약 80만~100만으로 추정된다.


-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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