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푸헝[부항] 열전 6부-병력 60%를 풍토병에 잃고 푸헝도 쓰러지다(연재종료)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모프맨님께서 번역 요청하신 청나라 건륭조 당시 십전무공의 으뜸 공신이자 명재상인

푸헝[부항]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건륭제의 처남 토벌군 사령관이 되다!

2부-방어력 최강의 금천(티베트족) 돌집

3부-짐의 곽거병이 개선하노라!

4부-소하에 비견되고 자광각에 화상이 걸리다!

5부-미얀마(면전국) 정벌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도도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301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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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부항(傅恆)

師久攻堅,士卒染瘴多物故,水陸軍三萬一千,至是僅存一萬三千。

傅恆以入告,上命罷兵,召傅恆還京。

傅恆俄亦病,阿桂以聞。

上令即馳驛還,而以軍事付阿桂。

會緬甸酋懵駁遣頭人諾爾塔齎蒲葉書乞罷兵,傅恆奏入,上許其行成。

傅恆附疏言:

「用兵之始,眾以為難。

  臣執意請行,負委任,請從重治罪。」

上手詔謂:

「用兵非得已,如以為非是,朕當首任其過。

  皇祖時,吳三桂 請撤藩,諮於群臣,議撤者惟米思翰、明珠數人。

  及三桂 反,眾請誅議撤諸臣,皇祖深闢其非。

  朕仰紹祖訓,傅恆此事,可援以相比。

  傅恆收猛拱,當賜三眼孔雀翎,疏辭,俟功成拜賜。

  今既未克賊巢,當繳進賜翎,以稱其請罪之意。」

懵駁遣頭人詣軍獻方物。

十月,傅恆還駐虎踞關,上命傅恆會雲貴總督彰寶議減雲南總兵、知府員缺,釐正州縣舊制。

三十五年二月,班師。

三月,上幸天津,傅恆朝行在。

既而緬甸酋謝罪表久不至,上謂傅恆方病,不忍治其罪。

七月,卒,上親臨其第酹酒,命喪葬視宗室鎮國公,諡文忠。

又命入祀前所建宗祠。

其後上復幸天津,念傅恆於此復命,又經傅恆墓賜奠,皆紀以詩。

及賦懷舊詩,許為「社稷臣」。

嘉慶元年,以福康安 平苗功,贈貝子。

福康安 卒,推恩贈郡王銜,旋並命配享太廟。

傅恆直軍機處二十三年,日侍左右,以勤慎得上眷。

故事,軍機處諸臣不同入見,乾隆初,惟訥親承旨。

迨傅恆自陳不能多識,乞諸大臣同入見。

上晚膳後有所諮訪,又召傅恆獨對,時謂之「晚面」。

又軍機處諸大臣既承旨,退自屬草,至傅恆始命章京具稿以進。

上倚傅恆為重臣,然偶有小節疏失,即加以戒約。

傅恆益謙下,治事不敢自擅。

敬禮士大夫,翼後進使盡其才。

行軍與士卒同甘苦。

卒時未五十,上尤惜之。

사(師)가 오랫동안 공견(攻堅)하니, 사졸(士卒)이 염장(染瘴/풍토병이 전염됨)하여 많이 물고(物故/사망)하여,

수륙군(水陸軍)이 3만1천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겨우 1만3천이었다.

부항(傅恆)이 이로써 입고(入告/임금에게 아룀)하니, 상(上)이 명(命)하여 파병(罷兵)하였고,

부항(傅恆)을 소(召)하여 환경(還京)하게 하였다.

부항(傅恆)도 갑자기 또한 병(病)하였는데, 아계(阿桂)가 이문(以聞)하였다.

상(上)이 영(令)하여 즉시(即) 치역(馳驛/역마을 달림)하여 환(還)하게 하였고, 

이로써 군사(軍事)는 아계(阿桂)에게 부(付)하였다.

때마침 면전(緬甸)의 추(酋) 몽박(懵駁)이 두인(頭人) 낙이탑(諾爾塔)을 보내 

포엽서(蒲葉書/부들잎으로 만든 서신)를 재(齎)하여 파병(罷兵)을 걸(乞)하니,

부항(傅恆)이 주입(奏入/상소를 올림)하였고, 상(上)이 그 행성(行成)을 허(許)하였다.

부항(傅恆)이 부(附)하여 소언(疏言)하길

「용병(用兵)의 시(始)에, 중(眾)이 난(難)하다 이위(以為)하였나이다.

  신(臣)이 집의(執意/의견을 굳게 가짐)하여 청행(請行)하였는데, 위임(委任)을 부(負)하였으니, 

  종중치죄(從重治罪)를 청(請)하나이다.」

상(上)이 수조(手詔)하여 위(謂)하길

「용병(用兵)이 득(得)하지 못하였을 뿐인데, 옳지 않다 생각하였다면, 짐(朕)이 마땅히 그 화(過)의 수임(首任)이노라!

  황조(皇祖/돌아간 조부, 강희제) 시(時)에, 오삼계(吳三桂)가 철번(撤藩)을 청(請)하였는데,

  군신(群臣)에게 자(諮/물음)하니, 의철(議撤)한 자(者)는 오직 미사한(米思翰)과 명주(明珠) 수인(數人)이었다.

  오삼계(三桂)가 반(反)함에 이르러, 중(眾)이 의철(議撤)의 제신(諸臣)을 청주(請誅)하였는데,

  황조(皇祖)께옵서는 그것이 옳지 않음을 심벽(深闢/심히 반박함)하였다.

  짐(朕)이 조훈(祖訓/선조의 훈계)을 앙소(仰紹/우러러보아 이음)하니,

  부항(傅恆)의 이일은, 상비(相比/비교함)로써 원(援/도움)함이 옳도다!

  부항(傅恆)은 맹공(猛拱)을 수(收)하였으니, 마땅히 삼안공작령(三眼孔雀翎)을 사(賜)하였는데,

  소사(疏辭)하였고, 공성(功成)을 사(俟/기다림)하여 배사(拜賜/삼가 공손히 받음)하였다.

  지금(今) 이윽고 적소(賊巢)를 미극(未克)하였으니, 마땅히 사(賜)한 령(翎)을 격진(繳進/나아가 바침)하여,

  이로써 그 청죄(請罪)의 의(意)라 칭(稱)하노라!」

몽박(懵駁)이 두인(頭人)을 견(遣)하여 예군(詣軍)하여 방물(方物)을 헌(獻)하였다.

10월에, 부항(傅恆)이 호거관(虎踞關)으로 환주(還駐/돌아와 머묾)하였고,

상(上)이 명(命)하여 부항(傅恆)은 운귀(雲貴) 총독(總督) 창보(彰寶)와 만나

운남총병(雲南總兵)과 지부(知府)의 원결(員缺/인원이 부족함)을 의감(議減/줄임을 의논함)하였고,

주현(州縣)의 구제(舊制)를 정주(釐正/정리하여 바로잡음)하였다.

[건륭] 35년(1770년) 2월에, 반사(班師)하였다.

3월에, 상(上)이 천진(天津)으로 행(幸)하니, 부항(傅恆)이 행재(行在)에서 조(朝)하였다.

얼마 안 있어 면전(緬甸) 추(酋)의 사죄표(謝罪表)가 오랫동안 부지(不至)하자,

상(上)이 부항(傅恆)이 바야흐로 병(病)하였다 위(謂)하였고, 그 치죄(治罪)를 불인(不忍)하였다.

7월에, 졸(卒)하였는데, 상(上)이 그 제(第)에 친림(親臨)하여 뢰주(酹酒/술을 따름)하였고,

명(命)하여 상장(喪葬/장사 지내는 일)은 종실(宗室) 진국공(鎮國公)이 시(視)하게 하였으며, 문충(文忠)이라 시(諡)하였다.

또 명(命)하여 전(前)에 소건(所建)한 종사(宗祠)에 입사(入祀)하게 하였다.

그 후(後) 상(上)이 다시 천진(天津)에 행(幸)하였는데, 부항(傅恆)이 이곳에서 복명(復命)한 것을 염(念)하였고,

또 부항(傅恆)의 묘(墓)를 경(經)하여 사전(賜奠/임금이 친히 제사지냄)하였고, 모두 시(詩)로써 기(紀)하였다.

구시(舊詩)를 부회(賦懷/회상하여 지음)하였고, 허(許)하여 「사직신(社稷臣/사직을 지킨 신하)」이라 하였다.

가경(嘉慶/청 7대 황제 인제의 #1연호) 원년(元年/1796년)에, 복강안(福康安)의 평묘(平苗)의 공(功)으로써,

패자(貝子)를 증(贈)하였다.

복강안(福康安)이 졸(卒)하자, 추은(推恩)하여 군왕함(郡王銜)을 증(贈)하였고,

빠르게 아울러 명(命)하여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였다.

부항(傅恆)이 군기처(軍機處/청 군사와 정무의 최고기관)에 23년간 직(直)하였는데, 날마다 좌우(左右)로 시(侍/모심)하였고,

근신(勤慎/힘써 삼감)으로써 상권(上眷/임금의 총애)를 득(得)하였다.

고사(故事)에, 군기처(軍機處)의 제신(諸臣)은 함께 입현(入見)하지 못하였는데,

건륭초(乾隆初)에, 오직 눌친(訥親)이 승지(承旨/유지를 받듦)하였다.

부항(傅恆)에 이르러 다직(多識/학식이 많음)이 불능(不能)함을 자진(自陳)하고,

여러 대신(大臣)이 함께 입현(入見)하도록 걸(乞)하였다.

상(上)이 만선(晚膳/저녁 식사) 후(後)에 자방(諮訪/찾아 물음)하는 바가 있으면,

또 부항(傅恆)을 소(召)하여 독대(獨對)하였고, 이때 이르기를 「만면(晚面/늦은 대면)」이라 하였다.

또 군기처(軍機處)의 여러 대신(大臣)이 이윽고 승지(承旨)하면, 퇴(退)하여 스스로 촉초(屬草/초안을 지음)하였는데,

부항(傅恆)에 이르러 비로소 명(命)하여 장경(章京)이 구고(具稿/초안을 갖춤)하여 이진(以進)하게 하였다.

상(上)이 부항(傅恆)을 의지(倚)하여 중신(重臣)으로 삼았는데,

그리하여 우연히(偶) 소절(小節/대수롭지 않은 예절)의 소실(疏失/실수)이 있으면, 

곧 계약(戒約/경계하여 약조함)으로써 가(加)하였다.

부항(傅恆)이 더욱 겸하(謙下/겸손하게 자기를 낮춤)하였고, 치사(治事)에 감히(敢) 자천(自擅/스스로 멋대로 함)하지 않았다.

사대부(士大夫)를 경례(敬禮/예로써 공경함)하였고, 후진(後進)을 익(翼/천거함)하여 그 재능(才)을 사진(使盡)하게 하였다.

행군(行軍)은 사졸(士卒)과 더불어 감고(甘苦/즐거움과 괴로움)를 함께 하였다.

졸시(卒時)가 50이 되지 않으니, 상(上)이 더욱 애석(惜)해하였다.


*종중치죄(從重治罪)/종중논죄(從重論罪)

 : 두 가지 이상의 죄가 드러났을 때에 가장 무거운 죄에 따라 처벌함.


*신뷰신(Hsinbyushin)/몽박(懵駁)

 : 미얀마 꽁바웅 왕조의 3대 국왕으로 1대 국왕 모크소보묘(목소木梳)의 추장 알라웅(옹자아/甕藉牙)의 아들이고

   2대 국왕 나웅도지(몽뢰/懵惱)의 동생이다.

   미얀마와 청과의 처음 접촉은 1661년 평서왕 오삼계가 남명 영력제를 쫓아 면전국 수도 아와성에 도착하면서이다.

   2대왕 나웅도지는 왕위에 오르자 1762년~1764년 사이에 청에 번속한 토사들을 공격하여 청을 자극한다.

   3대왕 신뷰신은 형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르자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취했고 샨국, 라오스, 치앙마이 등의 주변국을 약탈한다.

   건륭제는 1765년~1769년에 4차에 걸쳐 미얀마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한다.

   마지막 푸헝의 청군이 전염병으로 병력의 60%를 잃자 신뷰신은 번속을 약속하며 철군을 청하였으나 

   청군이 퇴각하자 이를 지키지 않았다.

   호는 흰 코끼리 왕이란 뜻의 백상왕(白象王)이다.



군사가 오랫동안 견고한 곳을 공격하니 사졸이 풍토병에 전염되어 많이 죽었는데,

본래 육군과 수군이 총 31000 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겨우 13000 이었다.

푸헝이 이로써 아뢰니 상이 명하여 회군하게 하였고 푸헝을 불러 수도로 돌아오게 하였다.

푸헝도 갑자기 또한 병에 걸리니 아구이가 이로써 아뢰었다.

상이 영을 내려 즉시 역마를 달려 돌아오게 하였고 이로써 군의 일은 아구이에게 맡기게 하였다.

때마침 미얀마의 대추장 몽박이 추장 낙이탑을 보내 부들입으로 만든 서신을 가지고 철군을 애걸하니

푸헝이 상소를 올렸고 상이 그 청을 허락하였다.

푸헝이 상소에 부기하여 말하길

「군사를 사용할 초기에 무리들이 어렵다 생각하였으나 신이 굳게 의논하여 출병을 청하였는데

  이에 맡기신 임무를 저버렸으니 중죄로 다스리길 청하나이다.」

상이 손수 조서를 내려 이르길

「군사를 사용하여 얻지 못하였을 뿐, 이것이 옳지 않다 생각한다면, 짐에게 마땅히 그 화의 가장 큰 책임이 있노라!

  황조(강희제) 때에 오삼계가 번을 철거해달라 청하였는데 뭇 신하들에게 물으니

  철거를 의논한 자는 오직 미스한(미사한)과 명주 등 몇 명이었다.

  오삼계가 배반함에 이르러 무리들이 철거를 의논한 여러 신하를 주살해달라 청하였는데

  황조께옵서는 그것이 옳지 않음을 심히 반박하시었다.

  짐이 선조의 훈계을 이어받아 우러러보니 푸헝의 이일과 비교하자면 돕는 게 옳도다!

  푸헝은 맹공을 거두어 마땅히 삼안공작령을 하사하였는데, 상소를 올려 사양하며 공이 이뤄지길 기다렸다가 공손하게 받았다.

  지금 이윽고 적의 소굴을 미처 함락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하사한 공작령을 바쳐 이로써 죄를 청한 뜻이라 칭하노라!」

몽박이 추장을 보내 군에 이르러 방물을 바쳤다.

10월에 푸헝이 호거관으로 돌아와 머물렀고 상이 명하여 푸헝은 운귀총독 창보와 만나

운남총병과 지부의 결원을 의논하고 주현의 옛 제도를 바로잡게 하였다.

1770년 2월에 회군하였다.

3월에 상이 천진으로 행차하니 푸헝이 행재(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조회하였다.

얼마 안 있어 미얀마 추장의 사죄 표문이 오랫동안 이르지 않자 

상이 푸헝은 바야흐로 병에 걸렸다 이르고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7월에 졸하였는데 상이 그 저택에 친히 가서 술을 따르고

명하여 장사 지내는 일은 종실 진국공이 맡아보게 하였으며 시호를 문충이라 하였다.

또 명하여 전에 건설한 (푸헝 가문의) 종사(가문의 사당)에 입사하게 하였다.

그 후에 상이 다시 천진으로 행차하였는데 푸헝이 이곳에서 복명한 것을 생각하고는

다시 푸헝의 묘에 가서 친히 제사 지냈고 시를 지어 기렸다.

옛시를 회상하여 지었고 「사직신(사직을 지킨 신하)」이라 하였다.

1796년에 푸캉간(복강안/푸헝의 3남)이 묘족을 평정한 공으로써 버이서(패자)를 더하였다.

푸캉간이 졸하자 추은하여 군왕함을 더하였고 빠르게 아울러 명하여 태묘에 배향하였다.

푸헝이 군기처(청 군사와 정무의 최고기관)에 23년간 종사하였는데 날마다 좌우로 모셨고 힘써 삼가하니 총애를 얻었다.

고사에 군기저의 여러 신하는 함께 알현하지 못하였는데 건륭초에 오직 너친만이 유지를 받들었다.

푸헝에 이르러 학식이 많지 않다 스스로 진술하고 여러 대신과 함께 알현할 수 있도록 애걸하였다.

상이 저녁 식사 후에 찾아 묻는 바가 있으면 또 푸헝을 불러 독대하였고,

이때 이르기를「만면(늦은 대면)」이라 하였다.

또 군기처의 여러 대신이 이윽고 유지를 받들게 되면 물러나 스스로 초안을 지었는데

푸헝에 이르러 비로소 명하여 장긴(장경)이 초안을 갖춰 이로써 올리게 하였다.

상이 푸헝을 의지하여 중신으로 삼았는데 우연히 사소한 실수가 있으면 곧 경계하도록 하였다.

푸헝이 더욱 겸손하게 자기를 낮췄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감히 멋대로 하지 않았다.

사대부를 예로써 공경하였고 후진을 천거하여 그 재능을 다 발휘하도록 하였다.

군사를 행함에 있어서는 사졸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하였다.

졸한 때가 50도 채 되지 않으니 상이 더욱 애석해하였다.


요약.

1769년 가을 미얀마군과 대치 중인 푸헝은 건륭제에게 상소를 알려 철군을 요청한다.

본래 북경에서 출병한 만몽 팔기군은 13600명이었고 광동과 복건에서 징발한 한족 병력까지 포함하여 총 3만1천이던 청군은

오랜 전투와 풍토병에 병력의 60%가 사망하여 겨우 1만3천만 남은 상태였다.

게다가 부사령관 아르군마저 풍토병에 사망하고 푸헝 자신도 병든 상태였다.

푸헝의 상소를 본 건륭제는 크게 놀랐고 때마침 미얀마 국왕 신뷰신(몽박)의 철군요청이 오자 건륭제는 철군을 윤허한다.

건륭제는 푸헝의 건강이 염려되어 역마를 타고 신속히 북경으로 올라오라 명한다.

푸헝은 중죄를 청하였으나 건륭제는 삼번 반란 당시 푸헝의 조부 미스한의 경우를 예를 들며 푸헝의 죄를 사면하고 

단지 삼안공작령의 회수를 명한다.

회군하던 푸헝은 1769년 10월 호거관에 머물며 운남 지역의 공무를 처리하고 

마침내 1770년 2월 1년 만에 북경으로 돌아왔고 건륭제를 알현한다.

푸헝은 미얀마에서 얻은 병으로 7월 끝내 사망한다.

건륭제는 푸헝을 사직을 지킨 신하라 칭하고 50도 안된 나이에 사망한 것을 애석해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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