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아지거 열전 1부-4대 암바 푸진 우라 아바하이의 장남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누르하치의 12남으로 도르곤과 도도의 친형인 아지거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도도푸헝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18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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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아제격(阿濟格)

阿濟格,太祖第十二子。

初授台吉。

天命十年,從貝勒莽古爾泰伐察哈爾,至農安塔。

十一年,偕台吉碩託伐喀爾喀巴林部,復從貝勒代善伐扎魯特,皆有功,授貝勒。

天聰元年,偕貝勒阿敏伐朝鮮,克五城。

從上伐明,偕莽古爾泰衞塔山糧運。

會師錦州,薄寧遠,明兵千餘人為車營,掘壕,前列火器,阿濟格擊殲之。

總兵滿桂出城陣,上欲進擊,諸貝勒以距城近,諫不可,獨阿濟格請從。

上督阿濟格馳擊明騎兵至城下,諸貝勒皆慚,奮不及冑,亦進擊其步軍,明兵死者大半。

二年,以擅主弟多鐸婚,削爵,尋復之。

三年,偕濟爾哈朗略明錦州、寧遠,焚其積聚,俘三千。

復從上伐明,克龍井關,下漢兒莊城,克洪山口。

進次遵化,擊斬明總兵趙率教。

薄明都,袁崇煥 、祖大壽 以兵二萬赴援,屯廣渠門外,師逐之,迫壕,阿濟格馬創,乃還。

尋偕阿巴泰等略通州,至張家灣。

尋從上閱薊州,遇明山海關援兵,阿濟格偕代善突入敵陣,大破之。

四年,復從伐明,趨廣寧,會師大凌河。

夜圍錦州,明兵襲阿濟格營,霧不見人,阿濟格嚴陣待。

青氣降,霧豁若門闢,急縱擊,獲明裨將一、甲械及馬二百餘。

上酌金卮親勞之,授圍城方略。

尋聞明增兵,上命揚古利率八旗巴牙喇兵之半以益軍。

大壽 弟大弼逐我軍中偵騎近上前,上擐甲與戰,阿濟格馳至,明兵步騎遝出,奮擊卻之,斬明裨將一。

上以所統兵付阿濟格,明監軍道張春援至,又戰于大凌河,截殺過半,逐北四十里。

六年,從伐察哈爾,林丹汗遁。

上移師伐明,令阿濟格統左翼及蒙古兵略大同、宣府,盡得張家口所貯犒邊財物。

七年,城通遠堡,迎降將孔有德 ,拒明及朝鮮兵。

詔問攻明及朝鮮、察哈爾三者何先,阿濟格言當攻明。

偕阿巴泰略山海關,詔責其不深入,阿濟格言;

「臣欲息馬候糧,諸貝勒不從。」

上曰:

「汝果堅不還,諸貝勒將棄汝行乎?」

八年,從伐明,克保安,拔靈丘。

아제격(阿濟格)은 태조(太祖)의 제 12자(子)인데, 태길(台吉)을 초수(初授)하였다.

천명(天命) 10년에, 패륵(貝勒) 망고이태(莽古爾泰)를 종(從)하여 찰합이(察哈爾)를 벌(伐)하였는데, 통안탑(農安塔)에 이르렀다.

[천명] 11년에, 태길(台吉) 석탁(碩託)과 함께 객이객(喀爾喀) 파림부(巴林部)를 정벌(伐)하였고,

다시 패륵(貝勒) 대선(代善)을 종(從)하여 찰로특(扎魯特)을 벌(伐)하였는데, 모두 유공(有功)하니, 패륵(貝勒)을 수(授)하였다.

천총(天聰) 원년(元年)에, 패륵(貝勒) 아민(阿敏)과 함께 조선(朝鮮)을 벌(伐)하였고, 5성(城)을 극(克)하였다.

종상(從上)하여 벌명(伐明)하였는데, 망고이태(莽古爾泰)와 함께 탑산(塔山)의 양운(糧運)을 위(衞)하였다.

금주(錦州)에서 회사(會師)하였는데, 영원(寧遠)을 박(薄)하였고, 명병(明兵) 천여인(千餘人)이 거영(車營)하였고, 

굴호(掘壕)하고 화기(火器)를 전열(前列)하였는데, 아제격(阿濟格)이 격(擊)하여 섬지(殲之)하였다.

총병(總兵) 만계(滿桂)가 성진(城陣)을 출(出)하였는데, 상(上)이 진격(進擊)하고자 하였고,

여러 패륵(貝勒)은 성(城)과 가까운 거리(距)이니 불가(不可)를 간(諫)하였는데, 아제격(阿濟格) 혼자 청종(請從)하였다.

상(上)이 아제격(阿濟格)을 독(督)하여 명(明) 기병(騎兵)을 치격(馳擊)하여 성하(城下)에 이르렀는데,

여러 패륵(貝勒)이 모두 참(慚/부끄러워함)하였고, 분격(奮)하여 주(冑/투구)를 불급(不及)하여,

역시(亦) 그 보군(步軍)을 진격(進擊)하니 명병(明兵)의 사자(死者)가 대반(大半)이었다.

[천총] 2년에, 멋대로 동생 다탁(多鐸)의 혼(婚)을 주(主)하니, 삭작(削爵)하였으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회복(復)하였다.

[천총] 3년(1629년)에, 제이합랑(濟爾哈朗)과 함께 명(明) 금주(錦州)와 영원(寧遠)을 공략(略)하여,

그 적취(積聚/쌓여서 모임)를 분(焚)하고, 3천(千)을 부(俘)하였다.

다시 상(上)의 벌명(伐明)을 종(從)하여 용정관(龍井關)을 극(克)하였고, 

한아장성(漢兒莊城)을 하(下)하였고, 홍산구(洪山口)를 극(克)하였다.

준화(遵化)로 진차(進次)하여, 명(明) 총병(總兵) 조솔교(趙率教)를 격참(擊斬)하였다.

명도(明都)를 박(薄)하니, 원숭환(袁崇煥)과 조대수(祖大壽)가 병(兵) 2만(萬)으로써 부원(赴援)하였고,

광거문(廣渠門) 외(外)에 둔(屯)하였고, 사축(師逐)하여, 호(壕)를 박(迫)하였는데, 

아제격(阿濟格)이 마창(馬創)하니, 내환(乃還)하였다.

거듭 아파태(阿巴泰) 등(等)과 함께 통주(通州)를 공략(略)하였고, 장가만(張家灣)에 이르렀다.

거듭 종상(從上)하여 계주(薊州)를 열(閱)하였고, 명(明) 산해관(山海關)의 원병(援兵)을 우(遇)하였는데,

아제격(阿濟格)이 대선(代善)과 함께 적진(敵陣)으로 돌입(突入)하여 대파(大破)하였다.

[천총] 4년(1630년)에, 다시 벌명(伐明)에 종(從)하여, 광녕(廣寧)을 추(趨)하여, 대릉하(大凌河)에서 회사(會師)하였다.

야(夜)에 금주(錦州)를 위(圍)하였고, 명병(明兵)이 아제격(阿濟格)의 영(營)을 습(襲)하였는데,

무(霧)로 견인(見人)하지 못하였고, 아제격(阿濟格)이 엄히(嚴) 진대(陣待)하였다.

청기(青氣)가 항(降)하자, 무(霧)가 활(豁/열림, 텅빔)하여 문벽(門闢/문이 열림)과 같았는데,

급히(急) 종격(縱擊/군대를 풀어서 마구 침)하였고, 명(明) 비장(裨將) 한 명과 갑계(甲械)와 더불어 

말 200여(餘)를 획(獲)하였다.

상(上)이 금치(金卮/금 술잔)에 작(酌/술을 부음)하여 친영(親勞)하였고, 위성(圍城) 방략(方略)을 수(授)하였다.

거듭 명(明)이 증병(增兵)하였다는 것을 문(聞)하니, 상(上)이 명(命)하여 양고리(揚古利)는 

팔기(八旗) 파아라병(巴牙喇兵)의 반(半)을 인솔(率)하여 이로써 익군(益軍)하게 하였다.

조대수(大壽)의 동생 조대필(大弼)이 아군(我軍) 중(中)으로 정기(偵騎/정찰 기병)를 축(逐)하여

상전(上前)에 근(近)하였는데, 상(上)이 환갑(擐甲/갑옷을 입음)하여 여전(與戰)하였다.

아제격(阿濟格)이 치지(馳至)하여, 명병(明兵) 보기(步騎)가 답출(遝出/뒤섞여 나옴)하였는데,

분격(奮擊)하여 각지(卻之)하였고, 명(明) 비장(裨將) 한 명을 참(斬)하였다.

상(上)이 통병(統兵)으로써 아제격(阿濟格)에게 부(付)하였고, 명(明) 감군(監軍) 도장춘(道張春)이 원지(援至)하였는데,

또 대릉하(大凌河)에서 전(戰)하여, 과반(過半)을 절살(截殺/끊어 죽임)하였고, 북(北) 40리(里)를 축(逐)하였다.

[천총] 6년(1632년)에, 찰합이(察哈爾)를 종벌(從伐)하였는데, 림단한(林丹汗)이 둔(遁)하였다.

상(上)이 이사(移師)하여 벌명(伐明)하였는데, 아제격(阿濟格)으로 하여금 좌익(左翼)과 더불어 

몽고병(蒙古兵)을 통(統)하여 대동(大同)과 선부(宣府)를 략(略)하게 하였는데,

장가구(張家口)에 소저(所貯)한 호변(犒邊/변경 군사를 호궤함)의 재물(財物) 진득(盡得)하였다.

[천총] 7년(1633년)에, 통원보(通遠堡)를 성(城/성을 쌓음, 구축함, 지킴)하고, 

항장(降將) 공유덕(孔有德)을 영(迎)하였고, 명(明)과 더불어 조선(朝鮮)의 병(兵)을 거(拒)하였다.

조(詔)하여 명(明)과 더불어 조선(朝鮮), 찰합이(察哈爾) 삼자(三者)를 어느 곳을 먼저 공(攻)해야 하는지 문(問)하였는데,

아제격(阿濟格)이 말하길

<응당(當) 명(明)을 공격(攻)해야 합니다.>

아파태(阿巴泰)와 함께 산해관(山海關)을 약(略)하였는데, 조(詔)하여 그 심입(深入)하지 않음을 책(責)하니,

아제격(阿濟格)이 말하길

「신(臣)은 식마(息馬)하고 후량(候糧/식량을 기다림)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패륵(貝勒)이 불종(不從)하였습니다.」

상(上)이 말하길

「너는 과연(果) 견(堅)하게 불환(不還)하였으니, 여러 패륵(貝勒)이 장차(將) 행(行)을 기(棄)하지 않겠느냐?」

[천총] 8년(1634년)에, 명(明)을 종벌(從伐)하여, 보안(保安)을 극(克)하였고, 영구(靈丘)를 발(拔)하였다.



아지거는 태조의 12남으로 처음에 타이지를 수여하였다.

1625년에 버이러 망굴타이를 따라 몽고 차하르를 정벌하였는데 통안탑에 이르렀다.

1626년에 타이지 쇼토와 함께 몽고 칼카 바린부를 정벌하였고,

다시 버이러 다이샨을 따라 몽고 자루트를 정벌하였는데 모두 공을 세우니 버이러를 수여하였다.

1627년에 버이러 아민과 함께 조선을 정벌하여 5성을 함락하였다.

상을 따라 명을 정벌하였는데 망굴타이와 함께 탑산의 식량 운송로를 호위하였다.

금주에서 합병하여 영원을 육박하였는데 명군 1천여가 전차를 앞세워 영을 세우고 참호를 파고 

화기를 앞에 배열하였는데 아지거가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총병 만계가 성에서 나오니 상이 나아가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버이러들은 성과 가까운 거리이니 불가하다 간하였는데 오직 아지거만이 따르기를 청하였다.

상이 아지거를 독려하여 말을 달려 명 기병을 공격하게 하여 성 아래에 이르니

여러 버이러들이 모두 부끄러워하고 분격하여 투구를 쓸 틈도 없이 또한 명나라 보병을 향하여 

진격하니 명군의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1628년에 멋대로 동생 도도의 혼인을 주관하니 작위를 박탈하였으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회복하였다.

1629년에 지르가랑과 함께 명 금주와 영원을 약탈하여 그 쌓인 곡식을 불사르고 3천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다시 상의 명 정벌전에 종군하여 용정관을 함락하였고, 한아장성을 점령하였으며 홍산구를 함락하였다.

준화로 진군하여 명 총병 조솔교를 공격하여 참하였다.

명 도읍(북경)을 압박하니 원숭환과 조대수가 병 2만으로써 구원하고자 이르러 광거문 밖에 주둔하니,

군사가 달려가 해자에 육박하였는데 아지거의 말이 상하니 이에 돌아왔다.

거듭 아바타이 등과 함께 통주를 약탈하고 장가만에 이르렀다.

거듭 상을 따라 계주를 들어가다 명 산해관의 구원병과 조우하였는데 아지거가 다이샨과 함께 적진으로 돌입하여 대파하였다.

1630년에 다시 명 정벌전에 종군하여 광녕으로 달려가 대릉하에서 합군하였다.

밤에 금주를 포위하였고 명군이 아지거의 영을 기습하였는데 안개로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자 

아지거가 엄히 진을 치고 대기하였다.

맑은 기운이 내려오자 안개가 걷혀 문이 열린 것과 같았는데

급히 군대를 풀어 마구 들이쳤고 명 비장 1명과 갑주와 무기와 더불어 말 200여 마리를 획득했다.

상이 금 술잔에 술을 부어 친히 위로하였고 위성방략(포위전 대장)을 제수하였다.

거듭 명이 증병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상이 명하여 양구리는 팔기 바야라병의 반을 인솔하여 이로써 증원하게 하였다.

조대수의 동생 조대필이 아군 가운데로 정찰 기병을 보내 상의 앞에 근접하니 상이 갑옷을 입고 더불어 싸웠다.

아지거가 말을 달려 명군의 보기병과 뒤섞였는데 분격하여 물리쳤고 명 비장 1명을 참하였다.

상이 아지거에게 군을 주어 통솔하게 하였고 명 감군 도장춘이 구원하여 이르니

또 대릉하에서 싸워 과반을 죽이고 북쪽으로 40리를 추격했다.

1632년에 차하르 정벌전에 종군하였는데 린단 칸이 달아났다.

상이 군을 옮겨 명을 정벌하였는데 아지거로 하여금 좌익과 몽고군을 통솔하여 대동과 선부를 약탈하게 하였는데 

장가구에 저축한 명군 호궤용 재물을 모두 획득하였다.

1633년에 통원보를 지키고 항장 공유덕을 맞이하였고 명군과 더불어 조선군을 막았다.

조서를 내려 명, 조선, 차하르 3나라 중 어느 곳을 먼저 공격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아지거는 응당 명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아바타이와 함께 산해관을 공략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깊게 들어가지 않은 것을 꾸짖으니 아지거가 말하길

「신은 말을 쉬게하고 군량을 기다리고자 하였으나 여러 버이러들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상이 말하길

「네가 만약 돌아오지 않겠다 고집을 부렸다면 여러 버이러들이 장차 너를 버리고 오지 않았겠느냐?」

1634년에 명 정벌전에 종군하여 보안을 함락하였고 영구를 공략했다.


요약.

아지거는 누르하치와 우라 아바하이(4대 암바 푸진)사이에서 1605년 출생했다.

도르곤과 도도가 모두 동복동생이다.

누르하치 사후 다이샨과 홍 타이지는 아버지의 유언을 빌어 아바하이에게 순장을 강요하였고

아바하이는 자식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장된다.

홍 타이지는 아지거, 도르곤, 도도를 친 자식처럼 돌보았다.

그러나 도르곤과 도도는 처음부터 버이러에 임명된데 반해 아지거는 타이지에 임명되는 등 동생들에 비해 지위가 낮았다.

아지거 또한 21세부터 전쟁에 장수로 활약하여 1625년엔 몽고 차하르, 

1626년에 몽고 칼카, 자루트를 정벌전에 참여하여 마침내 버이러에 임명되었다.

1627년엔 아민을 따라 정묘호란에 참전하였고 이후 명과의 전투에서도 활약한다.

1629년 1차 북경 포위전에도 참전하여 명 본토로 들어가 조솔교를 참수하는 등 활약을 펼쳤다.

1633년 홍 타이지는 제장회의를 통해 명, 조선, 차하르 3곳 중 먼저 공략해야 할 곳을 물었는데 

아지거는 명을 공격해야 한다 주장하였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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