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대학살 6부-함락1일차(3) 살육의 밤 공포에 떨다! 병자호란 이야기

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부-도르곤<사가법 선생! 같이 갑시다!>

2부-도도<반항하는 양주성을 도륙 냈나이다!>

3부-함락 하루 전...잔치를 벌이다

4부-함락1일차(1) 낙성임박! 이중인격자 사가법!

5부-함락1일차(2) 아내에게 자살을 권유하다!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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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 中

予趨出,望北來數騎皆按轡徐行,遇迎王師者,即俯首若有所語。
是時,人自
守,往來不通,故雖違咫尺而聲息莫聞,迨稍近,始知逐戶索金也。
然意頗不奢,稍有所得,即置不問,或有不應,雖操刀相向,
不及人,後乃知有捐金萬兩相獻而卒受斃者,揚人導之也。
次及予楣,一騎獨指予呼後騎曰:

我索此藍衣者。」

後騎方下馬,而予已飛遁矣;後騎遂棄餘上馬去,予心計曰:

「我粗服類人,何獨欲予?」

已而予弟適至,予兄亦至,因同謀曰:

「此居左右皆富賈,彼亦將富賈我,奈何?」

遂急從僻逕託伯兄率婦等冒雨至仲兄宅。
仲兄宅在何家墳後,胕腋皆窶人居也。
予獨留後以觀動靜,俄而伯兄忽至曰:

「中衢血濺矣,留此何待?予伯仲生死一處,亦可不恨。

予遂奉先人神主偕伯兄至仲兄宅,當時一兄一弟,一嫂一侄,又一婦一子,二外姨,一內弟,同避仲兄家。
天漸暮,敵兵殺人聲已徹門外,因乘屋暫避;

雨尤甚,十數人共擁一氈,絲髮皆濕;

門外哀痛之聲悚耳懾魄,延至夜靜,乃敢扳檐下屋,敲火炊食。
城中四周火起,近者十餘處,遠者不計其數,赤光相映如雷電,闢卜聲轟耳不

又隱隱聞擊楚聲,哀顧斷續,慘不可狀。
飯熟,相顧驚怛不能下一箸,亦不能設一謀。
予婦取前金碎之,析
四,兄弟各藏其一,髻履衣帶內皆有;

婦又覓破衲敝履予易訖,遂張目達旦。
是夜也,有鳥在空中如笙簧聲,又如小兒呱泣聲者,皆在人首不遠,後詢諸人皆聞之

내가 촉출(趨出)하여 망북(望北)하니 수기(數騎)가 래(來)하였는데 모두 안비(按轡/고삐를 잡아당김)하고 서행(徐行)하였고,

왕사(王師)를 우영(遇迎)한 자(者)가 곧 부수(俯首/머리를 숙임)하고 소어(所語)가 있는 것 같았다.

이때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수(守)하기 위하여 왕래(往來)가 불통(不通)하였는데,

이런 연고(故)로 비록 지척(咫尺)으로 위(違/떨어짐)하여도 성식(聲息/숨소리)이 막문(莫聞/들리지 않음)하였고,

점차 가까이 이르자, 비로소 축호(逐戶/집집마다)로 색금(索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意)는 자못 부사(不奢/오만하지 않음)한듯 하였고, 약간 소득(所得) 있으면, 곧 치(置/내버려 둠)하고 불문(不問)하였는데,

혹(或) 불응(不應)이 있으면, 비록 조도(操刀/칼을 쥠)하고 상향(相向/상대방을 향함)하였으나,

오히려 인(人)에는 불급(不及)하였는데, 후(後)에 이에 금(金) 만냥(萬兩)을 연(捐/바침)하여 양헌(相獻/빌고 헌상함)하였으나 

끝내 수폐(受斃/죽음을 받음)한 자(者)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양인(揚人)이 도지(導之)하였다.

다음으로 내 미(楣/처마)에 이르자, 1기(騎)가 홀로 지여(指予)하여 호(呼)한 후(後)에 기(騎)가 말하길

「우리는 이 남의(藍衣)한 자(者)를 색(索)한다!」

후기(後騎)가 바야흐로 하마(下馬)하였는데, 나는 이미(已) 비둔(飛遁/나는 듯 달아남)하였다.

후기(後騎)가 마침내 기여(棄餘/나머지를 버림)하고 상마(上馬)하여 거(去)하였는데, 여심(予心)으로 계(計)하여 말하길

「나의 조복(粗服/거칠고 값싼 의복)은 향인(鄉人)의 유(類)인데, 어찌 유독 나에게 달라하는가?

머지않아 내 동생이 적지(適至/때마침 도착함)하였는데, 내 형(兄) 역시(亦) 이르렀고,

이로 인(因)하여 동모(同謀)하여 말하길

「이 거(居)의 좌우(左右)가 모두 부가(富賈/부유한 상인)인데, 저쪽이 역시(亦) 장차(將) 나를 부가(富賈)라 할 것이니, 

  어찌해야 하나?

마침내 급히(急) 백형(伯兄/맏형)에게 탁(託)하여 벽경(僻逕/궁벽하고 좁은 길)을 종(從)하여

부(婦) 등(等)을 인솔(率)하고 모우(冒雨/비를 무릅씀)하고 중형(仲兄/둘째형)의 댁(宅)에 이르렀다.

중형(仲兄) 댁(宅)은 하가(何家) 분후(墳後/무덤 뒤)에 있었는데, 

주액(胕腋/팔꿈치와 겨드랑이)이 모두 구인(窶人/가난한 사람)의 거(居)였다.

나는 홀로 유후(留後)하여 이로써 동정(動靜)을 관(觀)하였는데, 갑자기 백형(伯兄)이 홀지(忽至)하여 말하길

「중구(中衢/가운데 네거리)가 혈천(血濺/피가 흩뿌려짐)하였는데, 남아 어찌 이를 기다리느냐?

  나와 백중(伯仲/맏이와 둘째)의 생사(生死)가 일처(一處)하다면 역시(亦) 가히(可) 불한(不恨)하다!

나는 마침내 선인(先人)의 신주(神主)를 봉(奉)하여 백형(伯兄)과 함께 중형(仲兄) 댁(宅)에 지(至)하였는데,

당시(當時) 1 형(兄)과 1 제(弟), 1 수(嫂)와 1 질(侄), 또한 1 부(婦)와 1 자(子), 2 외이(外姨/처제),

1 내제(內弟/처남), 중형가(仲兄家)로 동피(同避)하였다.

천(天)이 점차(漸) 모(暮/저묾)하였는데, 적병(敵兵)이 살인(殺人)하는 성(聲)이 이미(已) 문외(門外)에 철(徹/꿰뚫음)하였고,

이로 인(因)하여 승옥(乘屋)하여 잠피(暫避)하였다.

우(雨)가 우심(尤甚)하였는데, 십수인(十數人)이 1 전(氈/담요)를 공옹(共擁/함께 낌)하였고, 

사발(絲髮/실과 터럭)이 모두 습(濕/젖음)하였다.

문외(門外)에서 애통(哀痛)의 성(聲)이 송이(悚耳/귀를 두렵게 함)하고 섭백(懾魄/두려워 넋이 나감)하였고,

야정(夜靜/고요한 밤)에 이르도록 연(延/이어짐)하였는데,

이에 감(敢/용기를 냄)하여 반첨(扳檐/처마를 끌어당김)하고 하옥(下屋/집으로 내려감)하였고,

고화(敲火/부싯돌을 쳐 불을 핌)하고 취식(炊食/밥을 지음)하였다.

성중(城中)의 사주(四周/주위)에 화기(火起)하였는데, 근자(近者)는 십여처(十餘處)였고, 

원자(遠者)는 그 수(數)를 불계(不計)하였는데, 적광(赤光)이 상염(相映/서로 비춤)함이 뢰전(雷電/천둥과 번개)과 같았고,

벽복성(闢卜聲/나무가 갈라지는 소리)이 굉이(轟耳/귀를 울림)함이 부절(不絕)하였다.

또 은은(隱隱)히 격초(擊楚/죽임을 당해 고통스러운 소리)의 성(聲)이 문(聞)하였고,

애고(哀顧/애처롭게 돌봄)가 단속(斷續/끊어졌다 이어졌다 함)하였으며, 참혹(慘)하여 상(狀/형용함)함이 불가(不可)하였다.

반숙(飯熟/밥이 익음)하자, 상고(相顧/서로를 돌아봄)하고 경달(驚怛/매우 놀람)하여 

일저(一箸/젓가락 하나)도 하(下/손댐)함이 불능(不能)하였고, 또한 일모(一謀)의 설(設)도 불능(不能)하였다.

내 부인(婦)이 전취(取前)한 금(金)을 쇄지(碎之/부숨)하고 석(析/쪼갬)하여 사(四)로 하였고,

형제(兄弟)가 각각(各) 그 1을 장(藏/감춤)하였고, 계리(髻履/상투와 신발) 및 의대(衣帶/옷과 띠) 내(內)에 모두 있었다.

부인(婦)이 또 피납(破衲/해진 옷)과 폐리(敝履/헌신짝)를 멱(覓/찾음)하여 나에게 역(易)함을 흘(訖/마침)하자,

마침내 장목(張目/눈을 부릅뜸, 뜬눈)하고 달단(達旦/아침에 이름)하였다.

이밤에, 공중(空中)에 있는 조(鳥)가 있었는데 마치 생황(笙簧/관악기)의 성(聲)과 같았고,

또 소아(小兒)의 고읍(呱泣/아이 우는 소리)의 성(聲)과 같았는데, 대개(皆) 인수(人首/사람의 머리)와 

불원(不遠/멀지 않음)에 있었고, 후(後)에 제인(諸人)에게 순(詢/물어봄)하니 모두 문지(聞之)하였다.


내가 서둘러 나가서 북쪽을 바라보니 여러 기가 왔는데 모두 고삐를 잡아당겨 서행하였고

왕의 군대를 맞이한 자가 곧 머리를 숙이고 말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이때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왕래가 통하지 않았는데 

이런 연고로 비록 지척으로 떨어져 있어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점차 가까이 이르자 비로소 집집마다로 금을 수색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뜻은 자못 오만하지 않은 듯하였고 약간 얻은 게 있으면 곧 내버려 두고 더 이상 묻지 않았는데

혹 불응하면 비록 칼을 쥐고 상대방을 향하였으나 오히려 사람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후에 금 1만 냥을 바치고 빌었으나 끝내 죽임을 당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양주인이 인도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내 처마에 이르자 기병 1명이 홀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친 후에 기병이 말하길

「우리는 이 남색 옷을 입은 자를 수색한다!」

뒤에 있던 기병이 바야흐로 말에서 내렸는데 나는 이미 나는 듯 달아났다.

뒤에 있던 기병이 마침내 나머지를 버리고 말을 타고 가버렸는데 나는 속으로 헤아려 말하길

「나의 거칠고 값싼 의복을 입은 촌사람의 행색인데 어찌 유독 나에게 달라하는가?」

머지않아 내 동생이 때마침 도착하였고, 내 형 또한 이르렀는데 이로 인하여 서로 모의하여 말하길

「이 집은 좌우가 모두 부유한 상인으로 저들이 또한 장차 나를 부유한 상이라 여길 것이니 어찌해야 하나?」

마침내 급히 맏형에게 부탁하여 궁벽하고 좁은 길을 따라 부인 등을 인솔하고 비를 무릅써 둘째형의 집에 이르렀다.

둘째형 집은 하씨 집안 무덤 뒤에 있었는데 팔꿈치와 겨드랑이가 모두 가난한 사람의 거처였다.

나는 홀로 뒤에 남아 이로써 동정을 살폈는데 갑자기 맏형이 홀연히 이르러 말하길

「가운데 네거리가 피로 흩뿌려졌는데 남아서 어찌 이를 기다리겠느냐?

  나와 맏이와 둘째의 생사가 한 곳이라면 또한 가히 한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마침내 조상의 신주를 받들어 큰형과 함께 둘째형 댁에 이르렀는데

당시 형 1명, 동생 1명, 형수 1명, 조카 1명, 부인 1명, 아들 1명, 처제 2명, 처남 1명이 둘째형의 집으로 함께 피하였다.

하늘이 점차 저물었는데 적병이 살인하는 소리가 이미 문밖을 꿰뚫었고 이로 인하여 지붕 위로 올라가 잠시 피하였다.

비가 더욱 심하였는데 십수인이 담요 한 장을 함께 덮었고 옷과 털이 모두 젖었다.

문밖에서 애통의 소리가 귀를 두렵게 하였고 넋이 나간듯하였는데 고요한 밤에 이르도록 이어졌다.

이에 용기를 내 처마를 잡고 집으로 내려갔고 부싯돌을 쳐 불을 피고 밥을 지었다.

성중의 주위에 불이 일어났는데 가까운 곳은 십여 곳이었고 먼 곳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붉은색이 서로 비추는 것이 천둥과 번개와 같았고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귀에 울렸다.

또 은은히 죽임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렸고 애처로운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여 참혹하여 형용할 수가 없었다.

밥이 익자 서로를 돌아보니 매우 놀라 젓가락 하나도 손대지 못하였고 또한 하나의 계책도 세울 수가 없었다.

내 부인이 전에 취한 금을 부숴 4개로 쪼개 형제가 각각 그 한 개씩을 감췄고 상투, 신발, 옷, 띠 안에 모두 넣었다.

부인이 또 해진 옷과 헌신짝을 찾아 나에게 바꾸게 하였고 마침내 뜬눈으로 아침에 이르렀다.

이 밤에 공중에 새가 있었는데 마치 생황(관악기)의 소리와 같았고 또 어린아이 우는 소리와 같았는데

대개 사람 머리 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후에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두 들었다 하였다.


요약.

요약.

1645년 4월 25일 양주성내 서쪽 벽에 살던 왕수초의 집 근처로 청군 기병이 왔다.

팔기군들은 집집마다 금을 수색하고 있었는데 살인은 하지 않았다.

왕수초의 집 근처에 온 청군은 왕수초를 수색하려 하였고 이에 왕수초는 집으로 달아난다.

마침 왕수초의 형과 동생 가족도 왕수초의 집에 왔고 세 가족은 둘째형의 집으로 도망친다.

둘째형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던 동네로 그곳이 안전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날이 저물자 양주성내 곳곳에서 살인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왕수초 일행은 겁을 먹고 지붕 위로 피신한다.

비가 많이 내렸는데 일행은 밤새 비를 맞으며 공포에 떨었다.

점차 살육의 소리가 줄어들자 일행은 용기를 내 집으로 내려와 밥을 지었다.

이때 양주성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나무 타는 소리와 고통스러운 소리가 썩여 더욱 공포에 떨었고 

밥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였다.

왕수초의 부인은 소지하고 있던 금을 4조각으로 나눠 일행들에게 나눠주었고 왕수초에게 해진 옷을 입혀주었다.

이날 밤에 양주성에는 어린아이 우는 소리를 내는 새가 날아다녔다.


-7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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