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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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廿六日】
廿六日,頃之,火勢稍息。
天漸明,復乘高升屋躲避,已有十數人伏天溝內。
忽東廂一人緣牆直上,一卒持刃隨之,追躡如飛;
望見予眾,遂捨所追而奔予。
予惶迫,即下竄,兄繼之,弟又繼之,走百餘步而後止。
自此遂與婦子相失,不復知其生死矣。
諸黠卒恐避匿者多,紿眾人以安民符節,不誅,匿者競出從之,共集至五六十人,婦女參半,兄謂余曰:
「我落落四人,或遇悍卒,終不能免;
不若投彼大群勢眾則易避,即不幸,亦生死相聚,不恨也。」
當是時,方寸已亂,更不知何者為救生良策?共曰唯唯,相與就之。
領此者三滿卒也,遍索金帛,予兄弟皆罄盡,而獨遺予未搜;
忽婦人中有呼予者,視之乃余友朱書兄之二妾也,予急止之。
二妾皆散髮露肉,足深入泥中沒脛,一妾猶抱一女,卒鞭而擲之泥中,旋即驅走。
一卒提刀前導,一卒橫槊後逐,一卒居中,或左或右以防逃逸。
數十人如驅犬羊,稍不前,即加捶撻,或即殺之;
諸婦女長索系頸,纍纍如貫珠,一步一蹶,遍身泥土;
滿地皆嬰兒,或襯馬蹄,或藉人足,肝腦塗地,泣聲盈野。
行過一溝一池,堆屍貯積,手足相枕,血入水碧赭,化為五色,塘為之平。
至一宅,乃廷尉永言姚公居也,從其後門直入,屋宇深邃,處處皆有積屍,予意此間是我死所矣;
乃逶迤達前戶,出街復至一宅,為西商喬承望之室,即三卒巢穴也。
入門,已有一卒拘數美婦在內簡檢筐篚彩緞如山,見三卒至,大笑,即驅予輩數十人至後廳,留諸婦女置旁室;
中列二方幾,三衣匠一中年婦人製衣。
婦揚人,濃抹麗妝,鮮衣華飾,指揮言笑。
欣然有得色,每遇好物,即向卒乞取,曲盡媚態,不以為恥;
予恨不能奪卒之刀,斷此淫孽。
卒嘗謂人曰:
「我輩征高麗,擄婦女數萬人,無一失節者,何堂堂中國,無恥至此?」
嗚呼,此中國之所以亂也。
【4월 26일】
26일에, 얼마 있지 않아, 화세(火勢)가 초식(稍息/점차 없어짐)하였다.
천(天)이 점차(漸)) 명(明)하자, 다시 승옥(升屋)을 승고(乘高/높이 오름)하여 타피(躲避/피하여 숨음)하였는데,
이미(已) 십수인(十數人)이 천구(天溝/지붕의 낙수홈통) 내(內)에 복(伏)하여 있었다.
홀연히(忽) 동상(東廂/동쪽 행랑)에서 일인(一人)이 연장(緣牆/담장)으로 직상(直上)하니,
일졸(一卒)이 지인(持刃/칼을 쥠)하여 수지(隨之/따름)하였고, 날듯이 추섭(追躡/뒤를 밟아 쫓음)하였다.
여중(予眾)을 망견(望見)하였는데, 마침내 소추(所追)를 사(捨/내버려 둠)하고 나에게 분(奔/달림)하였다.
나는 황박(惶迫/당황하고 급박함)하여 즉시(即) 하찬(下竄/내려가 달아남)하였고,
형(兄)이 계지(繼之)하였으며, 제(弟) 또한 계지(繼之)하였고, 백여보(百餘步)를 주(走)한 후(後)에 지(止)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부자(婦子)와 더불어 상실(相失)하였고, 다시 그 생사(生死)를 지(知)하지 못하였다.
여러 힐졸(黠卒/교활한 병졸)이 피닉자(避匿者)가 다(多)함을 공(恐)하여,
중인(眾人)을 안민(安民/백성을 평안하게 함)의 부절(符節/증표)로써 부주(不誅)한다 태(紿/속임)하여
닉자(匿者)가 경출(競出/다투어 나옴)하여 종지(從之)하였는데, 공집(共集)하여 5~60인에 이르렀고,
부녀(婦女)가 참반(參半/반을 헤아림)이었는데, 형(兄)이 나에게 위(謂)하여 말하길
「우리는 낙낙(落落/드문드문 떨어짐)한 4인(人)이니, 혹(或) 한졸(悍卒)을 우(遇)하면 종내(終) 면(免)함이 불능(不能)할 것이다.
저 대군(大群)과 세중(勢眾)에 투(投/의지함)함만 못하니, 즉(則) 이피(易避/피하기가 쉬움)하거나,
즉(即) 불행(不幸)하다면, 역시(亦) 생사(生死)를 상취(相聚)할 것이니, 불한(不恨)이다.」
이때를 당(當)하여 방촌(方寸/마음)이 이미(已) 난(亂)하였고,
더욱이 하자(何者)가 구생(救生/생명을 구함)할 양책(良策)을 알 수 있었겠는가?
유유(唯唯/네네)라 공왈(共曰)하였고, 상여(相與)하여 취지(就之/나아감)하였다.
이에 영(領)하는 자(者)는 3 만졸(滿卒)이었고, 금백(金帛)을 편색(遍索/모두 수색함)하였는데,
나의 형제(兄弟)는 모두 경진(罄盡/모두 빼앗김)하였는데, 나만 미수(未搜/수색하지 않음)하여 독유(獨遺/홀로 남김)하였다.
홀연히(忽) 부인(婦人) 중(中)에 나를 호(呼)하는 자(者)가 있었는데,
시지(視之)하니 곧 여우(余友) 주서형(朱書兄)의 2첩(妾)이었고, 나는 급(急)히 지지(止之)하였다.
2첩(妾)이 모두 산발(散髮)하고 노육(露肉/살이 드러남)하였고, 족(足)은 이중(泥中/진흙 속)에 심입(深入)하여
몰경(沒脛/정강이가 빠짐)하였는데, 1첩(妾)은 오히려 1녀(女)를 포(抱/안음)하고 있었는데,
졸(卒)이 편(鞭/채찍질함)하고는 이중(泥中)으로 척지(擲之/내던짐)하였고, 선(旋)하여 즉(即) 구주(驅走/몰아서 감)하였다.
1 졸(卒)이 제도(提刀/칼을 듦)하여 전도(前導/앞길을 인도함)하였고,
1 졸(卒)은 횡삭(橫槊/창을 옆으로 놓음)하여 후축(後逐/뒤따라감)하였고,
1 졸(卒)은 거중(居中)하였는데, 혹(或) 좌(左)나 혹(或) 우(右)로 이로써 도일(逃逸/도망감)을 방(防/막음)하였다.
수십인(數十人)이 견양(犬羊)을 구(驅/몰고 감)함과 같았는데, 문득 부전(不前)하면 즉(即) 추달(捶撻/때리고 매질함)을
가(加)하였고, 혹(或) 즉(即) 살지(殺之)하였다.
여러 부녀(婦女)가 장삭(長索/긴 동아줄)으로 계경(系頸/목에 이어 맴)하였는데,
유유(纍纍/밧줄로 맴)한 것이 관주(貫珠/구슬을 뀀)와 같았고, 일보(一步)하면 일궐(一蹶/한 번 넘어짐)하였고,
이토(泥土/진흙)에 편신(遍身/몸에 두루 퍼짐)하였다.
지(地)는 모두 영아(嬰兒/젖먹이)로 만(滿/가득 참)하였고, 혹(或) 마제(馬蹄/말굽)에 친(襯/접근함)하거나,
혹(或) 인족(人足)에 적(藉/짓밟음)하여, 간뇌(肝腦)가 도지(塗地/땅에 칠함)하였고,
읍성(泣聲/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이 영야(盈野/들에 가득참)하였다.
일구(一溝/하나의 도랑)와 일지(一池/하나의 연못)를 행과(行過/지나감)하였는데,
퇴시(堆屍/시체를 쌓아둠)가 저적(貯積/많이 쌓임)하였고, 수족(手足)이 상침(相枕/서로 드러누움)하였고,
혈(血)이 입수(入水)하여 벽자(碧赭/푸른빛이 붉게 됨)하였고, 화(化)하여 오색(五色)이 되었으며, 당(塘/못)이 평평(平)해 졌다.
일댁(一宅)에 지(至)하였는데, 곧 정위(廷尉) 영언요(永言姚) 공(公)의 거(居)였는데, 종(從)하여 그 후문(後門)의 직입(直入)
하였고, 옥우(屋宇/가옥)가 심수(深邃/많이 깊숙함)하였는데, 처처(處處)가 모두 적시(積屍/겹겹이 쌓인 시체)가 있었고,
여의(予意)가 차간(此間/이때)가 바로 나의 사소(死所)이구나!
곧 위이(逶迤/구불구불함)하여 전호(前戶/앞집)에 도달(達)하였는데, 출가(出街/거리로 나감)하여 다시 일댁(一宅)에
지(至)하였고, 서상(西商) 교승망(喬承望)의 실(室)이니, 즉(即) 3졸(卒)의 소굴(巢穴)이었다.
4월 26일
26일에 얼마 있지 않아 불기운이 점차 없어졌다.
하늘이 점차 밝아지자 다시 지붕 위로 올라가 피하여 숨었는데 이미 십수인이 지붕의 낙수홈통 안에 엎드려 있었다.
홀연히 동쪽 행랑채에서 한 사람이 담장으로 곧장 올라왔는데, 병졸 1명이 칼을 쥐고 따라와 날듯이 쫓아왔는데
우리 무리를 보더니 마침내 추격하던 자를 내버려 두고 나에게 달려왔다.
나는 당황하고 급박하여 즉시 내려가 달아났고 형이 따라왔으며 동생 또한 따라왔는데 100 여보를 도주한 후에 멈추었다.
이로부터 마침내 부인과 아들을 잃어버렸고 다시 그 생사를 알지 못하였다.
여러 교활한 병졸이 숨은 자들이 많을까 두려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백성을 평안하게 한다는 증표로써 죽이지 않는다
속였는데, 숨은 자들이 다투어 나가니 따라 나오는 자가 모두 합하여 5~60인에 이르렀고,
부녀자가 반을 헤아렸는데 형이 나에게 일컬어 말하길
「우리는 드문드문 떨어진 4명이니 혹 사나운 병졸을 만나면 끝내 화를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저 큰 무리에 의지함만 못하니 즉 피하기가 쉬울 것이고, 즉 운이 좋지 못하다면
또한 생사를 함께 할 것이니 한이 없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마음이 이미 어지러웠고 더욱이 어떤 자도 생명을 구할 좋은 방책을 알 수 있었겠는가?
네, 네라고 모두 말하였고 함께 나아갔다.
이에 거느리는 자는 세 명의 만주 병졸이었고 금과 비단을 모조리 수색하였는데
나의 형과 동생은 모두 빼앗겼고 나만 미처 수색하지 않아 홀로 (금을) 남기게 되었다.
홀연히 부인들 중에 나를 부르는 자가 있었는데 바라보니 곧 나의 친구 주서형의 두 첩이었고 나는 급히 저지하였다.
두 첩은 모두 산발하고 살이 드러났으며 발은 진흙 속에 깊게 들어가 정강이가 빠졌는데 한 첩은 오히려 딸 하나를 안고 있었다.
병졸이 채찍질을 하여 진흙 속으로 내던졌고 돌아와 즉시 몰아서 갔다.
병졸 1명은 칼을 들고 앞길을 인도하였고, 병졸 1명은 창을 옆으로 들고 뒤따라 왔으며
병졸 1명은 그중에 있으면서 혹 왼쪽이나 혹 오른쪽이나 이로써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
수십인이 개와 양을 몰고 가는 것과 같았는데 문득 앞으로 가지 않으면 즉시 때리고 매질을 가하였고 혹은 즉시 죽였다.
여러 부녀자가 긴 동아줄을 목에 이어 맸는데 밧줄로 맨 것이 구슬을 꿴 것과 같았고
1보를 가면 한 번 넘어져 진흙이 몸에 두루 묻었다.
땅은 모두 젖먹이로 가득 찼고 혹은 말굽에 치이거나 혹은 사람 발에 짓밟혀 간과 뇌가 땅에 칠해졌고
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가 들에 가득 찼다.
하나의 도랑과 하나의 연못을 지나갔는데 시체를 쌓아둔 것이 많았고 손과 발이 서로 드러누워 있었으며,
피가 물에 들어가 푸른빛이 붉게 되었고 오색으로 변화하였으며, 못이 평평해졌다.
한 집에 이르렀는데 곧 정위 영언요 공의 거주지였고 따라가 그 후문으로 곧바로 들어갔는데
가옥이 깊숙하였고 곳곳에 모두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으니 나는 이때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구나 생각하였다.
곧 구불구불하게 나아가 앞집에 도달하였고 거리로 나가 다시 한 집에 이르렀는데
서양 상인 교승망의 저택으로 즉 병졸 세 명의 소굴이었다.
요약.
1645년 4월 26일 양주성 함락 2일차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왕수초 일행은 날이 밝자 다시 지붕 위로 피신한다.
지붕 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이 청군을 피해 담장을 거쳐 지붕으로 올라왔는데 이를 병졸 1명이 추격해서 올라왔고 곧 왕수초 일행을 보게 된다.
병졸은 즉각 왕수초 일행을 향해 달려왔고 다급한 왕수초는 처자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왕수초의 형제들 또한 왕수초와 함께 도주하였고 100 여보를 도주하자 병졸이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마침 청군은 투항하는 자는 살려준다 외치고 다녔고 약 5~60 여명이 이 말을 듣고 뛰쳐나왔다.
이중 반수가 부녀자들이었는데 왕수초의 형은 4명이서 돌아다녀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며 이들을 따라가자 말한다.
이들이 무리에 합류하자 만주족 병사 3명이 이들의 몸을 수색하여 금과 비단을 빼앗았다.
다행히 병사들은 왕수초를 수색하지 않아 왕수초는 금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때 여자 2명이 왕수초를 알아보고는 불렀는데 왕수초는 급히 그녀들을 제지하였다.
그녀들은 왕수초의 친구 주서형의 첩실들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산발하고 살이 드러나 있었는데 부인 1명은 딸 1명을 안고 있었다.
만주 병사는 이를 보더니 채찍질을 하여 어린 딸을 진흙 속에 내던지고 60인의 목에 동아줄을 이어 매고
이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굴비 엮듯이 끌려가는 통에 여자들은 계속 넘어졌는데 만주 병사는 즉각 때리고 채찍질을 가하였다.
끌려가다 보니 진흙길에는 갓난아이들이 셀 수 없이 널브러져 있었으며 모두 말굽과 사람 발에 밟혀
간과 뇌가 땅에 흩뿌려져 있었다.
끌려가는 중에 본 연못과 도랑에는 모두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었고 물은 모두 붉게 변해 있었다.
곧이어 일행은 서양 상인 교승망의 저택으로 끌려왔는데 이곳이 이 병사들의 소굴이었다.
-8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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