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주위 이만주는 유자광이 참수하였나?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1467년 건주위 토벌전은 의주목사 우공이 대창산에서 사냥하다가 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조선군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져

조선 자체적으로 건주위 토벌을 논하는 와중에 명 조정에서도 건주 토벌전에 조선군의 참여를 원하는 칙서가 내려옵니다.

이에 세조는 1467년 9월 군사 1만 명을 동원하여 북벌을 단행합니다.

군사 동원은 비교적 순조로웠는데 이미 1달 전에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장수와 군사들이었기 때문이었지요.

물론 이시애 토벌전에 동원된 병력 중에 일부는 피로하다 하여 평안도 병력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군은 9월 24일 1만여 군을 셋으로 나누어 

강순은 중군 강병 6백+궁수부대, 어유소는 좌군 5400명, 남이는 우군 4300명을 통솔하여 25일 압록강을 도강합니다.

29일에 이만주의 거처에 도착한 조선군은 이만주 건주 부락을 모조리 불태우고 30일에 올미부로 군을 옮겨 

이곳 또한 초토화합니다.

그리고 건주위 추장 이만주 등 수십명을 참수하고 <조선군이 명군이 오지 않아 먼저 토벌했노라>라는 방문을 붙여놓고 

회군합니다.


이때 이만주를 직접 참수한 장수가 유자광이라고 하네요.


유자광은 종2품 출신의 무관 유규의 서자로 그 가문은 나름 잘 나가는 집안이었고,

유자광 도한 무공 뿐한 아니라 문장에도 소질이 있었나 봅니다.

이시애 난이 발발하자 궁을 지키던 갑사였던 유자광은 세조에게 정병 300명만 주면 이시애의 목을 따오겠다 

호언장담하기도 하였지요.

무인 기질이 강했던 세조 또한 호쾌한 유자광을 나름 총애한 모양입니다.

유자광은 세조 앞에서 직접 무예를 선보이며 용력을 자랑하였고, 세조 또한 호방한 기질로 

즉각 유자광에게 5품 관직을 하사하고 장수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장수에 임명된 유자광은 건주위 토벌전에도 동원되어 직접 이만주의 목을 쳤다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의 용력으로 1년 만에 29세의 나이로 정3품 당상관으로 출세한 유자광을 

기존 사대부들은 좋게 보질 않았고 틈만 나면 유자광을 견제합니다.

유자광 또한 이들에게 큰 원한을 품었지요.

이후 유자광은 성종, 연산군의 각종 사화에 가담하였고, 중종반정에도 참가하는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지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대동수경(大東水經) 中

辛卯,右廂涉婆豬江,南怡及前鋒李克均等,攻李豆里ㆍ右納哈部落,陷之。

陣將柳子光攻李滿住部落,斬李滿住ㆍ右納哈等二十四級,退陣于防墻。

節】 魚有沼襲多會坪滅之,衛將禹貢ㆍ李叔ㆍ琦筆踰兀彌府,又勝之。

十月,左右軍皆還。

1467년 9월 29일에 우익이 파저강을 건넜고, 남이와 더불어 선봉 이극균 등은 이두리, 우납합 부락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진장 유자광은 이만주 부락을 공격하여 이만주와 우납합 등 24급을 참하였고, 방장에 회군하였다.

어유소는 다회평을 기습하여 멸하였고, 위장 우공, 이숙, 기필은 올미부를 지나갔는데 또한 승전하였다.

10월에 좌우군이 모두 돌아왔다.


조선왕조실록 1488년 6월 4일 기사中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에 성 쌓는 일이 중요함을 상언하다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이 상언(上言)하기를,

(중략)

신이 정해년의 출정(出征)에 따라가서 건주(建州)의 이만주(李滿住)가 사는 부락(部落)을 보았는데, 

풀로 덮은 집이 6, 70집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만주(李滿住)는 건주(建州)를 통솔하는 자인데, 그 부락(部落)이 이와 같다면 

다른 부락의 잔폐(殘廢)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호사설 정건주위(征建州衛) 中

국초(國初)에 이만주(李滿住)ㆍ범찰(凡察)의 무리가 모두 강계부(江界府)에 가까이 접근했으니, 

만주(滿住)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곧 가한(可汗)의 호칭과 같은 것이다. 

할아비 아합출(阿哈出) 및 아비 석가노(釋家奴) 때부터 명(明) 나라에서 사성(賜姓)을 받았으니, 

이른바 이사성(李思誠)은 곧 아합출이고, 이현충(李顯忠)은 곧 석가노이다. 

사성(思誠)의 아들 맹가불화(猛哥不花)와 손자 초만답실리(椒滿答失里)는 많이 우리나라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뒤에 만주(滿住)는 유자광(柳子光)에게 격참(擊斬)되었다. 


조선왕조실록 1467년 6월 14일 기사中

유자광(柳子光)은 전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얼자(孽子)이니, 효용하고 민첩하여 기사(騎射)를 잘하고, 

서사(書史)를 알며, 문장을 잘 하였고, 일찍이 큰소리를 하여 기개(氣槪)를 숭상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467년 6월 15일 기사中

민발(閔發)ㆍ유자광(柳子光)을 불러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는 책략을 진달하게 하니, 

유자광이 대답하기를,

“가령 신에게 정병(精兵) 3백을 주시면, 이시애의 목을 매어서 대궐 아래에 초치할 수 있겠습니다.”

(중략)

임금이 웃으시고 명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극진히 즐기고는 파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467년 6월 28일 기사中

또 유자광(柳子光)에게 명하여 초안을 세우게 하여 그 재주를 시험하였더니, 유자광이 입성(立成)하였으므로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는, 인하여 그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당종(唐宗)은 호걸(豪傑)한 선비[土]를 대(待)함에 반드시 먼저 위엄과 분노를 더하여 그 기상을 꺾은 연후에야 맡겨서 

등용하였는데, 나는 그렇지 않고, 친애(親愛)할 따름이다. 이제 너를 임용하여 장수로 삼아, 1려(旅)를 이끌고 가서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게 하려 하나, 다만 너는 미천하므로, 미천한 자는 본디 위망(位望)이 없어 

사졸(士卒)이 따르지 못할까 두려운 까닭에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니, 너는 마땅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467년 6월 30일 기사中

유자광의 효용을 시험하다

임금이 유자광(柳子光)의 효용(驍勇)함이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불러 시험하니, 

한 번 뛰어서 섬돌 수급(數級)을 지나고, 또 능히 큰 기둥나무[大柱]를 잡고서 오르기를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 같으니, 임금이 겸사복(兼司僕) 등을 돌아다보고 이르기를,

“너희들에게 유자광과 같이 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또 시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489년 10월 28일 기사中

장령 정석견이 유자광을 장악원 제조로 삼은 것을 개정할 것을 청하다

(중략)

유자광은 비록 궁검(弓劍)과 문묵(文墨)의 재주는 있지만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협객(俠客)과 같습니다.

예악(禮樂)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는 것인데 

유자광에게 악(樂)을 맡아 보는 관직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개정하기를 청합니다.


류큐사신<조선 세조 전하의 활쏨씨는 천하무쌍일세!!!>

건주위 그 시작에 대해서


호걸은 호걸을 알아보는 법! 

                                    이놈 비록 서출이지만 맘에 쏙 드네.

                                    나도 부왕 앞에서 한 용력 자랑했지만..... 

                                    흑흑 아부지... 저를... 그냥... 왕으로...


유자광 : 전하 소신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할 겁니다! 

                              분명히 그럴 겁니다! 

                          머리도 힘도 저보다 딸리는 그 빌어먹을 샌님들을 모조리 치워드리지요!


어라? 나는 왜 소환? 

                 뭐 유자광이 이만주 치워준 덕에 선조님들이 건주위 냠냠 잘하긴 했지 ㅋㅋ

                 따지고 보면 내가 만주 된 것도 유자광 덕분이네 ㅋㅋ


<강홍립의 밀서 中>

-성안으로 가서 만주(滿住)를 뵈온 후에-

-대해(大海)라고 하는 자가 만주의 말을 신등에게 고하기를-

-만주가 먼저 마시고 신들을 마시게 하여-

-만주는 끝내 노한 얼굴빛을 하고-

-만주가 우리들이 행한 예로 화가 나서-


<이이첨의 상소 中>

-정문(呈文 공문)을 돌릴 때는 한(汗)이라 칭했고, 다른 기록에는 만주(滿住)라 칭했으니-


*만주국 : 만주 이 구룬[manju i gurun] : 만주의 나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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