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아민 열전 1부-정묘호란 조선의 왕이 되려하다!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누르하치의 친동생 슈르가치의 아들로 후금 4대 버이러 중 둘째(자친) 버이러였던

아민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도도아지거푸헝

하르졸(해란주)호오거망굴타이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15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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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敏,舒爾哈齊第二子。

歲戊申,偕褚英伐烏喇,克宜罕山城,俘其衆以歸。

歲癸丑,上伐烏喇,布占泰以三萬人拒,諸將欲戰,上止之。

阿敏曰:

「布占泰已出,舍而不戰,將奈何?」

上乃決戰,遂破烏喇。

天命元年,與代善、莽古爾泰及太宗並授和碩貝勒,號 「四大貝勒」,執國政。

阿敏以序稱二貝勒。

四年,明經略楊鎬大舉來侵,阿敏從上擊破明兵薩爾滸山。

復禦明總兵劉綎于棟鄂路,代善等繼之,陣斬綎。

還擊明將喬一琦,一琦奔固拉庫崖,與朝鮮將薑弘烈合軍。

阿敏攻之,弘烈降。

一琦自經死。

尋從上破葉赫。

六年,從上取瀋陽、遼陽。

鎮江城將陳良策叛附明將毛文龍,阿敏遷其民於內地。

文龍屯兵朝鮮境,阿敏夜渡鎮江,擊殺其守將,文龍敗走。

十一年,伐喀爾喀巴林部,取所屬屯寨。

伐紮嚕特部,俘其衆。

天聰元年,太宗命偕貝勒岳託等伐朝鮮,瀕行,上命並討文龍。

師拔義州,分兵攻鐵山,文龍所屯地也,文龍敗走。

進克定州,渡嘉山江,克安州、平壤。

復進次中和,朝鮮國王李倧使迎師。

阿敏與諸貝勒答書數其罪有七,力拒之。

師復進次黃州,倧復遣使來。

阿敏欲遂破其都城,諸貝勒謂宜待其大臣至,蒞盟許平。

總兵李永芳進曰:

「我等奉上命仗義而行,前已遺書言遣大臣蒞盟即班師,背之不義。」

阿敏怒,叱之退,師復進次平山,倧走江華島,遣其臣進昌君至軍,阿敏令吹角督進兵。

岳託乃與濟爾哈朗駐平山,遣副將劉興祚入江華島責倧。

倧遣族弟原昌君覺等詣軍,為設宴。

宴畢,岳託議還師,阿敏曰:

「吾恆慕明帝及朝鮮王城郭宮殿,今既至此,何遽歸耶?

我意當留兵屯耕,杜度與我叔侄同居于此。」

杜度變色曰:

「上乃我叔,我何肯遠離,何為與爾同居?」

濟爾哈朗亦力阻,諸貝勒乃定議許倧盟。

阿敏縱兵掠三日,乃還。

上迎勞于武靖營,賜禦衣一襲。

復從上伐明,圍錦州,攻寧遠,斬明步卒千餘。

아민(阿敏)은 서이합제(舒爾哈齊)의 제이자(第二子)이다.

무신년(戊申/1608년)에, 저영(褚英)과 함께 오라(烏喇)를 벌(伐)하였고, 의한산성(宜罕山城)을 극(克)하였는데,

그 중(衆)을 획(俘)하여 이로써 귀(歸)하였다.

계축년(癸丑/1613년)에, 상(上)이 오라(烏喇)를 벌(伐)하였는데, 포점태(布占泰)가 3만인(萬人)으로써 거(拒)하였고,

제장(諸將)이 욕전(欲戰)하였는데, 상(上)이 지지(止之)하였다.

아민(阿敏)이 말하길

「포점태(布占泰)가 이출(已出)하였으니, 사(舍/내버려둠)하고 부전(不戰)한다면, 장차(將) 내하(奈何)하는가?」

상(上)이 이에 결전(決戰)하였고, 마침내 오라(烏喇)를 파(破)하였다.

천명(天命/후금 1대 한 태조의 #1연호) 원년(1616년)에, 대선(代善), 망고이태(莽古爾泰) 및 태종(太宗)과 함께 

화석패륵(和碩貝勒)을 병수(並授)하였고, 「사대패륵(四大貝勒)」이라 호(號)하여, 국정(國政)을 집(執)하게 하였다.

아민(阿敏)이 서(序)로써 2패륵(貝勒)을 칭(稱)하였다.

[천명] 4년(1619년)에, 명(明) 경략(經略) 양호(楊鎬)가 대거(大舉) 내침(來侵)하였는데,

아민(阿敏)이 종상(從上)하여 명병(明兵)을 살이호산(薩爾滸山)에서 격파(擊破)하였다.

다시 명(明) 총병(總兵) 유정(劉綎)을 동악로(棟鄂路)에서 어(禦)하였으며,

대선(代善) 등(等)이 계지(繼之)하였고, 유정(綎)을 진참(陣斬)하였다.

환(還)하여 명장(明將) 교일기(喬一琦)를 격(擊)하였고, 교일기(一琦)는 고랍고애(固拉庫崖)로 분(奔)하였는데,

조선(朝鮮)의 장(將) 강홍렬(薑弘烈)과 더불어 합군(合軍)하였다.

아민(阿敏)이 공지(攻之)하자, 강홍렬(弘烈)이 항(降)하였다.

교일기(一琦)가 스스로 경사(經死/목매어 죽음)하였다.

거듭 종상(從上)하여 엽혁(葉赫)을 파(破)하였다.

[천명] 6년(1621년)에 종상(從上)하여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을 취(取)하였다.

진강성(鎮江城) 장(將) 진량책(陳良策)이 배반(叛)하여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에게 부(附)하였는데,

아민(阿敏)이 그 민(民)을 내지(內地)에 천(遷)하였다.

모문룡(文龍)이 조선(朝鮮)의 경(境)에 둔병(屯兵)하였는데, 아민(阿敏)이 진강(鎮江)을 야도(夜渡)하여,

그 수장(守將)을 격살(擊殺)하였고, 모문룡(文龍)은 패주(敗走)하였다.

[천총] 11년(1626년)에, 객이객(喀爾喀) 파림부(巴林部)를 벌(伐)하였는데, 소속(所屬) 둔채(屯寨)를 취(取)하였다.

찰로특부(紮嚕特部)를 벌(伐)하여, 그 중(衆)을 부(俘)하였다. 

천총(天聰/후금 2대 한 태종의 #1연호) 원년(1627년)에, 태종(太宗)이 명(命)하여 패륵(貝勒) 악탁(岳託) 등(等)과 함께 

조선(朝鮮)을 정벌(伐)하였는데, 빈행(瀕行/곧 출발하려 함)하자, 

상(上)이 명(命)하여 아울러 모문룡(文龍)을 토벌(討)하게 하였다.

사(師)가 의주(義州)를 발(拔)하였고, 분병(分兵)하여 철산(鐵山)을 공(攻)하였는데,

모문룡(文龍)이 소둔(所屯)한 땅이었는데, 모문룡(文龍)이 패주(敗走)하였다.

진(進)하여 정주(定州)를 극(克)하였고, 가산강(嘉山江)을 도(渡)하여, 안주(安州)와 평양(平壤)을 극(克)하였다.

다시 진(進)하여 중화(中和)에 차(次)하였는데, 조선국왕(朝鮮國王) 이종(李倧/인조)이 사신(使)을 보내 영사(迎師)하였다.

아민(阿敏)이 제패륵(諸貝勒)과 더불어 그 죄(罪) 7가지를 수(數)하여 답서(答書)하여, 역거(力拒)하였다.

사(師)가 다시 진(進)하여 황주(黃州)에 차(次)하였는데, 이종(倧)이 다시 견사(遣使)하여 래(來)하였다.

아민(阿敏)이 마침내 그 도성(都城)을 파(破)하고자 하였는데, 

제패륵(諸貝勒)이 일컫길 의당(宜) 그 대신(大臣)의 지(至)를 대(待)하여 리맹(蒞盟/회맹함)하고 허평(許平)하여야 한다 하였다.

총병(總兵) 이영방(李永芳)이 진(進)하여 말하길

「아등(我等)은 상명(上命)을 봉(奉)하여 장의(仗義/의로움을 의지함)하여 행(行)하였으니,

  전(前)에 이미(已) 서언(書言)을 유(遺/남김)하였으니, 

  대신(大臣)을 견(遣)하여 리맹(蒞盟)한다면 즉(即) 반사(班師)해야 하며, 배지(背之)하면 불의(不義)하다.」

아민(阿敏)이 노(怒)하여, 질지(叱之/욕함)하며 퇴(退)하게 하였고, 사(師)가 다시 평산(平山)으로 진차(進次)하였는데,

이종(倧)이 강화도(江華島)로 주(走)하였고, 그 신(臣) 진창군(進昌君)을 견(遣)하여 지군(至軍)하였는데,

아민(阿敏)이 영(令)하여 취각(吹角/각을 붊)하여 진병(進兵)을 독(督)하였다.

악탁(岳託)이 이에 제이합랑(濟爾哈朗)과 함께 평산(平山)에 주(駐)하였고,

부장(副將) 유흥조(劉興祚)를 견(遣)하여 강화도(江華島)로 입(入)하여 이종(倧)을 책(責)하였다.

이종(倧)이 족제(族弟) 원창군(原昌君) 이각(覺) 등(等)을 견(遣)하여 예군(詣軍)하였는데,

설연(設宴)하였다.

연필(宴畢)하자, 악탁(岳託)이 환사(還師)를 의(議)하였는데, 아민(阿敏)이 말하길

「나는 명제(明帝)와 더불어 조선왕(朝鮮王)의 성곽(城郭)과 궁전(宮殿)을 항모(恆慕/항상 흠모함)하였는데,

  지금(今) 이윽고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급귀(遽歸)하겠는가?

  아의(我意)는 마땅히 유병(留兵)하고 둔경(屯耕/둔전을 경작함)할 것이니,

  두도(杜度)는 나와 더불어 숙질(叔侄)이니 이에 동거(同居)하겠노라!」

두도(杜度)가 변색(變色)하여 말하길

「상(上)이 곧 아숙(我叔)인데, 내가 어찌 감히 원리(遠離/멀리 떠남)하여, 어찌 너와 함께 동거(同居)하리오?」

제이합랑(濟爾哈朗) 역시(亦) 역조(力阻/힘껏 막음)하였고, 

제패륵(諸貝勒)이 이에 정의(定議)하여 이종(倧)과 맹(盟)을 허(許)하였다.

아민(阿敏)이 종병(縱兵)하여 삼일(三日)을 약(掠)하고, 이에 환(還)하였다.

상(上)이 무정영(武靖營)에서 영노(迎勞)하였고, 어의(禦衣) 1습(襲)을 사(賜)하였다.

다시 종상(從上)하여 벌명(伐明)하여, 금주(錦州)를 위(圍)하였고, 영원(寧遠)을 공(攻)하여,

명(明) 보졸(步卒) 천여(千餘)를 참(斬)하였다.



아민은 슈르가치의 2남이다.

1608년에 추옝과 함께 우라를 정벌하여 이한 산성을 함락하였는데 그 무리를 사로잡아 이로써 돌아왔다.

1613년에 상(누르하치)이 우라를 정벌하였는데 부잔타이가 3만명으로 항거하였고

여러 장수들이 싸우고자 하였는데 상이 저지하였다.

아민이 말하길

「부잔타이가 이미 나왔으니 내버려두고 싸우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오리까?」

상이 이에 싸우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우라를 격파하였다.

1616년에 다이샨, 망굴타이, 태종(홍 타이지)과 함께 호쇼이 버이러를 함께 제수하여

「사대패륵(四大貝勒)」이라 호칭하고 국정을 다스리게 하였다.

아민이 서열로써 둘째 버이러(자친 버이러)를 호칭하였다.

1619년에 명 경략 양호가 대거 내침하였는데 아민이 상을 따라 명군을 사르후 산에서 격파하였다.

다시 명 총병 유정을 동고 지역에서 방어하였으며 다이샨 등이 계속하여 와서 유정을 진영에서 참수하였다.

돌아와 명 장수 교일기를 격파하였고 교일기가 구라쿠 하다로 달아났는데 조선의 장수 강홍립과 더불어 합병하였다.

아민이 공격하자 강홍립이 항복하였고, 교일기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거듭 상을 따라 예허를 격파하였다.

1621년에 상을 따라 심양과 요양을 취하였다.

진강성 장수 진량책이 배반하여 명 장수 모문룡에게 붙었는데, 아민이 그 백성을 내지로 옮겼다.

모문룡이 조선의 경계에 둔병하였는데 아민이 진강을 야밤에 건너 그 수장을 공격하여 죽였고, 모문룡이 패하여 달아났다.

1626년에 (몽고) 칼카 바린 부족을 정벌하여 소속 둔채를 취하였다.

(몽고) 자루트 부족을 정벌하여 그 무리를 사로잡았다.

1627년에 태종이 명하여 버이러 요토 등과 함께 조선을 정벌하였는데,

곧 출발하려 하자 상이 명하여 아울러 모문룡을 토벌하게 하였다.

군사가 의주를 함락하였고 병사를 나누어 모문룡이 주둔한 철산을 공격하였는데 모문룡이 패하여 달아났다.

진군하여 정주를 함락하였고 가산강을 도강하여 안주와 평양을 함락하였다.

다시 진군하여 중화에 머물렀는데 조선국왕 이종(인조)이 사신을 보내 군사를 맞이하였다.

아민이 여러 버이러와 더불어 그 죄 7가지를 서신에 써서 보내며 (동맹을) 힘껏 거부하였다.

군사가 다시 진군하여 황주에 머물렀는데 이종이 다시 사신을 보내 왔다.

아민이 마침내 그 도성(한양)을 깨트리고자 하였는데 여러 버이러가 일컫길

<의당 그 대신이 오는 것을 기다려 회맹하고 화친을 허락해야 한다!>하였다.

총병 이영방이 나와 말하길

「우리들은 상의 명을 받들어 의로움을 의지하여 행하였고, 전에 이미 서신의 말을 남겼으니

  대신을 보내 회맹한다 하면 곧 회군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의롭지 못한 것이다」

아민이 노하여 욕하며 물러나게 하였고 군사가 다시 평산으로 진군하여 머물렀는데

이종이 강화도로 달아났고 그 신하 진창군을 보내 군에 이르렀는데 아민이 영하여 취각을 불며 진군을 독촉하였다.

요토가 이에 지르가랑과 함께 평산에 주둔하였고 부장 유흥조를 보내 강화도로 들어가 이종을 책망하였다.

이종이 일족 동생 원창군 이각 등을 보내 군에 이르게 하니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나자 요토가 회군을 읜노하였는데 아민이 말하길

「나는 명 황제와 더불어 조선왕의 성곽과 궁전을 항상 흠모하였는데

  지금 이윽고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급히 돌아가겠는가?

  나의 뜻은 마땅히 병사를 남기고 둔전할 것이니 두두는 나와 숙질 사이이니 이에 함께 있자구나!」

두두가 얼굴색이 변하여 말하길

「상이 곧 나의 숙부인데 내가 어찌 감히 멀리 떠나 너와 함께 동거하리오?」

지르가랑 역시 힘껏 막았고 여러 버이러가 이에 의논을 정하여 이종과 맹약을 허락하였다.

아민이 병사를 풀어 삼일간 약탈하고 이에 돌아왔다.

상이 무정영에서 노고를 위로하였고 어의 1벌을 하사하였다.

다시 상을 따라 명을 정벌하여 금주를 포위하고 영원을 공격하였으며 명 보병 1천여를 참수하였다.



요약.

아민은 누르하치의 친동생 슈르가치의 2남이다.

슈르가치는 1609년 3월 휘하 장수와 속민을 데리고 누르하치에게서 독립하여 흑차목으로 이주하려 하였고, 

이에 누르하치는 분노하여 아시부와 울쿤 몽고를 화형에 처하고 슈르가치는 유폐한다.

슈르가치는 2년간 유폐 생활을 하다 1611년 8월 19일 자살 혹은 병사한다.

당시 슈르가치의 장남 아이통아(阿尔通阿)도 처형되었는데 아민도 아버지를 부추긴 죄를 추궁받았으나 

결국 사면받고 슈르가치의 휘하 속민을 세습받게 된다.

1608년, 1613년 우라 정벌전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1616년 4대 버이러 중 둘째(자친) 버이러에 임명된다.

1619년 사르후 전역에서 공을 세웠으며 예허 침공전에도 종군한다.

홍 타이지 즉위 직후 1627년 전격적으로 조선 침공이 결정되었는데 아민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주 목적은 모문룡의 처단이었으며 기회를 보아 조선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조선 서북방 여러 성들을 점령하며 남하하여 평양까지 함락한 아민은 곧장 한양을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요토와 지르가랑 등이 반대한다.

이당시 이영방이 정의를 말하며 아민에게 조선과의 화친을 주장하였는데 

아민은 이영방에게 <한족 노예놈>이란 멸칭을 써가며 모욕한다.

아민은 자신은 항상 북경과 한양의 궁전을 흠모하였다며 한양을 점령해 궁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내비친다.

다른 버이러들이 반대하자 아민은 조카 두두를 지목하며 같이 조선에 주둔하며 한양을 공략하자 말한다.

실상 누르하치에게 유폐되었다가 처형된 두두의 부친 추옝을 선동하여 함께 홍 타이지로부터 독립하고자 함이었다.

두두는 이를 강력하게 거부하였고 다른 버이러들도 강하게 반발한다.

결국 요토 등은 유흥조(아이타/유해)를 인조에게 보내 화친 맹세를 하였고 후금군은 회군을 결심한다.

아민은 화가 나 맹약을 깨고 3일 동안 조선을 약탈하고 돌아간다.

이 당시 아민의 행동은 훗날 16가지 대죄 중 독립을 꾀하려 했다는 죄목에 해당되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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