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우전친왕 지르가랑 열전 번역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누르하치의 친동생 슈르가치의 아들로 순치제 초기 보정대신에 임명되었던 지르가랑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도도아지거푸헝

하르졸(해란주)호오거망굴타이아민고이마혼/와산/제극탑합/공아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15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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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獻親王濟爾哈朗,舒爾哈齊第六子。

幼育於太祖。

封和碩貝勒。

天命十一年,伐喀爾喀巴林部、扎嚕特部,並有功。

天聰元年,伐朝鮮,朝鮮國王李倧既乞盟,阿敏仍欲攻其國都。

岳託邀濟爾哈朗議,濟爾哈朗曰:

「吾等不宜深入,當駐兵平山以待。」

卒定盟而還。

五月,從上伐明,圍錦州,偕莽古爾泰擊敗明兵。

復移師寧遠,與明總兵滿桂遇,裹創力戰,大敗其眾。

二年五月,偕豪格討蒙古固特塔布囊,戮之,收其眾歸。

三年八月,伐明錦州、

寧遠,焚其積聚。

十月,上率師自洪山口入,濟爾哈朗偕岳託攻大安口,夜毀水門以進,擊明馬蘭營援兵。

及旦,明兵立二營山上,濟爾哈朗督兵追擊,五戰皆捷,降馬蘭營、馬蘭口、大安口三營。

引軍趨石門寨,殲明援兵,寨民出降。

會師遵化,薄明都,徇通州張家灣。

四年正月,從上圍永平,擊斬叛將劉興祚,獲其弟興賢。

既克永平,與貝勒薩哈璘駐守,察倉庫,閱士卒,置官吏,傳檄下灤州、遷安。

三月,阿敏代戍,乃引師還。

五年七月,初設六部,濟爾哈朗掌刑部事。

從上圍大凌河,濟爾哈朗督兵收近城臺堡。

六年五月,從征察哈爾,還趨歸化城,收其眾千餘人。

七年三月,城岫巖。

五月,明將孔有德 、耿仲明 自登州來降,明總兵黃龍以水師邀之,朝鮮兵與會,

濟爾哈朗與貝勒阿濟格等勒軍自鎮江迓有德 等,明兵引去。

崇德元年四月,封和碩鄭親王。

三年五月,攻寧遠,薄中後所城,明兵不敢出。

移師克模龍關及五里堡屯臺。

四年五月,略錦州、松山,九戰皆勝,俘其眾二千有奇。

五年三月,修義州城。

蒙古多羅特部蘇班岱、阿爾巴岱附於明,屯杏山五里臺,請以三十戶來歸。

上命率師千五百人迎之,戒曰:

「明兵見我寡,必來戰,可分軍為三隊以行。」

夜過錦州,至杏山,使潛告蘇班岱等攜輜重以行。

旦,明杏山總兵劉周智與錦州、松山守將合兵七千逼我師,濟爾哈朗縱師入敵陣,大敗之,賜御廄良馬一。

九月,圍錦州,設伏城南,敵不進,追擊

破之。

六年三月,復圍錦州,立八營,掘壕築塹,以困祖大壽 。

大壽 以蒙古兵守外郛,台吉諾木齊等遣人約獻東關,為大壽 所覺,與之戰。

濟爾哈朗督兵薄城,蒙古兵縋以入,據其郛。

遷蒙古六千餘人於義州,降明將八十餘。

上御篤恭殿宣捷。

四月,敗明援兵。

五月,又敗之,斬級二千。

六月,師還。

九月,復圍錦州。

十二月,洪承疇 自松山遣兵夜犯我軍,我軍循壕射之,敵敗去,不得入,盡降其眾。

七年,再圍錦州。

三月,大壽 降,隳松山、塔山、杏山三城以歸,賜鞍馬一、蟒緞百。

八年,世祖即位,命與睿親王多爾袞同輔政。

九月,攻寧遠,拔中後所,並取中前所。

順治元年,王令政事先白睿親王,列銜亦先之。

五月,睿親王率師入山海關,定京師。

十月,封為信義輔政叔王,賜金千、銀萬、緞千疋。

四年二月,以府第踰制,罰銀二千,罷輔政。

五年三月,貝子屯齊、尚善、屯齊喀等訐王諸罪狀,言王當太宗初喪,不舉發大臣謀立肅親王豪格。

召王就質,議罪當死,遂興大獄。

勛臣額亦都、費英東、揚古利諸子姪皆連染,議罪當死,籍沒。

既,改從輕比,王坐降郡王,肅親王豪格遂以幽死。

閏四月,復親王爵。

九月,命為定遠大將軍,率師下湖廣。

十月,次山東,降將劉澤清以叛誅。

六年正月,次長沙,明總督何騰蛟,總兵馬進忠、陶養用等,合李自成 餘部一隻虎等據湖南。

王分軍進擊,拔湘潭,擒騰蛟。

四月,次辰州,一隻虎遁走,克寶慶,破南山坡、

大水、洪江諸路兵凡二十八營。

七月,下靖州,進攻衡州,斬養用。

逐敵至廣西全州,分軍下道州、黎平及烏撒土司,先後克六十餘城。

七年正月,師還,賜金二百、銀二萬。

八年二月,偕巽親王滿達海、端重親王博洛、敬謹親王尼堪奏削故睿親王多爾袞爵,語詳睿親王傳。

三月,以王老,免朝賀、謝恩行禮。

九年二月,進封叔和碩鄭親王。

十二年二月,疏言:

「太祖創業之初,日與四大貝勒、五大臣討論政事得失,咨訪士民疾苦,

  上下交孚,鮮有壅蔽,故能掃清群雄,肇興大業。

  太宗纘承大統,亦時與諸王貝勒講論不輟,崇獎忠直,錄功棄過,凡詔令必求可以順民心、垂久遠者。

  又慮武備廢弛,時出射獵,諸王貝勒置酒高讌,以優戲為樂。

  太宗怒曰:

  『我國肇興,治弓矢,繕甲兵,視將士若赤子,故人爭效死,每戰必克。

    常恐後世子孫棄淳厚之風,沿習漢俗,即于慆淫。

    今若輩為此荒樂,欲國家隆盛,其可得乎?』

  遣大臣索尼再三申諭。

  今皇上詔大小臣工盡言,臣以為平治天下,莫要於信。

  前者軫恤滿洲官民,聞者懽忭。

  嗣役修乾清宮,詔令不信,何以使民?伏祈效法太祖、太宗,時與大臣詳究政事得失,必商榷盡善,

  然後布之詔令,庶幾法行民信,紹二聖之休烈。

  抑有請者,垂謨昭德,莫先于史。

  古聖明王,進君子,遠小人,措天下於太平,垂鴻名于萬世,繄史官是賴。

  今宜設起居注官,置之左右,一言一行,傳之無窮,亦治道之助也。」

疏上,嘉納之。

五月,疾革,上臨問,奏:

「臣受三朝厚恩,未及答,願以取雲貴,殄桂王,統一四海為念。」

上垂涕曰:

「天奈何不令朕叔長年耶!」

言已,大慟。

命工圖其像。

翌日薨,年五十七。

輟朝七日。

賜銀萬,置守園十戶,立碑紀功。

康熙十年六月,追諡。

乾隆四十三年正月,詔配享太廟,復嗣王封號曰鄭。

濟爾哈朗子十一,有爵者四:富爾敦、濟度、勒度、巴爾堪。

정헌친왕(鄭獻親王) 제이합랑(濟爾哈朗)은, 서이합제(舒爾哈齊)의 제육자(第六子)이다.

태조(太祖)에게 유육(幼育)하였고, 화석패륵(和碩貝勒)에 봉(封)하였다.

천명(天命/후금 1대 한 태조의 #1연호) 11년(1626년)에, 객이객(喀爾喀) 파림부(巴林部)와 

찰로특부(扎嚕特部)를 정벌(伐)하였는데, 모두 유공(有功)하였다.

천총(天聰/후금 2대 한 태종의 #2연호) 원년(1627년)에, 조선(朝鮮)을 벌(伐)하였는데,

조선국왕(朝鮮國王) 이종(李倧)이 이윽고 걸맹(乞盟)하자, 

아민(阿敏)이 이에 그 국도(國都)를 공(攻)하고자 하였다.

악탁(岳託)이 제이합랑(濟爾哈朗)의 의(議)를 요(邀/구함)하였는데, 제이합랑(濟爾哈朗)이 말하길

「오등(吾等)은 의당(宜) 심입(深入)하지 않아야 하며, 당연히(當) 평산(平山)에 주병(駐兵)하고 이로써 대(待)해야만 한다.」

마침내 정맹(定盟)하자 환(還)하였다.

5월에, 종상(從上)하여 벌명(伐明)하였고, 금주(錦州)를 위(圍)하였는데,

망고이태(莽古爾泰)와 함께 명병(明兵)을 격패(擊敗)하였다.

다시 영원(寧遠)으로 이사(移師)하여, 명(明) 총병(總兵) 만계(滿桂)와 더불어 조우(遇)하였는데,

과창(裹創/상처를 싸맴)하고 역전(力戰)하였고, 그 중(眾)을 격패(大敗)하였다.

[천총] 2년(1628년) 5월에, 호격(豪格)과 함께 몽고(蒙古) 고특탑포낭(固特塔布囊)을 토(討)하여,

육지(戮之)하였고, 그 중(眾)을 수(收)하여 귀(歸)하였다.

[천총] 3년(1629년) 8월에, 명(明) 금주(錦州)와 영원(寧遠)을 벌(伐)하여 그 적취(積聚)를 분(焚)하였다.

10월에, 상(上)이 솔사(率師)하여 홍산구(洪山口)로부터 입(入)하였는데,

제이합랑(濟爾哈朗)이 악탁(岳託)과 함께 대안구(大安口)를 공(攻)하였고,

야(夜)에 수문(水門)을 훼(毀/부숨)하고 이진(以進)하였고, 명(明) 마란영(馬蘭營)의 원병(援兵)을 격(擊)하였다.

급단(及旦)하여, 명병(明兵)이 2영(營)으로 산상(山上)에 입(立)하였는데,

제이합랑(濟爾哈朗)이 독병(督兵)하여 추격(追擊)하였고, 5전(戰)하여 모두 첩(捷)하였으며,

마란영(馬蘭營)과 마란구(馬蘭口), 대안구(大安口) 3영(營)이 항(降)하였다.

인군(引軍)하여 석문채(石門寨)로 추(趨)하여, 명(明)의 원병(援兵)을 섬(殲)하니, 채민(寨民)이 출항(出降)하였다.

준화(遵化)에서 회사(會師)하여, 명도(明都)에 박(薄)하였고, 통주(通州) 장가만(張家灣)을 순(徇)함였다.

[천총] 4년(1630년) 정월에, 종상(從上)하여 영평(永平)을 위(圍)하였고,

반장(叛將) 유흥조(劉興祚)를 격참(擊斬)하였으며, 그 제(弟) 유흥현(興賢)을 획(獲)하였다.

이윽고 영평(永平)을 극(克)하였는데, 패륵(貝勒) 살합린(薩哈璘)과 함께 주수(駐守)하였고,

창고(倉庫)를 찰(察/조사함)하였고, 사졸(士卒)을 열(閱)하였으며, 관리(官吏)를 치(置)하였고,

전격(傳檄/격문을 전함)하여 난주(灤州)와 천안(遷安)을 하(下)하였다.

3월에, 아민(阿敏)이 대수(代戍/수자리를 교대함)하니, 이에 인사(引師)하여 환(還)하였다.

[천총] 5년(1631년) 7월에, 6부(部)를 초설(初設)하였는데, 제이합랑(濟爾哈朗)이 형부사(刑部事)를 장(掌)하였다.

종상(從上)하여 대릉하(大凌河)를 위(圍)하였는데, 제이합랑(濟爾哈朗)이 독병(督兵)하여 근성대보(近城臺堡)를 수(收)하였다.

[천총] 6년(1632년) 5월에, 찰합이(察哈爾)를 종정(從征)하였는데, 환(還)하여 귀화성(歸化城)을 추(趨)하였고,

그 중(眾) 천여인(千餘人)을 수(收)하였다.

[천총] 7년(1633년) 3월에, 수암(岫巖)에 성(城)하였다.

5월에, 명장(明將) 공유덕(孔有德), 경중명(耿仲明)이 등주(登州)로부터 내항(來降)하였는데,

명(明) 총병(總兵) 황룡(黃龍)이 수사(水師)로써 요지(邀之)하였고, 조선병(朝鮮兵)이 여회(與會)하였는데,

제이합랑(濟爾哈朗)이 패륵(貝勒) 아제격(阿濟格) 등(等)과 함께 늑군(勒軍/군을 정돈함)하여 

진강(鎮江)으로부터 공유덕(有德) 등(等)을 아(迓/마중함)하였는데,

명병(明兵)이 인거(引去/이끌고 가버림)하였다.

숭덕(崇德/청 2대 황제 태종의 #2연호) 원년(1636년) 4월에, 화석정친왕(和碩鄭親王)을 봉(封)하였다.

[숭덕] 3년(1638년) 5월에, 영원(寧遠)을 공(攻)하였는데, 중후소성(中後所城)을 박(薄)하였고,

명병(明兵)이 감출(敢出)하지 못하였다.

이사(移師)하여 모룡관(模龍關)과 더불어 오리보(五里堡) 둔대(屯臺)를 극(克)하였다.

[숭덕] 4년(1639년) 5월에, 금주(錦州)와 송산(松山)을 약(略)하였는데, 9전(戰)하여 모두 승(勝)하였고,

그 중(眾) 2천 유기(有奇)를 부(俘)하였다.

[숭덕] 5년(1640년) 3월에, 의주성(義州城)을 수(修)하였다.

몽고(蒙古) 다라특부(多羅特部) 소반대(蘇班岱)와 아이파대(阿爾巴岱)가 명(明)에 부(附)하여,

행산(杏山) 오리대(五里臺)에 둔(屯)하였는데, 30호(戶)로써 내귀(來歸)를 청(請)하였다.

상(上)이 명(命)하여 1500인(人)을 솔사(率師)하여 영지(迎之)하였는데, 계(戒)하여 말하길

「명병(明兵)이 우리가 과(寡/적음)함을 견(見)하면, 필히(必) 내전(來戰)할 것이니,

  분군(分軍)하여 3대(隊)로 삼아 이로써 행(行)함이 가(可)하도다.」

야(夜)에 금주(錦州)를 과(過)하여, 행산(杏山)에 지(至)하였는데, 

 잠고(潛告/은밀히 고함)하여 소반대(蘇班岱) 등(等)으로 하여금 치중(輜重)을 휴(攜)하여 이로써 행(行)하게 하였다.

단(旦)에, 명(明) 행산총병(杏山總兵) 유주지(劉周智)가 금주(錦州)와 송산(松山) 수장(守將)과 함께

합병(合兵)하여 7천(千)으로 아사(我師)를 핍(逼)하였는데,

제이합랑(濟爾哈朗)이 종사(縱師)하여 적진(敵陣)으로 입(入)하였고, 대패지(大敗之)하니,

어구(御廄) 양마(良馬) 1을 사(賜)하였다.

9월에, 금주(錦州)를 위(圍)하였는데, 성남(城南)에 설복(設伏)하였고, 적(敵)이 부진(不進)하자,

추격(追擊)하여 파지(破之)하였다.

[숭덕] 6년(1641년) 3월에, 금주(錦州)를 복위(復圍)하였는데, 8 영(營)을 입(立)하였고, 

굴호(掘壕/해자를 팜)하고 축참(築塹/구덩이를 쌓음)하였고, 이로써 조대수(祖大壽)를 곤(困)하게 하였다.

조대수(大壽)가 몽고병(蒙古兵)으로써 외부(外郛/외성)를 수(守)하였는데,

태길(台吉) 낙목제(諾木齊) 등(等)이 견인(遣人)하여 동관(東關)을 약헌(約獻/바치기로 약조함)하였고,

조대수(大壽)가 소각(所覺)하여, 더불어 싸웠다.

제이합랑(濟爾哈朗)이 독병(督兵)하여 박성(薄城)하였는데, 몽고병(蒙古兵)이 추(縋/끈을 매닮)하여 이로써 입(入)하였고,

그 부(郛)를 거(據)하였다.

몽고(蒙古) 6천여인(人)을 의주(義州)에 천(遷)하였고, 명장(明將) 80여(餘)를 항(降)하였다.

상(上)이 독공전(篤恭殿)에 어(御)하여 선첩(宣捷)하였다.

4월에, 명(明) 원병(援兵)을 패(敗)하였고, 5월에, 또 패지(敗之)하였으며, 2천을 참급(斬級)하였다.

6월에, 환사(師還)하였다.

9월에, 금주(錦州)를 복위(復圍)하였다.

12월에, 홍승주(洪承疇)가 송산(松山)으로부터 견병(遣兵)하여 아군(我軍)을 야범(夜犯)하였는데,

아군(我軍)이 순호(循壕/해자를 돎)하며 사지(射之)하였고, 적(敵)이 패거(敗去)하여, 득입(得入)하지 못하였으며,

그 중(眾)을 진항(盡降)하였다.

[숭덕] 7년(1642년)에, 금주(錦州)를 재위(再圍)하였다.

3월에, 조대수(大壽)가 항(降)하였고, 송산(松山), 탑산(塔山), 행산(杏山) 3성(城)을 휴(隳/무너뜨림)하고 이로써 귀(歸)하니,

안마(鞍馬) 1과 망단(蟒緞) 100을 사(賜)하였다.

[숭덕] 8년(1643년)에, 세조(世祖)가 즉위(即位)하자, 명(命)하여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과 함께 

동보정(同輔政)하게 하였다.

9월에, 영원(寧遠)을 공(攻)하였고, 중후소(中後所)를 발(拔)하였고, 아울러 중전소(中前所)를 취(取)하였다.

순치(順治/청 3대 황제 세조의 #1연호) 원년(1644년)에, 왕(王)이 영(令)하여 정사(政事)를 예친왕(睿親王)에게 

선고(先白)하게 하였고, 열함(列銜/중요한 문서에 직함을 기명함) 역시(亦) 선지(先之)하게 하였다.

5월에, 예친왕(睿親王)이 솔사(率師)하여 산해관(山海關)을 입(入)하였고, 경사(京師)를 정(定)하였다.

10월에, 봉(封)하여 신의보정(信義輔政) 숙왕(叔王)으로 삼았고, 금(金) 1천, 은(銀) 1만, 단(緞/비단) 1천필(疋)을 사(賜)하였다.

[순치] 4년(1647년) 2월에, 부제(府第/왕부 저택)가 유제(踰制/정해진 제도를 벗어남)함으로써,

은(銀) 2천(千)을 벌(罰)하였고, 보정(輔政)을 파(罷)하였다.

[순치] 5년(1648년) 3월에, 패자(貝子) 둔제(屯齊), 상선(尚善), 둔제객(屯齊喀) 등(等)이 왕(王)의 여러 죄상(罪狀)을 

알(訐/들추어냄)하였고, 말하길 

왕(王)이 태종(太宗)의 초상(初喪/사람이 죽어 장사 지낼 때까지의 동안)을 당(當)하여, 대신(大臣)이 숙친왕(肅親王) 

호격(豪格)을 모립(謀立)하고, 왕(王)을 소(召)하여 취질(就質/나아가 이룸)한 것을 거발(舉發)하지 않았다 하니,

당사(當死)를 의죄(議罪)하였는데, 마침내 대옥(大獄)을 흥(興/일으킴)하였다.

훈신(勛臣) 액역도(額亦都), 비영동(費英東), 양고리(揚古利)의 여러 자질(子姪)이 모두 연염(連染/연루)하였고,

당사(當死)를 의죄(議罪)하였고, 적몰(籍沒)하였다.

이윽고, 개(改/바꿈)하고 종경(從輕/두 가지 이상의 죄 중에 가벼운 죄를 따라 처벌함)을 비(比)하여,

왕(王)은 좌(坐)하여 군왕(郡王)으로 항(降)하였고, 숙친왕(肅親王) 호격(豪格)은 마침내 이로써 유사(幽死)하였다.

윤(閏) 4월에, 친왕(親王)의 작(爵)을 복(復)하였다.

9월에, 명(命)하여 정원대장군(定遠大將軍)으로 삼았고, 솔사(率師)하여 호광(湖廣)을 하(下)하였다.

10월에, 산동(山東)에 차(次)하였는데, 항장(降將) 유택청(劉澤清)이 반(叛)함으로써 주(誅)하였다.

[순치] 6년(1649년) 1월에, 장사(長沙)에 차(次)하였고, 

명(明) 총독(總督) 하등교(何騰蛟), 총병(總兵) 마진충(馬進忠), 도양용(陶養用) 등(等)이 이자성(李自成)의 여부(餘部)와 일척호(一隻虎) 등(等)과 합(合)하여 호남(湖南)에 거(據)하였다.

왕(王)이 분군(分軍)하여 진격(進擊)하였고, 상담(湘潭)을 발(拔)하였고, 등교(騰蛟)를 금(擒)하였다.

4월에, 진주(辰州)에 차(次)하였고, 일척호(一隻虎)가 둔주(遁走)하였으며, 보경(寶慶)을 극(克)하였고, 

남산파(南山坡), 대수(大水), 홍강(洪江)의 제로병(諸路兵) 무릇 28영(營)을 파(破)하였다.

7월에, 정주(靖州)를 하(下)하였고, 형주(衡州)를 진공(進攻)하였고, 양용(養用)을 참(斬)하였다.

축적(逐敵)하여 광서(廣西)의 전주(全州)에 지(至)하였는데, 

분군(分軍)하여 도주(道州), 여평(黎平)과 더불어 오살토사(烏撒土司)를 하(下)하였고, 선후(先後)로 60여성(城)을 극(克)하였다.

[순치] 7년(1650년) 1월에, 환사(師還)하였는데, 금(金) 2백과 은(銀) 2만(萬)을 사(賜)하였다.

[순치] 8년(1651년) 2월에, 손친왕(巽親王) 만달해(滿達海), 단중친왕(端重親王) 박락(博洛), 

경근친왕(敬謹親王) 니감(尼堪)과 함께 고(故)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의 작(爵)을 삭(削)해달라 주(奏)하였는데,

이 말은 예친왕(睿親王) 열전(傳)에 상세(詳)하다.

3월에, 왕(王)이 노(老)함으로써, 조사(朝賀/조정에 나아가 황제에게 하례함)와 

사은행례(謝恩行禮/포상에 감사하는 예법)를 면(免)하게 하였다.

[순치] 9년(1652년) 2월에, 숙화석정친왕(叔和碩鄭親王)으로 진봉(進封)하였다.

[순치] 12년(1655년) 2월에, 소언(疏言)하길

「태조(太祖)의 창업(創業) 초(初)에는, 날마다 사대패륵(四大貝勒), 오대신(五大臣)과 더불어

  정사(政事)의 득실(得失)을 토론(討論)하여, 사민(士民/관리와 백성)의 질고(疾苦)를 자방(咨訪/묻고 상의함)하였고,

  상하(上下)가 교부(交孚/서로 성의를 다하고 마음이 맞아서 의심이 없음)하였으며,

  옹폐(壅蔽/임금의 눈과 귀를 막고 덮음)가 있는 것이 선(鮮/드묾)하였고,

  이런 연고(故)로 군웅(群雄/많은 군웅)을 소청(掃清/소탕)할 수 있었고,

  이에 비롯하여 대업(大業)을 흥(興/성공함)하였나이다.

  태종(太宗)이 대통(大統)을 찬승(纘承/계승)하였는데, 

  역시(亦) 이때도 제왕(諸王), 패륵(貝勒)과 함께 강론(講論)이 부철(不輟/그치지 않음)하였고,

  충직(忠直)을 숭장(崇獎/널리 권장함)하였고, 녹공(錄功)이 기화(棄過/화를 물리침)하였으니,

  무릇 조령(詔令)하여 필구(必求)하면 가히(可) 이로써 민심(民心)을 순(順/순응)하고, 원자(遠者)를 수구(垂久/오랫동안 전함)하였나이다.

  또 무비(武備)의 폐이(廢弛/폐하고 늦춤)를 여(慮/생각함)하여, 때마다 사렵(射獵)을 출(出)하였는데,

  제왕(諸王)과 패륵(貝勒)이 치주(置酒/술자리를 마련함)하고 고연(高讌/크게 잔치함)하였으며,

  우희(優戲/도탑게 놂)로써 낙(樂)을 삼았나이다.

  태종(太宗)이 노(怒)하여 말하길

  『아국(我國)이 조흥(肇興/성공하길 꾀함)하여, 궁시(弓矢)를 치(治)하고, 갑병(甲兵)을 선(繕/갖춤)하고,

   장사(將士)를 시(視/간주함)함이 적자(赤子/임금이 아이를 보듯 사랑함)와 같았고,

   이런 연고(故)로 효사(效死/목숨 바쳐 일함)를 인쟁(人爭/사람마다 다툼)하여, 매전(每戰)하면 필극(必克)하였다.

    항상(常) 후세(後世) 자손(子孫)이 순후(淳厚/순박하고 인정이 많음)의 풍(風)을 기(棄)할까 공(恐)하였는데,

    한속(漢俗/한족의 풍속)을 연습(沿習/따라 배움)하여, 도음(慆淫/문란하고 음란함)에 즉(即/가까이함)한다.

    지금(今) 만약(若) 무리가 이와 같이 황락(荒樂/주색에 빠져 음탕한 짓을 하며 즐김)한다면,

    국가(國家)가 융성(隆盛)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가득(可得)하겠는가?』

  대신(大臣) 색니(索尼)를 견(遣)하여 재삼(再三) 신유(申諭/여러 번 타일러 깨우쳐 줌)하였나이다.

  지금(今) 황상(皇上)이 조(詔)하여 대소신공(大小臣工)이 진언(盡言)하게 하였는데,

  신(臣)이 생각건대 평치천하(平治天下/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림)는, 신(信)에 막요(莫要/중요한게 없음)하옵니다.

  전자(前者/지난번)에 만주(滿洲) 관민(官民)을 진휼(軫恤/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하니,

  문자(聞者)가 환변(懽忭/즐거워하고 좋아함)하였나이다.

  사역(嗣役/부역을 이음)하여 건청궁(乾清宮)을 수(修)하여, 조령(詔令)이 불신(不信)하였으니,

  어찌 이로써 사민(使民/백성을 부림)하겠나이까?

  복기(伏祈/엎드려 기원함)하건대 태조(太祖)와 태종(太宗) 시(時)에 대신(大臣)과 더불어 

  정사(政事)의 득실(得失)을 상구(詳究/자세히 연구함)한 법(法)을 효(效/본받음)하여,

  필히(必) 진선(盡善/선행을 다함)을 상교(商榷/의견을 교환함)하고, 

  이런 연후(然後)에 조령(詔令)을 포지(布之)한다면, 거의 법행(法行)함에 있어 민신(民信)할 것이니,

  이성(二聖)의 휴렬(休烈/훌륭한 공적)을 소(紹/이음)할 것이옵니다.

  청자(請者)를 억유(抑有/억누름)하고, 소덕(昭德/덕을 밝힘)을 수모(垂謨/계책을 전함)한 것은,

  앞선 역사(史)에 없었나이다.

  고성(古聖/옛 성인)과 명왕(明王/밝은 군주)는, 군자(君子)를 진(進)하고, 소인(小人)을 원(遠)하며,

  천하(天下)를 태평(太平)에 조(措/베풂)하여, 만세(萬世)에 홍명(鴻名/큰 명예)을 수(垂/드리움)하였으니,

  아! 사관(史官)이 이에 뢰(賴/의지함)한 것이옵니다.

  지금(今) 의당(宜) 기거주관(起居注官)을 설(設)하고, 좌우(左右)에 치지(置之)하고,

  일언일행(一言一行/하나하나의 말과 행동)의 전지(傳之)가 무궁(無窮/끝이 없음)하며,

  역시(亦) 치도(治道)의 조(助/이룸)이옵나이다.」

소상(疏上)하니, 가납지(嘉納之)하였다.

5월에, 질극(疾革/병세가 매우 위중함)하였고, 상(上)이 임문(臨問/몸소 방문함)하니, 주(奏)하길

「신(臣)이 삼조(三朝)의 후은(厚恩)을 수(受)하여, 보답(答)을 미극(未及/미치지 못함)하였으니,

  원(願)하옵건데 운귀(雲貴)를 취(取)함으로써, 계왕(桂王/남명 마지막 황제 영력제 주유량)을 진(殄/멸함)하고,

  사해(四海)를 통일(統一)하길 염(念/생각함)하나이다.」

상(上)이 수체(垂涕/눈물을 흘림)하여 말하길

「하늘이 어찌하여 짐(朕)의 숙(叔)으로 하여금 장년(長年/오래 삶)하지 않게 하는가!」

말하고 조금 있다가 대통(大慟)하였다.

명(命)하여 그 상(像)을 공도(工圖/장인에게 그림을 그리게 함)하게 하였다.

익일(翌日)에 훙(薨)하였는데, 나이 57세였다.

7일을 철조(輟朝/조정을 임시로 폐함)하였고, 은(銀) 만(萬)을 사(賜)하였고,

수원(守園) 10호(戶)를 치(置)하였고, 입비(立碑)하여 기공(紀功)하였다.

강희(康熙/청 4대 황제 성조의 #1연호) 10년(1671년) 6월에, 추시(追諡)하였다.

건륭(乾隆/청 5대 황제 고종의 #1연호) 43년(1778년) 1월에, 조(詔)하여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였다.

다시 사왕(嗣王/왕위를 계승함)하여 봉호(封號)하여 말하길 정(鄭)이라 하였다.

제이합랑(濟爾哈朗)의 자(子)는 11인데, 유작(有爵)한 자(者)가 4인데, 

부이돈(富爾敦), 제도(濟度), 륵도(勒度), 파이감(巴爾堪)이다.


정헌친왕(鄭獻親王/우전 친왕) 지르가랑은 슈르가치의 6남이다.

태조가 어릴 때부터 보육하였고 호쇼이 버이러에 봉하였다.

1626년에 (몽고) 칼카 바린 부족과 자루트 부족을 정벌하였는데 모두 공이 있었다.

1627년에 조선을 정벌하였는데 조선국왕 이종(인조)이 이윽고 동맹을 애걸하자 아민이 이에 그 국도(한양)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요토가 지르가랑의 의견을 구하였는데 지르가랑이 말하길

「우리들은 의당 깊게 들어가지 않아야 하며 마땅히 평산에 주둔하고 이로써 대기해야만 한다.」

마침내 동맹을 정하자 돌아왔다.

5월에 상을 따라 명을 정벌하였고 금주를 포위하였는데 망굴타이와 함께 명군을 격파하였다.

다시 영원으로 군을 옮겨 명 총병 만계와 더불어 조우하였는데 상처를 싸매고 힘껏 싸워 그 무리를 격파하였다.

1628년 5월에 호오거와 함께 몽고 구터이 타부낭을 토벌하여 죽였고 그 무리를 거둬 돌아왔다.

1629년 8월에 명 금주와 영원을 정벌하여 그 쌓아놓은 곡식을 불살랐다.

10월에 상이 군을 인솔하여 홍산구로부터 들어갔는데 지르가랑이 요토와 함께 대안구를 공격하였고

밤에 수문을 부수고 이로써 나아가 명 마란영의 원군을 격파하였다.

아침에 이르러 명군이 산 정상에 영 2개를 세웠는데 지르가랑이 병사를 독려하여 추격하였고

5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으며 마란영, 마란구, 대안구 3영이 투항하였다.

군을 이끌고 석문채로 달려가 명의 원군을 섬멸하니 석문채의 백성이 나와 항복하였다.

준화에서 합병하여 명 수도(북경)을 육박하였고 통주 장가만을 순행하였다.

1630년 1월에 상을 따라 영평을 포위하였고 배반한 장수 유흥조(아이타, 유해)를 공격하여 참하였으며

그 동생 유흥현을 사로잡았다.

이윽고 영평을 함락하였는데 버이러 사하랸과 함께 주둔하였고 창고를 조사하고 사졸을 사열하였으며

관리를 배치하고 격문을 전하여 난주와 천안을 항복시켰다.

3월에 아민이 수자리를 교대하러 오니 이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1631년 7월에 6부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지르가랑이 형부의 일을 관장하였다.

상을 따라 대릉하를 포위하였는데, 지르가랑이 병사를 독려하여 인근의 성, 보, 대를 거뒀다.

1632년 5월에 차하르 정벌전에 종군하였는데 돌아와 귀화성으로 달려갔고 그 무리 1천여인을 거뒀다.

1633년 3월에 수암에 축성하였다.

5월에 명 장수 공유덕, 경중명이 등주로부터 항복하여 왔는데 명 총병 황룡이 수군으로써 요격하였고

조선군이 연합하였는데 지르가랑이 버이러 아지거 등과 함께 군을 정돈하여

진강으로부터 공유덕 등을 마중하니, 명군이 퇴각하였다.

1636년 4월에 호쇼이 우전 친왕에 봉하였다.

1638년 5월에 영원을 공격하였는데 중후소성을 육박하니 명군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군을 옮겨 모룡관과 더불어 오리보의 둔과 대를 함락하였다.

1639년 5월에 금주와 송산을 공략하였는데 9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고 그 무리 2천 남짓을 사로잡았다.

1640년 3월에 의주성을 수리하였다.

몽고 돌로트 소반대와 아이파대가 명에 붙어 행산 오리대에 주둔하였는데 30호로써 귀부를 청하였다.

상이 명하여 군사 1500인을 인솔하여 맞이하게 하였는데 경계하며 말하길

「명군이 우리가 적을 것을 보면 반드시 싸우러 올 것이니 군을 3대로 나누어 행군하는 것이 옳도다!」

밤에 금주를 지나 행산에 이르렀는데 소반대 등에게 은밀히 고하여 치중을 휴대하고 이로써 행군하게 하였다.

아침에 명 행산 총병 유주지가 금주와 송산의 수장들과 함께 합병하여 7천명으로 아군을 핍박하였는데

지르가랑이 군사를 풀어 적진으로 들어가 크게 깨트리니 상이 타는 좋은 말 1마리를 하사하였다.

9월에 금주를 포위하였는데 성 남쪽에 매복을 설치하였는데 적이 진군하지 않자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1641년 3월에 금주를 다시 포위하였는데 8영을 세우고 해자를 파고 구덩이를 쌓았으며 이로써 조대수를 곤란하게 하였다.

조대수가 몽고병으로써 외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타이지 낙목제 등이 사람을 보내 동쪽 관문을 바치기로 약조하였고

조대수가 알아차려 더불어 싸웠다.

지르가랑이 병사를 독려하여 성에 육박하였는데 몽고병이 끈을 매달아 이로써 들어갔고 그 외성을 근거하였다.

몽고인 6천명을 의주로 옮기고, 명 장수 80여명이 투항하였다.

상이 독공전에 거동하여 승첩을 선포하였다.

4월에 명 구원병을 깨트리고, 5월에 또 깨트려 2천명을 참수하였다.

6월에 회군하였다.

9월에 금주를 다시 포위하였다.

12월에 홍승주가 송산으로부터 병력을 보내 야밤에 아군을 범하였는데

아군이 해자를 돌며 화살을 쏘았고 적이 패하여 도주하여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그 무리가 모조리 투항하였다.

1642년에 금주를 재차 포위하였다.

3월에 조대수가 투항하였고 송산, 탑산, 행산 3성을 무너뜨리고 이로써 돌아오니

안장을 얹은 말 1마리와 망단 100필을 하사하였다.

1643년에 세조(순치제)가 즉위하자, 명하여 머르건 친왕 도르곤과 함께 보정하게 하였다.

9월에 영원을 공격하였고 중후소를 빼앗았으며 아울러 중전소를 취하였다.

1644년에 왕이 영을 내려 정사를 머르건 친왕에게 먼저 고하게 하였으며

문서에 직함을 기명함에 있어서도 역시 먼저하게 하였다.

5월에 머르건 친왕이 군사를 인솔하여 산해관에 들어갔고 경사(수도)를 정하였다.

10월에 봉하여 신의보정 숙왕(숙부왕)으로 삼았고 금 1천, 은 1만, 비단 1천필을 하사하였다.

1647년 2월에 왕부 저택이 정해진 제도를 벗어나니 은 2천을 벌하였고 보정을 멈추게 하였다.

1648년 3월에 버이서 툰치, 상선, 툰치카 등이 왕의 여러 죄상을 들추어내 말하길

<왕이 태종의 초상을 당하여 대신이 파풍아 친왕 호오거의 옹립을 모의하고

 왕을 불러 성취하고자 한 것을 고발하지 않았다!> 하니

의논하여 마땅히 사형죄라 하였고 마침내 대옥사를 일으켰다.

훈신 어이두, 피옹돈, 양구리의 여러 아들과 조카들이 연루되었고 죄를 의논하며 사형을 당하였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이윽고 다시 죄의 경중을 비교하여 왕을 군왕으로 강등하였고 파풍아 친왕 호오거는 마침내 이로써 유폐되어 죽었다.

윤 4월에 친왕의 작위를 회복하였다.

9월에 명을 내려 정원대장군으로 삼았고 군을 인솔하여 호광을 함락하였다.

10월에 산동에 머물고 투항한 장수 유택청이 배반하니 주살하였다.

1649년 1월에 장사에 머물렀고 명 총독 하등교, 총병 마진충, 도양용 등이 

이자성의 남은 부대 일척호 등과 합하여 호남에 근거하였다.

왕이 군을 나누어 진격하였고 상당을 빼앗았으며 등교를 사로잡았다.

4월에 진주에 머물렀는데 일척호가 도주하니 보경을 함락하였고

남산파, 대수, 홍강의 여러 지역의 군사 무릇 28영을 격파하였다.

7월에 정주를 함락하였고 진군하여 형주를 공격하였고 양용을 참하였다.

적을 추격하여 광서의 전주에 이르렀는데 군을 나누어 도주, 여평과 더불어 오살토사를 함락하였고

전후로 60여성을 함락하였다.

1650년 1월에 회군하였는데 금 2백과 은 2만을 하사하였다.

1651년 2월에 손친왕 만다하이, 단중친왕 보로, 경근친왕 니칸과 함께 고 머르건 친왕 도르곤의 작위를 삭제해달라 아뢰었는데

이 말은 머르건 친왕 열전에 상세하다.

3월에 왕이 연로함으로써 조정에 나아가 하례하는 것과 사은행례를 면하게 하였다.

1652년 2월에 숙(叔) 호쇼이 우전 친왕으로 올려 봉하였다.

1655년 2월에 상소를 올려 말하길

「태조의 창업 초기에 날마다 4대(大) 버이러, 5 대신들과 더불어 정사의 옳고 그름을 토론하며
  관리와 백성의 괴로움을 묻고 상의하였고 상하가 서로 성의를 다하고 마음이 맞아 의심이 없었으며
  임금의 눈과 귀를 막고 덮는 것이 드물었고 이런 연고로 군웅을 소탈할 수 있었으며 이에 비롯하여 대업을 일으켰나이다.
  태종이 대통을 계승하였는데 역시 이때도 여러 왕, 버이러들과 함께 강론이 그치지 않았으며
  충직을 널리 권장하고 녹공하여 화를 물리쳤으니 무릇 조서로 영을 내려 반드시 구하고자 하면
  민심이 순응하였고 먼 곳까지 오랫동안 전하였나이다.
  또 군사 준비를 폐하고 늦춰지는 것을 생각하여 때마다 사냥을 나갔는데,
  여러 왕과 버이러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크게 잔치하며 도탑게 노는 것을 낙으로 삼았나이다.
  태종이 노하여 말하길
  『우리나라가 성공하기를 꾀하여 궁시를 연마하고 갑병을 갖추고 장졸을 보는 것을
    임금이 아이를 보는듯 사랑한 연고로 목숨 바쳐 일하길 사람마다 다투어 매번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였다.
    항상 후세 자손이 순박한 기풍을 버릴까 두려워하였는데
    한족의 풍속을 따라 배워 문란하고 음란함을 가까이하는 구나!
    지금 만약 너희들이 이와 같이 주색에 빠져 음탕한 짓을 즐긴다면 국가의 융성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대신 소닌을 보내 재삼 타일러 깨우쳐 주었나이다.
  지금 황상이 조서를 내려 대소신료에게 진언을 올리도록 하였는데
  신이 생각키로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는 것에는 믿음만큼 중요한 게 없나이다.
  지난번 만주의 관민을 진휼하시니 듣는 자들마다 즐거워하고 좋아하였나이다.
  그런데 잇달아 부역을 일으켜 건청궁을 수리하여 황명을 불신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로써 백성을 부리겠나이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조와 태종 당시에 대신들과 더불어 정사의 득실을 연구하는 법을 본받으시어
  반드시 선행을 다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이런 연후에 황명을 선포하신다면
  법을 집행함에 있어 백성이 믿을 것이오니 2분 황제의 훌륭한 공적을 이으실 것이옵니다.
  청하는 자를 억누르면서 덕을 밝혀 계책을 전하는 것은 앞선 역사에 없었나이다.
  옛 성인과 밝은 군주는 군자를 올리고 소인을 멀리하며 천하에 태평을 베풀어 만세에 큰 명예를 드리웠으니
  아! 사관이 이에 의지한 것이옵니다.
  지금 의당 기거주관을 설치하고 좌우에 두시어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전함에 있어 무궁할 것이오니
  역시 치도를 이룰 것이옵나이다.」
상소를 올리니, 기쁘게 받아들였다.
5월에 병세가 매우 위중하니 상이 몸소 방문하였는데 아뢰기를
「신이 삼조(태조, 태조, 세조)의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도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운주와 귀주를 취함으로써 계왕(남명 마지막 황제 영력제 주유량)을 멸하고, 사해를 통일하길 기원하나이다.」
상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하늘이 어찌하여 짐의 숙부를 오래 살게 하지 않는 것인가?」
말하고 조금 있다가 크게 통곡하였다.
명하여 그 상을 장인에게 그리게 하였다.
다음날에 훙하였는데 57세였다.
7일간 조정을 폐하고 은 1만을 하사하였으며, 장원을 지키는 10호를 배치하였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였다.
1671년 6월에 시호를 내렸다.
1778년 1월에 조서를 내려 태묘에 배향하였다.
다시 왕위를 계승하여 봉하며 말하길 정(鄭/우전)이라 하였다.
지르가랑의 아들은 11명인데, 작위가 있는 자가 4명으로 부이돈, 제도, 륵도, 파이감이다.
 
 

요약.
지르가랑은 1599년 슈르가치의 6남으로 태어나서 1655년에 사망하였다.
청이 개국하자 우전친왕에 봉작되었고, 순치제가 즉위해서는 도르곤과 보정이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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