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타이지가 살아 있었다면 양주 대학살은? 홍타이지 이야기

병자호란 당시 홍 타이지가 청군에 내린 군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항하는 모든 자를 죽여라!

-저항하지 않은 자는 죽이지 마라!

-항복한 성은 약탈하지 마라!

-항복한 조선 백성은 모두 머리를 밀게 하라!

-먼저 투항하여 온 자는 사랑으로 돌봐라!

-전투를 벌여 포로로 잡은 관리와 군사는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싸워서 얻은 성, 보, 마을의 백성은 죽이려면 죽이고 포로로 잡으려면 잡아라!


공포와 회유, 이게 그 당시 청군의 기본 전략이었습니다.

항복하면 그대로 살게 하고, 저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는 살인면허를 발급한 것이지요.

함락한 성의 관리는 1명도 살리지 말고, 한족은 포로로 잡든 죽이든 알아서 하라!


청이 입관 당시로 돌아가 보죠.

청의 군권을 장악한 도르곤에게 산해관의 오삼계는 한 통의 서신을 보내 도움을 청합니다.

당시 이자성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으로 와서 오삼계의 부친 오양을 인질로 삼고 협박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도르곤은 반신반의하며 총동원령을 내려 산해관으로 갑니다.

결국 오삼계는 도르곤에게 무릎을 꿇고 투항하였고 연합군은 그대로 이자성군을 밀어버립니다.

이자성은 급하게 북경을 털고 남하하기 시작했고,

도르곤은 (구) 명나라 관리들의 만세 소리를 들으며 황제의 수레를 타고 북경에 입성합니다.

자금성에 들어온 도르곤은 곧장 숭정제를 장사 지내고, 그 복수를 하겠노라 천명합니다.


당시 북경은 이미 피폐해져 털어먹기는커녕, 청 본국에서 물자를 실어 날라 한족을 구휼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지거는 북경 한족을 모두 도륙내고 심양으로 돌아가자 하였으나

도르곤은 오히려 심양에 있는 순치제에게 내탕금 1백만 냥을 내어달라 청하게 됩니다.

도르곤은 동생 도도를 총사령관 정국대장군으로, 형 아지거를 정원대장군으로 삼아 이자성, 남명을 토벌하게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청나라 군권을 도르곤, 도도, 아지거 3형제가 쥐고 있는 상황에서

한족에 대한 모든 처분권은 출병한 도도와 아지거의 마음대로였습니다.

아지거야 두말할 나위 없이 한족에 대해 흉폭한 인물이었고,

도도는 야심이 많았던 인물로 홍 타이지 사후 내심 제위를 넘보기도 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기록(호오거의 발언)을 살펴보면 도르곤은 몸이 약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도르곤은 당시 실질적인 청의 통치자였습니다.

즉 도르곤이 요절한다면 차기 권력은 도도가 차지할 차례였던 것이지요.

하여 도도는 형 도르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도르곤도 친동생인 도도를 심복으로 삼아 친왕으로 복작시키고 

다시 지르가랑을 실각시켜 도도를 보정 숙부왕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르곤은 양주를 지키던 사가법에게 수차례 서신을 보내

<오랫동안 대인의 명망을 들어왔소! 나랑 함께 난신적자를 토벌합시다! 남명 왕을 데려오면 모든 왕의 위에 앉히겠소!>


이렇게 회유하지만 사가법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지요.

형이 애써 서신까지 보냈는데 사가법이 무시하자 도도는 이것이 심히 언짢았습니다.

당시 이자성을 추격하여 서진하던 도도는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말머리를 강남으로 향합니다.

가는 곳마다 모조리 투항하였고, 순조롭게 양주까지 직행하지요.

그런데 1645년 4월 18일 양주에 도착한 도도는 다시 한번 사가법에게 사람을 보내 투항을 권고합니다.

역시 일언지하 거절, 사가법은 결사항전을 다짐합니다.


이에 극도로 화가 난 도도는 한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립니다.

<성을 근거로 하는 자는 모두 도륙하라!>



청실록 1645년 5월 28일 도도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 中

<4월 18일에 대군이 양주성 아래에 육박하여 그 양주 수장 각부 사가법, 한림학사 위윤문과 더불어 

 총병관 4명과 도원 2명 등을 초유하였는데 따르지 않았습니다.

 25일에 영을 내려 바인투, 투라이, 아산 등으로 하여 양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게 하였고 

 그 각부 사가법을 잡아 군전에서 참하였나이다.

 그 성을 근거로 하여 명을 어긴 자는 모두 주살하였습니다.>


실상 도도가 형 도르곤에게 자랑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양주 대학살은 큰 효과를 거둬 남명은 자중지란이 발생하였고,

남명 복왕 주유숭은 싸우지도 않고 도주, 흔성백 조지룡은 강남 장정 23만명의 명부를 가지고

도도에게 백기 투항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만약 홍 타이지가 2~3년만 더 살았다면 아니 1년 반만 더 살았다면 양주 대학살이 벌어졌을까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분명히 병자호란 당시 홍 타이지는 반항하는 모든 자를 죽여라, 

단 함락한 성의 백성은 죽이든 포로로 삼든 알아서 하라! 하였지요.

즉 청의 기본 전략은 병자호란이나 양주대학살 당시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홍 타이지는 아버지 누르하치와는 다르게 한족 학살을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1630년 후금은 요서 영평, 난주, 천안, 준화를 함락하였습니다.

홍 타이지는 함락한 이곳의 한족을 학살&약탈하지 않았고 명 관리들을 그대로 임용합니다.

그리고는 아민에게 5천 병력을 주어 이 4곳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얼마 후 명 경략 손승종이 대군을 이끌고 이곳을 쳐들어왔습니다.

난주를 지키던 투르거이는 명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400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탈출합니다.

당시 후금과 명의 교전비를 생각하면 후금 400명 전사는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대패였던 것이지요.

(홍 타이지는 이들을 생각하며 눈물도 흘렸습니다.)


이때 아민은 즉각 퇴거 명령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청사고 아민 열전中

-이미 성을 함락하였는데 무슨 연고로 그 백성을 죽이지 않는가?

-또 병사 무리에게 분명히 알려 말하길

『내가 이윽고 여기에 왔으니 어찌 너희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먹이지 않고 돌아가고자 하겠는가?』

-약탈하여 그 재물을 모조리 노략질하였고 또한 투항민을 몰아 8기에 노비로 삼아 나누어 주었다.

-마침내 명의 장수와 관리의 투항자를 모조리 살해하였고 성의 백성을 도륙하였으며

 그 금과 비단을 거둬 냉구 동쪽으로 야밤에 나와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홍 타이지는 아민을 16가지 대죄를 언급하며 사형을 내렸다가 유폐시킵니다.

그때 언급한 아민의 말 인용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내가 조선인을 학살하지 않은 것은 그 한양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 북경을 점령하지도 않을 거면서 한족들을 살려둬서 어디에 쓰겠는가?


이에 홍 타이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래 항복한 성의 한족을 침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싸워서 함락한 영평성의 한족도 전혀 침해하지 않고 죽이지 않고 돌본 것을 무리들 모두 보았느니라.

 너는 하늘이 내게 준 4개 성을 버리고 돌본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왔다.


이 죄목으로 후금 공식서열 #3위였던 아민은 그대로 숙청당합니다.

이후 청이 개국하고 모든 친왕들은 홍 타이지의 말을 하늘로 알며 감히 거역할, 방종할 생각도 못하게 됩니다.


이런 홍 타이지가 사라지자, 도도와 아지거는 더 이상 거릴 길 것이 없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청군은 양주까지 가는 동안 약탈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팔기군 병사들에게는 약탈만이 법으로 허용하는 소득이었으니,

대도시 양주를 도륙하고 약탈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니 성안의 백성들이 온전하겠어요?


물론 단기간에 소수의 팔기군으로 중원을 평정한 도도와 아지거의 공은 청나라 입장에서는 엄지척이었겠으나

당하는 한족들에겐 그야말로 재앙이었습니다.


P.S)막을 힘도 없는 양주성 총책임자 사가법은 군민을 위해 투항하거나 아니면 

     최소 성민들의 목숨만이라도 보장해 달라는 최후 협상이라도 하지...

     최후의 순간에 성을 버리고 탈출하려다 잡혀서 도도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P.S)홍 타이지 좀만 더 살지 그랬니... 네 큰아들은 죽임 당했고, 황제가 된 아들은 꼭두가시가 되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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