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7부-함락2일차(1) 젖먹이들이 길가에 간과 뇌를 흩뿌리다!
8부-함락2일차(2) 고려여자들은 절개를 지켰는데, 너희 중국인은 수치를 모르는가?
10부-함락3일차 학살에 울부짖는 아이들과 울지 않는 젖먹이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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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廿八日】
廿八日,予謂伯兄曰:
「今日不卜誰存?吾兄幸無恙,乞與彭兒保其殘喘。」
兄垂淚慰勉,遂別,逃他處。
洪嫗謂予婦曰:
「我昨匿破櫃中,終日貼然,當與子易而避之。」
婦堅不欲,仍至柩後偕匿焉。
未幾,數卒入,破櫃劫嫗去,捶擊百端,卒不供出一人,予甚德之,後仲兄產百金,予所留餘亦數十金,並付洪嫗,感此也。
少間,兵來益多,及予避所者前後接踵,然或一至屋後,望見柩而去。
忽有十數卒恫喝而來,其勢甚猛,俄見一人至柩前,以長竿搠予足,予驚而出,乃揚人之為彼鄉導者,
面則熟而忘其姓,予向之乞憐,彼索金,授金,乃釋予,猶曰:
「便宜爾婦也。」
出語諸卒曰:
「姑捨是。」
諸卒乃散去。
喘驚未定,忽一紅衣少年摻長刃直抵予所,大呼索予,出,舉鋒相向,獻以金,復索予婦,婦時孕九月矣,死伏地不起。
予紿之曰:
「婦孕多月,昨乘屋墜下,孕因之壞,萬不能坐,安能起來?」
紅衣者不信,因啟腹視之,兼驗以先塗之血褲,遂不顧。
所擄一少婦一幼女一小兒,小兒呼母索食,卒怒一擊,腦裂而死,復挾婦與女去。
予謂此地人逕已熟,不能存身,當易善地處之。
而婦堅欲自盡,予亦惶迫無主,兩人遂出,並縊於梁。忽項下兩繩一時俱絕,並跌於地。
未及起,而兵又盈門,直趨堂上,未暇過兩廊。
予與婦急趨門外,逃奔一草房,中悉村間婦女,留婦而卻予,予急奔南首草房中,
其草堆積連屋,予登其顛,俯首伏匿,復以亂草覆其上,自以為無患矣。
須臾卒至,一躍而上,以長矛搠其下,予從草間出乞命,復獻以金。
卒搜草中,又得數人,皆有所獻而免。
卒既去,數人復入草間,予窺其中,置大方桌數張,外圍皆草,其中廓然而虛,可容二三十人。
予強竄入,自謂得計,不意敗垣從半腰忽崩一穴,中外洞然,已為他卒窺見,乃自穴外以長矛直刺。
當其前者無不被大創,而予後股亦傷。
於是近穴者從隙中膝行出,盡為卒縛,後者倒行排草而出。
予復至婦所,婦與眾婦皆伏臥積薪,以血膏體,綴髮以煤,飾面形如鬼魅,鑒別以聲。
予乞眾婦,得入草底,眾婦擁臥其上,予閉息不敢動,幾悶絕,婦以一竹筒授予,口銜其末,出其端於上,氣方達,得不死。
戶外有卒一,時手殺二人,其事甚怪,筆不能載。
草上諸婦無不股慄,忽哀聲大舉,卒已入室,復大步出,不旋顧。
天亦漸暝,諸婦起,予始出草中,汗如雨。
至夕,復同婦至洪宅,洪老洪嫗皆在,伯兄亦來,雲是日被劫去負擔,賞以千錢,仍付令旗放還。
途中亂屍山疊,血流成渠,口難盡述。
復聞有王姓將爺居本坊昭陽李宅,以錢數萬日給難民,其黨殺人,往往勸阻,多所全活。
是夜悲咽之餘,昏昏睡去。
【4월 28일】
28일에 내가 백형(伯兄)에게 일컬어 말하길
「금일(今日) 누가 존(存)할지 불복(不卜/헤아리지 못함)합니다.
내 형(兄)은 다행(幸)히 무양(無恙/탈이 없음)하니,
바라건대 팽아(彭兒)와 더불어 그 잔천(殘喘/겨우 붙어 있는 목숨)을 보(保)하십시오.」
형(兄)이 수루(垂淚/눈물을 흘림)하고 위면(慰勉/위로)하였고, 마침내 별(別)하여, 타처(他處)로 도(逃)하였다.
홍구(洪嫗)가 내 부(婦)로 일컬어 말하길
「내가 어제 파궤(破櫃/깨진 궤짝) 중(中)에 닉(匿)하였는데, 종일(終日) 첩연(貼然/안전함)하였으니,
마땅히 당신과 더불어 석(易)하여 피지(避之)하자!」
부(婦)가 굳게 하지 않으려 하였고, 이에 구후(柩後)에 이르러 함께 닉(匿)하였다.
얼마 안 있어, 수졸(數卒)이 입(入)하였는데, 파궤(破櫃)하고 겁구(劫嫗)하고는 거(去)하였는데,
백단(百端/온갖 방법)으로 추격(捶擊/매질함)하였고, 졸(卒)이 1인(人)도 공출(供出/자백)하지 않으니,
나는 심히(甚) 덕지(德之/고맙게 생각함)하였고, 후(後)에 중형(仲兄)의 산(產) 백금(百金)과
나의 남아 있는 것 또한 수십금(數十金)을 아울러 홍구(洪嫗)에게 부(付)하였고, 이를 감(感)하였다.
소간(少間)에, 병(兵)이 익다(益多)하여 래(來)하였고,
나의 피소(避所)에 이르는 자(者)가 전후(前後)로 접종(接踵/잇달아 옴)하였는데,
그런데 혹(或) 하나가 옥후(屋後/집 뒤)에 이르렀는데, 구(柩)를 망견(望見)하더니 거(去)하였다.
홀연히(忽) 십수(十數) 졸(卒)이 있어 동갈(恫喝/을러대어 위협함)하며 래(來)하였는데,
그 세(勢)가 심맹(甚猛/심히 사나움)하였고, 갑자기 1인(人)이 견(見)하더니 구전(柩前)에 지(至)하여,
장간(長竿/긴 장대)로써 나의 족(足)을 삭(搠/찌름)하였고, 나는 경(驚)하여 출(出)하였는데,
곧 양인(揚人)으로 피(彼)를 위하여 향도(鄉導)한 자(者)였고, 면(面)이 즉(則) 열(熟)하였으나 그 성(姓)을 망(忘)하였는데,
나는 향지(向之)하여 걸련(乞憐/동정을 빎)하였는데, 그가 색금(索金)하니, 수금(授金)하였고, 곧 나를 석(釋)하고는,
오히려 말하길
「너의 부(婦)를 편의(便宜/좋게 해 줌)하겠다!」
제졸(諸卒)에게 출어(出語)하여 말하길
「이를 고사(姑捨/잠시 내버려 둠)하자!」
제졸(諸卒)이 이에 산거(散去)하였다.
천경(喘驚/놀라 헐떡임)이 미정(未定)하였는데, 홀연히(忽) 1 홍의(紅衣)의 소년(少年)이 장인(長刃)을 삼(摻/쥠)하고
나의 소(所)로 직저(直抵/곧장 이름)하여, 대호(大呼)하며 색여(索予)하니, 출(出)하였는데,
거봉(舉鋒/칼을 듦)하여 상향(相向/서로 마주함)하였는데, 금(金)으로써 헌(獻)하였고, 다시 나의 부(婦)를 색(索)하였는데,
부(婦)가 이때 잉태(孕) 9월이었고, 죽은 것처럼 복지(伏地)하여 불기(不起)하였다.
내가 태(紿/속임)하여 말하길
「부(婦)가 다월(多月)을 잉(孕)하였고, 어제 승옥(乘屋)하였다가 추하(墜下)하여, 잉(孕)이 이로 인(因)하여 괴(壞)하였고,
능좌(能坐)가 만불(萬不)하니, 어찌 기래(起來)할 수 있으리까?」
홍의자(紅衣者)가 불신(不信)하니, 이로 인(因)하여 계복(啟腹)하여 시지(視之)하였고,
겸(兼)하여 먼저 도(塗/칠함)한 혈고(血褲/피묻은 바지)로써 험(驗/증거)하니, 마침내 불고(不顧)하였다.
소로(所擄)는 1 소부(少婦)와 1 유녀(幼女) 및 1 소아(小兒)였는데, 소아(小兒)가 호모(呼母)하여 색식(索食)하니,
졸(卒)이 노(怒)하여 일격(一擊)하였고, 뇌열(腦裂/골이 터짐)하고 사(死)하였고,
다시 부(婦)를 협(挾)하여 여(女)와 함께 거(去)하였다.
나는 생각하길
<이 땅은 인경(人逕/사람의 자취)이 이숙(已熟/이미 익숙함)하니, 몸이 있을 수가 없다.
마땅히 선지(善地)로 역(易)하여 처지(處之)해야만 한다.>
그러나 부(婦)는 굳게 자진(自盡)하고자 하였고, 나 역시(亦) 황박(惶迫/당황하고 급박함)하여 무주(無主/줏대가 없음)하니,
양인(兩人)이 마침내 출(出)하여, 나란히 양(梁/대들보)에 액(縊/목맴)하였다.
홀연히(忽) 항하(項下/목덜미 아래)의 양승(兩繩/두 줄)이 일시(一時)에 모두 절(絕)하였고, 아울러 땅에 질(跌/거꾸러짐)하였다.
일어날 틈도 없이 병(兵)이 또 영문(盈門/문에 가득 참)하였고, 당상(堂上/대청 위)으로 직촉(直趨/곧장 달려감)하였는데,
미처 양채(兩廊/양쪽 사랑채)를 과(過/지나감)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부(婦)와 함께 급(急)히 문외(門外)로 추(趨)하였고, 1 초방(草房/초가집)으로 도분(逃奔)하였는데,
중(中)에 모두 촌간(村間)의 부녀(婦女)들이 있었고, 부(婦)를 유(留)하고는 나를 각(卻)하니,
나는 급히(急) 남수(南首)의 초방(草房) 중(中)으로 분(奔)하였는데,
그 초(草)가 퇴적(堆積/많이 겹쳐 쌓임)하여 연옥(連屋/지붕에 닿음)하니, 나는 그 전(顛/꼭대기)으로 등(登)하였고,
부수(俯首/머리를 숙임)하고 복닉(伏匿/엎드려 숨음)하였는데,
다시 난초(亂草)로써 그 상(上)을 부(覆)하니, 스스로 무환(無患)하다 이위(以為)하였다.
수유(須臾/잠시 후)에 졸지(卒至)하였는데, 일약(一躍/대번에 뛰어오름)하여 상(上)하였고,
장모(長矛)로써 그 하(下)를 삭(搠/찌름)하였는데, 나는 이로 말미암아 초간(草間)에서 출(出)하여 걸명(乞命)하였고,
다시 금(金)으로써 헌(獻)하였다.
졸(卒)이 초중(草中)을 수(搜/뒤짐)하였고, 또 수인(數人)을 득(得)하였는데, 모두 소헌(所獻)이 있어 면(免)하였다.
졸(卒)이 이윽고 거(去)하였고, 수인(數人)이 다시 초간(草間)으로 입(入)하였는데,
나는 그 중(中)을 규(窺/엿봄)하니, 대방탁(大方桌/큰 사각 탁자) 수장(數張)을 치(置)하고,
외(外)를 모두 초(草)로 위(圍)하고, 그 가운데를 확대(廓)하고 나면 허(虛)하니, 가히(可) 2~30인(人)을 용(容)할 것 같았다.
나는 강(強)하게 찬입(竄入/숨어 들어감)하였고, 득계(得計)를 자위(自謂)하였는데,
불의(不意)에 패원(敗垣/썩은 담벼락)이 반요(半腰/중간)를 따라 홀연히(忽) 혈(穴/구멍) 하나가 붕(崩)하니,
중외(中外)가 통연(洞然/확 트임)하였고, 이미(已) 다른 곳의 졸(卒)이 규견(窺見/몰래 엿봄)하였고,
이에 혈외(穴外)로부터 장모(長矛)로 직자(直刺)하였다.
그리하여 그 전자(前者)로 대창(大創)을 피(被)하지 않음이 없었고, 나의 후고(後股/정강이 뒤) 역시(亦) 상(傷)하였다.
이에 근혈(近穴)한 자(者)는 극중(隙中/틈 가운데)를 종(從)하여 슬행(膝行/무릎으로 김)하여 출(出)하니,
모두 졸(卒)이 박(縛)하고, 후자(後者)는 도행(倒行/역행)하여 배초(排草/풀을 밀침)하고 출(出)하였다.
나는 다시 부소(婦所)에 지(至)하였는데, 부(婦)는 중부(眾婦)와 더불어 모두 적신(積薪/장작더미)에
복와(伏臥/엎드려 누움)하였고, 혈(血)로써 고체(膏體/몸에 기름칠함)하고 철발(綴髮/머리털을 엮음)하였고,
매(煤/숯검댕)로써 식면(飾面/얼굴을 위장함)한 형상(形)이 귀매(鬼魅/도깨비)와 같았는데,
성(聲)으로써 감별(鑒別/식별)하였다.
나는 중부(眾婦)에 걸(乞)하여, 초저(草底/풀 밑)를 득입(得入)하였는데,
중부(眾婦)가 그 상(上)을 옹와(擁臥/끼고 누움)하니, 나는 폐식(閉息/숨이 막힘)하고 감동(敢動)하지 못하였는데,
거의 민절(悶絕/기절함)하였는데, 부(婦)가 죽통(竹筒/대나무 통) 하나를 내게 주니,
그 말(末)을 구함(口銜/입에 묾)하여, 상(上)에 그 단(端/끝)을 출(出)하니, 기(氣)가 바야흐로 달(達)하여,
불사(不死)를 득(得)하였다.
호외(戶外)에 졸(卒) 하나가 있었는데, 이때 2인(人)을 수살(手殺)하였는데, 그 사(事)가 심괴(甚怪)하여,
필(筆)로 재(載)할 수가 없다.
초상(草上)의 제부(諸婦)는 고율(股慄/두려워서 다리가 떨림)를 무부(無不)하였는데,
홀연히(忽) 애성(哀聲)이 대거(大舉)하였는데, 졸(卒)이 이미(已) 입실(入室)하였고,
다시 대보(大步)하여 출(出)하였는데, 선고(旋顧)하지 않았다.
천(天) 역시(亦) 점차(漸) 명(暝)하자, 제부(諸婦)가 기(起)하니,
나는 비로소 초중(草中)을 출(出)하였고, 한(汗/땀)이 여우(如雨)하였다.
석(夕)에 이르러, 다시 부인(婦)과 함께 홍댁(洪宅)에 지(至)하였는데,
홍노(洪老) 홍구(洪嫗)가 모두 재(在)하였고, 백형(伯兄) 역시(亦) 래(來)하여 운(雲)하길
<이날에 겁거(劫去)를 피(被)하여 부담(負擔/짐을 짐)하였는데, 천전(千錢)으로써 상(賞)하였고,
이에 영기(令旗)를 부(付)하여 방환(放還)하였다.
도중(途中)에 난시(亂屍)가 산첩(山疊)하였고, 혈류(血流)는 성거(成渠/개천을 이룸)하였는데, 진술(盡述)을 구난(口難)한다.
다시 문(聞)하니 왕성(王姓)의 장야(將爺/장군의 존칭)가 있어
본방(本坊/본 동네) 소양(昭陽) 이댁(李宅)에 거(居)하며 전(錢) 수만(數萬)으로써 난민(難民)을 일급(日給)하여,
그 당(黨)이 살인(殺人)하면 왕왕(往往) 권조(勸阻/그만두어 말림)하여, 다소(多所)가 전활(全活/목숨을 살림)하였다 한다.>
이 밤에 비인(悲咽/슬퍼서 목이 맴)한 나머지, 혼혼(昏昏/정신을 차리지 못함)하여 수거(睡去/잠이 듦)하였다.
【4월 28일】
28일에 내가 큰형에게 일컬어 말하길
「금일 누가 살아 있을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내 형은 다행히 무탈하니 바라건대 팽아와 더불어 그 겨우 붙어 있는 목숨을 보존하십시오.」
형이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였고 마침내 작별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홍 할머니가 내 부인에게 일컬어 말하길
「내가 어제 깨진 궤짝 속에 숨었는데 종일 안전하였으니 마땅히 당신과 바꿔서 피하도록 하자!」
부인이 굳게 하지 않으려 하였고 이에 관 뒤에 이르러 함께 숨었다.
얼마 안 있어 몇몇 병졸이 들어왔는데 궤짝을 부수고 할머니를 협박하고 가버렸는데
온갖 방법으로 매질하였으나 결국 한 사람도 자백하지 않으니 나는 심히 고맙게 생각하였고
후에 둘째 형의 재산 100금과 내 남아 있는 수십금을 아울러 홍 할머니에게 주어 이에 감사를 표했다.
잠시 후에 병졸이 더욱 많이 왔고 내 숨은 곳에 이르는 자들이 앞뒤로 잇달아 오더니
혹 하나가 집 뒤에 이르러 관을 멀리서 보고는 가버렸다.
홀연히 십수 병졸이 있어 을러대어 위협하며 왔는데 그 기세가 심히 사나웠고
갑자기 1인이 보더니 관 앞으로 이르러 긴 장대로 내 발을 찔렀고 나는 놀라 나갔는데
곧 양주 사람으로 저쪽을 위하여 향도한 자로 얼굴이 즉 낯이 익었으나 그 성씨를 잊었는데
나는 그를 향하여 애걸하며 동정을 빌었다.
그가 금을 찾으니 금을 바쳤고 곧 나를 풀어주고는 말하길
「너의 부인을 좋게 해 주겠다!」
여러 병졸에게 나가면서 말하길
「이들을 잠시 내버려 두자!」
여러 병졸들이 이에 흩어져 가버렸다.
놀라 헐떡임이 미처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홀연히 홍의를 입은 한 소년이 큰 칼을 쥐고 내가 있는 곳으로 곧장 이르더니
크게 소리치며 나를 찾았고 나가니 칼을 들고 서로 마주하니 금을 바쳤다.
다시 나의 부인을 찾았는데 부인이 이미 잉태 9개월이었고 죽은 것처럼 땅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속여 말하길
「부인이 잉태한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 어제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추락하여 이로 인하여 유산하였고
능히 앉아 있질 못하는데 어찌 일어날 수 있으리까?」
홍의를 입은 자가 믿지 않으니 배의 옷을 헤치고 겸하여 먼저 칠한 피 묻은 바지를 증거로 보여주니 마침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포획한 것은 어린 부인 1명과 딸아이 1명, 남자 어린이 1명이었는데 남자 어린이가 모친을 부르며 먹을 것을 찾으니
병졸이 노하여 한 번 때리니 골이 터져 죽었고 다시 부인을 협박하여 딸과 함께 가버렸다.
나는 생각하길
<이 땅은 사람의 자취가 이미 익숙하니 몸이 있을 수가 없다. 마땅히 좋은 곳으로 바꿔 거처해야만 한다.>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굳게 자진하고자 하였고 나 역시 황박하여 줏대가 없으니 두 사람이 마침내 나가 나란히 대들보에 목을 맸다.
홀연히 목덜이 아래의 두 줄이 일시에 모두 끊어졌고 아울러 땅에 거꾸러졌다.
일어날 틈도 없이 병졸이 또 대문에 가득 찼는데 대청 위로 곧장 달려왔으나 미처 양쪽 사랑채를 지나갈 겨를은 없었다.
나는 부인과 함께 급히 문 밖으로 달아났고 한 초가집으로 도주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모두 촌간의 부녀들이 있었고
부인을 남기더니 나를 물리쳤고 나는 급히 남쪽의 초가집 사이로 달아났는데 그 풀이 많이 겹쳐 쌓여 지붕에 닿으니
나는 그 꼭대기로 올라가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 숨고는 다시 풀을 어지럽게 그 위에 덮으니 스스로 무환하다 생각하였다.
잠시 후에 병졸이 이르렀는데 대번에 뛰어올라 위로 올라가더니 긴 창으로 그 아래를 찔렀는데
나는 이로 말미암아 풀 사이에서 나가 목숨을 애걸하였고 다시 금을 바쳤다.
병졸이 풀 사이를 뒤지니 또 여러 명을 얻었는데 모두 바치는 바가 있어 면하였다.
병졸이 이윽고 가버리니 여러 명이 다시 풀 사이로 들어갔는데
내가 그 가운데를 엿보니 큰 사각 탁자 여러 개를 배치하고 그 밖을 모두 풀로 둘러
그 가운데를 확대하고 나면 빈 공간에 가히 20~30인이 들어갈만했다.
나는 강하게 숨어 들어갔고 계책을 얻었다 스스로 일컬었는데
불의에 썩은 담벼락의 중간이 무너져 구멍 하나가 밖에 확 트였는데
이미 다른 곳의 병졸이 몰래 엿보더니 이에 구멍 밖으로부터 긴 창으로 곧장 찔러왔다.
그리하여 그 앞에 있던 자들이 크게 상처 받지 않는 자들이 없었고 나의 정강이 뒤 또한 상하였다.
이에 구멍 가까이 있던 자들은 틈 가운데를 따라 무릎으로 기어 나가니 모두 병졸에게 포박당하였고
뒤에 있던 자들은 역행하여 풀을 밀치고 나갔다.
나는 다시 부인이 있던 곳에 이르렀는데 부인은 부녀자들과 함께 모두 장작더미에 엎드려 누워있었고
피를 몸에 칠하고 머리털을 엮었으며 숯검댕으로 얼굴을 위장한 형상이 도깨비와 같았는데 소리로써 식별하였다.
나는 부녀자들에게 애걸하여 풀 밑을 얻어 들어갔는데 부녀자들이 그 위를 끼고 누우니 나는 숨이 막혀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였는데
거의 기절할 뻔하였는데 부인이 대나무 통 하나를 내게 주니
그 밑을 입에 물고 위에 그 끝을 나가게 하니 기가 바야흐로 통하여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집 밖에 병졸 하나가 있었는데 이때 2명을 직접 살해하였는데 그 일이 심히 괴상하여 붓으로 실을 수가 없다.
풀 위의 부녀자들은 두려워 다리를 떨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갑자기 애처로운 소리를 대거 냈는데 병졸이 이미 집안으로 들어왔고 다시 큰 걸음으로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 또한 점차 어두워지자 부녀자들이 일어나니 나는 비로소 풀 속에서 나갔는데 땀이 비와 같았다.
밤에 이르러 다시 부인과 함께 홍씨 집에 이르렀는데 홍 노인, 홍 할머니가 모두 있었고 큰형 또한 와서 말하길
<이날에 위협을 당하여 끌려가 짐을 지게 되었는데 1000전(1관)을 포상하였고
이에 영기(令旗/군중의 작은 깃발)를 주어 풀어서 돌려보냈다.
길 가운데 어지러운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피가 흘러 개천을 이뤘는데 입으로 모두 진술하기가 어렵다.
다시 들으니 왕씨 성의 장군이 있어 본 동네 소양 이씨 집에 머물면서 전 수만으로 난민에게 매일 공급하였는데,
그 당여가 살인하면 왕왕 말려 그만두게 하여 많은 자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한다.>
이 밤에 슬퍼서 목이 맨 나머지 정신이 몽롱하여 잠들었다.
요약.
1645년 4월 28일 함락 4일차.
아침이 되자 왕수초와 부인은 다시 어제 숨었던 집의 관 뒤로 간다.
홍 할머니는 어제 자신이 숨었던 궤짝 속에 아내가 숨으라 하였으나 아내는 거절하고 끝내 왕수초와 함께 간다.
결국 청군에게 걸리게 되었는데 그는 양주사람으로 낯이 익은 자였다.
그는 돈을 받고 눈감아 주었는데 조금 후에 빨간 옷을 입은 소년이 칼을 들고 찾아와 왕수초를 위협한다.
왕수초는 금을 바쳤으나 소년은 아내를 내놓으라 협박하였고 왕수초는 아내가 유산하였다며 이를 모면한다.
소년이 가버리자 왕수초와 아내는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고자 하였으나
다행히 줄이 끊어졌고 다시 청군이 집에 들어오자 다급히 도망친다.
어떤 초가집에 들어가니 부녀자들이 숨어 있었고 아내만을 받아주고 왕수초는 다시 다른 초가집으로 도망간다.
왕수초는 초가집 안의 풀 속에 숨었으나 곧 담이 무너져 청군에 발각되고 많은 사람들이 잡혀간다.
몰래 빠져나온 왕수초는 다시 부인이 숨은 곳으로 가서 부녀자들에게 애원하여 간신히 숨게 된다.
청군 1명이 초가집에 들어오자 부녀자들은 일제히 놀라 소리를 쳤으나 병졸은 그냥 나가버렸다.
밤에 다시 홍 할머니 집으로 가서 큰형과 만나게 되었는데 큰형은 청군 장군 중에 왕씨라는 자가
수많은 한족들을 살리고 휘하 병졸들의 살육을 중지하고 있다 전한다.
이날 왕수초는 정신이 몽롱하여 깊이 잠이 든다.
*양주성에 입성한 만주족+몽고족+한족 청군
청나라 한족 장군의 존재와 병졸과 말이 통했다는 부분을 살펴보면
당시 양주성 공방전에 요동 출신 한족 팔기군도 참전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청실록 1645년 7월 3일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도도 휘하에 우전 초오하(한군/漢軍)가 있었다.
또한 외번 몽고병도 기록에 보인다.
즉 양주 대학살 당시 양주성에 입성한 청군은 [만몽 팔기 + 외번 몽고 + 요동 출신 한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도의 출병은 1644년 10월 25일에 순치제의 명, 실상 도르곤의 명으로 이뤄졌는데
이 당시 이자성과 남명의 대죄 3개를 언급하며 반드시 이들을 멸하라 명하였고
군율을 엄히하여 항복한 지역에서 절대 약탈&살육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다.
물론 양주성은 함락한 성이었으니 이 명은 통하지 않았다.
-11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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