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7부-함락2일차(1) 젖먹이들이 길가에 간과 뇌를 흩뿌리다!
8부-함락2일차(2) 고려여자들은 절개를 지켰는데, 너희 중국인은 수치를 모르는가?
10부-함락3일차 학살에 울부짖는 아이들과 울지 않는 젖먹이
14부-함락6일차 봉도령(封刀令)! 얼레빗과 참빗 명군의 약탈!
16부-함락8일차 쌀을 받아가라! 아비규환에서 살아난 원귀꼴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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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初五】
初五日,幽僻之人始悄悄走出,每相遇,各淚下不能作一語。
予等五人雖獲稍蘇,終不敢居宅內,晨起早食,即出處野畔,其妝飾一如前日;
蓋往來打糧者日不下數十輩,雖不操戈,而各制梃恐嚇,詐人財物,每有斃杖下者;
一遇婦女,仍肆擄劫,初不知為清兵、為鎮兵、為亂民也?
是日,伯兄因傷重,刀瘡迸裂而死,傷哉,痛不可言!
憶予初被難時,兄弟嫂侄婦子親共八人,今僅存三人,其內外姨又不復論。
計揚之人如予之家水知凡幾?
其數瀕於死,幸死而不死,如予與婦者甚少,然而愁苦萬狀矣!
自四月二十五日起,至五月五日止,共十日,其間皆身所親歷,目所親睹,故漫記之如此,遠處風聞者不載也。
後之人幸生太平之世,享無事之樂;
不自修省,一味暴殄者,閱此當驚惕焉耳!
【5월 5일】
초(初) 5일에, 유벽(幽僻/한적하고 구석짐)의 사람이 비로소 초초(悄悄) 주출(走出/나와서 걸음)하였는데,
매번(每) 상우(相遇)하면, 각각(各) 누하(淚下)하여 일언(一語)도 작(作)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 5인(人)은 비록 점차 소생(蘇)을 획(獲)하였으나, 종내(終) 감히(敢) 댁내(宅內)에 거(居)하지 못하였고,
신기(晨起/새벽에 일어남)하고 조식(早食/아침 밥을 일찍 먹음)하면,
즉(即) 야반(野畔/변두리 밭두렁)으로 출처(出處/나가서 머묾)하였고,
그 장식(妝飾/꾸미고 위장함)은 전일(前日)과 일여(一如)하였다.
대개(蓋) 왕래(往來)하며 타량(打糧/식량을 약탈함)하는 자(者)는 하루에 수십배(數十輩)에 불하(不下/모자라지 아니함)하였고,
비록 조과(操戈/창을 쥠)하지는 않았으나, 각각(各) 제정(制梃/방망이를 만듦)하고 공하(恐嚇/협박함)하여,
사람의 재물(財物)을 사(詐/속임)하여 매번(每) 장하(杖下/몽둥이 아래)에 폐(斃/죽음)한 자(者)도 있었다.
부녀(婦女)를 일우(一遇)하면, 곧 방자하게 노겁(擄劫/위협하여 빼앗음)하였는데,
초(初)엔 청병(清兵)인지, 진병(鎮兵)인지, 난민(亂民)인지 부지(不知)하였다.
이날에, 백형(伯兄)이 중상(傷重)으로 인(因)하여, 도창(刀瘡/칼에 의한 상처)이 병렬(迸裂/파열함)하여 사(死)하였는데,
상재(傷哉)로다! 통부가언(痛不可言/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움)이로다!
기억(憶)하면 내가 난시(難時)를 초피(初被)함에, 형제수질(兄弟嫂侄)과 부자(婦子)의 친(親)이 모두 8인이었는데,
지금(今) 3인(人)을 근존(僅存)하였고, 그 내외(內外)의 이(姨/아내의 자매)는 또한 복론(復論)하지 않았다.
헤아리면 양(揚)의 사람으로 내 집과 같은 경우가 무릇 얼마인지 알겠는가?
그 죽음에 빈(瀕/근접함)함이 몇 번이며, 다행히(幸) 죽거나 죽지 않거나 나와 더불어 부(婦)와 같은 자(者)는
심소(甚少)하였으니, 그렇지만 수고(愁苦/근심하고 괴로워함)는 만상(萬狀/만 가지 형상)이로다!
4월 25일로부터 기(起)하여, 5월 5일에 이르러 지(止)하였으니, 공(共)하면 10일인데,
그 간(間)에 모두 신소친력(身所親歷/몸으로 직접 겪은 바)하고 목소친도(目所親睹/눈으로 직접 목도한 바)하였으니,
이런 연고(故)로 이와 같이 만기(漫記/생각나는 대로 씀)하니, 원처(遠處)의 풍문(風聞)인 것들은 부재(不載)한다.
후(後)의 사람이 다행히(幸) 태평지세(太平之世)를 생(生)하여, 무사지락(無事之樂)을 향(享)하는데,
스스로 수성(修省/수양하고 반성함)하지 않거나, 일미폭진(一味暴殄/그저 돈이나 시간을 낭비함)하는 자(者)는
이를 열(閱/봄)한다면 마땅히 경척(驚惕/놀라서 두려워함)할 뿐이로다!
【5월 5일】
5일에 한적하고 구석진 곳의 사람들이 비로소 점차 나와서 걸었는데
매번 서로 조우하면 각각 눈물을 흘리며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 5인은 비록 점차 소생을 얻었으나 종내 감히 집안에 있지 못하였고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일찍 먹도 곧 변두리 밭두렁으로 나가 머물렀으며 그 꾸미고 위장한 것은 전일과 똑같이 하였다.
대개 왕래하며 식량을 약탈하는 자는 하루에 수십 무리에 모자라지 아니하였고
비록 창을 쥐지는 않았으나 각각 방망이를 만들어 협박하고 사람의 재물을 속여 매번 몽둥이 아래에서 죽은 자도 있었다
부녀를 한 번 만나면 곧 방자하게 위협하고 빼앗았는데 처음에 청병인지, 진병(남명군)인지, 난민인지 알지 못하였다.
이날에 큰형이 중상으로 인하여 도창이 파열하여 죽었는데 슬프도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도다!
기억하자면 내가 어지러운 때를 처음 당할 때 형제, 형수, 조카, 부인, 아들의 친척이 모두 8인이었는데
지금 겨우 3인이 있으니 그 내외의 아내의 자매는 또한 다시 논하지 않겠다.
헤아리면 양주 사람으로 내 집과 같은 경우가 무릇 얼마인지 알겠는가?
그 죽음에 근접한 것이 몇 번이며 다행히 죽거나 죽지 않거나 나와 부인과 같은 자는 심히 적었으니
그러나 근심하고 괴로워함은 만 가지 형상이로다!
4월 25일로부터 일어나 5월 5일에 이르러 그치었으니 합하면 10일인데
그 간에 모두 몸으로 직접 겪은 바와 눈으로 직접 목도한 바를 이런 연고로 이와 같이 생각나는 대로 쓰니
먼 곳의 풍문인 것들은 기재하지 않았다.
후의 사람이 다행히 태평지세에 태어나 무사지락을 누리면서 스스로 수양하고 반성하지 않거나
그저 돈이나 시간을 낭비하는 자가 이를 보게 된다면 마땅히 놀라서 두려워할 뿐이로다!
요약.
1645년 5월 5일 양주성 함락 10일차.
학살이 멈춘 지 벌써 5일이나 지났으나 왕수초 일가는 계속 위장을 하고 숨어 있었다.
성내에는 한족들이 몽둥이를 들고 약탈을 자행하고 있으니
왕수초는 이들이 청군인지 명군인지 난민인지 구분이 안 간다고 한탄한다.
이날 중상을 입고 누워있던 큰형이 상처가 터져서 사망한다.
왕수초의 일가족은 왕수초와 처자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하거나 행방이 묘연했다.
왕수초는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만 적었다며
먼 훗날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크게 놀랄 것이라 말한다.
-18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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