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대학살 19부-사실인가? 과장인가? 위서인가?(연재완료) 홍타이지 이야기

입관 1년 후 1645년 4월 청군이 10일간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양주십일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부-도르곤<사가법 선생! 같이 갑시다!>

2부-도도<반항하는 양주성을 도륙 냈나이다!>

3부-함락 하루 전...잔치를 벌이다

4부-함락1일차(1) 낙성임박! 이중인격자 사가법!

5부-함락1일차(2) 아내에게 자살을 권유하다!

6부-함락1일차(3) 살육의 밤 공포에 떨다!

7부-함락2일차(1) 젖먹이들이 길가에 간과 뇌를 흩뿌리다!

8부-함락2일차(2) 고려여자들은 절개를 지켰는데, 너희 중국인은 수치를 모르는가?

9부-함락2일차(3) 구사일생 처자와 상봉하다!

10부-함락3일차 학살에 울부짖는 아이들과 울지 않는 젖먹이

11부-함락4일차 청 한족 장군이 한족들을 살리다!

12부-함락5일차(1) 흉폭한 한족 팔기군 병사!

13부-함락5일차(2) 집단 강간당하는 부녀자들

14부-함락6일차 봉도령(封刀令)! 얼레빗과 참빗 명군의 약탈!

15부-함락7일차 80만 시신을 불태우다!

16부-함락8일차 쌀을 받아가라! 아비규환에서 살아난 원귀꼴

17부-함락9일차 비가 멈추자 부패하는 시신들

18부-함락10일차 아 후세인이여 이 글을 보고 놀라지 말라!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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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륙령은 있었나?

→ 청실록을 살펴보면 도도의 도륙령은 있었다.

   청실록 1645년 5월 28일, 1645년 6월 8일 기사


2. 양주성민은 백만 명이었나?


명사 지리지 中

揚州府元揚州路,屬淮東道宣慰司。太祖丁酉年十月曰淮海府。辛丑年十二月曰維揚府。丙午年正月曰揚州府。

領州三,縣七。西距南京二百二十里。

洪武二十六年編戶一十二萬三千九十七,口七十三萬六千一百六十五。

弘治四年,戶一十萬四千一百四,口六十五萬六千五百四十七。

萬曆六年,戶一十四萬七千二百一十六,口八十一萬七千八百五十六。

양주부(揚州府)는 원(元)의 양주로(揚州路)로, 회동(淮東) 도선위사(道宣慰司)에 속(屬)하였다.

태조(太祖) 정유년(丁酉年) 10월에 회해부(淮海府)라 말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2월에 유양부(維揚府)라 말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월에 양주부(揚州府)라 말하였고, 3주(州)와 7현(縣)을 영(領)하였다.

서(西)쪽으로 남경(南京)과 220리(里) 거리(距)이다.

홍무(洪武) 26년에 12만 3097 호(戶)와 73만 6165 구(口)를 편(編)하였다.

홍치(弘治) 4년에, 10만 4104 호(戶), 65만 6547 구(口)였다.

만력(萬曆) 6년에, 14만 7216 호(戶), 81만 7856 구(口)였다.


→ 양주부에는 3주와 7현이 있었으며 1578년에 총 인구는 81만 정도였다.

   1645년에 양주의 인구가 얼마 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국 사학자 장덕방(张德芳)은 당시 양주부의 총 인구는 7만 8960호, 49만 5497명이라고 하며,

   청의 공격으로 양주성으로 관내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하더라도 

   당시 양주성에 밀집한 인구는 20~30만이라 추정하였다.



3. 80만 학살 기록

명말청초 사학가 계륙기(计六奇/1622년~1687년)는 저서 명계남략(明季南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명계남략(明季南略) 中

揚州(府)初被高傑(明軍)屠害二次,殺人無算。

及豫王(清軍)至,复盡屠之。

總計前後殺人凡八十萬,誠生民一大劫也。

양주(揚州) (부)는 처음에 고걸(高傑/흥평백) (명군)에게 2차례 도해(屠害)를 피(被)하여 살인(殺人)이 무산(無算)하였다.

예왕(豫王) (청군)이 이름에 다시 진도(盡屠)하였다.

전후(前後)의 살인(殺人)을 총계(總計)하면 무릇 80만이며, 참으로 생민(生民)의 하나의 대겁(大劫)이었다.


양주는 처음에 (남명 흥평백) 고걸에게 2차례 도륙을 당해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청 예왕(도도)가 이르러 다시 모조리 도륙하였다.
전후로 죽은 자를 모두 헤아리면 무릇 80만이니, 참으로 백성들에 닥친 큰 재난이었다.



4. 화려한 개선

도도는 양주를 도륙냈다고 순치제에게 보고하였고 마침내 1645년 6월 8일 북경으로 돌아온다.


청실록 1645년 6월 8일 기사中

○己未。以南京平定。上御殿。攝政王多爾袞、率諸王、貝勒、貝子、公、及文武群臣、上表。

行慶賀禮是日、遣戶部尚書英俄爾岱、告祭圜丘。禮部尚書郎球、告祭方澤。吏部尚書鞏阿岱告祭

太廟內大臣何洛會、告祭社稷圜丘祝文曰。臣仰承天命。遣定國大將軍豫親王多鐸等、統兵征剿。

蕩平流寇。底定三秦。黃河以南、望風響應。兩淮官民、誠心歸順。惟揚州逆命未服。旋被攻克。江東將士鳥驚魚潰。

投降者二十三萬。餘皆奔竄。自是造船渡江。大兵直抵金陵。福王朱由松遁走。官民踴躍出迎。

俄頃之間、南方遂定。此皆上天默佑之所致也。敬行慶禮祭告。伏惟歆饗餘文同

○기미일(己未)에, 남경(南京)을 평정(平定)함으로써 상(上)이 어전(御殿)하였고,

섭정왕(攝政王) 다이곤(多爾袞)이 제왕(諸王), 패륵(貝勒), 패자(貝子), 공(公)과 더불어

문무군신(文武群臣)을 솔(率)하여 상표(上表)하고 경하례(慶賀禮)를 행(行)하였다.

이날에, 호부상서(戶部尚書) 영아이대(英俄爾岱)를 보내 원구(圜丘)에 고제(告祭)하였고,

예부상서(禮部尚書) 낭구(郎球)로 하여금 방택(方澤)에 고제(告祭)하게 하였다.

이부상서(吏部尚書) 공아대(鞏阿岱)로 하여금 태묘(太廟)에 고제(告祭)하게 하였고,

내대신(內大臣) 하락회(何洛會)로 하여금 사직(社稷)에 고제(告祭)하게 하였는데,

원구(圜丘)의 축문(祝文)에 말하길

   <신(臣)이 천명(天命)을 앙승(仰承)하여, 정국대장군(定國大將軍)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 등(等)을 보내

    통병(統兵)하여 정초(征剿)하고, 유구(流寇)를 탕평(蕩平)하게 하였나이다.

    삼진(三秦)을 저정(底定/평정함)하였고, 황하(黃河) 이남(以南)은 망풍(望風)하여 향응(響應)하였고,

    양(兩) 회(淮)의 관민(官民)은 성심(誠心)으로 귀순(歸順)하였나이다.

    오직 양주(揚州)만이 역명(逆命)하고 미복(未服)하니, 선(旋)하여 공극(攻克)을 피(被)하였나이다.

    강동(江東)의 장사(將士)는 조경어궤(鳥驚魚潰)하여, 투항자(投降者)가 23만(萬)이었고,

    나머지 모두는 분찬(奔竄)하니, 이로부터 조선(造船)하여 도강(渡江)하였고,

    대병(大兵)이 금릉(金陵)을 직저(直抵)하였나이다.

    복왕(福王) 주유송(朱由松)은 둔주(遁走)하였고, 관민(官民)은 용약(踴躍)하여 출영(出迎)하였습니다.

    아경지간(俄頃之間/일순간)에 남(南)이 바야흐로 마침내 정(定)하였으니,

    이는 모두 상천(上天)이 묵우(默佑)한 소치(所致)이나이다.

    공경(敬)하게 경례(慶禮)를 행(行)하옵고 제고(祭告)하오니, 복유(伏惟)하건대 흠향(歆饗/신명이 제물을 받음)하소서!>

여문(餘文)은 동(同)하다.


*원구단(圓丘壇) : 제천행사

*방택단(方澤壇) : 제지행사


○1645년 6월 8일에 남경을 평정함으로써 전각에 거둥하였고

섭정왕 도르곤이 여러 왕, 버이러, 버이서, 공작과 더불어 문무신하를 인솔하여 표를 올리고 경하례를 행하였다.

이날에 호부상서 잉굴다이를 보내 원구에 고하여 제사하였고

예부상서 랑쿄를 보내 방택에 고하여 제사하였고

이부상서 궁가다이를 보내 태묘에 고하여 제사하였고

내대신 호로호이를 보내 사직에 고하여 제사하게 하였는데

원구의 축문에 말하길

   <신(순치제)이 천명에 우러러 받들어 정국대장군 어르커 친왕 도도 등을 보내

    군을 통솔하여 적을 토벌하고 섬멸하였으며 도적떼를 탕평하였고, 

    삼진을 평정하였고 황하 이남은 멀리서 바라보고 호응하였으며 양회의 관민은 성심으로 귀순하였나이다.

    오직 양주만이 명을 거역하고 복종하지 않으니 빠르게 공격하여 함락하였나이다.

    강동의 장졸들은 새가 놀란듯 물고기가 흩어지듯 투항한 자가 23만이었고 나머지 모두는 달아나 숨었나이다.

    이로부터 배를 건조하고 강을 건너 대군이 금릉에 곧장 들이치니

    복왕 주유송은 도주하였고 관민은 뛸뜻이 춤추며 나와 맞이하였습니다.

    일순간에 남방이 마침내 평정되었으니 이는 모두 상천이 보우한 소치이나이다.

    공경하게 경사스러운 예를 행하옵고 제사하여 고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흠향하소서!>

나머지 글도 동일하다.



5. 양주성 전투에 참전한 청나라 장수들


청실록 1645년 10월 30일 기사中

○戊申上御殿。以和碩豫親王多鐸等、統軍西征破流賊李自成 兵二十餘萬攻克潼關下西安等處、又收服河南進拔揚州渡江下江寧

擒福王朱由松前後戰敗水陸馬步敵兵凡一百五十餘陣江南浙江等處悉平招撫文武官二百四十四員馬步兵三十一萬七千七百名

敘功行賞。加封多鐸、為和碩德豫親王賜黑狐皮帽貂皮朝服褂各一。金五千兩銀五萬兩玲瓏鞍、漆鞍、馬各一匹空馬八匹。

賜從征多羅承澤郡王碩塞、金二千兩銀二萬兩玲瓏鞍馬一匹。空馬四匹多羅貝勒尼堪、博洛、金各二百兩。銀各一萬五千兩

漆鞍馬各一匹。空馬各二匹恭順王孔有德 懷順王耿仲明 、貂裘蟒緞朝衣各一襲金各一百兩銀各一萬兩馬各二匹固山貝子吞齊、

和託尚善護軍統領公圖賴金各一百兩銀各五千兩鞍馬各一匹輔國公杜爾祜特爾祜、杜嫩、金各五十兩銀各二千兩固山額真

宗室拜尹圖金八十兩。銀四千兩。鞍馬一匹。固山額真公阿山、金五十兩銀三千兩。鞍馬一匹。固山額真佟圖賴富喇克塔、

金各三十兩。銀各一千五百兩。護軍統領阿濟格尼堪尚書宗室韓岱、金各二十五兩。銀各一千三百兩。并隨征各章京、

外藩台吉、章京恭順懷順兩王下章京等金銀各有差。

○무신일(戊申)에 상(上)이 어전(御殿)하였는데, 

화석예친왕(和碩豫親王) 다탁(多鐸) 등(等)이 통군(統軍)하여 서정(西征)하고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의 병(兵) 20여만(萬)을 파(破)하였으며,

동관(潼關)을 공극(攻克)하고, 서안(西安) 등처(等處)를 하(下)하였으며,

또한 하남(河南)을 수복(收服)하였고, 양주(揚州)를 진발(進拔)하였으며,

도강(渡江)하여 강령(江寧)을 하(下)하고 복왕(福王) 주유송(朱由松)을 금(擒)하였고,

전후(前後)로 전(戰)하여 수륙마보(水陸馬步)의 적병(敵兵) 무릇 150여 진(陣)을 패(敗)하였고,

강남(江南)과 절강(浙江) 등처(等處)를 실평(悉平)하여 

문무관(文武官) 244원(員)과 마보병(馬步兵) 31만 7700명(名)을 초무(招撫)하였으니, 서공행상(敘功行賞)하였다.

다탁(多鐸)을 가봉(加封)하여 화석(和碩) 덕예친왕(德豫親王)으로 삼고,

흑호피(黑狐皮), 모초피(帽貂皮), 조복괘(朝服褂) 각(各) 1벌씩과 금(金) 5천냥, 은(銀) 5만냥, 

영롱안(玲瓏鞍), 칠안(漆鞍), 마(馬) 각각(各) 1필(匹), 공마(空馬) 8필(匹)을 사(賜)하였다.

다탁(多羅)을 종정(從征)한 승택군왕(承澤郡王) 석새(碩塞)에게 

금(金) 2천냥, 은 2만냥, 영롱안마(玲瓏鞍馬) 1필(匹), 공마(空馬) 4필(匹).

다라패륵(多羅貝勒) 니감(尼堪), 박락(博洛)에게 금(金) 각(各) 200냥, 은(銀) 각(各) 1만5천냥,

칠안마(漆鞍馬) 각(各) 1필(匹), 공마(空馬) 각(各) 2필(匹).

공순왕(恭順王) 공유덕(孔有德), 회순왕(懷順王) 경중명(耿仲明)에게 초구망단(貂裘蟒緞) 조의(朝衣) 각(各) 1습(襲),

금(金) 각(各) 100냥, 은(銀) 각(各) 1만냥, 마(馬) 각(各) 2필(匹).

고산패자(固山貝子) 탄제(吞齊), 화탁(和託), 상선(尚善), 호군통령(護軍統領) 공(公) 도뢰(圖賴)에게

금(金) 각(各) 100냥, 은(銀) 각(各) 5천냥, 안마(鞍馬) 각(各) 1필(匹).

보국공(輔國公) 두이호(杜爾祜), 특이호(特爾祜), 두눈(杜嫩)에게 금(金) 각(各) 50냥, 은(銀) 각(各) 2천냥.

고산액진(固山額真) 종실(宗室) 배윤도(拜尹圖)에게 금(金) 80냥, 은(銀) 4천냥, 안마(鞍馬) 1필(匹).

고산액진(固山額真) 공아대(公阿山)에게 금(金) 50냥, 은(銀) 3천냥, 안마(鞍馬) 1필(匹).

고산액진(固山額真) 퉁도뢰(佟圖賴), 부라극탑(富喇克塔)에게 금(金) 각(各) 30냥, 은(銀) 각(各) 1500냥.

호군통령(護軍統領) 아제격니감(阿濟格尼堪), 상서(尚書) 종실(宗室) 한대(韓岱)에게 금(金) 각(各) 25냥, 은(銀) 각(各) 1300냥.

아울러 수정(隨征/종군)한 각(各) 장경(章京), 외번(外藩) 태길(台吉)와 장경(章京),

공순(恭順), 회순(懷順) 양왕(兩王)의 하(下) 장경(章京) 등(等)에게 금은(金銀)을 각각(各) 유차(有差)하게 사(賜)하였다.


○1645년 10월 30일에 상이 어전에 거동하였는데

호쇼이 어르커 친왕 도도 등이 군을 통솔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유적 이자성의 병 20여만을 격파하였으며

동관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서안 등의 곳을 투항시켰으며 또한 하남을 수복하고

나아가 양주를 쳐서 빼앗았고 강을 건너 강령을 투항시키고 복왕 주유송을 사로잡았으며

전후로 싸워 수륙 보기의 적병 무릇 150여진을 격파하였고, 강남과 절강 등처를 모조리 평정하였고

문무관 244명과 보기병 31만 7700명을 초무하였으니 논공하여 포상하였다.

도도를 가봉하여 호쇼이 어르더뭉어 어르커 친왕으로 삼고

흑호피, 모초피, 조복괘 각각 1벌씩과 금 5천냥, 은 5만냥, 영롱안, 칠안, 말 각각 1필식, 공마 8필을 하사하였다.

도도를 따라 종군한 커싱어 군왕 쇼서에게 금 2천냥, 은 2만냥, 영롱안마 1필, 공마 4필.

도로이 버이러 니칸, 보로에게 각각 금 200냥, 은 1만5천냥, 칠안마 1필, 공마 2필.

공순왕 공유덕, 회순왕 경중명에게 각각 초구망단 조의 1벌, 금 100냥, 은 1만냥, 말 2필.

구사 버이서 툰치, 호토, 샹샨, 바야라 투 장긴 공작 투라이에게 각각 금 100냥, 은 5천냥, 안마 각 1필.

구룬 더 아이시라라 공 두르후, 터르후, 두눈에게 각각 금 50냥, 은 2천냥.

구사 어전 종실 바인투에게 금 80냥, 은 4천냥, 안마 1필.

구사 어전 궁가다이에게 금 50냥, 은 3천냥, 안마 1필.

구사 어전 퉁 투라이, 푸랔타에게 각각 금 30냥, 은 1500냥.

바야라 투 장긴 아지거니칸, 상서 종실 한다이에게 각각 금 25냥, 은 130냥.

아울러 종군한 각 장긴, 외번 타이지와 장긴,

공순왕과 회순왕 양왕의 휘하 장긴 등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참전장수

1. 만몽 팔기군

-친왕 : 도도

-군왕 : 쇼서

-버이러 : 니칸, 보로

-버이서 : 툰치, 호토, 샹샨, 투라이

-보국공 : 두르후, 터르후, 두눈

-기주(구사 어전) : 바인투, 궁가다이, 퉁 투라이, 푸랔타

-호군통령(바야라 투 장긴) : 아지거니칸

-상서 : 한다이

2. 외번 몽고군

3. 한족 3왕군

-왕 : 공유덕, 경중명



6. 양주성 인근을 지킨 남명 장수들


청사고 1644년 7월 기사中

秋七月癸巳,以遷都祭告上帝、陵廟。丁酉,故明德王朱由弼縢降。時故明福王朱由崧即位江南,改元弘光,

以史可法 為大學士,駐揚州督師,總兵劉澤清、劉良佐、黃得功、高傑分守江北。

가을 7월 계사일(癸巳)에, 천도(遷都)함으로써 상제(上帝)와 능묘(陵廟)에 제고(祭告)하였다.
정유일(丁酉)에, 고(故) 명(明) 덕왕(德王) 주유필(朱由弼)을 등강(縢降/내려 봉함)하였다.
이때 고(故) 명(明)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이 강남(江南)에서 즉위(即位)하고, 홍광(弘光)이라 개원(改元)하였는데,
사가법(史可法)을 대학사(大學士)로 삼아, 양주(揚州)에 주(駐)하며 독사(督師)하게 하였고,
총병(總兵) 유택청(劉澤清), 유량좌(劉良佐), 황득공(黃得功), 고걸(高傑)은 강북(江北)을 분수(分守)하였다.

1644년 가을 7월 8일에 (북경으로) 천도함으로써 상제와 능묘에 제사하고 고하였다.
7월 8일에 옛 명 덕왕 주유필을 내려 봉하였다.
이때 옛 명 복왕 주유숭이 강남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고쳐 홍광이라 하였는데,
사가법을 대학사로 삼아 양주에 주둔하며 군을 감독하게 하였고
총병 유택청, 유량좌, 황득공, 고걸은 강 북쪽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7. 어떤 경로로 세상에 나왔나?

-1808년경 일본에 전파되었다고 세계대백과사전 제2판(히타치 솔루션즈 크리에이트)에 기록되어 있다.

-1911년 신해혁명 이전에 일본에 유학 중이던 중국인에게 읽히고 중국으로 유입되어 멸만흥한을 촉발시켰다.

-1923년 일본 소설가 미야자키 야오요시에 의해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 가정도성기략(嘉定屠城紀略)이 출판되었다.


 

8. 결론

a. 도도의 양주성 도륙령은 사실이다.

b. 양주 1백만 거주설은 과장으로 추정된다.

c. 당시 양주성에 모인 인구는 20~30만으로 추정된다.

d. 청군이 오기전에 남명군(흥평백 고걸)의 학살 또한 있었다.

e. 양주십일기에 따르면 학살은 2일차~4일차(1645년 4월 26일~28일)에 집중되었다.

f. 당시 학살에 참가한 청나라 군은 만주족+몽고족+한족이다.

g. 양주십일기에 따르면 학살 금지령(봉도령)이 내린 것은 5월 1일이다.

h. 양주십일기에 양주성민의 80%가 학살되었다니 실제 추산하면 16만~24만 가량이

   피살, 자살, 아사, 병사, 경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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