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오늘은 13세기에 원나라에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태조 칭기스칸의 일대기를 기록한
성무친정록을 틈틈이 번역해 볼까 합니다.
3부-원수 타타르를 멸하고 보르지긴 적통 주르킨을 섬멸하다!
8부-쿠이텐 대승 후 혼사 문제로 왕 가한과 틀어지다!
11부-나를 배신한 일족들이여! 땅을 다른 씨족에게 뺏기지 말라!
19부-무칼리를 국왕으로 삼고 금 정벌 사령관에 임명하다!
원문 출처 : https://ctext.org/wiki.pl?if=gb&chapter=73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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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秋,上復破之,遂進軍至懷來。
金帥高琪將兵與戰。
我軍勝,追至北口。
大敗之,死者不可勝計。
時金人塹山築寨,悉力為備。
上留怯臺、薄察頓兵拒守,遂將別眾西行,由紫荊口出。
金主聞之,遣大將奧屯拒隘,勿使及平地。
比其至,我眾度關矣,乃命哲別率眾攻居庸南口,出其不備,破之。
進兵至北口,與怯臺、薄察軍合。
既而又遣諸部精兵五千騎令怯臺、哈臺二將圍守中都。
上自率兵攻涿、易二州,即日拔之。
乃分軍為三道,大太子、二太子、三太子為右軍,循太行而南,破保州、中山、邢、洛、磁、相、輝、衛、懷、孟等州,
棄真定、威州境,抵黃河,大掠平陽、太原而還;
哈撒兒及斡陳那顏、拙赤■〈礙,角代石〉薄剎、為左軍,沿海破洙、沂等城而還。
上與四太子馭諸部軍由中道,遂破深、莫、河間、清、滄、景、獻、濟南、濱、棣、益都等城,棄東平、大名不攻,
餘皆望風而拔。
下令北還,又遣木華黎回攻密州,拔之。
上至中都,亦來合。
계유년(癸酉/1213년) 추(秋)에, 상(上)이 다시 파지(破之)하였고, 마침내 진군(進軍)하여 회래(懷來)에 지(至)하였다.
금수(金帥) 고기(高琪)가 장병(將兵)하고 여전(與戰)하였고, 아군(我軍)이 승(勝)하여, 북구(北口)에 추지(追至)하여,
대패지(大敗之)하니, 사자(死者)가 승계(勝計)를 불가(不可)하였다.
이때 금인(金人)이 참산(塹山/산을 팜)하여 축채(築寨/목책을 쌓음)하여, 진력(悉力)하여 위비(為備)하였다.
상(上)이 겁대(怯臺)와 박찰(薄察)을 유(留)하여 돈병(頓兵)하여 거수(拒守)하게 하였고,
마침내 별중(別眾)을 장(將)하여 서행(西行)하였고, 자형구(紫荊口)를 유(由)하여 출(出)하였다.
금주(金主)가 견지(聞之)하여, 대장(大將) 오둔(奧屯)을 견(遣)하여 거애(拒隘)하였고, 평지(平地)에 이르게 하지 말라 하였다.
그들이 이르기도 전에, 아중(我眾)이 도관(度關/관문을 넘음)하였고, 이에 명(命)하여 철별(哲別)은 솔중(率眾)하고
거용(居庸) 남구(南口)를 공(攻)하게 하였으며, 그 불비(不備)에 출(出)하여, 파지(破之)하였다.
진병(進兵)하여 북구(北口)에 지(至)하였고, 겁대(怯臺)와 박찰(薄察)의 군(軍)과 더불어 합(合)하였다.
기이(既而)에 또 제부(諸部)의 정병(精兵) 5천기(騎)를 견(遣)하여 겁대(怯臺)와 합대(哈臺) 2장(將)으로 하여금 중도(中都)를
위수(圍守)하게 하였다.
상(上)이 스스로 솔병(率兵)하여 탁주(涿)와 역주(易) 2주(州)를 공(攻)하였고, 즉일(即日)에 발지(拔之)하였다.
곧 분군(分軍)하여 삼도(三道)로 삼아, 대태자(大太子), 이태자(二太子), 삼태자(三太子)를 우군(右軍)으로 삼고, 태행(太行)을
순(循)하여 이남(而南)하게 하였고, 보주(保州), 중산(中山), 형주(邢), 락주(洛), 자주(磁), 상주(相), 휘주(輝), 위주(衛),
회주(懷), 맹주(孟) 등(等)의 주(州)를 파(破)하였고, 진정(真定)과 위주(威州)의 경(境)을 기(棄)하고, 황하(黃河)를 저(抵)하여,
평양(平陽)과 태원(太原)을 대략(大掠)하고 환(還)하였다.
합살아(哈撒兒)와 더불어 알진나안(斡陳那顏), 졸적각(拙赤角), 박찰(薄剎)을 좌군(左軍)으로 삼고, 연해(沿海)하여 수주(洙)와
기주(沂) 등(等)의 성(城)을 파(破)하고 환(還)하였다.
상(上)이 사태자(四太子)와 함께 제부(諸部)의 군(軍)을 어(馭)하여 중도(中道)를 유(由)하였고, 마침내 심주(深), 막주(莫),
하간주(河間), 청주(清), 창주(滄), 경주(景), 헌주(獻), 제남(濟南), 빈주(濱), 체주(棣), 익도(益都) 등(等)의 성(城)을
파(破)하였고, 동평(東平)과 대명(大名)을 기(棄)하여 불공(不攻)하였고, 여(餘)는 모두 망풍(望風)하고 발(拔)하였다.
하령(下令)하여 북환(北還)하였고, 또 목화려(木華黎)를 견(遣)하여 밀주(密州)를 회공(回攻)하게 하여, 발지(拔之)하였다.
상(上)이 중도(中都)에 지(至)하여, 역시(亦) 내합(來合)하였다.

1213년 가을에 상이 다시 (덕흥부를) 깨트리게 하였고 마침내 진군하여 회래에 이르렀다.
금 원수 고기(기우기)가 군을 거느리고 더불어 싸웠는데 아군이 승전하였고 추격하여 북구에 이르러 대파하니 죽은 자를
헤아리기가 불가하였다.
이때 금군이 산을 파고 목책을 쌓아 모든 힘을 기울여 방비하였다.
상이 카타이(겁대)와 부차(박찰)를 남겨 군을 정돈하고 막아 지키게 하였고 마침내 별도로 무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행군하여
자형구(시킹기우)를 거쳐 나갔다.
금 임금이 듣고는 대장 오둔(누둔)을 보내 협곡을 막게 하였고 평지에 이르게 하지 말라 하였다.
그들이 이르기도 전에 우리군이 관문을 넘었고 이에 명하여 제베(철별)는 무리를 인솔하고 거용 남구를 공격하게 하니
그 불시에 나가 격파하였다.
진군하여 (거용관) 북구에 이르렀고 카타이와 부차의 군과 더불어 합하였다.
얼마 안 있어 또 여러 부족의 정병 5천기를 보내 카타이와 하타이(합대) 2 장군으로 하여금 중도(현 북경)를 포위하여 지키게
하였다.
상이 스스로 군을 인솔하여 탁주와 역주 2주를 공격하였고 그날에 함락하였다.
곧 군을 나누어 세 길로 대태자(주치), 이태자(차카타이), 삼태자(우구데이)를 우군으로 삼고 태행을 돌며 남진하게 하였고,
보주, 중산, 형주, 락주, 자주, 상주, 휘주, 위주, 회주, 맹주 등의 주를 격파하였고, 진정과 위주의 경계를 버리고 황하에 이르러
평양과 태원을 크게 약탈하고는 돌아왔다.
카사르(합살아)와 더불어 알치 노얀(알진 나안), 주르체테이(졸적각대), 부차(박찰)를 좌군으로 삼고 해안을 따라 수주와 기주
등의 성을 격파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상은 사태자(톨루이)와 함께 여러 부족의 군을 거느리고 가운데 길을 경유하여 마침내 심주, 막주, 하간주, 청주, 창주, 경주,
헌주, 제남, 빈주, 체주, 익도 등의 성을 격파하였고 동평과 대명은 내버려 두고 공격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바라만 보고도 함락하였다.
영을 내려 북쪽으로 회군하게 하였고, 또 무칼리(목화려)를 돌려보내 밀주를 공격하게 하여 함락하게 하였다.
상이 중도에 이르러 또한 합하였다.
-중도 : 북경(베이징)
-동경 : 요양
-서경 : 대동
-남경 : 개봉
-북경 : 대정(요서)
요약.
1213년 가을 칭기스 가한은 다시 금을 침공하여 거용관 북구에서 고기를 격파한다.
칭기스칸은 제베를 우회시켜 거용관 남구 마저 함락하고 북구의 투항을 받는다.
칭기스 가한은 카타이와 부차에게 5천명으로 금의 수도 중도(북경)을 포위하게 하고 나머지 군은 탁주와 역주를 함락하고
세군으로 나누어 하북 일대를 공략한다.
칭기스 가한과 톨루이의 중군은 심주/막주/하간주/청주/창주/경주/헌주/제남/빈주/체주/익도
우군(주치+차카타이+우구데이)은 보주/중산/형주/락주/자주/상주/휘주/위주/회주/맹주/평양/태원
좌군(카사르+알치+주르체데이+부차)은 수주/기주
별동대(무칼리)는 밀주를 함락한다.
금은 야호령 전투에 정예군이 몰살당한 후 수성전에 치중하였고, 각 지방의 성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철저한 약탈과 학살이었다.
당시 칭기스칸은 북중국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이 없어, 약탈전에 몰두했다는 학자의 의견도 있다.
-18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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