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 태조 칭기스칸 13부-금황제 개봉으로 달아나다!(맹약 파기) 신원사 태조 칭기스칸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틈틈이 원나라 태조 칭기스칸의 일대기를 연재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원나라 역사의 집대성이라 칭송받는 신원사 태조 본기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1부-의부 옹칸, 안다 자무카

2부-13쿠리엔 전투 자무카에게 대패하다!

3부-금나라의 백호장(자오드 코리)에 임명되다!

4부-등 돌린 옹칸을 다시 돕고 나이만군의 시체로 경관을 쌓다!

5부-타이치오트 멸망/자무카 구르 칸에 옹립되다!

6부-쿠이텐 전투!

7부-칼라칼지드 사막 전투! 그리고 옹칸의 패망!

8부-초원통일! 눈을 외국으로 돌리다!

9부-진정한 몽골군의 탄생!

10부-칸 금에 조공하러 갔다가 침을 뱉고 돌아오다!

11부-야호령에서 금 정예군을 몰살하다!

12부-삼로 진군으로 북중국을 초토화하다


원사 칭기스 카안

만주어 원사 칭기스 한

신원사 칭기스 칸

성무친정록 칭기스 가한

만주어 몽고원류 칭기스 카간

원조비사 칭기스 칸

신원사 본기 서기


만주어 요나라 태조 아보오지

만주어 금나라 태조 아구다

만주어 청나라 태조 누르가치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96%B0%E5%85%83%E5%8F%B2/%E5%8D%B7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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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年甲戌春正月,帝駐蹕中都北郊。

初,金粘罕營中都,於城外築四子城,樓櫓、倉廒、甲仗庫各穿地道通於內城,人笑之。

粘罕曰:

「不及百年,吾言當驗。」

至是,金人分守四城,大兵攻內城,四城兵迭用炮擊之。

又開南薰門,誘兵人,縱火焚之,死傷甚眾。

二月,帝欲班師,遣阿剌淺入城詔諭金主。

三月,金主遣其平章完顏承暉來乞和,帝復遣阿刺淺報之,諭金主曰:

「山東、河北州縣盡爲我有,汝所守唯中都耳!

  天既弱汝,我復迫汝於險,天其謂我何!

  我今歸,汝不能犒軍,以弭諸將之怒耶?」

金主與廷臣會議,其丞相術虎高琪曰:

「彼兵力已疲,再與決戰,何如?」

完顏承暉曰:

「此孤注也,敗則不能復振。

  不如俟其退,再爲戰守之計。」

金主從之,奉衛紹王女岐國公主及金帛、童男女五百人、馬三千匹以獻。

遣承暉送帝出居庸,至野麻池而返。

是月,大兵克嵐州。

夏五月,金主遷於南京,留其太子守忠守中都。

帝聞之,怒曰:

「既和而復遷,是有疑心,特以和議款我耳!

遣阿剌淺往詰責之。

會金糺軍扈我主南遷,至良鄉。

金主命輸鎧仗人入官,糺軍怒,殺其帥詳袞,推斫答、比涉耳、劄剌兒三人爲帥,來請降。

時帝避署於魚兒濼、遣石抹明安、撒木合入古北口,與斫答等圍中都。

秋七月,金主召太子守忠赴南京。

冬十月,木華黎克順州。

十二月,木華黎徇遼西諸路,克懿州。

錦州張鯨,高州盧琮、金樸等,俱以城降。

是年,始置行省於宣平,以撒木合領之,部署降眾。

9년 갑술년(甲戌/1214년) 춘(春) 정월(正月)에, 제(帝)가 중도(中都) 북교(北郊)에 주필(駐蹕)하였다.

초(初)에, 금(金) 점한(粘罕)이 중도(中都)에 영(營)하며, 성외(城外)에 사자성(四子城)을 축(築)하였고,

누로(樓櫓/적을 망보는 전망대), 창오(倉廒/창고), 갑장고(甲仗庫)는 각각(各) 천지(穿地/땅을 팜)하여 내성(內城)에 

도통(道通)하였는데, 인(人)이 소지(笑之)하였다.

점한(粘罕)이 말하길

「백년(百年)을 불급(不及)하면, 오언(吾言)이 당험(當驗)하리라!」

이에 이르러, 금인(金人)이 사성(四城)을 분수(分守)하였고, 대병(大兵)이 내성(內城)을 공(攻)하여, 사성(四城)의 병(兵)이 

포(炮)를 질용(迭用)하여 격지(擊之)하였다.

또 남훈문(南薰門)을 개(開)하여, 병인(兵人)을 유(誘)하여, 종화(縱火)하고 분지(焚之)하니, 사상(死傷)이 심중(甚眾)하였다.

2월에, 제(帝)가 반사(班師)하고자 하였고, 아랄천(阿剌淺)을 견(遣)하여 입성(入城)하고 금주(金主)를 조유(詔諭)하였다.

3월에, 금주(金主)가 그 평장(平章) 완안승휘(完顏承暉)를 견(遣)하고 내(來)하여 걸화(乞和)하니, 제(帝)가 다시 

아랄천(阿刺淺)을 견(遣)하여 보지(報之)하여, 금주(金主)를 유(諭)하여 말하길

「산동(山東)과 하북(河北)의 주현(州縣)이 모조리 아유(我有)가 되었고, 여(汝)의 소수(所守)는 오직 중도(中都)뿐이니라!

  천(天)이 이윽고 약여(弱汝)하였으니, 내가 다시 너를 험(險)에 박(迫)한다면, 천(天)이 이에 나를 무어라 위(謂)하겠는가!

  아(我)는 금귀(今歸)하니, 여(汝)가 호군(犒軍)하여 이로써 제장(諸將)의 노(怒)를 미(弭/그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금주(金主)가 정신(廷臣/조정의 신하)과 더불어 회의(會議)하였고, 그 승상(丞相) 술호고기(術虎高琪)가 말하길

「피병(彼兵)의 역(力)이 이피(已疲)하니, 재차(再) 더불어 결전(決戰)함이 하여(何如)하리까?」

완안승휘(完顏承暉)가 말하길

「이는 고주(孤注/도박)이니, 패(敗)하면 즉(則) 복진(復振)을 불능(不能)하옵니다.

  그 퇴(退)를 사(俟)하여, 재차(再) 전수(戰守)의 계(計)로 삼는 것만 못하옵니다.」

금주(金主)가 종지(從之)하였고, 위소왕(衛紹王)의 녀(女) 기국공주(岐國公主)와 더불어 금백(金帛), 동남녀(童男女) 500인, 

마(馬) 3천 필(匹)을 봉(奉)하여 이헌(以獻)하였다.

완안승휘(承暉)를 견(遣)하여 송제(送帝)하고 거용(居庸)을 출(出)하였으며, 야마지(野麻池)에 지(至)하여 반(返)하였다.

이달에, 대병(大兵)이 람주(嵐州)를 극(克)하였다.

하(夏) 5월에, 금주(金主)가 남경(南京)에 천(遷)하였고, 그 태자(太子) 수충(守忠)을 유(留)하여 중도(中都)를 수(守)하게 하였다.

제(帝)가 문지(聞之)하더니, 노(怒)하여 말하길

「이윽고 화(和)되었는데 복천(復遷)하니, 이는 의심(疑心)이 있는 것으로, 곧 화의(和議)로써 관아(款我/나를 늦춤)할 

  뿐이었구나!

아랄천(阿剌淺)을 견(遣)하여 왕(往)하고 힐책지(詰責之)하였다.

때마침 금(金) 규군(糺軍)이 아주(我主)를 호(扈)하여 남천(南遷)하였고, 양향(良鄉)에 지(至)하였다.

금주(金主)가 명(命)하여 개장(鎧仗/갑옷과 무기)을 사람에게 수(輸/짊어짐)하여 입관(入官)토록 하였는데, 규군(糺軍)이 

노(怒)하였고, 그 수(帥) 상곤(詳袞)을 살(殺)하였고, 작답(斫答), 비섭이(比涉耳), 차랄아(劄剌兒) 3인(人)을 수(帥)로 삼아 

추(推)하였으며, 내청항(來請降)하였다.

이때 제(帝)가 어아락(魚兒濼)에 피서(避署)하였는데, 석말명안(石抹明安)과 살목합(撒木合)을 견(遣)하여 

고북구(古北口)로 입(入)하게 하였고, 작답(斫答) 등(等)과 함께 중도(中都)를 위(圍)하였다.

추(秋) 7월에, 금주(金主)가 태자(太子) 수충(守忠)을 소(召)하여 남경(南京)에 부(赴)하게 하였다.

동(冬) 10월에, 목화려(木華黎)가 순주(順州)를 극(克)하였다.

12월에, 목화려(木華黎)가 요서(遼西)의 제로(諸路)를 순(徇)하였고, 의주(懿州)를 극(克)하였다.

금주(錦州)의 장경(張鯨), 고주(高州)의 로종(盧琮)과 김박(金樸) 등(等)이 모두 성(城)으로써 항(降)하였다.

이해에, 비로소 선평(宣平)에 행성(行省)을 치(置)하였고, 살목합(撒木合)으로써 영지(領之)하였으며, 항중(降眾)을 

부서(部署/배치함)하였다.



[칭기스 칸] 9년 1214년 봄 1월에 황제가 중도(북경) 북쪽 교외에 주둔하였다.

처음에 금 완안점한이 중도(북경)에 영을 세우고 성 밖에 사자성(四子城)을 축성하였고, 전망대, 창고, 무기 창고는 각각 땅을 

파서 내성과 길이 통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비웃었다.

완안점한이 말하길

「백년도 되지 않아 내말이 마땅히 증명되리라!」

이에 이르러 금나라 사람이 네 성을 나누어 수비하였고 대군이 내성을 공격하면 네 성의 병력이 포를 연발하여 공격하였다.

또 남훈문을 열어 군사를 유인하여 불을 질러 화공을 가하니 사상자가 심히 많았다.

2월에 황제가 회군하고자 하였고 아랄치엔(아랄천)을 보내 성에 들어가 조서로 금 임금을 회유하게 하였다.

3월에 금 임금이 그 평장 완안승휘를 보내와서 화친을 애걸하니 황제가 다시 아랄치엔을 보내 답하게 하여 

금 임금을 회유하여 말하길

「산동과 하북의 주현은 모조리 우리 소유가 되었고 네가 지키는 곳은 오직 중도뿐이니라.

  하늘이 이윽고 너를 약하게 하였으니 내가 다시 너를 궁지로 핍박한다면 이에 하늘이 나를 무어라 일컫겠는가!

  나는 지금 돌아갈테니 너는 군을 호궤하여 이로써 제장들의 분노를 그치게 하겠는가?」

금 임금이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회의하였는데 그 승상 술호고기가 말하길

「저쪽 군의 힘이 이미 지쳤으니 재차 더불어 결전함이 어떠하오리까?」

완안승휘가 말하길

「이는 도박이니 패하면 곧 회복이 불가하옵니다.

  그 퇴각을 기다려 재차 싸워 지키는 계책으로 삼는 것만 못하옵니다.」

금 임금이 따랐고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와 더불어 금과 비단, 어린 남녀 500인, 말 3천필을 받들어 헌상하였다.

완안승휘를 보내 황제를 전송하고 거용을 나가 마지(야마지)에 이르러 돌아갔다.

이달에 대군이 람주를 함락하였다.

여름 5월에 금 임금이 남경(개봉)으로 천도하였고 그 태자 완안수충을 남겨 중도(북경)를 지키게 하였다.

황제가 듣고는 노하여 말하길

「이윽고 화친하였는데 다시 천도하니 이는 다른 마음이 있는 것으로 곧 화친계를 써서 나를 늦추려 할 뿐이었구나!」

아랄치엔을 보내 꾸짖게 하였다.

때마침 금 규군이 금 임금을 호위하여 남쪽으로 천도하였고 양향에 이르렀다.

금 임금이 명하여 갑옷과 무기을 사람에게 짊어지고 관에 들이도록 하였는데 규군이 노하였고 그 수장 상곤을 살해하고는 

작답(진다), 비섭이(비자르), 차랄아(빌라르) 3인을 원수로 삼아 추대하여 항복을 청해왔다.

이때 황제가 쿠아울(어아락)에 피서하였는데, 석말명안과 사무카(살목합)을 보내 고북구(古北口)로 들어가게 하였고,

작답 등과 함께 중도(북경)를 포위하였다.

가을 7월에 금 임금이 태자 완안수충을 소환하여 남경(개봉)에 이르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무칼리가 순주를 함락하였다.

12월에 무칼리가 요서의 여러 지역을 돌며 의주를 함락하였다.

금주의 장경, 고주의 노과 김박 등이 모두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해에 비로소 선평(宣平)에 행성(行省)을 설치하였고 사무카에게 거느리게 하였으며 항복한 무리를 배치하였다.


요약.
1214년 칭기스칸은 북경(중도) 북쪽에 주둔하면서 금을 압박한다.
북경 함락이 어려워지자 칭기스칸은 회군을 결정하고 금 황제 선종을 회유한다.
이에 선종은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와 함께 수많은 세폐를 바친다.
금군이 물러나자 선종은 개봉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이에 화친 위반이라 판단한 칭기스칸은 금 재침을 결정한다.
선종을 호위하여 개봉으로 향하던 거란군(규군)은 선종을 배신하고 회군하여 북경을 포위한다.
무칼리 등은 요서를 공략한다.

-1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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