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틈틈이 원나라 태조 칭기스칸의 일대기를 연재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원나라 역사의 집대성이라 칭송받는 신원사 태조 본기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4부-등 돌린 옹칸을 다시 돕고 나이만군의 시체로 경관을 쌓다!
14부-수도함락, 여진족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다!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96%B0%E5%85%83%E5%8F%B2/%E5%8D%B7002
---------------------------------------------------------------------------
十年乙亥春正月丁丑,金右副元帥蒲察七斤以通州降。
以七斤爲都元帥。
二月,木華黎圍北京。
留守奧屯襄先爲其部將習烈所殺推寅答虎爲帥,寅答虎以城降。
以吾也而權北京兵馬都元帥,寅答虎爲留守。
金興中府元帥石天應降,以天應爲興中府尹。
帝遣阿剌淺諭金主以河北、山東未下諸城來獻,及去帝號爲河南王,金主不從。
三月,金主遣其將永錫、慶壽、李英等援中都,人負糧三斗,慶壽、英亦負之以率其眾。
慶壽至涿州旋風寨。
英至霸州青戈寨,皆爲大軍所敗。
中都援絕,人相食。
夏五月庚申,金右丞相兼都元帥承暉仰藥死,眾以城降。
石抹明安入中都,遣使來獻捷。
帝駐蹕桓州之涼陘,命忽都虎等按視中都帑藏,以石抹明安爲太傅,兼管蒙古、漢軍都元帥。
秋八月,木華黎遣史天倪克平州,又遣史進道等克廣寧府。
紅羅山賊帥杜秀降,以秀爲錦州節度使。
冬十月,金宣撫蒲鮮萬奴擾遼東,僭號大王。
十一月,耶律留哥來朝。
史天祥克興州,擒其節度使趙守玉。
十二月,史天倪克大名府及曹州。
張鯨總北京十提控兵,從木華黎南伐。
鯨謀反伏誅,其弟致據錦州以叛。
是年,取城邑凡八百六十有二。
改中都爲薊州,改河間路之深州隸真定路,升鼓城縣爲晉州,改千滏縣爲滏陽縣。
10년 을해년(乙亥/1215년) 춘(春) 정월(正月) 정축일(丁丑)에, 금(金) 우부원수(右副元帥) 포찰칠근(蒲察七斤)이
통주(通州)로써 항(降)하니, 포찰칠근(七斤)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
2월에, 목화려(木華黎)가 북경(北京)을 위(圍)하였다.
유수(留守) 오둔양(奧屯襄)이 앞서 그 부장(部將) 습렬(習烈)에게 소살(所殺)되었고 인답호(寅答虎)를 수(帥)로 삼아
추(推)하였는데, 인답호(寅答虎)가 성(城)으로써 항(降)하였다.
오야이(吾也而)를 권북경(權北京)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삼았고, 인답호(寅答虎)를 유수(留守)로 삼았다.
금(金) 흥중부(興中府) 원수(元帥) 석천응(石天應)이 항(降)하니, 석천응(天應)을 흥중부윤(興中府尹)으로 삼았다.
제(帝)가 아랄천(阿剌淺)을 견(遣)하여 하북(河北)과 산동(山東)의 미하(未下)한 제성(諸城)으로써 내헌(來獻)하라
금주(金主)를 유(諭)하게 하였고, 더불어 제호(帝號)를 거(去)하여 하남왕(河南王)으로 삼는다 하였는데, 금주(金主)가
불종(不從)하였다.
3월에, 금주(金主)가 그 장(將) 영석(永錫), 경수(慶壽), 이영(李英) 등(等)을 견(遣)하여 중도(中都)를 원(援)하였는데,
사람마다 양(糧) 3두(斗)를 부(負)하게 하였고, 경수(慶壽)와 이영(英)이 역시(亦) 그 중(眾)을 솔(率)하여 부지(負之)하였다.
경수(慶壽)가 탁주(涿州) 선풍채(旋風寨)에 지(至)하였고, 이영(英)은 패주(霸州) 청과채(青戈寨)에 지(至)하였는데,
모두 대군(大軍)에게 소패(所敗)하였다.
중도(中都)가 원절(援絕)하자, 인(人)이 상식(相食)하였다.
하(夏) 5월 경신일(庚申)에, 금(金) 우승상(右丞相) 겸(兼) 도원수(都元帥) 완안승휘(承暉)가 앙약(仰藥)하여 사(死)하였고,
중(眾)이 성(城)으로써 항(降)하였다.
석말명안(石抹明安)이 중도(中都)에 입(入)하였고, 견사(遣使)하여 헌첩(獻捷)하여 왔다.
제(帝)가 환주(桓州)의 양형(涼陘)에 주필(駐蹕)하였는데, 명(命)하여 홀도호(忽都虎) 등(等)은 중도(中都)의 탕장(帑藏)을 안시
(按視/살펴 봄)하게 하였고,석말명안(石抹明安)을 태부(太傅) 겸(兼) 관몽고(管蒙古)와 한군(漢軍)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
추(秋) 8월에, 목화려(木華黎)가 사천예(史天倪)를 견(遣)하여 평주(平州)를 극(克)하였고, 또 사진도(史進道) 등(等)을
견(遣)하여 광녕부(廣寧府)를 극(克)하였다.
홍라산적(紅羅山賊)의 수(帥) 두수(杜秀)가 항(降)하였는데, 두수(秀)를 금주(錦州)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동(冬) 10월에, 금(金) 선무(宣撫)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遼東)을 요(擾)하였고, 대왕(大王)을 참호(僭號)하였다.
11월에, 야율유가(耶律留哥)가 내조(來朝)하였다.
사천상(史天祥)이 흥주(興州)를 극(克)하였고, 그 절도사(節度使) 조수옥(趙守玉)을 금(擒)하였다.
12월에, 사천예(史天倪)가 대명부(大名府)와 더불어 조주(曹州)를 극(克)하였다.
장경(張鯨)이 북경(北京) 십제공병(十提控兵)을 총(總)하여, 목화려(木華黎)를 종(從)하여 남벌(南伐)하였다.
장경(鯨)이 모반(謀反)하니 복주(伏誅)하였고, 그 제(弟) 장치(致)가 금주(錦州)를 거(據)하여 이로써 반(叛)하였다.
이해에, 취한(取) 성읍(城邑)이 무릇 862였다.
중도(中都)를 개(改)하여 계주(薊州)로 하였고, 하간로(河間路)의 심주(深州)를 개(改)하여 진정로(真定路)에 예(隸)하였으며,
고성현(鼓城縣)을 승(升)하여 진주(晉州)로 하였고, 천부현(千滏縣)을 개(改)하여 부양현(滏陽縣)으로 하였다.
[칭기스 칸] 10년 1215년 봄 1월 17일에 금 우부원수 포찰칠근이 통주를 바치고 항복하니, 포찰칠근을 도원수로 삼았다.
2월에 무칼리가 북경(대정)을 포위하였다.
유수 오둔양이 앞서 그 부장 습렬에게 피살되었용고 인답호를 원수로 삼아 추대하였는데 인답호가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우야르(오야이)를 권북경 병마도원수로 삼았고, 인답호를 유수로 삼았다.
금 흥중부 원수 석천응이 항복하니 석천응을 흥중부윤으로 삼았다.
황제가 아랄치엔(아랄천)을 보내 하북과 산동의 함락되지 못한 여러 성을 바쳐오라 금 임금을 회유하게 하였고 더불어 황제의
호칭을 제거하고 하남왕으로 삼는다 하였는데 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3월에 금 임금이 그 장수 영석, 경수, 이영 등을 보내 중도(북경)를 구원하였는데, 사람마다 군량 3두를 짊어지게 하였고
경수와 이영이 또한 그 무리를 인솔하여 스스로 짊어졌다.
경수가 탁주 선풍채에 이르렀고, 이영은 패주 청과채에 이르렀는데, 모두 대군에게 패배하였다.
중도(북경)가 구원이 끊기자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여름 5월 2일에 금 우승상 겸 도원수 완안승휘가 독약을 먹고 죽었으며 무리가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석말명안이 중도(북경)에 들어갔고 사신을 보내 승첩을 아뢰었다.
황제가 환주의 양형에 주둔하였는데 명하여 쿠투쿠 등은 중도(북경)의 내탕고를 조사하게 하였고 석말명안을 태부 겸
관몽고와 한군 도원수로 삼았다.
가을 8월에 무칼리가 사천예를 보내 평주를 함락하였고 또 사진도 등을 보내 광녕부를 함락하였다.
홍라의 산적 두목 두수가 항복하였는데 두수를 금주 절도사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금 선무 포선만노(호카노)가 요동을 시끄럽게 하더니 대왕을 참칭하였다.
11월에 야율유가가 조회하여 왔다.
사천상이 흥주를 함락하였고, 그 절도사 조수옥을 사로잡았다.
12월에 사천예가 대명부와 더불어 조주를 함락하였다.
장경이 북경(대정) 십제공병을 통솔하여 무칼리를 따라 남벌하였다.
장경이 모반하니 처형하였는데 그 동생 장치가 금주에 근거하여 배반하였다.
이해에 취한 성읍이 무릇 862였다.
중도(북경)를 고쳐 계주로 하였고 하간로의 심주를 고쳐 진정로에 예속하였으며,
고성현을 승격하여 진주로 하였고, 천부현을 고쳐 부양현으로 하였다.
요약.
1215년 금 우부원수 포찰칠근이 수도 북경(중도)인근 통주를 바침으로써 수도함락은 시간문제였다.
금 선종은 영석+경수+이영에게 병사와 군량을 주어 북경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무칼리군에 대패한다.
결국 북경을 지키던 완안승휘(완안복흥)는 자살하고 말년진충은 달아난다.
이로써 금은 수도를 잃고 요동과 요서 및 본거지인 상경을 영원히 잃게 된다.
무칼리는 북경 함락에 이어 요서 공략에 나서고 광녕을 함락한다.
한편 몽골에 투항한 금나라 항장 사천예는 군을 이끌고 남진하여 대명부와 조주를 함락하여 개봉에 육박한다.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