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 神弓 제베 열전 2부-서하,서요,호라즘,러시아를 평정하고 서역의 별이 되다!(완료) 테무진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몽고의 신궁이라 알려진 제베, 만주어로는 저볘이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타이초트의 선봉장, 테무진의 활이 되다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도도아지거푸헝

하르졸(해란주)호오거망굴타이아민고이마혼/와산/제극탑합/공아지르가랑두두니칸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96%B0%E5%85%83%E5%8F%B2/%E5%8D%B7123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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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年,太祖北還,時古出魯克盜據西遼,命者別征之。

明年,師至垂河,所過城邑望風降附,古出魯克西奔。

又明年,者別使曷思麥裏逾蔥嶺追之,及諸撒裏黑昆,斬其首以循。

諸部軍中獲馬千匹,皆口白色者,歸獻於太祖曰:

「臣請償昔者射斃之馬。」

十四年,太祖親征西域,以者別爲前鋒,速不台爲者別後援,脫忽察兒又爲速不臺後援,追西域主阿拉哀丁。

西域主竄海島而死,俘其母、妻及珍寶以獻。

復攻下西域各城,入其西北鄰部曰阿特耳佩佔,曰角兒只,曰失兒灣,皆望風款服。

十六年,西域略定。

太祖覆命者別與速不台進軍裏海之西,以討奇卜察克。

軍入高喀斯山,奇卜察克、阿速、撒耳柯思等部據險邀之。

者別以衆寡不敵,乃甘言誘奇卜察克謂:

「我等皆同類,無相害意,何必助他族以傷同類?」

奇卜察克,信其言而退。

者別引軍出險敗阿速等部,急追奇卜察克,縱兵奮擊,殺其霍灘之弟玉兒格及其子塔阿兒,告捷於太子朮赤,請濟師。

時朮赤駐軍於裏海東,分兵助之。

十七年冬,新軍至,乘冰合,渡浮而嘎河,遂下阿斯塔拉干城。

遇奇卜察克兵,又敗之,軍分爲二,懼引而西:一軍遣敗兵過瑞河,一軍至阿索富海之東南,

平撒耳柯思、阿速等部,遂自阿索富海履冰以至黑海,入克勒姆之地。

兩軍復合。

霍灘遁入斡羅斯境,乞援於其婿哈力赤王穆斯提斯拉甫。

哈力赤王集斡羅斯南部諸王於計掖甫,議出境迎擊。

者別、速不台遣使十人來告:

「蒙古所討者奇克察克,與斡羅斯無釁,必不相犯。

  奇卜察克素與貴國構兵,盍助我以攻仇敵?」

斡羅斯諸王謂:

「先以此言餌奇卜察克,今復餌我,不可信。」

執十人殺之。

者別、速不台復遣使謂:

「殺我行入,曲在汝。

  天奪汝魄,自取滅亡。

  請一戰以決勝負!」

庫灘又欲殺之。

斡羅斯人釋之,約戰期。

哈力赤王先以萬騎東渡帖尼博耳河,敗前鋒裨將哈馬貝,獲而殺之。

諸王皆引兵從之。

至喀勒吉河,與大軍遇。

時斡羅斯軍分屯南北,南軍力計掖甫、扯耳尼哥等部,北軍爲哈力赤等部及奇卜察克之兵。

哈力赤王輕敵,獨率北軍渡河,戰於孩兒桑之地。

勝負未決。

奇卜察克兵先遁,我軍乘之,斡羅斯兵大潰。

哈力赤王走渡河,即沉其舟,後至者不得渡,悉爲我軍所殺。

南軍不知北軍之戰,亦不知其敗,我軍猝至,圍其壘,三日不下。

誘令納賄行成,俟其出,疾攻之,斬馘無算。

我軍西至帖尼博河,北至扯耳尼可城及諾拂敦羅特城、夕尼斯克城而止。

捷書至太祖行在,詔以馬十萬匹犒師,封朮赤於奇卜察克,以轄西北諸部。

十九年,朮赤西行,者別與速不台歸朮赤部兵,自率所部東返。

中道卒。

初,者別名只兒豁忽阿歹,太祖以其射斃戰馬,賜名者別,國語梅針箭也。

子忽生孫,爲千戶。

忽生孫子哈拉,從旭烈兀入西域。

者別弟蒙都薩窪兒,侍拖雷左右。

其子烏勒思,亦入西域。

者別後,在西域者甚衆。

史臣曰:

「者助蔑、忽必來、者別,所謂熊景之士,不二心之臣也。

  者勒蔑屢拯太祖於忠難,忽必來之勇素爲太祖所知,其視者別奮自降虜者蓋不俟矣。

  然其功名反出者所勒蔑、忽必來之右。

  吾益嘆太祖棄仇佳誰、任智勇,其雄略爲不可及也。」

11년(1216년)에, 태조(太祖)가 북환(北還)하였는데, 이때 고출로극(古出魯克)이 도(盜)하여 서요(西遼)를 거(據)하였는데,

명(命)하여 자별(者別)로 하여금 정지(征之)하였다.

명년(明年/1217년)에, 사(師)가 수하(垂河)에 지(至)하였는데, 소과(所過)하는 성읍(城邑)마다 망풍항부(望風降附)하니,

고출로극(古出魯克)이 서분(西奔)하였다.

또 명년(明年/1218년)에, 자별(者別)이 갈사맥리(曷思麥裏)로 하여금 총령(蔥嶺/파미르 고원)을 유(逾)하여 추지(追之)하였는데,

여러 살리흑곤(撒裏黑昆)과 더불어, 그 수(首)를 참(斬)하고는 이로써 순(循)하였다.

제부(諸部)의 군중(軍中)이 마(馬) 천필(千匹)를 획(獲)하였는데, 모두 구(口)가 백색(白色)으로,

귀(歸)하여 태조(太祖)에게 헌(獻)하며 말하길

「신(臣)은 옛날 사폐(射斃)의 마(馬)를 상(償/속죄함)하길 청(請)하나이다.

14년(1219년)에, 태조(太祖)가 서역(西域)을 친정(親征)하였는데,

자별(者別)로써 전봉(前鋒)으로 삼았으며, 속부태(速不台)를 자별(者別)의 후원(後援)으로 삼았고,

탈홀찰아(脫忽察兒)는 또한 속부대(速不臺)의 후원(後援)으로 삼았으며,

서역(西域)의 주(主) 아랍애정(阿拉哀丁)을 추(追)하였다.

서역(西域)의 주(主)가 해도(海島)로 찬(竄)하였다가 사(死)하니, 그 모(母)와 처(妻) 및 진보(珍寶)를 획(俘)하여 

이헌(以獻)하였다.

다시 서역(西域)의 각성(各城)을 공하(攻下)하였으며, 그 서북(西北)의 인부(鄰部)인 왈(曰) 아특이패점(阿特耳佩佔), 

왈(曰) 각아지(角兒只), 왈(曰) 실아만(失兒灣)으로 입(入)하였고, 모두 망풍(望風)하고 관복(款服/진심으로 복종함)하였다.

16년(1221년)에, 서역(西域)이 약정(略定)하였다.

태조(太祖)가 복명(覆命)하여 자별(者別)은 속부태(速不台)와 함께 이해(裏海)의 서(西)로 진군(進軍)하게 하였고,

이로써 기복찰극(奇卜察克)을 토(討)하게 하였다.

군(軍)이 고객사산(高喀斯山)으로 입(入)하였고, 기복찰극(奇卜察克), 아속(阿速), 살이가사(撒耳柯思) 등(等)의 

부(部)가 거험(據險)하여 요지(邀之)하였다.

자별(者別)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써, 곧 감언(甘言)하여 기복찰극(奇卜察克)을 유(誘)하여 위(謂)하길

「아등(我等)은 모두 동류(同類)이니, 서로 해의(害意)가 없는데, 

  어찌 타족(他族)을 필조(必助)하여 이로써 동류(同類)를 상(傷)하는가?」

기복찰극(奇卜察克)이 그 언(言)을 신(信)하고는 퇴(退)하였다.

자별(者別)이 인군(引軍)하여 출험(出險)하고 아속(阿速) 등(等)의 부(部)를 패(敗)하였고, 

기복찰극(奇卜察克)을 급추(急追)하고는, 종병(縱兵)하여 분격(奮擊)하였고,

그 곽탄(霍灘)의 제(弟) 옥아격(玉兒格)과 더불어 그 자(子) 탑아아(塔阿兒)를 살(殺)하였고,

태자(太子) 출적(朮赤)에게 고첩(告捷)하고는, 제사(濟師)를 청(請)하였다.

이때 출적(朮赤)은 이해(裏海) 동쪽(東)에 주군(駐軍)하였는데, 분병(分兵)하여 조지(助之)하였다.

17년(1222년) 동(冬)에, 친군(新軍)이 지(至)하였고, 빙합(冰合)을 승(乘)하여, 이알하(而嘎河)를 도부(渡浮)하였고,

마침내 아사탑랍간성(阿斯塔拉干城)을 하(下)하였다.

기복찰극(奇卜察克)의 병(兵)을 우(遇)하여, 또 패지(敗之)하였고, 군(軍)을 둘로 분(分)하여, 

구인(懼引/경계하며 인솔함)하고 서(西)하였다.

1군(軍)은 패병(敗兵)을 견(遣)하여 서하(瑞河)를 과(過)하였고, 1군(軍)은 아색부해(阿索富海)의 동남(東南)에 지(至)하여, 

살이가사(撒耳柯思)와 아속(阿速) 등(等)의 부(部)를 평(平)하였고,

마침내 아색부해(阿索富海)로부터 리빙(履冰/얼음을 밟음)하여 이로써 흑해(黑海)에 지(至)하였고,

극륵모(克勒姆)의 지(地)로 입(入)하였다.

양군(兩軍)이 복합(復合)하였다.

곽탄(霍灘)이 알라사경(斡羅斯境)으로 둔입(遁入)하였는데, 

그 서(婿/사위) 합력적왕(哈力赤王) 목사제사랍보(穆斯提斯拉甫)에게 걸원(乞援)하였다.

합력적왕(哈力赤王)이 알라사(斡羅斯) 남부(南部)의 제왕(諸王)을 계액보(計掖甫)에 집(集)하여,

출경(出境)하여 영격(迎擊)을 의(議)하였다.

자별(者別)과 속부태(速不台)가 10인(人)을 견사(遣使)하여 내고(來告)하길

「몽고(蒙古)의 소토자(所討者)는 기극찰극(奇克察克)이니, 알라사(斡羅斯)와는 무흔(無釁/불화가 없음)한데,

  필(必)히 상범(相犯)하지 말자!

  기복찰극(奇卜察克)은 본디 귀국(貴國)과 더불어 구병(構兵)하였는데,

  어찌 조아(助我)하여 이로써 구적(仇敵)을 공(攻)하지 않는 것인가?」

알라사(斡羅斯)의 제왕(諸王)이 위(謂)하길

「먼저 이 언(言)으로써 기복찰극(奇卜察克)을 이(餌/꾀임)하였는데, 지금(今) 다시 이아(餌我)하니, 신(信)할 수 없다.」

10인(人)을 집(執)하여 살지(殺之)하였다.

자별(者別)과 속부태(速不台)가 다시 견사(遣使)하여 위(謂)하길

「아(我)의 행입(行入)을 살(殺)한다면, 곡재아(曲在汝/잘못이 너희에게 있음)로다.

  천(天)이 여백(汝魄)을 탈(奪)할 것이고, 멸망(滅亡)을 자취(自取)할 것이로다.

  청(請)컨대 일전(一戰)하여 이로써 승부(勝負)를 결(決)하자!」

곳탄(庫灘)이 또 살지(殺之)하고자 하였는데, 알라사인(斡羅斯人)이 석지(釋之)하였고, 전기(戰期)를 약(約)하였다.

합력적왕(哈力赤王)이 먼저 만기(萬騎)로써 동쪽(東) 첩니박이하(帖尼博耳河)를 도(渡)하였고,

전봉(前鋒) 비장(裨將) 합마패(哈馬貝)를 패(敗)하였고, 획(獲)하고는 살지(殺之)하였다.

제왕(諸王)이 모두 인병(引兵)하여 종지(從之)하여, 객륵길하(喀勒吉河)에 지(至)하여, 대군(大軍)과 우(遇)하였다.

이때 알라사(斡羅斯)의 군(軍)이 남북(南北)에 분둔(分屯)하였는데,

남군(南軍)은 계액보(計掖甫)와 차이니가(扯耳尼哥) 등(等)의 부(部)로 하였고,

북군(北軍)은 합력적(哈力赤) 등(等)의 부(部)와 더불어 기복찰극(奇卜察克)의 병(兵)으로 하였다.

합력적왕(哈力赤王)이 경적(輕敵/적을 얕잡아 봄)하여, 북군(北軍)을 독솔(獨率)하여 도하(渡河)하였고,

해아상(孩兒桑)의 지(地)에서 전(戰)하였다.

승부(勝負)가 미결(未決)하였는데, 기복찰극(奇卜察克)의 병(兵)이 선둔(先遁)하니, 아군(我軍)이 승지(乘之)하였고,

알라사병(斡羅斯兵)이 대궤(大潰)하였다.

합력적왕(哈力赤王)이 주(走)하여 도하(渡河)하였는데, 그 주(舟)를 즉침(即沉)하니,

후지자(後至者)가 도(渡)를 부득(不得)하였고, 모조리 아군(我軍)이 소살(所殺)하였다.

남군(南軍)은 북군(北軍)의 전(戰)을 부지(不知)하였고, 역시(亦) 그 패(敗)를 부지(不知)하였는데,

아군(我軍)이 졸지(猝至)하여, 그 루(壘)를 위(圍)하였는데, 3일(日)이 불하(不下)하였다.

유(誘)하여 납회(納賄/재물을 바침)하여 행성(行成)하게 하였는데,

그 출(出)을 사(俟)하여, 질공(疾攻/급히 공격함)하니, 참괵(斬馘)이 무산(無算)하였다.

아군(我軍)이 서(西)하여 첩니박하(帖尼博河)에 지(至)하였고,

북(北)하여 차이니가성(扯耳尼可城)과 더불어 낙불돈라특성(諾拂敦羅特城) 및 석니사극성(夕尼斯克城)에 지(至)하고는 

지(止)하였다.

첩서(捷書)가 태조(太祖)의 행재(行在)에 지(至)하니, 조(詔)하여 마(馬) 10만필(匹)로써 호사(犒師/군을 호궤함)하였고,

출적(朮赤)을 기복찰극(奇卜察克)에 봉(封)하여, 이로써 서북(西北)의 제부(諸部)를 할(轄/다스림)하게 하였다.

19년(1224년)에, 출적(朮赤)이 서행(西行)하였는데, 자별(者別)은 속부태(速不台)와 더불어 

출적(朮赤)의 부병(部兵)을 귀(歸)하였고, 스스로 소부(所部)를 솔(率)하여 동반(東返)하였으나, 중도(中道)에 졸(卒)하였다.

초(初)에 자별(者別)의 명(名)은 지아활홀아알(只兒豁忽阿歹)이었는데,

태조(太祖)가 그 전마(戰馬)를 사폐(射斃)함으로써, 자별(者別)을 사명(賜名)하니, 국어(國語)의 매침전(梅針箭)이다.

자(子) 홀생손(忽生孫)은 천호(千戶)로 삼았다.

홀생손(忽生孫)의 자(子)는 합랍(哈拉)인데, 욱렬올(旭烈兀)을 종(從)하여 서역(西域)에 입(入)하였다.

자별(者別)의 제(弟) 몽도살와아(蒙都薩窪兒)는 타뢰(拖雷)의 좌우(左右)를 시(侍)하였다.

그 자(子) 오륵사(烏勒思)는 역시(亦) 서역(西域)에 입(入)하였다.

자별(者別)의 후예(後)로 서역(西域)에 재(在)한 자(者)가 심중(甚衆)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자륵멸(者助蔑/젤메), 홀필래(忽必來/쿠비라이), 자별(者別)은 소위(所謂) 웅경지사(熊景之士/태양과 같이 빛나는 사내)로,

  이심(二心)이 있지 않은 신(臣)이었다.

  자륵멸(者勒蔑)은 태조(太祖)를 충난(忠難)에서 누증(屢拯/여러번 구함)하였고,

  홀필래(忽必來)의 용(勇)은 본디 태조(太祖)가 소지(所知)하였으나,

  그 자별(者別)의 분(奮)을 시(視)하니 자항(自降)한 노자(虜者)는 대개(蓋) 사(俟)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공명(功名) 반출(反出)하여 자소륵매(者所勒蔑)와 홀필래(忽必來)의 우(右)가 되었다.

  나는 태조(太祖)가 기구(棄仇)하여 지용(智勇)을 임(任)한 것을 가수(佳誰)할지 익탄(益嘆/더욱 찬탄함) 하노라!

  그 웅략(雄略)은 급(及)하기가 불가(不可)하노라!」


*고출로극(古出魯克)

 : 쿠추룩(kuculug), 나이만 부족장 타이 부카의 아들로 서요 4대 황제.

  굴출률(屈出律/요사), 곡출률(曲出律/원사), 고출로극(古出魯克/원조비사, 신원사), 집사(Kuchuluk Khan)

  타이 부카가 1204년 테무진에게 대패하고 사망하자 쿠추룩은 서요로 달아난다.

  서요 황제 야율직로고의 사위가 된 후 흩어진 나이만 부족들을 결집하여 1211년 제위를 찬탈하고

  서요 4대 황제에 오른다.

  본시 나이만 부족은 기독교를 숭배하였으나 서요를 통치하기 위해 서요 귀족 종교인 불교로 개종하고

  국내의 이슬람교를 탄압한다.

  1218년 테무진의 장수 제베가 서요를 공격하자 서요의 이슬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쿠추룩은 축출되어 

  파미르 고원(현 아프카니스탄)으로 탈출한다.

  

 *태양한(太陽汗)

 : 타이 부카(Tai Buqa)/탈아로흑(脱兒魯黑), 이난치의 아들, 몽고 나이만 부족장.

  테무진의 세력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타이 부카는 케레이트 왕 카안, 메르키트, 오이라트, 자무카 등과 연합하여

  1204년 테무진을 공격하나 대패하고 곧 사망한다.







1216년에 태조가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구출룩(고출로극)이 서요를 차지하고 근거로 삼았는데 

명을 내려 제베로 하여금 정벌하게 하였다.

1217년에 군사가 추이강(수하)에 이르렀는데 지나는 성읍마다 바라만 보고 항복하니 구출룩이 서쪽으로 달아났다.

또 1218년에 제베가 갈사맥리로 하여금 파미르 고원(총령)을 경유하여 추격하게 하였는데

여러 살리흑곤과 더불어 그 머리를 참하고는 이로써 조리를 돌렸다.

여러 부족군 중에서 말 1천 필을 획득하였는데 모두 백마니 돌아와 태조에게 바치며 말하길

「신은 옛날 쏘아 죽인 말을 속죄하길 청하나이다.」

1219년에 태조가 서역을 친정하였는데 제베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수부타이(속부태)를 제베의 후원으로 삼았고

토쿠차르(탈홀찰아)를 또한 수부타이의 후원으로 삼아 서역의 주인 알라 앗 딘(아랍애정/무함마드)을 추격하였다.

서역(호라즘)의 주인이 섬으로 도망갔다가 죽으니 그 모친, 처와 보물을 획득하여 태조에게 바쳤다.

다시 서역의 각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그 서북의 인근 부족 아특이패점, 각아지, 실아만으로 들어가니 

모두 바라만 보고도 진심으로 복종하였다.

1221년에 서역을 대략 평정하였다.

태조가 다시 명을 내려 제베는 수부타이와 함께 카스피해(이해)의 서쪽으로 진군하게 하였고 

이로써 킵착(기복찰극)을 토벌하게 하였다.

군이 고객사산으로 들어가니 킵착, 아속, 살이가사 등의 부족이 험한 곳에 근거하여 대적하였다.

제베가 중과부적이니 곧 감언으로 킵착을 꾀여 말하길

「우리들은 모두 동류이니 서로 해치려는 뜻이 없는데 어찌 다른 종족을 반드시 원조하여 이로써 동류를 해치는가?」

킵착이 그 말을 믿고는 퇴각하였다.

제베가 군을 인솔하고 요해처를 나와 아속 등의 부족을 격파하였고 급히 킵착을 추격하여 군을 풀어 공격하였고

그 곽탄의 동생 옥아격과 더불어 그 아들 타아르(탑아아)를 살해하고 태자 주치(출적)에게 승첩을 고하고는 원군을 청하였다.

이때 주치는 카스피해 동쪽에 주둔하였는데 군을 나누어 원조하게 하였다.

1222년 겨울에 태조의 친군이 이르러 얼음이 언 것을 틈타 이알하을 건넜고 마침내 아사탑랍간성을 함락하였다.

킵착의 병력과 조우하여 또 격파하였고 군을 둘로 나누어 경계하며 인솔하여 서쪽으로 갔다.

1군은 패잔병을 보내 서하(瑞河)를 건너게 하였고 1군은 아색부해의 동남쪽에 이르러 살이가사와 아속 등의 

부족을 평정하였으며 마침내 아색부해로부터 얼음을 밟고 이로써 흑해에 이르렀고 

쿠룸(극륵모/현 헝가리 북동부)의 땅으로 들어가 양군이 다시 합하였다.

곽탄이 러시아(알라사) 경계로 도망쳐 들어가 그 사위 칼라치아(합력적)왕 므스트슬라프(목사제사랍보)에게 구원을 애걸하였다.칼라치아왕이 러시아 남부의 여러 왕을 키예프(계액보)에 소집하여 변경을 나가 반격하기로 의논하였다.

제베와 수부타이가 10인을 사신으로 보내 고하길

「몽고가 토벌하고자 하는 자는 킵착이니, 러시아와는 불화가 없는데 필히 서로 범하지 말자!

  킵착은 본디 귀국과 더불어 전쟁하였는데 어찌 나를 도와 이로써 원수를 공격하지 않는 것인가?」

러시아의 여러 왕이 일컫기를

「먼저 이 말로써 킵착을 꾀었는데, 지금 다시 우리를 꾀고 있으니 믿을 수 없다.」

10인을 사로잡아 죽였다.

제베와 수부타이가 다시 사신을 보내 일컫기를

「나의 사신을 죽인 잘못은 너희에게 있도다!

  하늘이 너희의 혼백을 빼앗을 것이고 스스로 멸망을 취할 것이로다!

  청컨대 한 번 싸워 이로써 승부를 결정하자!」

곡타가 또 죽이고자 하였는데 러시아인이 풀어줬고 싸울 날짜를 약조하였다.

칼라치아왕이 먼저 1만기로써 동쪽 첩니박이하를 건너 선봉 비장 카마베(합마패)를 격파하고는 사로잡아 죽였다.

러시아의 여러 왕이 모두 군을 인솔하여 따라와 칼카강(객륵길하)에 이르렀는데 대군과 조우하였다.

이때 러시아의 군이 남북에 나누어 주둔하였는데 남군은 키예프(계액보)와 체르니고프(차이나가) 등의 부족이었고

북군은 칼라치아 등의 부족과 더불어 킵착의 군대였다.

칼라치아왕이 적을 얕잡아 보고 독단으로 북군을 인솔하여 강을 건넜고 해아상의 땅에서 싸웠다.

승부가 미처 결정되지 못하였는데 킵착의 군사가 먼저 달아나니 아군이 승세를 타고 러시아군을 크게 궤멸하였다.

칼라치아왕이 달아나 강을 건너고는 그 배를 즉시 침몰시키니 뒤에 이른 자들이 건널 수 없었고 모두 아군에게 살해되었다.

남군은 북군의 싸움을 알지 못하였고 또한 그 패배를 알지 못하였는데 

아군이 갑자기 이르러 그 보루를 포위하였으나 3일 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재물을 바치도록 회유하여 일이 거의 이뤄졌는데 그 나오는 것을 기다려 급히 공격하니 참한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아군이 서쪽으로 진군하여 첩니박하에 이르렀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차이니가성과 더불어 

낙불돈라특성 및 석니사극성에 이르고는 정지하였다.

승전보가 태조의 행재소에 이르니 조서를 내려 말 10만필로써 군을 호궤하게 하였고

주치를 킵착으로 봉하여 이로써 서북의 여러 부족을 다스리게 하였다.

1224년에 주치가 서쪽으로 진군하니 제베가 수부타이와 더불어 주치의 부족병을 돌려보내고

스스로 소속 부대를 인솔하여 동쪽으로 되돌아 갔는데 중도에서 졸하였다.

처음에 제베의 이름은 지르쿠타이(지아활홀아대/지르고아다이)이었는데 태조가 그 전마를 쏘아 죽인 일로 제베라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몽고어로 화살을 뜻한다.

아들 홀생손은 천호로 삼았다.

홀생손의 아들 합랍은 훌레구(욱렬올)를 따라 서역으로 들어갔다.

제베의 동생 뭉게두 사우르(몽도살와아)는 톨루이(타뢰)의 좌우 근시였다.

그 아들 우르스(오륵사) 또한 서역으로 들어갔다.

제베의 후예로 서역에 있는 자가 심히 많았다.


사신은 말한다!

「젤메, 쿠비라이, 제베는 소위 웅경지사(태양과 같이 빛나는 사내)로 두 마음이 있지 않은 신하들이었다.

  젤메는 태조를 충심으로 난중에서 여러 번 구하였고, 쿠빌라이의 용맹은 본디 태조가 알고 있었으나,

  그 제베의 분격을 보았는데 대개 스스로 항복하여 포로가 된자는 중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리어 그 공명을 발휘하게 하여 젤메와 쿠비라이의 오른팔이 되게 하였다.

  나는 태조가 원한을 버리고 지용을 맡긴 것을 그 누가 따를 수 있을지 더욱 찬탄하노라!

  그 웅략은 결코 따를 수가 없도다!」


요약.

금 정벌전에 이어 나이만 부족장 구출룩이 점령한 서요를 멸하였고 백마 1천 마리를 칭기스 카안에게 바쳐 옛 빚을 갚는다.

이어 제베는 구출룩을 추격하여 파미르 고원을 거쳐 호라즘(서역)을 평정한다.

호라즘 평정 후 제베는 주치, 수부타이와 함께 흑해의 킵착을 토벌한다.

패전한 킵착의 왕 곽탄은 아라사(러시아)로 도주하였고 제베는 러시아에게 상관하지 말라는 사신을 파견한다.

그러나 곽탄은 사신단을 죽여버린다. 이에 제베는 러시아를 멸하겠다 경고한 후 진격한다.

제베는 칼카강에서 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주치에게 승첩을 보고한다.

1224년 주치가 계속 서진하자 제베는 소속 부대를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가다 서역에서 사망한다.

제베의 후손은 대다수가 서역에 머물렀다.

신원사 찬자 가소민은 젤메, 쿠빌라이, 제베를 태양과 같은 사내들이라 극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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