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이 숲에서 초원으로 이주한 시기가 충격이군요. 테무진 이야기

김호동 교수님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을 읽고 있는데
제게는 좀 쇼킹한 내용이 많이 실려 있더군요.


2014년 경에 제가 몽골인의 원 뿌리인 몽올실위의 위치를 비정한 적이 있었는데요.


몽올실위(蒙兀室韋) 위치 비정

실위와 거란의 언어/몽올실위 관련 중국 정사 발번역



이들 몽골족이 산악지대에서 채집 수렵민으로 살다가 몽고 초원으로 가서 유목민으로 전업한 것이

김호동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칭기스칸이 태어나기 100년~150년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9세기 중반 대략 840년경 몽골 초원을 주름잡던 위구르 제국이 몰락하자

그때까지 초원의 투르크계 유목민족과 대립하던 삼림지역에 살던 타타르족과 몽골족에게

마침내 족쇄의 굴레가 벗겨졌다고 합니다.



북사(北史) 실위(室韋)中

실위의 언어는 고막해, 거란 및 두막루국과 같다.


신당서(新唐書) 북적(北狄) 실위(室韋)中

실위는 거란의 별종으로 동호의 북변이며 대개 당나라 북적 철륵의 후손이다.

구당서(舊唐書) 북적(北狄) 실위(室韋)中

실위는 거란의 별종이다.


건염이래조야잡기 달단 관새 몽국본말 中

又有蒙國者在女真之東北唐謂之蒙兀部金人謂之蒙兀亦謂之萌骨人不火食夜中能視以鮫魚皮為甲可捍流矢

또 몽국은 여진의 동북에 있는데 당에서 이르길 몽올부라 하였고,

금나라 인이 이르길 몽올이라 하였고, 또한 몽골인(萌骨人)이라 불렀다.

음식을 익혀 먹지 않고 밤중에서 능히 볼수 있으며 물고기 가죽을 갑옷으로 입는데 화살을 막을 수 있다.

(중략)

※여기서 여진은 금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건염이래조야잡기가 남송조에 만들어진 사료입니다.

  몽올실위가 본래 당나라 시절에는 (현재) 금의 동북에 있었다는 표현 같습니다.

 

韃靼之人皆勇悍善戰。近漢地者謂之熟韃靼,能種秫穄,以平底瓦釜煮而食之。遠者謂之生韃靼,止以射獵為生
無器甲,矢用骨鏃。而已蓋以地不產鐵故也。契丹雖通其和市,而鐵禁甚嚴。

달단의 사람은 모두 날래고 사나우며 싸움을 잘한다.

중국 땅과 가까운 자들을 숙달단이라 하는데 능히 찰벼와 검은 기장을 심을수 있으며 평평한 질솥으로 익혀서 먹는다.

멀리 있는 자들을 일컫기를 생달단이라 하는데 수렵으로 살아가는데 그친다.

병기와 갑옷이 없고 화살은 뼈 화살촉을 사용할 뿐인데, 대개 땅에 철이 생산되지 않는 연고이다.

거란이 비록 그들과 뜻이 맞아 거래가 통하여도 철은 심히 엄하게 금한다.


남송조 이미 거란은 망했기 때문에 이 기록은 과거 몽골족이 삼림 수렵민으로 살아갈 때 이야기 같습니다.

집사나 신원사에도 몽골족의 선조들이 협곡에 갇혀 있었는데 탈출할 방법을 알지 못하다가

70마리 소와 말을 잡아 가죽으로 풀무를 만들어 철광산을 녹여 협곡을 탈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 칭기스칸 당시에도 매년 설날 밤에 단야의식을 행했다고 합니다.

또한 유물론적으로도 당시 초원 동쪽에서 발견된 11~12세기 화살촉은 뼈화살촉과 철화살촉의 비율이

6~10세기보다 약 3배 정도 증가했다고 합니다.

즉 협곡 탈출과 제철기술 연마를 통해 몽골족은 삼림에서 탈출하여 초원에 진입하였고,

제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전쟁 기술도 그만큼 올라가게 되어 점차 서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몽골족의 협곡 탈출 기록


신원사 본기 서기 中

오직 남은 남녀 2명이 한 산으로 도망쳐 들어가 험한 길과 험한 산을 경유하여

겨우 출입을 통하니 마침내 거주하였으며 그 산의 이름을 「에르게네 쿤(아르군 협곡)」이라 하였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자는 뇌고이고, 차자는 키요트(걸안)이었다.

「키요트(걸안)」의 뜻은 급하고 세찬 빠른 물살을 뜻하는데 그 무리가 용맹하게 전진하는 것을 본뜬 것이다.

키요트 자손의 무리가 많으니 걸안물(乞顏物)이라 칭하였으며 또한 기악온(만주어 치우원)이라 번역하였다.

「온」이란 것은 (몽고) 국어의 꼬리말이다.

후에 땅이 협소하고 사람이 많으니 산에서 나가고자 하였고 이내 길에 이미 가득 차게 되었다.

매우 깊은 철광 동굴이 있었는데 이 동굴 속에서 횃불을 켜고 소 70마리를 도살하여 가죽을 갈라 풀무로 삼았고,

쇠와 돌이 이윽고 녹아 길이 마침내 통하게 되었다.

몽고는 오래전부터 설날 아침에 화로에 쇠를 불리며 존비의 차례대로 때리는데 그 일은 대개 이에 연유한다.


집사 中 (김호동 역주)

새해를 맞는 첫날밤에 칭기스 칸 일족의 관습과 의례는 대장장이의 풀무와 화로와 석탄을 준비하고

얼마간의 쇠를 달군 뒤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때려서 길게 늘이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먼저 초원으로 발을 내디딘 것은 타타르 종족, 이들의 초원 이주는 981년 사고창기에 기록되어 있어 증빙이 되는데

몽골족은 타타르족보다 훨씬 늦어 10세기에 삼림지역이던 아르군 강, 

11세기에 초원으로 이동하여 오논강 하류, 12세기가 되어서야 본거지인 오논강 중류까지 왔다는 겁니다.

이는 몽골의 특이한 매장방식 머리를 북쪽에 두는 유골의 존재로 확인이 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白石曲之의 <チンギス=カンの考古学>에 따르면 고고학적 연구에 몽골족의 초원 대량 이주는

12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시기라고 합니다.

칭기스칸의 출생년도가 1162년경이니 딱 칭기스칸 부친대인 예수게이 시절에나 초원에 왔다는 -0-

뭐 중국의 사서나 원의 사서를 살펴보면 1130년대에 몽골족이 조원황제를 참칭했다는 기록이나

카불 칸, 암바가이 칸의 활동 시기를 살펴보면 12세기 초반에는 초원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호동 교수는 몽골족이 오논강 중류까지 온 데에는 1125년 요의 멸망이 기폭제였다고 합니다.

즉 테무진이 태어나기 30년 전까지만 하여도 몽골족은 타타르족과 거란족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서진하여 초원의 영토를 확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이미 포진한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에 비하면 몽골족은 세가 많이 작았고요.


몽골족이 삼림 수렵민에서 초원 유목민으로 전업한 이유 중 하나가 11세기 동북아에 불어닥친 

기후 한랭화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칭기스칸 사서들을 읽고 번역하면서 느낀 점은

"무슨 초원의 유력 부족은 다 일가친척이야?"라는 의문이 들었었는데

김호동 교수님은 저서에서 이런 의문점을 시원하게 답해주시고 계시더군요.

당시 10~12세기 몽고 초원은 그야말로 약육강식, 약탈의 시대로 필연적으로 계급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이 약육강식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보르지긴 씨로, 몽골족이 모두 보르지긴씨가 아닌 

그들이 지배한 혹은 복속시킨 백성들을 모두 통칭 몽골족이라 부른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그만큼 몽골족이 초원 동북방에 뿌리내린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몽골 키요트 보르지긴씨가 수백년간 부족장을 한 것도 아니고, 겨우 100년 전후로 주인 없는 초원 동북방에 자리 잡았고

다른 백성들을 약탈, 복속하면서 점차 여러 부족으로 분파되었다는 것이지요.


몽골비사나 집사의 보르지긴씨 계보도를 추적해 보면 당시 상당수의 유력 부족들이 

칭기스칸의 증조부 카불 칸 이후에 분파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이 귀족 계급으로 각자 가문/부족을 만들고 초원으로 흩어진 게 

겨우 칭기스칸 출생 30~40년 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테무진 당시 몽골 부족 및 주요 인물 현황


한편 12세기, 13세기 칭기스칸의 몽골족이 맹위를 떨친 이면에는 당시 몽골초원에 불어닥친 기후 변화

즉 온기와 다습한 환경이 목초지를 증가시켰고, 이에 따라 말이 급속도로 많아진 것에 기인한다는

2012년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 에이미 헤슬박사&콜롬비아 대학 네일 페더슨 박사의 연구도 있더군요.

몽골 나친 바타비레그 국립종합대학 교수진도 6~9세기 돌궐, 위구르 제국의 기후 변화에 따른

유목 제국의 흥망을 연구하고 있더군요.


이 연구들을 두고 가정하자면

6~9세기 온난화, 다습화 → 몽골초원의 목초지 증가 → 돌궐, 위구르 제국 레벨↑

10~12세기 한냉화 → 위구르 제국 레벨↓ 멸망,

11세기~12세기 삼림 수렵민 몽골족 춥고 배고파서 때마침 주인이 없어진 초원으로 이동 유목민 전업

12~13세기 온난화, 다습화 → 몽골족 레벨↑





요약.

1. 몽골족은 본래 삼림 수렵민이었다.

2. 한랭화로 산에서 탈출한 시기는 대략 칭기스칸 출생 이전 30~150년 사이다.

3. 당시 초원 동북방에는 주인이 없었다.

4. 몽골족이 본거지인 오논강 중류로 온 건 칭기스 칸 출생 30년 전이다.

5. 칭기스 칸의 출생 즈음 철기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했고, 초원이 온난 다습화로 풀이 무성했다.

6. 철제 무기와 풍부한 말로 인해 초원에는 약육강식의 서바이벌 삶이 시작되었고,

   가문(뼈/야순)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 계급이 탄생하여 평민들을 지배했다.


-끝-



덧글

  • 천하귀남 2020/02/26 10:02 #

    징기스칸 통일 전 몽골이 돌이나 뼈 화살촉을 사용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설마 그 정도일까 했는데
    그 당시에 한창 발전하는 상황이라 모두 그런것은 아니고 경제력 낮은 하층은 일상 사냥 등에서 사용된 것이라 봐야 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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