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만명?이 학살된 호라즘 수도 우르겐치(구르간지) 테무진 이야기

몽골군이 호라즘을 침공한 후 호라즘 샤 술탄 무함마드는 야전을 포기하고 전국에 수성전을 명합니다.

몽골군은 수성전을 하면서 피해를 입게 되자 더욱 독기를 품었고 성을 함락하면 일체의 자비도 없이 학살을 자행하였는데요.

리처드A. 가브리엘은 몽골군의 학살을 현대 나치의 학살만큼 끔찍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칭기스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 中(리처드A. 가브리엘)

몽골이 이슬람 국가와 벌인 이 첫 번째 전쟁은 결국 말살전이 되어 샤 왕국 인구의 5분의 4가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어느 역사가는 "단 3년 동안의 충돌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경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몽골에 의해 자행된 냉혹하고 계획적인 대량 학살은 고대 아시리아인과 현대 나치의 만행만큼이나 끔찍한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몽골군의 호라즘 학살 기록은 너무나 많아서 요약하기도 힘이 들 정도인데요.

끔찍한 학살이 벌어진 호라즘의 수도 우르겐치를 함락할 당시 기록을 보실까요?


집사 칭기스칸기中 (김호동 역주)

나머지 사람들은 처형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분배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병사] 한 사람에게 24명씩 나누어 주었고, 몽골의 병사들 숫자는 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도시민] 모두를 죽였고, 병사들은 약탈에 몰두했다.

동리와 건물들 가운데 남은 것들은 한꺼번에 파괴해 버렸다.


5만명 * 24명 = 120만 명 학살!!!


일설에는 당시 호라즘 수도를 사마르칸트라고 알려져 있으나

집사에는 분명하게 사마르칸트는 이미 이전에 함락되었고 이어 함락된 곳이 수도 우르겐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사 칭기스칸기中 (김호동 역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칭기스 칸은 사마르칸트를 정복한 뒤(중략)

호라즘-원래 이름은 구르간지이고, 몽골인들은 이를 우르겐치라고 부른다-은 마치 밧줄이 끊어진 천막처럼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는 그곳도 정복하기를 원했고, 바로 그때 자신의 큰아들들인 주치와 차카타이와 우구데이를 호르즘 [정벌]하는 일에 임명하고.


즉 사마르칸트를 함락한 칭기스칸은 주치와 차카타이, 우구데이 3아들을 우르겐치로 보냈는데

본래 주치와 차카타이는 사이가 안좋았지요.

몽골비사에 기록되었듯이 호라즘 원정 직전에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었고

테무진은 주치가 맏아들이라며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차카타이는 주치가 메르키트 잡놈이라며

거부하였고 이 둘은 아버지 앞에서 멱살잡이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우구데이가 후계자로 합의되었고 이후에도 주치와 차카타이는 서로 으르렁댔습니다.

주치와 차카타이의 불화는 거의 모든 사서에 기록이 될 정도였고,

사료를 살펴보면 우구데이나 톨루이도 은근히 차카타이를 큰형이라고 말하며

동복형인 주치를 보르지긴씨가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당시 몽골군은 7개월 동안 우르겐치를 포위 공격하였는데요.

총대장 주치와 차카타이의 불화는 심각하여 몽골군은 일원화된 공격을 하지 못했고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습니다.


집사 칭기스칸기中 (김호동 역주)

호라즘을 공략하지 못한 채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했으며,

그렇게 된 까닭의 일부는 주치와 차카타이 사이의 불화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칭기스 칸은 분노하여

"그들의 막냇동생인 톨루이가 지휘관이 되어 그들과 그 휘하의 군대를 지휘하라! 그의 말에 따라 전투를 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우르겐치 공략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톨루이는 형 주치와 차카타이를 오가며

그 둘을 화해시키고 명령을 통일해 마침내 일제 공격을 단행하여 금방 우르겐치를 함락시킵니다.



집사를 집필한 라시드 앗 딘도 우르겐치 학살의 수를 <전하는 바에 의하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Rein Taagepera는 저서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에서 

1218년 당시 호라즘의 영토는 360만㎢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반도(22만㎢)의 약 16배 정도네요.


John Man은 저서 [Genghis Khan: Life, Death, and Resurrection(2007)]에서 

1218년 당시 호라즘의 인구는 약 5백 만, 사상자는 약 25%인 170만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에 역사적 인구 학자인 ertius Chandler 와 Gerald Fox에 의하면 

1218년경 호라즘의 총 인구를 52만~85만으로 추정했고,

도시별 인구는

-사마르칸트 : 8만~10만

-니샤푸르 : 7만

-레이 : 10만

-이스파한 : 8만

-메르브 : 7만

-발크 : 3만

-가슴 : 4만

-헤라트 : 4만

-오트라르+우르겐치+부하라 : 7만 미만

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건강한 장정은 10만5천~14만 정도, 군대는 약 4만의 투르크 출신 기병

숫자를 알 수 없는 전투력이 약한 민병대가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아마 민병대는 집사에 기록된 불량배들이라고 기록된 이들이나 캉클리인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우르겐치의 학살당한 호라즘인은 아무리 많아도 수만에 불과하지 절대 120만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즉, 우르겐치에서 학살당한 백성이 120만 기록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40년 후 호라즘 영토에 뿌리내린 훌레구 칸에 의한 장정 조사에서 

당시 5투멘, 즉 5만명의 병사를 운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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