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 무칼리 열전 2부-만호장에 임명되다! 테무진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칭기스칸의 서열 1위 장군으로 금나라 정벌 총사령관 무칼리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나는 무칼리다! (사준사구)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도도아지거푸헝

하르졸(해란주)호오거망굴타이아민고이마혼/와산/제극탑합/공아지르가랑두두니칸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96%B0%E5%85%83%E5%8F%B2/%E5%8D%B7119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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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即位,以木華黎爲左萬戶,東至合剌溫山悉隸之,子孫世襲勿替。

是時封功臣九十餘人爲千戶,惟木華黎與博爾本爲左、右萬戶,位諸將之上。

太祖嘗從容語之曰:

「吾有汝二人,猶車之兩轅,身之兩臂也。」

六年,從太祖代金,渡漠而南。

金主使其將獨吉思忠將兵築烏沙堡,欲以逼我。

木華黎襲敗之,思忠遁走。

金將郭寶玉來降。

從太祖克西京及昌、桓、撫等州。

金兵號四十萬,陣野狐嶺北,木華黎進曰:

「彼衆我寡,弗致死,未易破之。」

遂率敢死士,大呼陷陣,太祖麾諸軍繼進,大敗之。

追至澮河堡,又敗之,殭屍百里。

是役也,金人之精銳殲焉,其後遂不能復振。

七年,從太祖攻德興府。

八年,從入紫荊關,敗金兵於五回嶺,拔涿、易等州。

是時三路伐金,太祖與睿宗爲中路,分遣木華黎拔益都、濱、棣等州縣,又攻拔密州,屠之。

還次霸州,史天倪、蕭勃迭兒來降,承製授天倪萬戶,勃迭兒千戶。

九年,從圍中都,金主珣請和。

太祖北還,命木華黎統諸軍取遼西高州,守將盧琮、金樸以城降。

初,高州富庶,寨將攸興哥屢抗我軍,木華黎下令,能斬攸興哥首以獻,則城人皆免死。

興哥挺身自歸,諸將欲殺之,木華黎曰:

「壯土也,留麾下爲吾用。」

後以功,太祖賜名攸哈喇拔都。

태조(太祖)가 즉위(即位)하자, 목화려(木華黎)를 좌만호(左萬戶)로 삼았고, 동(東)쪽으로 합랄온산(合剌溫山)에 지(至)하도록 

실례지(悉隸之)하였고, 자손(子孫)의 세습(世襲)을 물체(勿替)하게 하였다.

이 당시(時) 공신(功臣) 90여인(人)을 봉(封)하여 천호(千戶)로 삼았는데, 오직 목화려(木華黎)와 박이본(博爾本)만을 

좌만호(左)와 우만호(右萬戶)로 삼아, 제장(諸將)의 상(上)에 위(位)하게 하였다.

태조(太祖)가 일찍이 종용(從容/조용)의 언(語)으로 말하길

「내가 너희 2인이 있어, 거(車)의 양원(兩轅)과 신(身)의 양비(兩臂/두팔)와 같다 하겠노라!

[칭기스칸] 6년에, 태조(太祖)를 종(從)하여 벌금(代金)하였는데, 도막(渡漠)하여 이남(而南)하였다.

금주(金主)가 그 장(將) 독길사충(獨吉思忠)으로 하여금 장병(將兵)하여 오사보(烏沙堡)를 축(築)하게 하여, 

이로써 우리를 핍(逼)하고자 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습패지(襲敗之)하니, 독길사충(思忠)이 둔주(遁走)하였고, 금장(金將) 곽보옥(郭寶玉)은 내항(來降)하였다.

태조(太祖)를 종(從)하여 서경(西京)과 더불어 창주(昌), 환주(桓), 무주(撫) 등(等)의 주(州)를 극(克)하였다.

금병(金兵)이 사십만(四十萬)이라 호(號)하며, 야호령(野狐嶺) 북(北)에 진(陣)하였는데, 목화려(木華黎)가 진(進)하며 말하길

「피중(彼衆)하고 아과(我寡)하니, 불치사(弗致死)하지 않는다면, 이파지(易破之)하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감사(敢死/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한 사(士)를 솔(率)하여, 대호(大呼)하며 함진(陷陣)하였고, 태조(太祖)가 

제군(諸軍)을 휘(麾)하여 계진(繼進)하여, 대패지(大敗之)하였다.

회하보(澮河堡)에 추지(追至)하였고, 또 패지(敗之)하니, 강시(殭屍)가 백리(百里)였다.

이 역(役)으로 금인(金人)의 정예(精銳)가 섬(殲)하였고, 그 후(後)에 마침내 복진(復振)을 불능(不能)하였다.

[칭기스칸] 7년에, 태조(太祖)를 종(從)햐여 덕흥부(德興府)를 공(攻)하였다.

[칭기스칸] 8년에, 자형관(紫荊關)을 종입(從入)하였고, 금병(金兵)을 오회령(五回嶺)에서 패(敗)하였고, 탁주((涿)와 

역주(易) 등주(等州)를 발(拔)하였다.

이 당시(時) 삼로(三路)로 벌금(伐金)하였는데, 태조(太祖)는 예종(睿宗)과 함께 중로(中路)가 되었고, 목화려(木華黎)를 

분견(分遣)하여 익도(益都), 빈주(濱), 체주(棣) 등(等)의 주현(州縣)을 발(拔)하였고, 또 밀주(密州)를 공발(攻拔)하고, 

도지(屠之)하였다.

환(還)하여 패주(霸州)에 차(次)하였는데, 사천예(史天倪)와 소발질아(蕭勃迭兒)가 내항(來降)하니, 승제(承製)하여 

사천예(天倪)를 만호(萬戶), 소발질아(勃迭兒)는 천호(千戶)에 수(授)하였다.

[칭기스칸] 9년에, 중도(中都)를 종위(從圍)하였고, 금주(金主) 완안순(珣)은 청화(請和)하였다.

태조(太祖)가 북환(北還)하였는데, 명(命)하여 목화려(木華黎)는 제군(諸軍)을 통(統)하여 요서(遼西) 고주(高州)를 

취(取)하게 하였는데, 수장(守將) 노종(盧琮)과 김박(金樸)이 성(城)으로써 항(降)하였다.

초(初)에, 고주(高州)가 부서(富庶/풍요로움)하였는데, 채장(寨將) 유흥가(攸興哥)가 아군(我軍)에 누항(屢抗)하니,

목화려(木華黎)가 하령(下令)하여, 능히(能) 유흥가(攸興哥)의 수(首)를 참(斬)하여 이헌(以獻)한다면, 즉(則) 성인(城人)은 

모두 면사(免死)한다 하였다.

유흥가(興哥)가 정신(挺身/앞장서 나아감)하여 자귀(自歸)하니, 제장(諸將)이 살지(殺之)하고자 하였는데, 

목화려(木華黎)가 말하길

「장사(壯土/士의 오기)로다! 휘하(麾下)에 유(留)하여 나를 위해 용(用)하겠노라!」

후(後)에 공(功)으로써, 태조(太祖)가 유합라(攸哈喇) 발도(拔都)라 사명(賜名)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자 무칼리를 좌만호로 삼았고 동으로 실지울 산에 이르도록 모조리 예속하게 하였고,

자손의 세습을 바꾸지 말라 하였다.

이 당시 공신 90 여인을 봉하여 천호로 삼았는데 오직 무칼리와 보오르초(박이본)만을 좌만호와 우만호로 삼아 제장들의 

위에 위치하게 하였다.

태조가 일찍이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 2인이 있어 수레의 두 끌채처럼 몸의 두 팔과 같다 하겠노라!

[칭기스칸] 6년(1211년)에 태조를 따라 금을 정벌하였는데 사막을 건너 남진하였다.

금 임금이 그 장수 독길사충으로 하여금 군을 거느리고 오사보를 쌓게 하여 이로써 우리를 핍박하고자 하였다.

무칼리가 기습하여 깨트리니 독길사충은 달아났고 금 장수 곽보옥은 투항하여 왔다.

태조를 따라 서경(대동)과 더불어 창주, 환주, 무주 등의 주를 함락하였다.

금군이 40만이라 부르며 야호령 북쪽에 진을 쳤는데 무칼리가 진군하여 말하길

「저쪽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쉽게 격파하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크게 소리치며 진을 함락하였고 태조가 여러 군을 지휘하여 계속 전진하게 

하여 대파하였다.

회하보에 이르기까지 추격하였고 또 깨트리니 시체가 100리에 깔렸다.

이 전역으로 금나라의 정예군이 섬멸되었고 그 후에는 마침내 다시 회복할 수가 없게 되었다.

[칭기스칸] 7년(1212년)에 태조를 따라 덕흥부를 공격하였다.

[칭기스칸] 8년(1213년)에 종군하여 자형관에 들어갔고 금군을 오회령에서 깨트리고 탁주와 역주 등의 주를 함락하였다.

이 당시 3로로 금을 정벌하였는데 태조는 예종(톨루이)와 함께 중로가 되었고

무칼리를 따로 보내 익도, 빈주, 체주 등의 주현을 함락하게 하였고, 또 밀주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도륙하게 하였다.

돌아와 패주에 주둔하였는데 사천예와 소발질아가 와서 투항하니 편의종사하여 사천예에게 만호, 소발질아에게 천호를 

제수하였다.

[칭기스칸] 9년(1214년)에 종군하여 중도(북경)을 포위하였는데 금 임금 완안순(선종)이 화친을 청하였다.

태조가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명을 내려 무칼리는 여러 군을 통솔하여 요서 고주를 취하게 하였고, 수장 노종과 김박이 

성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처음에 고주가 사람이 많고 풍요로웠는데 목책의 장수 유흥가가 아군에게 누차 대항하니 무칼리가 영을 내려 능히 유흥가의 

목을 참하여 바친다면 곧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게 해 준다 하였다.

유흥가가 앞장서 나아가 스스로 귀부하니 제장들이 죽이고자 하였는데 무칼리가 말하길

「장사로다! 휘하에 남겨 나를 위해 쓰겠노라!」

(유흥가가) 후에 공을 세우니 태조가 유카라 바하두르(유합라 발도)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칭기스칸의 부대 편성(약 13만명) 및 부하 서열

중국 정사에서의 마지막 [발해인] 기록


요약.

1204년 테무진은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칭기스칸에 즉위한다.

칭기스칸은 기존 부족 중심의 군 동원제에서 피라미드식 천호제를 도입한다.

약 85명의 천호들이 임명되었고 무칼리와 보오르초는 좌우 만호에 임명된다.

칭기스칸은 무칼리와 보오르초를 양팔과 같다며 절대적인 신임을 내보인다.

1211년 마침내 금 침공을 시작한 몽골군은 야호령에서 금 대군을 격파한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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