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 무칼리 열전 3부-요서와 요동을 평정하다! 테무진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칭기스칸의 서열 1위 장군으로 금나라 정벌 총사령관 무칼리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나는 무칼리다! (사준사구)

2부-만호장에 임명되다!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도도아지거푸헝

하르졸(해란주)호오거망굴타이아민고이마혼/와산/제극탑합/공아지르가랑두두니칸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96%B0%E5%85%83%E5%8F%B2/%E5%8D%B7119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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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進圍北京。

金守將奧屯囊率衆二十萬來拒,逆戰破之,斬首八萬餘級。

城中食盡,其裨將完顏習烈、高德玉等殺奧屯囊,推寅達虎爲帥,以城降。

木華黎怒其降遲,欲坑之。

部將石抹也先進曰:

「北京爲遼西重鎮,今坑其衆,後豈有降者乎?」

從之。

承製以寅達虎爲北京守,以吾也而權兵馬都元帥,撫定其地。

又遣高德玉、劉清速窩兒招諭興中府。

同知兀裏卜不從,殺薄速窩兒,德玉走免。

已而城中殺兀裏卜,推石天應爲帥,以城降。

承製授天應爲興中府尹,兼兵馬都提控。

錦州張鯨聚衆十餘萬,殺節度使,自稱臨海郡王,亦來降。

承製以鯨總北京十提控兵,使從脫欒扯兒必南征。

攻略未附州縣。

鯨懷反側,木華黎覺之,以石抹也先監其軍。

鯨稱疾,逗留不進,也先執送行在,誅之。

鯨弟致據錦州叛,陷平、灤、瑞、利、義、懿、廣寧等府州。

木華黎率蒙古不花等討之。

進至紅羅山,其將杜秀迎降,承製以秀爲錦州節度使。

又遣史進道攻廣寧府,拔之。

十一年,致陷興中府。

木華黎使吾也而等先攻溜石山,諭之曰:

「今急攻,賊必赴援,我截其歸路,致可擒也。」

又遣蒙古不花屯永德縣以邀之。

致果遣鯨子東平將騎八千、步兵三萬,援溜石山。

木華黎引兵抵神水縣東,與蒙古不花前後夾擊。

選善射者數千人,令曰:

「賊步兵無甲,疾射之!」

又麾騎兵突陣,賊大敗,陣斬東平及士卒萬三千餘級。

拔開義縣,進圍錦州。

致遣張太平、高益出戰,又敗之,斬首三千餘級。

圍數月,高益縛致出降,伏誅。

廣寧劉炎、懿州田和尚亦來降,木華黎曰:

「此叛賊,不殺之無以懲後。」

遂盡戮其衆。

進拔復州及化城縣,斬完顏衆家奴。

咸平守將蒲鮮萬奴等遁入海島。

遼東、西皆平。

[칭기스칸] 10년(1215년)에, 진(進)하여 북경(北京)을 위(圍)하였다.

금(金) 수장(守將) 오둔낭(奧屯囊)이 20만(萬)을 솔중(率衆)하여 내거(來拒)하였는데, 역전(逆戰)하여 파지(破之)하였고, 

8만여급(餘級)을 참수(斬首)하였다.

성중(城中)이 식진(食盡)하여, 그 비장(裨將) 완안습렬(完顏習烈)과 고덕옥(高德玉) 등(等)이 오둔낭(奧屯囊)을 살(殺)하였고,

인달호(寅達虎)를 추(推)하여 수(帥)로 삼고, 성(城)으로써 항(降)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그 항지(降遲/항복이 늦음)를 노(怒)하여 갱지(坑之)하고자 하였다.

부장(部將) 석말야선(石抹也先)이 진(進)하여 말하길

「북경(北京)은 요서(遼西)의 중진(重鎮)인데, 지금(今) 그 중(衆)을 갱(坑)한다면, 후(後)에 어찌 항자(降者)가 있으리오?」

종지(從之)하였다.

승제(承製)하여 인달호(寅達虎)를 북경수(北京守)로 삼았고, 오야이(吾也而)를 권병마도원수(權兵馬都元帥)로 삼아, 

그 지(地)를 무정(撫定)하게 하였다.

또 고덕옥(高德玉)과 유포속와아(劉清速窩兒/蒲의 오기)를 견(遣)하여 흥중부(興中府)를 초유(招諭)하였다.

동지(同知) 올리복(兀裏卜)이 불종(不從)하였고, 유포속와아(薄速窩兒)를 살(殺)하였고, 고덕옥(德玉)은 주면(走免)하였다.

이이(已而)에 성중(城中)이 올리복(兀裏卜)을 살(殺)하고, 석천응(石天應)을 추(推)하여 수(帥)로 삼고, 성(城)으로써 

항(降)하였다.

승제(承製)하여 석천응(天應)을 수(授)하여 흥중부윤(興中府尹) 겸(兼)하여 병마도제공(兵馬都提控)으로 삼았다.

금주(錦州)의 장경(張鯨)이 중(衆) 10여만(萬)을 취(聚)하여, 절도사(節度使)를 살(殺)하고, 자칭(自稱) 임해군왕(臨海郡王)이라

하고는, 역시(亦) 내항(來降)하였다.

승제(承製)하여 경총북경(鯨總北京) 십제공병(十提控兵)으로 삼았고, 탈란차아필(脫欒扯兒必)을 종(從)하여 남정(南征)하여, 

미부(未附)한 주현(州縣)을 공략(攻略)하게 하였다.

장경(鯨)이 반측(反側/두 가지 마음을 품고 다른 길로 감)을 회(懷)하니, 목화려(木華黎)가 각지(覺之)하였고, 

석말야선(石抹也先)으로써 그 군(軍)을 감(監)하게 하였다.

장경(鯨)이 칭질(稱疾)하더니, 두류(逗留/한 곳에 오래 머물고 나가지 않음)하며 부진(不進)하니, 석말야선(也先)이 집(執)하여

행재(行在)에 송(送)하니, 주지(誅之)하였다.

장경(鯨)의 제(弟) 장치(致)가 금주(錦州)를 거(據)하여 반(叛)하였고, 평주(平), 난주(灤), 서주(瑞), 이주(利), 의주(義), 

의주(懿), 광녕(廣寧) 등(等)의 부주(府州)를 함(陷)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몽고부화(蒙古不花) 등(等)을 솔(率)하여 토지(討之)하였다.

진(進)하여 홍라산(紅羅山)에 지(至)하였는데, 그 장(將) 두수(杜秀)가 영항(迎降)하였고, 승제(承製)하여 두수(秀)를 

금주절도사(錦州節度使)로 삼았다.

또 사진도(史進道)를 견(遣)하여 광녕부(廣寧府)를 공(攻)하여 발지(拔之)하였다.

[칭기스칸] 11년(1216년)에 장치(致)가 흥중부(興中府)를 함(陷)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오야이(吾也而) 등(等)으로 하여금 유석산(溜石山)을 선공(先攻)하게 하였는데, 유지(諭之)하여 말하길

「지금(今) 급공(急攻)하면, 적(賊)은 필히(必) 부원(赴援)할 것이니, 나는 그 귀로(歸路)를 절(截)하여, 

  장치(致)는 가금(可擒)하리라!」

또 몽고불화(蒙古不花)를 견(遣)하여 영덕현(永德縣)에 둔(屯)하여 이로써 요지(邀之)하였다.

장치(致)과 과연(果) 장경(鯨)의 자(子) 장동평(東平)을 견(遣)하여 기(騎) 8천(千)과 보병(步兵) 3만(萬)을 장(將)하여, 

유석산(溜石山)을 원(援)하게 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인병(引兵)하여 신수현(神水縣) 동(東)을 저(抵)하였고, 몽고부화(蒙古不花)와 더불어 전후(前後)로 

협격(夾擊)하였다.

선사자(善射者) 수천인(數千人)을 선(選)하여, 영(令)하여 말하길

「적(賊) 보병(步兵)은 무갑(無甲)이니, 질사지(疾射之)하라!」

또 기병(騎兵)을 휘(麾)하여 돌진(突陣)하였는데, 적(賊)이 대패(大敗)하였고, 장동평(東平)과 더불어 사졸(士卒) 

만삼천여급(萬三千餘級)을 진참(陣斬)하였다.

개의현(開義縣)을 발(拔)하였고, 금주(錦州)를 진위(進圍)하였다.

장치(致)가 장태평(張太平)과 고익(高益)을 견(遣)하여 출전(出戰)하였는데, 또 패지(敗之)하였고, 삼천여급(三千餘級)을 

참수(斬首)하였다.

수월(數月)을 위(圍)하였는데, 고익(高益)이 장치(致)를 박(縛)하여 출항(出降)하니, 복주(伏誅)하였다.

광녕(廣寧)의 유엄(劉炎)과 의주(懿州)의 전화상(田和尚)이 역시(亦) 내항(來降)하였는데, 목화려(木華黎)가 말하길

「이 반적(叛賊)은, 불살지무(不殺之無)하여 이로써 징후(懲後/뒷날의 사람들을 경계함)하겠노라!」

마침내 그 중(衆)을 진륙(盡戮)하였다.

진(進)하여 부주(復州)와 더불어 화성현(化城縣)을 발(拔)하였고, 완안중가노(完顏衆家奴)를 참(斬)하였다.

함평(咸平) 수장(守將) 포선만노(蒲鮮萬奴) 등(等)이 해도(海島)에 둔입(遁入)하였다.

요동(遼東)과 요서(西)가 모두 평(平)하였다.











[칭기스칸] 10년(1215년)에 진군하여 북경(요서 대정)을 포위하였다.

금 수장 오둔낭이 20만 무리를 인솔하여 대항하여 왔는데 반격하여 격파하였고 8만 여급을 참수하였다.

성안에서 식량이 떨어지자 그 비장 완안습렬과 고덕옥 등이 오둔낭을 살해하여 인달호를 추대하여 원수로 삼고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무칼리가 그 항복이 늦은 것에 노하였고 갱살하고자 하였다.

부장 석말야선이 나와 말하길

「북경은 요서의 중진인데 지금 그 무리를 갱살한다면 후에 어찌 투항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편의종사하여 인달호를 북경수로 삼았고 우야르(오야이)를 권병마도원수로 삼아 그 땅을 안정시키게 하였다.

또 고덕옥과 유포속와아를 보내 흥중부를 초유하게 하였다.

동지 올리복이 따르지 않았고 유포속와아를 살해하였고 고덕옥은 달아나 면하였다.

얼마 안 있어 성안에서 올리복을 살해하고 석천응을 추대하여 원수로 삼고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편의종사하여 석천응을 흥중부윤 겸 병마도제공에 제수하였다.

금주의 장경이 무리 10여만을 모아 절도사를 살해하고 임해군왕이라 자칭하였는데 또한 항복하여 왔다.

편의종사하여 경총북경 십제공병으로 삼았고 톨론 체르비(탈란 차아필)을 따라 남정하여 귀부하지 않은 주현을 공략하게 하였다.

장경이 두 마음을 품었는데 무칼리가 깨닫고는 석말야선으로 그 군을 감독하게 하였다.

장경이 병을 칭하더니 한 곳에 오래 머물고 나가지 않으니 석말야선이 사로잡아 행재에 보냈고 주살하였다.

장경의 동생 장치가 금주를 근거하여 배반하였고 평주, 난주, 서주, 이주, 의주(義), 의주(懿), 광녕 등의 부와 주를 함락하였다.

무칼리가 몽골부카(몽고부화) 등을 인솔하여 토벌하였다.

진군하여 홍라산에 이르렀는데 그 장수 두수가 맞이하여 항복하였고 편의종사하여 두수를 금주절도사로 삼았다.

또 사진도를 보내 광녕부를 공격하여 함락하게 하였다.

[칭기스칸] 11년(1216년)에 장치가 흥중부를 함락하였다.

무칼리가 우야르(오야이) 등으로 하여금 유석산을 먼저 공격하게 하였는데 깨우쳐 말하길

「지금 급히 공격한다면 반드시 적의 구원군이 이를 것이니 내가 그 퇴로를 끊는다면 가히 장치를 사로잡으리라!」

또 몽골부카(몽고불화)를 보내 영덕현에 주둔하여 요격하게 하였다.

장치가 과연 장경의 아들 장동평을 보내 기병 8천과 보병 3만을 거느리고 유석산을 구원하게 하였다.

무칼리가 군을 인솔하여 신수현 동쪽을 막고 몽골부카와 더불어 앞뒤로 협공하였다.

활을 잘 쏘는 자 수천명을 선발하여 영을 내려 말하길

「적 보병은 갑옷이 없으니 급히 쏘도록 하라!」

또 기병을 지휘하여 돌진하여 적을 대파하였고 장동평과 더불어 사졸 1만 3천 여급을 진중에서 참수하였다.

개의현을 함락하였고 진군하여 금주를 포위하였다.

장치가 장태평과 고익을 보내 출전하였는데 또 격파하였고 3천 여급을 참수하였다.

수개월동안 포위하였는데 고익이 장치를 포박하여 성을 나와 투항하니 주살하였다.

광녕의 유엄과 의주의 전화상이 또한 항복하여 왔는데 무칼리가 말하길

「이 반적은 모조리 죽여 이로써 뒷날의 사람들에게 경계하겠노라!」

마침내 그 무리를 모조리 도륙하였다.

진군하여 부주와 더불어 화성현을 함락하였고 완안중가노를 참하였다.

함평 수장 포선만노 등이 해도로 달아나 들어갔다.

요동과 요서가 모두 평정되었다.


요약.

1215년~1216년 무칼리는 요동과 요서를 정벌한다.

무칼리는 한족/거란/여진족 장수들이 투항하면 편의종사를 행사하여 몽골의 장수에 임명한다.

그러나 장치나 포선만노처럼 투항했다가 배반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무칼리는 두 번 용서하지 않고 장치를 죽이고 투항한 자들을 모조리 도륙하였다.


-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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