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칭기스칸의 서열 1위 장군으로 금나라 정벌 총사령관 무칼리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인물 열전>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 후르한, 푸차 군다이
잉굴다이, 어르더니 밬시, 양구리, 보르진, 특금, 마심, 캉카라, 도르곤, 도도, 아지거, 푸헝
하르졸(해란주), 호오거, 망굴타이, 아민, 고이마혼/와산/제극탑합/공아, 지르가랑, 두두, 니칸
한세충, 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 고구, 송강, 장방창, 황잠선, 묘부(유정언), 진회
송서
원문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96%B0%E5%85%83%E5%8F%B2/%E5%8D%B7119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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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年春,覲太祖於土拉河。
秋八月,詔封太師、國王、都行省承製行事。
木華黎在金人境,金人咸呼爲國王。
太祖聞之曰:
「此喜兆也。」
至是遂封國王,賜誓券、黃金印曰:
「子孫傳國,世世不絕。」
以汪古特萬人,兀魯特四千人爲木華黎麾下親軍。
亦乞剌思人二千,孛徒古兒幹統之;
忙兀特人一千,木勒格哈兒札統之;
翁吉剌特人三千,阿勒赤諾延統之;
札剌亦兒人二千,木華黎弟帶孫統之;
又契丹、女真兵,吾也而與蒙古不花統之。
皆受木華黎節制。
諭曰:
「太行之北,朕自經略;太行以南,卿其勉之。」
賜大駕所建九斿大旗,仍諭諸將曰:
「木華黎建此旗以號令請將,猶朕之號令也。」
乃建行省於中都,以略中原。
進拔遂城縣及蠡州。
蠡州力屈始降,大將石抹也先攻城,中炮死,木華黎欲屠之。
蔚州人趙瑨從軍,爲署百戶,泣請曰:
「母與兄在城中,乞以身贖一城之命。」
木華黎義而免之。
冬,攻拔大名府,復定益都、淄、登、菜、濰、密等州縣。
十三年,自西京逾大和嶺入河東,攻太原、忻、代、澤、潞、汾、霍等府州,悉降之。
遂拔平陽府,以拓拔按札兒統蒙古軍守之,又以義州監軍李延楨之弟守忠權河東南路元帥府事。
十四年,命蕭勃迭兒等攻岢嵐州火山軍,谷裏夾打攻石、隰、絳三州,皆拔之。
十五年,木華黎以河東已下,復北徇燕、趙,至滿城縣。
使蒙古不花將輕騎三千出倒馬關,遇金將武仙遣葛鐵槍攻台州,不花敗之,武仙以真定降,承製以仙權知河北西路兵馬事。
史天倪進言曰:
「今中原粗定,而兵猶抄掠,非正者弔民伐罪之事也。」
木華黎曰:
「善。」
下令禁剽掠,所獲老稚皆縱還鄉里,軍中肅然,民大悅。
進至滏陽,金邢州守將武貴迎降。
遣蒙古不花分兵略定懷、盂等州。
木華黎自以輕騎至濟南府,嚴實籍所隸相、魏、磁、等州戶三十萬詣軍門降。
時金兵屯黃陵岡,號二十萬,遣步卒二萬來襲。
木華黎以五百人擊走之,遂進薄黃陵岡。
金兵陣河南,示以必死。
木華黎令騎卒下馬,以短兵接戰,大敗之,溺死者衆。
復北攻衛州,嚴實率所部先登拔之。
又拔單州,圍東平府。
承製以實權山東西路行省事,戒之曰:
「東平糧盡,其將必棄城走,汝即入城安輯之,鎮忽暴苦郡縣。」
留梭魯忽禿以蒙古兵三千守之。
[칭기스칸] 12년(1217년) 춘(春)에, 태조(太祖)를 토랍하(土拉河)에서 근(覲)하였다.
추(秋) 8월에, 조(詔)하여 태사(太師), 국왕(國王), 도행성승제행사(都行省承製行事)로 봉(封)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금인(金人)의 경(境)에 재(在)하였는데, 금인(金人)이 함평(咸呼/모두 부름)하여 국왕(國王)이라 하였다.
태조(太祖)가 문지(聞之)하더니 말하길
「이는 희조(喜兆/좋은 조짐)로다!」
이에 이르러 마침내 국왕(國王)에 봉(封)하였고, 서권(誓券)과 황금인(黃金印)을 사(賜)하며 말하길
「자손(子孫)이 전국(傳國)하여, 세세불절(世世不絕)하라!」
왕고특(汪古特) 만인(萬人)과 올로특(兀魯特) 사천인(四千人)으로써 목화려(木華黎) 휘하(麾下) 친군(親軍)으로 삼았다.
역걸랄사인(亦乞剌思人) 2천(千)은, 패도(孛徒) 고아간(古兒幹)이 통지(統之)하였고, 망올특인忙兀特人) 1천(千)은,
목륵격합아찰(木勒格哈兒札)이 통지(統之)하였고, 옹길라특인(翁吉剌特人) 3천(千)은, 아륵적난연(阿勒赤諾延)이
통지(統之)하였고,
찰랄역아인(札剌亦兒人) 2천(千)은, 목화려(木華黎)의 제(弟) 대손(帶孫)이 통지(統之)하였다.
또 글단(契丹)과 여진병(女真兵)은 오야이(吾也而)와 몽고부화(蒙古不花)가 통지(統之)하였다.
모두 목화려(木華黎)의 절제(節制)를 수(受)하게 하였다.
유(諭)하여 말하길
「태행(太行)의 북(北)은, 짐(朕)이 스스로 경략(經略)하겠노라!
태행(太行) 이남(以南)은, 경(卿)이 그 면지(勉之)하라!」
대가(大駕)를 사(賜)하였고 구유대기(九斿大旗)를 소건(所建)하였으며, 이에 제장(諸將)에게 유(諭)하여 말하길
「목화려(木華黎)가 이 기(旗)를 건(建)하여 이로써 제장(請將/諸의 오기)을 호령(號令)함은,
마땅히 짐(朕)의 호령(號令)이니라!」
곧 중도(中都)에 행성(行省)을 건(建)하여, 이로써 중원(中原)을 략(略)하였다.
진(進)하여 수성현(遂城縣)과 더불어 여주(蠡州)를 발(拔)하였다.
여주(蠡州)가 역굴(力屈/힘이 다함)하니 비로소 항(降)하였는데, 대장(大將) 석말야선(石抹也先)이 공성(攻城)하다,
중포(中炮)하여 사(死)하였고, 목화려(木華黎)가 도지(屠之)하고자 하였다.
울주인(蔚州人) 조진(趙瑨)이 종군(從軍)하여, 서백호(署百戶)로 삼았는데, 읍청(泣請)하며 말하길
「모(母)와 더불어 형(兄)이 성중(城中)에 재(在)하니, 걸(乞)하건대 신(身)으로써 일성(一城)의 명(命)을 속(贖)하게 하소서!」
목화려(木華黎)가 의(義)하여 면지(免之)하였다.
동(冬)에, 대명부(大名府)를 공발(攻拔)하였고, 익도(益都), 치주(淄), 등주(登), 채주(菜), 유주(濰), 밀주(密) 등(等)의
주현(州縣)을 복정(復定)하였다.
[칭기스칸] 13년(1218년)에, 서경(西京)으로부터 대화령(大和嶺)을 유(逾)하여 하동(河東)에 입(入)하였고, 태원(太原),
흔주(忻), 대주(代), 택주(澤), 로주(潞), 분주(汾), 곽주(霍) 등(等)의 부주(府州)를 공(攻)하였고, 실항지(悉降之)하였다.
마침내 평양부(平陽府)를 발(拔)하였고, 탁발안찰아(拓拔按札兒)로써 몽고군(蒙古軍)을 통(統)하여 수지(守之)하였고,
또 의주(義州) 감군(監軍) 이연정(李延楨)의 제(弟) 이수충(守忠)으로써 권하동남로(權河東南路) 원수부사(元帥府事)로 삼았다.
[칭기스칸] 14년(1219년)에, 명(命)하여 소발질아(蕭勃迭兒) 등(等)은 가람주(岢嵐州) 화산군(火山軍)을 공(攻)하게 하였고,
곡리협타(谷裏夾打)는 석주(石), 습주(隰), 강주(絳) 3주(州)를 공(攻)하게 하여, 모두 발지(拔之)하였다.
[칭기스칸] 15년(1220년)에, 목화려(木華黎)가 하동(河東)이 이하(已下)함으로써, 다시 연주(燕)와 조주(趙)를 북순(北徇)하였고,
만성현(滿城縣)에 지(至)하였다.
몽고불화(蒙古不花)로 하여금 경기(輕騎) 3천(千)을 장(將)하여 도마관(倒馬關)을 출(出)하게 하였는데, 금장(金將)
무선(武仙)이 견(遣)한 갈철창(葛鐵槍)과 우(遇)하여 태주(台州)를 공(攻)하였는데, 불화(不花)가 패지(敗之)하였고,
무선(武仙)이 진정(真定)으로써 항(降)하였고, 승제(承製)하여 무선(仙)을 권지하북서로병마사(權知河北西路兵馬事)로 삼았다.
사천예(史天倪)가 진언(進言)하여 말하길
「지금(今) 중원(中原)이 조정(粗定/대략 평정됨)하였는데, 그러나 병(兵)은 오히려 초략(抄掠/약탈함)하오니,
왕자(正者/王의 오기)는 조민벌죄(弔民伐罪/백성을 위로하고 죄를 벌줌)의 사(事)가 아니오이다!」
목화려(木華黎)가 말하길
「선(善)하다!」
하령(下令)하여 표략(剽掠)을 금(禁)하였고, 소획(所獲)한 노치(老稚/노인과 어린이)는 모두 향리(鄉里)로
종환(縱還/풀어줘 돌아가게 함)하였고, 군중(軍中)이 숙연(肅然/삼가고 두려워함)하였고, 민(民)이 대열(大悅)하였다.
진(進)하여 부양(滏陽)에 지(至)하였는데, 금(金) 형주(邢州) 수장(守將) 무귀(武貴)가 영항(迎降)하였다.
몽고불화(蒙古不花)를 견(遣)하여 분병(分兵)하고 회주(懷)와 우주(盂) 등(等)의 주(州)를 약정(略定)하게 하였다.
목화려(木華黎)는 스스로 경기(輕騎)로써 제남부(濟南府)에 지(至)하였는데, 엄실(嚴實)이 소예(所隸)한 상주(相), 위주(魏),
자주(磁) 등(等)의 주(州) 호(戶) 30만(萬)을 적(籍)하여 군문(軍門)에 예(詣)하여 항(降)하였다.
이때 금병(金兵)이 황릉강(黃陵岡)에 둔(屯)하였는데, 20만(萬)이라 호(號)하였고, 보졸(步卒) 2만(萬)을 견(遣)하여
내습(來襲)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5백인(人)으로써 격주지(擊走之)하였고, 마침내 진(進)하여 황릉강(黃陵岡)을 박(薄)하였다.
금병(金兵)이 하남(河南)에 진(陣)하였는데, 이로써 필사(必死)를 시(示)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기졸(騎卒)로 하여금 하마(下馬)하게 하였고, 이로써 단병접전(短兵接戰)하여, 대패지(大敗之)하였으며,
익사자(溺死者)가 중(衆)하였다.
다시 북(北)진하여 위주(衛州)를 공(攻)하였는데, 엄실(嚴實)이 소부(所部)를 솔(率)하여 선등(先登)하고 발지(拔之)하였다.
또 단주(單州)를 발(拔)하였고, 동평부(東平府)를 위(圍)하였다.
승제(承製)하여 엄실(實)을 권산동서로행성사(權山東西路行省事)로 삼고는, 계지(戒之)하여 말하길
「동평(東平)이 양진(糧盡)하니, 그 장(將)이 필(必)히 기성(棄城)하고 주(走)할 것이니,
너는 즉시(即) 입성(入城)하여 안집지(安輯之)하고, 진(鎮)하여 군현(郡縣)을 폭고(暴苦/난폭하게 욕보임)하지 말라!」
사로홀독(梭魯忽禿)을 유(留)하여 몽고병(蒙古兵) 3천(千)으로써 수지(守之)하였다.
[칭기스칸] 12년(1217년) 봄에 태조를 토라강(토랍하)에서 알현하였다.
가을 8월에 조서를 내려 태사, 국왕(무양), 도행성 승제행사로 봉하였다.
무칼리가 금나라의 경계에 있었는데 금나라 사람들이 모두 국왕이라 불렀다.
태조가 듣더니 말하길
「이는 좋은 징조로다!」
이에 이르러 마침내 국왕에 봉하였고 서권과 황금인을 하사하며 말하길
「자손이 나라를 전하여 대대로 끊기지 않게 하라!」
웅구트(왕고특) 1만인과 우루우트(올로특) 4천인으로써 무칼리 휘하의 친군으로 삼게 하였다.
이키레스(역걸랄사) 사람 2천은 보투 쿠레겐(패도 고아간)이 통솔하게 하였고, 망쿠트(망올특) 사람 1천은
뭉케 칼자(목륵격 합아찰)가 통솔하게 하였고, 옹기라트(옹길라특) 사람 3천은 알치 노얀(아륵적 난연)이 통솔하게 하였고,
잘라이르(찰랄역아) 사람 2천은 무칼리의 동생 다이순(대손)이 통솔하게 하였다.
또 거란(카라키타이)과 여진(주르체)의 병력은 우야르(오야이)와 몽골부카(몽고부화)가 통솔하게 하였다.
모두 무칼리의 절제를 받도록 하였다.
유지를 내려 말하길
「태행 이북은 짐이 스스로 경략하겠노라!
태행 이남은 경이 힘쓰도록 하라!」
어가를 하사하였고 구유대기(9개의 다리를 지닌 칭기스칸의 군기)를 세우게 하였고 이에 제장들에게 유지를 내려 말하길
「무칼리가 이 기를 세워 이로써 제장들을 호령하는 것은 마땅히 짐의 호령과 같느니라!」
곧 중도(북경)에 행성을 세우고 이로써 중원을 공략하게 하였다.
진군하여 수성현과 더불어 여주를 함락하였다.
여주가 힘이 다하니 비로소 항복하였는데 대장 석말야선이 공성하다가 포에 명중되어 죽으니 무칼리가 도륙하고자 하였다.
울주인 조진이 종군하여 백호 서리로 삼았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청하여 말하길
「모친과 더불어 형이 성중에 있으니 간청하옵건대 이 몸으로 하여금 1 성의 목숨을 속죄하게 해주시옵소서!」
무칼리가 의롭다 하여 면하게 하였다.
겨울에 대명부를 공격하여 함락하였고 익도, 치주, 등주, 채주, 유주, 밀주 등의 주현을 다시 평정하였다.
[칭기스칸] 13년(1218년)에 서경(대정)으로부터 대화령을 경유하여 하동에 들어가
태원부, 흔주, 대주, 택주, 로주, 분주, 곽주 등의 부와 주를 공격하여 모조리 투항시켰다.
마침내 평양부를 함락하였고 타크바르 안자르(탁발 안찰아)로써 몽고군을 통솔하여 지키게 하였고, 또 의주 감군 이연정의
동생 이수충을 권하동남로 원수부사로 삼았다.
[칭기스칸] 14년(1219년)에, 명을 내려 소발질아 등은 가람주 화산군을 공격하게 하였고, 곡리협타는 석주, 습주, 강주 3주를
공격하게 하여 모두 함락하게 하였다.
[칭기스칸] 15년(1220년)에 무칼리가 하동이 이미 평정됨으로써 다시 북진하여 연주와 조주를 순행하여 만성현에 이르렀다.
몽골부카(몽고불화)로 하여금 경기병 3천을 거느리고 도마관을 나가게 하였는데
금 장수 무선이 보낸 갈철창과 조우하여 태주를 공격하여 몽골부카가 깨트렸고 무선은 진정을 바치고 항복하니 편의종사하여
무선을 권지 하북서로병마사로 삼았다.
사천예가 나와 말하길
「지금 중원이 대략 평정되었는데도 군사들은 오히려 약탈하오니
왕께옵서 백성을 위로하고 죄를 벌주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옵니다.」
무칼리가 말하길
「훌륭하다!」
영을 내려 약탈을 금지하였고 사로잡은 노인과 어린이들은 모두 풀어줘 향리로 돌아가게 하니 군중이 삼가고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진군하여 부양에 이르렀는데 금 형주 수장 무귀가 맞이하여 항복하였다.
몽골부카를 보내 병을 나누어 회주와 우주 등의 주를 공략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무칼리가 스스로 경기병을 이끌고 제남부에 이르렀는데 엄실이 예속된 상주, 자주 등의 30만 호를 장부에 적어 군문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이때 금군이 황릉강에 주둔하였는데 20만이라 부르며 보졸 2만 명을 보내 기습하여 왔다.
무칼리가 5백인으로써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고 마침내 진군하여 황릉강을 육박하였다.
금군이 강 남쪽에 진을 치고는 이로써 반드시 죽고자 함을 내보였다.
무칼리가 기병들로 하여금 말에서 내리게 하여 이로써 단병접전하여 대파하였는데 익사자가 많았다.
다시 북진하여 위주를 공격하였는데 엄실이 소속 부대를 인솔하여 먼저 올라가 함락하였다.
또 단주를 함락하였고 동평부를 포위하였다.
편의종사하여 엄실을 권산동서로행성사로 삼고는 경계하여 말하길
「동평의 식량이 다하였으니 그 장수가 반드시 성을 버리고 도주할 것이다.
너는 즉시 성에 들어가 안정시키고 진정시켜 군현을 난폭하게 욕보이지 말라!」
소르쿠두(사로홀독)을 남겨 몽고병 3천으로써 지키게 하였다.
요약.
1217년 무칼리는 토라강에서 칭기스칸을 알현하는데 칭기스칸은 무칼리를 신하 중 최초로 국왕에 봉하고
2만 몽골군과 2만 거란족+한족군을 주어 금 정벌을 지속하게 한다.
또한 신하 중 최초로 칸만이 세울 수 있는 구유백기를 하사하며 모든 신하들은 무칼리의 명을 자신의 명과 같이 받들라 명한다.
이후 칭기스칸은 나머지 모든 몽골군을 이끌고 호라즘을 정벌하러 떠난다.
이후 칭기스칸과 무칼리는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본격적인 금 공략에 나선 무칼리는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펴 투항한 금의 장수들을 중용한다.
또한 투항한 사천예의 간언을 받아들여 학살과 약탈을 금지한다. 이에 금 관리들의 투항이 이어진다.
한편 1219년에는 일족 카친과 자라를 고려에 보내 달아난 거란 잔당을 섬멸하게 한다.
-5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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