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칭기스칸의 서열 1위 장군으로 금나라 정벌 총사령관 무칼리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인물 열전>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 후르한, 푸차 군다이
잉굴다이, 어르더니 밬시, 양구리, 보르진, 특금, 마심, 캉카라, 도르곤, 도도, 아지거, 푸헝
하르졸(해란주), 호오거, 망굴타이, 아민, 고이마혼/와산/제극탑합/공아, 지르가랑, 두두, 니칸
한세충, 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 고구, 송강, 장방창, 황잠선, 묘부(유정언), 진회
송서
원문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96%B0%E5%85%83%E5%8F%B2/%E5%8D%B7119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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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年四月,東平糧盡,其行省蒙古綱、監軍王廷玉率衆趨邳州,梭魯忽禿邀擊之,斬首七千級。
先是,帶孫攻州圭不下。
至是,遣石天應拔之。
宋將石圭來降,承製以珪爲濟、袞、單三州都總管,賚以繡衣、玉帶。
張林來降,承製以林爲行山東東路益都、滄、景、濱、棣等州都元帥。
金將鄭遵亦以棗鄉、蓚縣降,升爲完州,承製以遵爲節度使,行元帥府事。
木華黎遂振旅北還,監國公主遣使來迎,以郊勞之禮待木華黎。
初,木華黎受專征之命,攻拔七十餘城來告捷,且問旋師之期。
太祖諭以盡取金人之地而後返。
使者回報,木華黎問:
「上意何如?」
使者曰:
「惟伸拇指,以獎大王而已。」
木華黎又問:
「果爲吾否?」
使者曰:
「然。」
木華黎太息曰:
「上眷吾如此,吾效死宜矣。」
是年,木華黎由東勝州渡河引兵而西,夏主聞之俱,遣其臣答海監府等宴木華黎於河南,且遣塔海甘卜將兵五萬屬焉。
木華黎乃引兵東入葭州,金將王公佐迎降,以石天應權行臺兵馬都元帥守葭州,而自將攻綏德。
夏主復遣其臣述僕率兵會之。
述僕問木華黎相見之禮,木華黎曰:
「汝見夏主之禮即是也。」
術僕曰:
「未受主命,不敢拜。」
乃引去。
及木華黎進逼延安,術僕始贄馬而拜。
木華黎攻拔馬蹄寨,距延安三十里。
金延安守將合達率兵三萬,陣於城東。
蒙古不花輕騎覘之,馳報曰:
「彼見我兵少,輕我,當佯敗以誘之,可以取勝。」
從之。
夜半,將士亟進,伏於城東十五里兩谷中。
次日,蒙古不花望見金人,即棄旗鼓佯走。
金人果追之,伏發,萬矢雨下,金人大敗,斬首七千餘級,獲馬八百匹。
合達走入延安,堅壁不出。
木華黎知城不易拔,乃南徇洛川,拔隰州,獲金將完顏六斤、紇石烈鶴壽、蒲察婁室等。
進至坊州,聞金復取隰州,木華黎遂自丹州渡河,攻隰州,拔之。
獲其守將軒成,以田雄權元帥府事。
又攻拔代州。
斬其守將奧敦醜和尚。
[칭기스칸] 16년(1221년)에 4월에, 동평(東平)이 양진(糧盡)하니, 그 행성(行省) 몽고강(蒙古綱)과 감군(監軍)
왕정옥(王廷玉)이 솔중(率衆)하여 비주(邳州)로 추(趨)하였는데, 사로홀독(梭魯忽禿)이 요격지(邀擊之)하여, 7천급(級)을
참수(斬首)하였다.
선시(先是)에, 대손(帶孫)이 명주(州圭/洺州의 오기)를 공(攻)하였으나 미하(不下)하였다.
이에 이르러, 석천응(石天應)을 견(遣)하여 발지(拔之)하였다.
송장(宋將) 석규(石圭)가 내항(來降)하니, 승제(承製)하여 석규(珪)를 제주(濟), 곤주(袞), 단주(單) 3주(州)의
도총관(都總管)으로 삼았고, 수의(繡衣/수를 놓은 옷)와 옥대(玉帶)로써 뢰(賚)하였다.
장림(張林)이 내항(來降)하니, 승제(承製)하여 장림(林)을 행산동동로(行山東東路) 익도(益都), 창주(滄), 경주(景), 빈주(濱),
체주(棣) 등(等) 주(州)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
금장(金將) 정준(鄭遵) 역시(亦) 조향현(棗鄉)과 수현(蓚縣)으로써 항(降)하니, 승(升)하여 완주(完州)로 삼았고,
승제(承製)하여 정준(遵)을 절도사(節度使)와 행원수부사(行元帥府事)로 삼았다.
목화려(木華黎)가 마침내 진려(振旅/군사를 거둠)하여 북환(北還)하였고, 감국공주(監國公主/칭기스칸의 3녀 알카이 베키)가
견사(遣使)하여 내영(來迎)하였고, 교로지례(郊勞之禮/교외에까지 나와 영접하는 예)로써 목화려(木華黎)를 대(待)하였다.
초(初)에, 목화려(木華黎)가 전정지명(專征之命)을 수(受)하여, 70여성(城)을 공발(攻拔)하여 첩(捷)을 내고(來告)하였는데,
또한 선사(旋師)의 기(期)를 문(問)하였다.
태조(太祖)가 유(諭)하여 금인(金人)의 지(地)를 진취(盡取)함으로써 후반(後返)하게 하였다.
사자(使者)가 회보(回報)하니, 목화려(木華黎)가 문(問)하길
「상의(上意)가 하여(何如)한가?」
사자(使者)가 말하길
「오직 신무(伸拇/엄지손가락을 펼침)하여 지(指/가리킴)하여, 이로써 대왕(大王)을 장(獎/칭찬함)할 뿐이었습니다.」
목화려(木華黎)가 또 문(問)하길
「과연 나를 위한 것이었더냐?」
사자(使者)가 말하길
「그렇습니다.」
목화려(木華黎)가 태식(太息)하며 말하길
「상(上)이 이와 같이 나를 권(眷/보살핌)하니, 나는 효사(效死/사력을 다함)함이 의(宜)할 뿐이노라!」
이해에, 목화려(木華黎)가 동승주(東勝州)를 유(由)하여 도하(渡河)하여 인병(引兵)하고 이서(而西)하였는데, 하주(夏主)가
구(俱)를 문지(聞之)하더니, 그 신(臣) 답해감부(答海監府) 등(等)을 견(遣)하여 목화려(木華黎)를 하남(河南)에서 연(宴)하였고,
또 탑해감복(塔海甘卜)을 견(遣)하여 병(兵) 5만(萬)을 장(將)하여 속(屬)하게 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이에 인병(引兵)하여 동(東)진하여 가주(葭州)에 입(入)하였고, 금장(金將) 왕공좌(王公佐)가
영항(迎降)하였고, 석천응(石天應)으로써 권행대병마도원수(權行臺兵馬都元帥)로 삼아 가주(葭州)를 수(守)하게 하였고,
자장(自將)하여 수덕(綏德)을 공(攻)하였다.
하주(夏主)가 다시 그 신(臣) 술복(述僕)을 견(遣)하여 솔병(率兵)하고 회지(會之)하였다.
술복(述僕)이 목화려(木華黎)에게 상견지례(相見之禮)를 문(問)하였는데, 목화려(木華黎)가 말하길
「네가 하주(夏主)를 현(見)하는 예(禮)가 즉(即) 시(是)하노라!」
술복(術僕)이 말하길
「주명(主命)을 미수(未受)하였으니, 감배(敢拜)하지 못하겠다!」
이에 인거(引去)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진(進)하여 연안(延安)을 핍(逼)함에 이르러, 술복(術僕)이 비로소 지마(贄馬/말을 예물로 바침)하고
배(拜)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마제채(馬蹄寨)를 공발(攻拔)하였는데, 연안(延安)과 거(距)가 30리(里)였다.
금(金) 연안(延安) 수장(守將) 합달(合達)이 병(兵) 3만(萬)을 솔(率)하여, 성동(城東)에 진(陣)하였다.
몽고불화(蒙古不花)가 경기(輕騎)로 첨지(覘之)하였는데, 치보(馳報)하여 말하길
「저쪽이 아병(我兵)의 소(少)를 견(見)하더니, 경아(輕我)하였는데, 마땅히 양패(佯敗/거짓 패한 체함)하여
이로써 유지(誘之)한다면, 가히(可) 이로써 취승(取勝)하리오다!」
종지(從之)하였다.
야반(夜半)에, 장사(將士)가 극진(亟進)하였고, 성동(城東) 14리(里) 양협중(兩谷中)에 복(伏)하였다.
차일(次日)에, 몽고불화(蒙古不花)가 금인(金人)을 망견(望見)하였는데, 즉(即)시 기고(旗鼓)를 기(棄)하고 양주(佯走)하였다.
금인(金人)이 과연(果) 추지(追之)하니, 복발(伏發)하여, 만시(萬矢)가 우하(雨下)하니, 금인(金人)이 대패(大敗)하였고,
7천여급(級)을 참수(斬首)하였고, 마(馬) 8백필(匹)을 획(獲)하였다.
합달(合達)이 주(走)하여 연안(延安)으로 입(入)하더니, 견벽(堅壁)하고 불출(不出)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성(城)의 부이발(不易拔)을 지(知)하더니, 이에 남진(南)하여 낙천(洛川)을 순(徇)하였고, 습주(隰州)를
발(拔)하였으며, 금장(金將) 완안육근(完顏六斤)과 흘석렬학수(紇石烈鶴壽) 및 포찰루실(蒲察婁室) 등(等)을 획(獲)하였다.
진(進)하여 방주(坊州)에 지(至)하였는데, 금(金)이 습주(隰州)를 복취(復取)하였음을 문(聞)하였고,
목화려(木華黎)가 마침내 단주(丹州)로부터 도하(渡河)하여, 습주(隰州)를 공(攻)하였고, 발지(拔之)하였다.
그 수장(守將) 헌성(軒成)을 획(獲)하였고, 전웅(田雄)으로써 권원수부사(權元帥府事)로 삼았다.
또 대주(代州)를 공발(攻拔)하였고, 그 수장(守將) 오둔추화상(奧敦醜和尚)을 참(斬)하였다.
[칭기스칸] 16년(1221년)에 4월에 동평의 식량이 떨어지니 그 행성 몽고강과 감군 왕정옥이 무리를 인솔하여
비주로 달려갔는데 소르쿠두(사로홀독)가 요격하여 7천 여급을 참수하였다.
이에 앞서 다이순(대손)이 명주를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석천응을 보내 함락하게 하였다.
송나라 장수 석규가 항복하여 오니 편의종사하여 석규를 제주, 곤주, 단주 3주의 도총관으로 삼았고, 수를 놓은 의복과 옥대를
주었다.
장림이 항복하여 오니 편의종사하여 장림을 행산동동로 익도, 창주, 경주, 빈주, 체주 등의 주 도원수로 삼았다.
금 장수 정준이 또한 조향현과 수현을 바치고 항복하니 올려 완주로 하였고, 편의종사하여 정준을 절도사와 행원수부사로 삼았다.
무칼리가 마침내 군사를 거둬 북쪽으로 돌아갔고 감국공주(칭기스칸의 3녀 알카이 베키)가 사신을 보내 맞이하여 왔고,
교외에까지 나와 영접하는 예로써 무칼리를 대우하였다.
처음에 무칼리가 전권의 명을 받아 70여 성을 공격하여 함락한 승첩을 고하였는데 또한 회군의 시기를 물었다.
태조가 유지를 내려 금나라 땅을 모조리 취한 후에 돌아가라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무칼리가 묻길
「상의 뜻이 어떠하던가?」
사자가 말하길
「오직 엄지손가락을 펼쳐 가리키며 이로써 대왕을 칭찬할 뿐이었습니다.」
무칼리가 또 묻길
「진실로 나를 위한 것이었더냐?」
「그렇습니다.」
무칼리가 크게 탄식하며 말하길
「상께서 이와 같이 나를 보살피시니 나는 마땅히 사력을 다할 뿐이로다!」
이해에 무칼리가 동승주를 경유하여 강을 건너 서진하였는데 서하 임금이 모두 듣더니 그 신하 답해감부 등을 보내
무칼리를 강 남쪽에서 연회하게 하였고, 또 탑해감복을 보내 병 5만을 거느리고 수행하게 하였다.
무칼리가 이에 군을 이끌고 동진하여 가주에 들어갔는데 금 장수 왕공좌가 맞이하여 항복하였고
석천응을 권행대병마도원수로 삼아 가주를 지키게 하였고 스스로 군을 거느리고 수덕을 공격하였다.
서하 임금이 다시 그 신하 술복을 보내 군을 인솔하여 만나게 하였다.
술복이 무칼리에게 상견지례를 물었는데 무칼리가 말하길
「네가 서하 임금에게 알현하는 예가 곧 옳도다!」
술복이 말하길
「임금의 명령을 받지 못하였으니 감히 절하지 못하겠다!」
이에 군을 이끌고 가버렸다.
무칼리가 진군하여 연안을 핍박함에 이르러 술복이 비로소 말을 예물로 바치고 절하였다.
무칼리가 마제채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는데 연안과 거리가 30리였다.
금 연안 수장 합달이 병 3만을 인솔하여 성 동쪽에 진을 쳤다.
몽골부카(몽고불화)가 경기병으로 염탐하게 하였는데 달려와 보고하여 말하길
「저쪽이 아군이 적은 것을 보더니 우리를 경시하였는데 마땅히 거짓 패한 체하여 이로써 유인한다면 가히 승리를 취하리오다!」
따랐다.
한밤중에 장졸이 급히 진군하여 성 동쪽 14리 양 협곡 사이에 매복하였다.
다음날에 몽골부카가 금나라 사람을 멀리서 발견하더니 즉시 기와 북을 버리고 거짓으로 도주하였다.
금군이 과연 추격하니 매복군이 일어나 화살 1만 개가 비처럼 쏟아지니 금군이 대패하였고 7천 여급을 참수하고 말 800필을
획득하였다.
합달이 도주하여 연안으로 들어가더니 성벽을 견고히 하고는 나오지 않았다.
무칼리가 성이 쉽게 함락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이에 남진하여 낙천을 순행하여 습주를 함락하였고 금장 완안육근, 흘석렬학수,
포찰루실 등을 사로잡았다.
진군하여 방주에 이르렀는데 금이 습주를 다시 취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무칼리가 마침내 단주로부터 강을 건너
습주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그 수장 헌성을 사로잡고 전웅을 권원수부사로 삼았다.
또 대주를 공격하여 함락하였고 그 수장 오둔추화상을 참하였다.
요약.
1221년 금 정벌을 지속하던 무칼리는 대다수의 성들을 함락하고 포용정책을 펴 투항한 장수들과 백성들을 받아들인다.
출병한 지 5년 만에 몽골 초원으로 돌아간 무칼리를 감국공주에 임명되어 몽골을 통치하고 있던 칭기스칸의 3녀
알카이 베키가 영접한다.
무칼리는 금 70여 성을 함락하였다며 칭기스칸에게 가고 싶다며 호라즘에 있던 칭기스칸에게 사신을 파견한다.
칭기스칸은 무칼리를 엄지를 들어 칭찬하며 금을 모조리 함락하라 명한다.
이 말을 들은 무칼리는 탄식을 하며 다시 남진하여 금 정벌을 지속한다.
한편 무칼리는 금 정벌에 복속한 서하군도 참전하라 명한다.
이에 서하 양종(이준욱)은 술복을 사령관으로 파견한다.
무칼리는 술복에게 임금에게 올리는 예로 절하라 명하였으나 술복은 이를 거부하고 회군하여 돌아갔다가 다시 와 절을 올린다.
-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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