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 무칼리 열전 6부-태조의 풍모를 지니고 충신으로 죽다!(연재완료) 테무진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칭기스칸의 서열 1위 장군으로 금나라 정벌 총사령관 무칼리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나는 무칼리다! (사준사구)

2부-만호장에 임명되다!

3부-요서와 요동을 평정하다!

4부-국왕으로 중원공략 총사령관이 되다!

5부-칸이시여! 돌아가도 되겠나이까?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도도아지거푸헝

하르졸(해란주)호오거망굴타이아민고이마혼/와산/제극탑합/공아지르가랑두두니칸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96%B0%E5%85%83%E5%8F%B2/%E5%8D%B7119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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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年,命蒙古不花引兵出秦隴,以張聲勢。

自率大兵道雲中,攻拔孟州四蹄寨、晉陽縣義和寨,進拔三清巖及霍州山堡。

金將胡天作拒守青龍堡,金主覆命其將張開、郭文振等援之,次彈平寨東三十里不敢進。

其裨將定住、提控王和執胡天作以降,遷天作於平陽。

其後定住譖天作於郡王帶孫殺之。

八月,有星晝見,術士喬靜真曰:

「觀天象,未可進兵。」

木華黎曰:

「上命我平定中原,今關中、河南均未下,若因天象而不進兵,天下何時定耶?」

冬十月,連拔滎州胡平堡、吉州牛心寨,遂進攻河中府。

金將侯小叔嬰城固守,會小叔出迎樞密院官,大軍乘之而入,小叔奔中條山。

木華黎召石天應曰:

「河中吾要害地,非君不能守。」

乃以天應權河東甫北路關西陝右行臺,平陽守將李守忠、太原守將攸哈喇拔都、隰州守將田雄,並受天應節制。

天應造浮橋以濟師,木華黎乃渡河,拔同州、蒲城縣,徑趨長安。

金將合達擁兵二十萬堅守不下,命兀胡、太不花與合達相持。

又遣按赤將兵塞潼關,而自率大軍酉圍風翔府,月餘又不下。

木華黎謂諸將曰:

「吾奉命征討,不數年取遼東、西及山東、河北,不勞餘力。

  前攻延安,今攻風翔,皆不克,豈吾命當盡耶?」

乃解圍循渭水而南,遣蒙古不花出牛嶺關,徇鳳州。

時侯小叔伺我軍既西,率輕騎襲河中府,石天應戰死。

小叔入城,即燒燬浮橋,以斷援兵。

會先鋒元帥按察兒自平陽赴援,急攻之,復克河中。

木華黎乃以天應子斡可爲河中守將,仍督造浮橋。

十八年,師還,浮橋未就。

木華黎顧謂諸將曰:

「橋工末畢,豈可坐待。」

復攻拔河西十餘堡。

三月,渡河至聞喜縣,疾篤,召其弟帶孫,謂曰:

「我爲國家佐成大業,東征西討垂四十年,所慨者南京未下耳!

  汝其勉之。」

卒,年五十四。

後太祖親攻鳳翔,謂諸將曰:

「使木華黎在,朕不至此矣。」

至治元年,贈體仁開國輔世佐命功臣太師、開府儀同三司、上柱國、魯國王,諡忠武。

子孛魯。

史臣曰:

「木華黎經略中原,收金之降將而用之。

  知人善任,有太祖之風,其爲功臣第一宜哉!

  子孫繩繩,世挺賢哲,自古功臣之胄,永保富貴者有之矣,未有將相名臣如札剌兒氏之盛者也。」

[칭기스칸] 17년(1222년)에, 명(命)하여 몽고불화(蒙古不花)는 인병(引兵)하여 진롱(秦隴)을 출(出)하여 이로써 

성세(聲勢)를 장(張)하게 하였다.

대병(大兵)을 자솔(自率)하여 운중(雲中)으로 도(道)하였고, 맹주(孟州) 사제채(四蹄寨)와 진양현(晉陽縣) 

의화채(義和寨)를 공발(攻拔)하였고, 진(進)하여 삼청암(三清巖)과 더불어 곽주(霍州)의 산보(山堡)를 발(拔)하였다.

금장(金將) 호천작(胡天作)이 청룡보(青龍堡)를 거수(拒守)하였는데, 금주(金主)가 다시 그 장(將) 장개(張開)와 

곽문진(郭文振) 등(等)에게 명(命)하여 원지(援之)하였는데, 탄평채(彈平寨) 동(東) 30리(里)에 차(次)하면서 

감진(敢進)하지 못하였다.

그 비장(裨將) 정주(定住)와 제공왕화(提控王和)가 호천작(胡天作)을 집(執)하여 이로써 항(降)하였는데,

호천작(天作)을 평양(平陽)에 천(遷)하였다.

그 후(後) 정주(定住)가 호천작(天作)을 군왕(郡王) 대손(帶孫)에게 참(譖)하여 살지(殺之)하였다.

8월에, 성주현(星晝見/별이 낮에 보임)이 있었는데, 술사(術士) 교정진(喬靜真)이 말하길

「천상(天象)을 관(觀)하니, 진병(進兵)함은 옳지 못합니다.」

목화려(木華黎)가 말하길

「상(上)이 명아(命我)하여 중원(中原)을 평정(平定)하게 하였는데, 지금(今) 관중(關中)과 하남(河南)은 모두 

  미하(未下)하였는데, 만약(若) 천상(天象)으로 인(因)하여 진병(進兵)하지 않는다면, 천하(天下)가 하시(何時)에 

  정(定)하겠느냐?」

동(冬) 10월에, 형주(滎州) 호평보(胡平堡)와 길주(吉州) 우심채(牛心寨)를 연발(連拔)하였고, 마침내 하중부(河中府)를

진공(進攻)하였다.

금장(金將) 후소숙(侯小叔)이 영성(嬰城/농성하여 굳게 지킴)하여 고수(固守)하였는데, 때마침 후소숙(小叔)이 

출(出)하여 추밀원관(樞密院官)을 영(迎)하였는데, 대군(大軍)이 승지(乘之)하여 입(入)하였고, 후소숙(小叔)은 

중조산(中條山)으로 분(奔)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석천응(石天應)을 소(召)하여 말하길

「하중(河中)은 나의 요해지(要害地)로, 군(君)이 아니면 수(守)를 불능(不能)하다!」

이에 석천응(天應)으로써 권하동보북로(權河東甫北路) 관서섬우행대(關西陝右行臺)로 삼았고,

평양(平陽) 수장(守將) 이수충(李守忠)과 태원(太原) 수장(守將) 유합라(攸哈喇) 발도(拔都) 및 습주(隰州) 수장(守將) 

전웅(田雄)을 아울러 석천응(天應)의 절제(節制)를 수(受)하게 하였다.

석천응(天應)이 부교(浮橋)를 조(造)하여 이로써 제사(濟師)하였고, 목화려(木華黎)가 이에 도하(渡河)하여,

동주(同州)와 포성현(蒲城縣)을 발(拔)하였고, 장안(長安)으로 경추(徑趨/지름길로 달려감)하였다.

금장(金將) 합달(合達)이 병(兵) 20만(萬)을 옹(擁)하여 견수(堅守)하니 미하(不下)하였고, 명(命)하여 올호(兀胡)와 

태부화(太不花)는 합달(合達)과 더불어 상지(相持)하게 하였다.

또 안적(按赤)을 견(遣)하여 장병(將兵)하고 동관(潼關)을 새(塞/보루를 쌓음)하게 하였고, 대군(大軍)을 자솔(自率)하여

서(酉/西의 오기)진하여 풍상부(風翔府)를 위(圍)하였는데, 월여(月餘/한 달 남짓) 또 미하(不下)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제장(諸將)에게 위(謂)하여 말하길

「내가 봉명(奉命)하여 정토(征討)하였는데, 수년(數年)도 되지 않아 요동(遼東) 및 요서(西)와 더불어 

  산동(山東)과 하북(河北)을 취(取)하였는데, 여력(餘力)을 불로(不勞/힘쓰지 아니함)하였다.

  전(前)에 연안(延安)을 공(攻)하였고, 지금(今) 풍상(風翔)을 공(攻)하였는데, 모두 불극(不克)하니,

  어찌 내가 명(命)하여 당진(當盡)하지 않으리?」

이에 해위(解圍)하고 위수(渭水)를 순(循)하며 이남(而南)하였고, 몽고불화(蒙古不花)를 견(遣)하여 

우령관(牛嶺關)을 출(出)하게 하여, 봉주(鳳州)를 순(徇)하게 하였다.

이때 후소숙(侯小叔)이 아군(我軍)을 사(伺/엿봄)하였는데 이윽고 서진(西)하자 경기(輕騎)를 솔(率)하여 

하중부(河中府)를 습(襲)하니, 석천응(石天應)이 전사(戰死)하였다.

후소숙(小叔)이 입성(入城)하여, 즉(即) 부교(浮橋)를 소훼(燒燬/불사름)하였고, 이로써 원병(援兵)을 단(斷)하였다.

때마침 선봉(先鋒) 원수(元帥) 안찰아(按察兒)가 평양(平陽)으로부터 부원(赴援)하여, 급공지(急攻之)하여, 

하중(河中)을 복극(復克)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이에 석천응(天應)의 자(子) 석알가(斡可)를 하중수장(河中守將)으로 삼았고,

곧 부교(浮橋)를 독조(督造)하였다.

[칭기스칸] 18년(1223년)에, 사환(師還)하였는데 부교(浮橋)가 미취(未就)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제장(諸將)을 고위(顧謂)하며 말하길

「교공(橋工)이 미필(末畢)하였으니, 어찌 좌대(坐待)함이 옳겠는가?」

다시 하서(河西) 10여보(堡)를 공발(攻拔)하였다.

3월에, 도하(渡河)하여 문희현(聞喜縣)에 지(至)하였는데, 질독(疾篤)하였고, 그 제(弟) 대손(帶孫)을 소(召)하여, 

위(謂)하여 말하길

「내가 국가(國家)를 위하여 대업(大業)을 좌성(佐成)하였고, 동정서토(東征西討)하여 40년(年)을 

  수(垂/힘을 기울임)하였는데, 소개(所慨/슬퍼하는 바)하는 것은 남경(南京/개봉)이 미하(未下)할 뿐이로다!

  네가 그를 면지(勉之)하라!」

졸(卒)하니, 연(年) 54였다.

후(後)에 태조(太祖)가 봉상(鳳翔)을 친공(親攻)하였는데, 제장(諸將)에게 위(謂)하여 말하길

「만일 목화려(木華黎)가 재(在)하였다면, 짐(朕)이 이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로다!」

지치(至治/원 5대 황제 영종의 #1연호) 원년(元年/1321년)에, 

체인개국보세좌명공신태사(體仁開國輔世佐命功臣太師),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노국왕(魯國王)을 증(贈)하였고,

시(諡)는 충무(忠武)였다.

자(子)는 패로(孛魯)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목화려(木華黎)가 중원(中原)을 경략(經略)하였는데, 금(金)의 항장(降將)을 수(收)하여 용지(用之)하였다.

  지인(知人)하여 선임(善任)하니, 태조(太祖)의 풍(風)이 있었고, 그를 공신(功臣)의 제일(第一)로 삼음이 마땅하였노라!

  자손(子孫)이 승승(繩繩/대가 끊어지지 않음)하여, 대대로 특출나게 현철(賢哲/어질고 슬기로움)하였고,

  자고(自古)로 공신(功臣)의 주(胄/자손)로, 부귀(富貴)를 영보(永保)한 자(者)가 있었던가?

  장상명신(將相名臣)으로 찰랄아씨(札剌兒氏)와 같이 성한(盛) 자(者)는 미유(未有)하였노라!」





[칭기스칸] 17년(1222년)에 명을 내려 몽골부카(몽고불화)는 군을 인솔하여 진롱을 나가 이로써 성세를 펼치게 하였다.

스스로 대군을 인솔하여 운중으로 진군하였고 맹주 사제채와 진양현 의화채를 공격하여 함락하였고,

진군하여 삼청암과 더불어 곽주의 산보를 함락하였다.

금 장수 호천작이 청룡보를 막고 지켰는데 금 임금이 다시 그 장수 장개와 곽문진 등에게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고,

탄평채 동쪽 30리에 주둔하면서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그 비장 정주와 제공왕화가 호천작을 사로잡아 이로써 항복하였는데 호천작을 평양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후 정주가 호천작을 군왕 다이순(대손)에게 참소하여 살해하게 하였다.

8월에 별이 낮에 보였는데 술사 교정진이 말하길

「천문을 관찰하니 진군함은 옳지 못합니다.」

무칼리가 말하길

「상께서 나에게 명하여 중원을 평정하게 하였는데 지금 관중과 하남이 모두 함락되지 못하였다.

  만약 천문으로 인하여 진군하지 않는다면 천하가 어느 때에 평정되겠느냐?」

겨울 10월에 형주 호평보와 길주 우심채를 연달아 함락하였고 마침내 진군하여 하중부를 공격하였다.

금 장수 후소숙이 농성하며 굳게 지켰는데 때마침 후소숙이 출성하여 추밀원관을 맞이하였는데 대군이 틈을 타 

들어가니 후소숙이 중조산으로 달아났다.

무칼리가 석천응을 소환하여 말하길

「하중은 나의 요해처로 그대가 아니면 지킬 수가 없다!」

이에 석천응을 권하동보북로 관서섬우행대로 삼았고 평양 수장 이수충과 태원 수장 유카라 바하두르(유합라 발도) 

및 습주 수장 전웅을 아울러 석천응의 절제를 받게 하였다.

석천응이 부교를 만들어 이로써 군을 건너게 하였고 무칼리가 이에 강을 건너 동주와 포성현을 함락하였고,

지름길로 장안으로 달려갔다.

금 장수 합달이 병력 20만을 끼고 굳게 수비하니 함락하지 못하였고 명을 내려 우코(올호)와 타이부카(태부화)는 

합달과 더불어 대치하게 하였다.

또 알치(안적)를 보내 군을 거느리고 동관에 보루를 쌓게 하였고 

스스로 대군을 인솔하여 서진하여 풍상부를 포위하였는데 한 달 남짓 또한 함락하지 못하였다.

무칼리가 제장들에게 일컬어 말하길

「내가 명을 받들어 정토하였는데 수년도 되지 않아 요동, 요서, 산동, 하북을 취하였는데 남은 힘을 다쓰지 않았다.

  전에 연안을 공격하였고 지금 풍상을 공격하였는데 모두 함락하지 못하니 어찌 내가 마땅히 명을 다하지 않겠는가?」

이에 포위를 풀고 위수를 따라 남진하였고 몽골부카를 보내 우령관을 나가 봉주를 돌게 하였다.

이때 후소숙이 아군을 엿보아 이윽고 서진하자 경기병을 인솔하여 하중부를 기습하니 석천응이 전사하였다.

후소숙이 성에 들어가 즉시 부교를 불사르고 이로써 원군을 끊었다.

때마침 선봉 원수 알자르(안찰아)가 평양으로부터 구원하여 이르러 급히 공격하게 하여 하중을 다시 함락하였다.

무칼리가 이에 석천응의 아들 석알가를 하중 수장으로 삼았고 곧 독려하여 부교를 만들게 하였다.

[칭기스칸] 18년(1223년)에 회군하였는데 부교가 미처 완성되지 못하였다.

무칼리가 제장들을 돌아보며 말하길

「부교 공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어찌 앉아서 기다리겠는가?」

다시 강 서쪽 10여보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3월에 강을 건너 문희현에 이르렀는데 병이 심하였고 그 동생 다이순(대손)을 소환하여 일컬어 말하길

슬프게도 남경을 미처 함락하지 못하였다.

  동생 다이손아! 네가 이루도록 하라!

졸하니 54세였다.

후에 태조가 봉상을 친히 공격하였는데 제장들에게 일컬어 말하길

「만일 무칼리가 있었다면 짐이 이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로다!」

지치(원 5대 황제 영종의 #1연호) 원년(1321년)에 체인개국보세좌명공신태사,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노국왕을 

증하였고, 시호는 충무였다. 아들은 보골(패로)이다.


사신은 말한다!

「무칼리가 중원을 공략하였는데 금의 항장을 거둬 등용하였다.

  사람을 잘 알아 좋게 임용하니 태조의 풍모가 있었고 그를 공신의 제1로 삼음이 마땅하였노라!

  자손의 대가 끊기지 않고 대대로 특출하게 어질고 슬기로웠는데,

  자고로 공신의 자손으로 부귀를 영원히 지킨 자가 있었던가?

  장상명신으로 잘라이르(찰랄아) 씨와 같이 성한 자들은 일찍이 있지 아니하였노라!」



집사 부족지中 (김호동 역주)

잘라이르 종족 전체에서 칭기스 칸의 시대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지위가 높았던 사람은 무칼리 구양이었다.

차트 종족 출신이었고 칭기스 칸의 좌익 군대 전체를 그가 지휘했다.


요약.

1223년 중원을 공략 중이던 무칼리는 병이 들어 54세의 나이로 죽는다.

무칼리는 동생 다이손에게 금 수도 개봉 함락을 명하고 눈을 감는다.

아들 보골이 국왕을 세습하였다.

신원사 찬자는 무칼리에게 태조의 풍모가 있었다며 극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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