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 나이만 구출룩칸/증손자 베테킨 열전 테무진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테무진 당시 남부 나이만 군주 타양칸의 아들로 서요 황제가 된 구출룩칸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인물 열전>

청사고

왕올당, 왕고, 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추옝, 슈르하치, 야르하치 

피옹돈, 호호리, 어이두, 안퍙구후르한푸차 군다이

잉굴다이어르더니 밬시양구리보르진특금마심, 캉카라도르곤도도아지거푸헝

하르졸(해란주)호오거망굴타이아민고이마혼/와산/제극탑합/공아지르가랑두두니칸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모문룡

송서

만주팔기씨족통보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zh-hant/%E6%96%B0%E5%85%83%E5%8F%B2/%E5%8D%B7118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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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元年,親征不月魯克。

不月魯克方獵於兀魯黑塔山,太祖兵奄至,殺之。

古出魯克與脫黑脫阿奔也兒的石河。

三年,太祖以衛拉特降酋忽都哈別乞爲嚮導,至也兒的石河,陣斬脫黑脫阿,古出魯克復奔西遼。

是時,西遼古兒罕爲直魯古。

古出魯克至西遼,將謁古兒罕,慮有變,令從者僞爲己入謁,自立於門外俟之。

適古兒罕之女格兒八速自外至,見其狀貌,偉之。

後詢得其實,乃以女晃忽妻古出魯克。

晃忽年十五,性慧黠。

以古兒罕喜諛,使古出魯克迎合其意,古兒罕遂以國事任之。

古出魯克聞其父潰卒多藏匿於舊地,欲糾合部衆,以奪古兒罕之國。

乃言於古兒罕曰:

「蒙古方有事於乞都,不暇西顧。

  若我往葉密裏、哈押立克、別失八里,招集潰卒,衆必響應,可藉其力以衛本國。」

古兒罕從之。

古出魯克既東,乃蠻舊衆果聞命附從。

又遇貨勒自彌使者,約東西夾攻古兒罕。

西軍勝,則拓地至阿力麻裏、和闐、喀什噶爾,東軍勝,則拓地至費那克特河。

議定,古出魯克即至鄂思懇,奪西遼之庫藏,進攻八剌沙袞。

古兒罕自出御之,古出魯克敗退。

而貨勒自彌之兵已至塔剌思,擒古兒罕之將塔尼古。

八剌沙袞城守鄂思懇潰卒以象毀門而入,大掠三日。

古出魯克乘機再進,古兒罕戰敗,生獲之。

奉古兒罕爲太上皇,篡其國而自立。

越二年,古兒罕以憂卒。

古出魯克既篡立,又納西遼前宰相之女爲妃,貌甚美,與正妃晃忽同信佛教。

契丹本舉國事佛,及耶律大石西遷,其地盛行回回教。

大石聽其信仰,不之禁,故上下相安。

古出魯克用其妃之言,定佛法爲國教。

諭其民奉佛,不行奉謨罕默德。

自至和闐,招集天方教士辯論教理。

有教士曰阿拉哀丁,與古出魯克往復駁難,古出魯克慚怒,置而縛之,釘其手足於門。

又賦斂苛重,每一鄉長家置一卒監之。

於是民心瓦解,惟望蒙古兵速至。

太祖亦聞之,使哲別伐古出魯克。

哲別入西遼境,諭民各奉舊教勿更易,各鄉長皆殺監卒應之。

古出魯克在喀什噶爾,兵未至先遁。

哲別追及於撒裏黑庫爾,古出魯克匿於葦拉特尼之山谷。

哲別遇牧羊人詢知古出魯克蹤跡,獲而殺之。

古出魯克自太祖三年奔西遼,六年篡直魯古,十四年爲哲別所殺,距太陽罕之死已十有一年。

古出魯克有子敞溫走死。

敞溫子抄思幼,從母康里氏間行歸太祖,給事中宮。

年二十五,出從征伐。

破代、石二州,不避失石。

太宗四年,從皇帝拖雷敗金師於鈞州之三峯山。

論功,賜湯陰黃招撫等百十有七戶,不受;

復賜俘口五十、宅一區,黃金鞶帶、酒壺、杯、盂各一,再辭,不許,乃受之。

擢副萬戶,與忽都虎留撫河南,尋移隨州,九年,籤西京、大名、濱、棣、杯孟、真定、河間、邢、洺、磁、威、新、衛、

保等路軍,得四千有六十餘人,以抄思統之。

移鎮潁州。

卒。

子別的因,襁褓時鞠於祖母康里氏,留和林。

稍長,給事乞兒吉思皇后。

父卒,母張氏迎別的因南來。

張賢明,嘗從容訓之曰:

「人之所以成立者,知恐懼、知羞恥知艱難,否則禽獸而已。」

憲宗四年,以別的因襲父職副萬戶,鎮隨、潁二州。

別的因身長七尺,多力,尤精騎射,士卒畏服之。

中統四年,入覲,賜金符爲壽、潁二州屯田達魯花赤。

時州境有虎食人,別的因縛羊置檻中,誘虎殺之。

至元十三年,授信陽府達魯花赤。

信陽亦多虎,別的因加馬踢鞍上出獵,命左右燔山,虎出走,別的因擲以踢,虎搏踢,據地而吼,還馬射之,立斃。

十六年,進常德路副達魯花赤。

會同知李明秀作亂,別的因單騎往諭之降。

事聞朝廷,誅明秀。

三十一年,進池州路達魯花赤。

大德十一年,遷臺州路。

卒,年八十一。

子三人:

不花,僉嶺南廣西道肅政廉訪司事;文圭,有隱德,贈祕書著作郎;延壽,湯陰縣達魯花赤。

孫可恭,曾孫與權,皆進士。

史臣曰:

「王罕猜忌失衆,賴烈祖父子亡而復存,乃聽讒子之言,辜恩負德。

  太陽罕懦耐我謀,橫挑強敵。

  考其禍敗之由,皆不量智力,輕於一舉,身隕國滅,同趨覆轍,愚莫甚焉。

  古出魯克乘機篡奪,民心未附,乃強其所不從,而淫刑以逼之,淵魚叢爵,徒爲吊伐之資而已。」

태조(太祖) 원년(元年)에, 부월로극(不月魯克)을 친정(親征)하였다.

부월로극(不月魯克)이 바야흐로 올로흑탑산(兀魯黑塔山)에서 엽(獵)하였는데, 태조(太祖)의 병(兵)이 엄지(奄至)하여, 

살지(殺之)하였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이 탈흑탈아(脫黑脫阿)와 함께 야아적석하(也兒的石河)로 분(奔)하였다.

[칭기스칸] 3년에, 태조(太祖))가 위랍특(衛拉特)의 항(降)함으로써 추(酋) 홀도합별걸(忽都哈別乞)을 향도(嚮導)로 삼아, 

야아적석하(也兒的石河)에 지(至)하였고, 탈흑탈아(脫黑脫阿)를 진참(陣斬)하였으며, 고출로극(古出魯克)은 서요(西遼)로 

복분(復奔)하였다.

이때에, 서요(西遼) 고아한(古兒罕)은 야율직로고(直魯古)였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이 서요(西遼)에 지(至)하자, 장차(將) 고아한(古兒罕)을 알(謁)하고자 하였는데, 유변(有變)을 려(慮)하여,

종자(從者)로 하여금 거짓으로 위기(爲己/자신을 가장함)하여 입알(入謁)하였고, 문외(門外)에서 자립(自立)하여 

사지(俟之)하였다.

때마침 고아한(古兒罕)의 녀(女) 격아팔속(格兒八速)이 외(外)로부터 지(至)하였는데, 그 상모(狀貌)를 견(見)하더니, 

위지(偉之/훌륭하게 여김)하였다.

후(後)에 순(詢/물음)하여 그 실(實)을 득(得)하니, 이에 녀(女) 황홀(晃忽)로써 고출로극(古出魯克)에게 처(妻)로 삼았다.

황홀(晃忽)의 연(年)은 15였는데, 성(性)이 혜힐(慧黠/총명하고 교활함)하였다.

고아한(古兒罕)에게 희유(喜諛/아첨하여 기쁘게 함)함으로써, 고출로극(古出魯克)으로 하여금 그 의(意)를 영합(迎合)하게 

하였으며, 고아한(古兒罕)이 마침내 국사(國事)로써 임지(任之)하였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이 그 부(父)의 궤졸(潰卒)이 구지(舊地)에 많이 장닉(藏匿)하였다는 것을 문(聞)하더니, 부중(部衆)을 

규합(糾合)하고자 하였고, 이로써 고아한(古兒罕)의 국(國)을 탈(奪)하고자 하였다.

이에 고아한(古兒罕)에게 언(言)하여 말하길

「몽고(蒙古)가 바야흐로 걸도(乞都)에 유사(有事)하여, 서고(西顧)할 겨를이 없다.

  만약(若) 내가 엽밀리(葉密裏), 합압립극(哈押立克), 별실팔리(別失八里)에 왕(往)하여, 궤졸(潰卒)을 초집(招集)한다면,

  중(衆)이 필히(必) 향응(響應/호응)할 것이니, 가히(可) 그 역(力)을 차(藉/빌림)하여 이로써 본국(本國)을 위(衛)하자!」

고아한(古兒罕)이 종지(從之)하였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이 이윽고 동진(東)하였는데, 내만(乃蠻)의 구중(舊衆)이 과연(果) 문명(聞命)하고 부종(附從)하였다.

또 화륵자미(貨勒自彌)의 사자(使者)와 우(遇)하여, 고아한(古兒罕)을 동서(東西)로 협공(夾攻)하자 약(約)하였다.

서군(西軍)이 승(勝)하면, 즉(則) 척지(拓地)하여 아력마리(阿力麻裏), 화전(和闐), 객십갈이(喀什噶爾)에 지(至)하고,

동군(東軍)이 승(勝)하면, 즉(則) 척지(拓地)하여 비나극특하(費那克特河)에 지(至)하기로 하였다.

의정(議定)하자, 고출로극(古出魯克)이 즉시(即) 악사간(鄂思懇)에 지(至)하였고, 서요(西遼)의 

고장(庫藏/창고에 저장해 놓은 것)을 탈(奪)하였으며, 진(進)하여 팔랄사곤(八剌沙袞)을 공(攻)하였다.

고아한(古兒罕)이 자출(自出)하여 어지(御之)하였는데, 고출로극(古出魯克)이 패퇴(敗退)하였다.

그러나 화륵자미(貨勒自彌)의 병(兵)이 이미(已) 탑랄사(塔剌思)에 지(至)하여, 고아한(古兒罕)의 장(將) 탑니고(塔尼古)를 

금(擒)하였다.

팔랄사곤(八剌沙袞)의 성수(城守) 악사간(鄂思懇)의 궤졸(潰卒)이 상(象)으로써 훼문(毀門)하고 입(入)하여, 

3일(日)을 대략(大掠)하였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이 승기(乘機)하여 재진(再進)하였고, 고아한(古兒罕)이 전패(戰敗)하여, 생획지(生獲之)하였다.

고아한(古兒罕)을 봉(奉)하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삼고, 그 국(國)을 찬(篡)하여 자립(自立)하였다.

2년(年)을 월(越)하자, 고아한(古兒罕)이 우(憂)로써 졸(卒)하였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이 이윽고 찬립(篡立)하자, 또 서요(西遼)의 전(前) 재상(宰相)의 녀(女)를 납(納)하여 비(妃)로 삼았는데,

모(貌)가 심미(甚美)하였는데, 정비(正妃) 황홀(晃忽)과 더불어 불교(佛教)를 동신(同信)하였다.

글단(契丹)은 본래(本) 거국(舉國)하여 사불(事佛)하였는데,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서천(西遷)함에 이르러, 그 지(地)는 

회회교(回回教/이슬람)가 성행(盛行)하였다.

야율대석(大石聽)이 그것을 신앙(信仰)하여, 금(禁)하지 못하였고, 이런 연고(故)로 상하(上下)가 상안(相安)하였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이 그 비(妃)의 신(言)을 용(用)하여, 불법(佛法)을 정(定)하여 국교(國教)로 삼았다.

그 민(民)에게 봉불(奉佛)하라 유(諭)하였고, 모한묵덕(謨罕默德/무함마드/마호메트)을 행봉(行奉)하지 못하게 하였다.

스스로 화전(和闐)에 지(至)하여, 천방교사(天方教士)를 초집(招集)하여 교리(教理)를 변론(辯論/논쟁)하였다.

아랍애정(阿拉哀丁)이라 말하는 교사(教士)가 있었는데, 고출로극(古出魯克)과 더불어 왕복(往復)하여 박난(駁難/반박)하였고,

고출로극(古出魯克)이 참노(慚怒/부끄러워 성을 냄)하였고, 치(置)하여 박지(縛之)하였으며, 그 수족(手足)을 문(門)에 

정(釘)하였다.

또 부렴(賦斂/조세)이 가중(苛重/가혹하고 과중함)하였고, 매(每) 일향(一鄉)의 장가(長家)에 일졸(一卒)를 치(置)하여 

감지(監之)하였다.

이에 민심(民心)이 와해(瓦解)되었고, 오직 몽고병(蒙古兵)의 속지(速至)를 망(望)하였다.

태조(太祖)가 역시(亦) 문지(聞之)하였고, 철별(哲別)로 하여금 고출로극(古出魯克)을 벌(伐)하게 하였다.

철별(哲別)이 서요(西遼)의 경(境)에 입(入)하여, 유민(諭民)하고 각각(各) 구교(舊教)를 봉(奉)하고 물경역(勿更易)하니,

각(各)  향장(鄉長)이 모두 감졸(監卒)을 살(殺)하고 응지(應之)하였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이 객십갈이(喀什噶爾)에 재(在)하다, 병(兵)이 미지(未至)하였는데도 선둔(先遁)하였다.

철별(哲別)이 추(追)하여 살리흑고이(撒裏黑庫爾)에 급(及)하였는데, 고출로극(古出魯克)이 위랍특니(葦拉特尼)의 

산곡(山谷)에 닉(匿)하였다.

철별(哲別)이 목양인(牧羊人)을 우(遇)하여 고출로극(古出魯克)의 종적(蹤跡)을 순지(詢知)하였고, 

획(獲)하여 살지(殺之)하였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은 태조(太祖) 3년으로부터 서요(西遼)로 분(奔)하였다가, 6년에 야율직로고(直魯古)를 찬(篡)하였고, 

14년에 철별(哲別)에게 소살(所殺)하였는데, 태양한(太陽罕)의 사(死)로부터 벌써 11년이었다.

고출로극(古出魯克)은 자(子) 창온(敞溫)이 있었는데 주사(走死)하였다.

창온(敞溫)의 자(子) 초사(抄思)는 유(幼)하였는데, 모(母) 강리씨(康里氏)를 종(從)하여 간행(間行/사잇길로 감)하여 

태조(太祖)에게 귀(歸)하였고, 중궁(中宮)에 급사(給事)하였다.

연(年) 25에, 출종(出從)하여 정벌(征伐)하였다.

대주(代)와 석주(石) 2주(州)를 파(破)하였고, 시석(失石/矢의 오기)을 불피(不避)하였다.

태종(太宗) 4년에, 황제(皇帝) 타뢰(拖雷)를 종(從)하여 금사(金師)를 균주(鈞州)의 삼봉산(三峯山)에서 패(敗)하였다.

논공(論功)하여, 탕음황초무(湯陰黃招撫) 등(等) 117호(戶)를 사(賜)하였는데, 불수(不受)하였다.

부구(俘口) 50, 택(宅) 1구(區), 황금(黃金) 반대(鞶帶/가죽띠), 주호(酒壺/술병), 배(杯/술잔), 우(盂/사발) 각(各) 1을 

복사(復賜)하였는데, 재사(再辭)하자, 불허(不許)하였고, 이에 수지(受之)하였다.

부만호(副萬戶)에 탁(擢)하여, 홀도호(忽都虎)와 함께 하남(河南)을 유무(留撫)하였으며, 수주(隨州)로 심이(尋移)하였다.

[태종] 9년에, 서경(西京), 대명(大名), 빈주(濱), 체주(棣), 배맹(杯孟), 진정부(真定), 하간주(河間), 형주(邢), 명주(洺), 

자주(磁), 위주(威), 신주(新), 위주(衛), 보주(保) 등(等)의 로군(路軍)을 첨(籤)하여, 4060여인을 득(得)하였고, 

초사(抄思)로써 통지(統之)하였다.

영주(潁州)로 이진(移鎮)하였는데, 졸(卒)하였다.

자(子) 별적인(別的因)은, 강보시(襁褓時)에 조모(祖母) 강리씨(康里氏)에게 궁(鞠/기름)하였고, 화림(和林)에 유(留)하였다.

초장(稍長)하자, 걸아길사(乞兒吉思) 황후(皇后)에게 급사(給事)하였다.

부(父)가 졸(卒)하자, 모(母) 장씨(張氏)가 별적인(別的因)을 영(迎)하여 남래(南來)하였다.

장(張)이 현명(賢明)하였는데, 일찍이 종용(從容)하게 훈지(訓之)하여 말하길

「사람으로 성립(成立)하는 자의 소이(所以)는, 공구(恐懼)를 지(知)함이요, 수치(羞恥)를 지(知)함이요,

  간난(艱難)을 지(知)함이니, 부(否)한다면 즉(則) 금수(禽獸)일뿐이니라!」

헌종(憲宗) 4년에, 별적인(別的因)으로써 부직(父職)을 습(襲)하여 부만호(副萬戶)로 삼았고, 수주(隨)와 영주(潁) 2주(州)를 

진(鎮)하게 하였다.

별적인(別的因)의 신장(身長)은 칠척(七尺)이었고, 다력(多力)하였으며, 또한 기사(騎射)에 정(精)하니, 사졸(士卒)이 

외복지(畏服之)하였다.

중통(中統) 4년에, 일근(入覲)하였는데, 금부(金符)를 사(賜)하고 수주(壽)와 영주(潁) 2주(州)의 둔전(屯田)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삼았다.

이때 주경(州境)에 식인(食人)하는 호(虎)가 있었는데, 별적인(別的因)이 박양(縛羊)하여 함중(檻中)에 치(置)하여, 

유호(誘虎)하여 살지(殺之)하였다.

지원(至元) 13년에, 신양부(信陽府) 달로화적(達魯花赤)에 수(授)하였다.

신양(信陽) 역시(亦) 다호(多虎)하였는데, 별적인(別的因)이 마(馬)의 안상(鞍上/안장 위)에 척(踢)을 가(加)하고 

출렵(出獵)하였고, 명(命)하여 좌우(左右)는 산(山)을 번(燔/불사름)하게 하였는데, 호(虎)가 출주(出走)하자, 별적인(別的因)이

척(踢)으로써 척(擲/던짐)하니, 호(虎)가 박척(搏踢)하였는데, 거지(據地)하며 후(吼/울부짖음)하였고, 환마(還馬)하여 

사지(射之)하였고, 입폐(立斃)하였다.

[지원] 16년에, 상덕로(常德路) 부달로화적(副達魯花赤)에 진(進)하였다.

때마침 동지(同知) 이명수(李明秀)가 작난(作亂)하였는데, 별적인(別的因)이 단기(單騎)로 왕유지(往諭之)하여 항(降)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사문(事聞)하자, 이명수(明秀)를 주(誅)하였다.

[지원] 31년에, 지주로(池州路) 달로화적(達魯花赤)에 진(進)하였다.

대덕(大德) 11년에, 대주로(臺州路)로 천(遷)하였는데, 졸(卒)하였고, 연(年) 81이었다.

자(子)는 3인인데, 불화(不花)는, 첨영남광서도(僉嶺南廣西道) 숙정렴방사사(肅政廉訪司事)다.

문규(文圭)는, 은덕(隱德)이 있어, 비서저작랑(祕書著作郎)을 증(贈)하였다.

연수(延壽)는, 탕음현(湯陰縣) 달로화적(達魯花赤)이다.

손(孫) 가공(可恭)은, 증손(曾孫) 권(權)과 더불어 모두 진사(進士)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왕한(王罕)이 시기(猜忌)하여 실중(失衆)하였고, 열조(烈祖)의 부자(父子)에게 뇌(賴)하여 망(亡)했다가 

  복존(復存)하였는데도, 이에 참소(讒)하는 자(子)의 언(言)을 청(聽)하여, 고은(辜恩/은혜를 저버림)하고 

  부덕(負德/덕을 등짐)하였다.

  태양한(太陽罕)은 나내(懦耐)하였는데도 아모(我謀/아집을 부려 도모함)하여, 강적(強敵)을 횡도(橫挑/멋대로 공격함)하였다.

  그 화패(禍敗)의 유(由)를 고(考)하면, 모두 지력(智力)을 불량(不量)한 것인데, 일거(一舉)에 경(輕)하여, 

  신운(身隕/목숨을 잃음)하고 국멸(國滅)하였으니, 복철(覆轍/엎어진 수레바퀴/전철)을 동촉(同趨)하였으니, 

  우(愚)가 심(甚)하지 아니하던가?

  고출로극(古出魯克)은 승기(乘機)하여 찬탈(篡奪)하였는데, 민심(民心)이 미부(未附)하였고, 이에 그 소(所)의 불종(不從)을 

  강(強)하였으며, 음형(淫刑/부당한 형벌)하여 이로써 핍지(逼之)하니, 연어총작(淵魚叢爵)이라, 

  도(徒)가 적벌(吊伐)의 자(資)로 삼았을 뿐이었노라!


*연어총작(淵魚叢爵)
 : 수달이 고기를 깊은 못으로 몰고, 새매가 참새를 숲 속으로 쫓는다는 말로,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적들 편으로 몰아준다는 뜻이다.




태조 원년 1206년에, 부이룩(부월로극)을 친히 정벌하였다.
부이룩이 바야흐로 울룩탁산(올로흑탑산)에서 사냥하였는데 태조의 군사가 기습하여 살해하였다.
구출룩(고출로극)이 톡타아(탈흑탈아)와 함께 에르디시강(야아적석하)으로 달아났다.
태조 3년 1208년에 태조가 오이라트(위랍특)가 항복함으로써 추장 쿠투카 베키(홀도합 별걸)을 향도로 삼아 에르디시강에 
이르렀고 톡타아를 진중에서 참하였으며 구출룩은 다시 서요로 달아났다.
이 때에 서요 구르칸(고아한)은 야율직로고였다.
구출룩이 서요에 이르자 장차 구르칸을 알현하고자 하였는데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종자로 하여금 거짓으로 자신을 가장하여 
알현하게 하였고 스스로 문밖에 서서 기다렸다.
때마침 구르칸의 부인 구르베수(격아팔속)가 밖으로부터 이르렀는데 그 용모를 보더니 훌륭하다 여겼다.
후에 물어 그 사실을 얻게 되니 이에 딸 쿵쿠(황홀)를 구출룩에게 처로 주었다.
쿵쿠는 나이가 15세였는데 성품이 총명하고 교활하였다.
구르칸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함으로써 구출룩으로 하여금 그 뜻을 부합하게 하였으며 구르칸에게 마침내 국사를 맡기게 하였다.
구출룩이 그 부친의 패잔병이 옛 땅에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을 듣더니 부족 무리를 규합하고자 하였고,이로써 구르칸의 나라를 
빼앗고자 하였다.
이에 구르칸에게 말하길
「몽고가 바야흐로 키타이(걸도/중국)에 일이 있어 서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만약 내가 에밀(엽밀리), 카얄릭(합압립극), 비시발릭(별실팔리)에 가서 흩어진 병졸을 모집한다면 무리가 필히 호응할 
  것이니 가히 그 힘을 빌려 이로써 본국을 지키자!」
구르칸이 따랐다.
구출룩이 이윽고 동진하였는데 나이만(내만)의 옛 무리들이 과연 명을 듣더니 복종하였다.
또 호라즘(화륵자미)의 사자와 만나 구르칸을 동서로 협공하자 약조하였다.
서군(호라즘)이 승리하면 곧 땅을 나누어 알말릭(아력마리), 호탄(화전), 카쉬가르(객십갈이)에 이르고, 동군(나이만)이 
승리하면 곧 땅을 나누어 파나카트강(비나극특하)에 이르기로 하였다.
의논이 정해지자 구출룩이 즉시 악사간에 이르렀고 서요의 창고에 저장해 놓은 것을 탈취하였으며 진군하여 
발라사쿤(팔랄사곤)을 공격하였다.
구르칸이 스스로 나가 방어하였는데 구출룩이 패하여 물러났다.
그러나 호라즘의 군이 이미 타라즈(탑랄사)에 이르러 구르칸의 장수 타양구(탑니고)를 사로잡았다.
발라사쿤의 성 수비 장군 악사간의 패잔병이 코키리로써 문을 부수고 들어가 3일간 크게 약탈하였다.
구출룩이 기회를 틈타 재차 진군하였고 구르칸이 패전하여 사로잡혔다.
구르칸을 태상황으로 받들고 그 나라를 찬탈하여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2년이 넘자 구르칸이 근심하다 졸하였다.
구출룩이 이윽고 찬탈하자 또 서요의 전 재상의 딸을 거둬 비로 삼았는데 용모가 심히 아름다웠고 정비 쿵쿠와 더불어 불교를 
믿었다.
거란(글단)은 본래 나라를 일으키며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야율대석이 서쪽으로 천도함에 이르러 그 땅에서는 
이슬람(회회교)이 성행하였다.
야율대석이 그것을 신앙하여 금지하지 못하였고 이런 연고로 상하가 서로 편안하였다.
구출룩이 그 비의 신앙을 이용하여 불법을 세워 국교로 삼았다.
그 백성에게 불교를 받들라 유지를 내렸고 마호메트(모한묵덕/무함마드)를 받들지 못하게 하였다.
스스로 호탄(화전)에 이르러 천방교사(이슬람 사제들/이맘)를 불러 교리를 논쟁하였다.
알라 앗 딘(아랍애정)이라 말하는 사제가 있었는데 구출룩에게 가서 더불어 반박하였고 구출룩이 부끄러워 성을 내며 
포박하게 하여 그 수족을 문에 못 박게 하였다.
또 조세를 가혹하게 매겼고 한 마을의 촌장집에 병사 한 명을 두어 감시하게 하였다.
이에 민심이 와해되었고 오직 몽고병의 속히 이르기를 기대하였다.
태조가 또한 듣고는 제베(철별)로 하여금 구출룩을 정벌하게 하였다.
제베가 서요의 국경에 들어가 백성을 회유하고 각각 옛 종교를 받들어 바꾸지 말라 하니 각각의 마을의 촌장들이 모두 
감시병을 살해하고 호응하였다.
구출룩이 카쉬가르(객십갈이)에 있다가 군이 미처 이르지 않았는데도 먼저 달아났다.
제베가 추격하여 사릭 콜(살리흑고이)에 이르렀는데 구출룩이 위랍특니의 산곡에 숨었다.
제베가 양을 유목하는 사람을 만나 구출룩의 종적을 물어 알고는 사로잡아 살해하였다.
구출룩은 태조 3년(1208년)으로부터 서요로 달아났다가 6년(1211년)에 야율직로고를 찬탈하였고 14년(1218년)에 제베에게 
살해당했는데 타양칸의 죽음으로부터 벌써 11년이었다.
구출룩은 아들 자우쿠(창온)가 있었는데 달아나다 죽었다.
자우쿠의 아들 초사는 어렸는데 모친 캉글리씨(강리씨)를 따라 사잇길로 가서 태조에게 귀부하였고 중궁에서 일을 보게 하였다.
25세에 종군하여 (금을) 정벌하였다.
대주와 석주 2주를 깨트렸는데 시석을 피하지 않았다.
태종(우구데이) 4년에 황제의 동생 톨루이(타뢰)를 따라 금군을 균주의 삼봉산에서 격파하였다.
공을 논하여 탕음황초무 등 117호를 하사하였는데 받지 않았다.
포로 50, 저택 1구, 황금 가죽띠, 술병, 술잔, 사발 각각 1개씩을 다시 하사하였는데 재차 사양하자 불허하였고 이에 받게 하였다.
부만호에 발탁하여 쿠투쿠(홀도호)와 함께 하남에 남아 위무하게 하였으며 수주로 거듭 옮겼다.
[태종] 9년에 서경, 대명, 빈주, 체주, 배맹, 진정부, 하간주, 형주, 명주, 자주, 위주, 신주, 위주, 보주 등의 지방군을 뽑아 
4060여인을 얻었고 초사로써 통솔하게 하였다.
영주로 진을 옮겼는데 졸하였다.
아들 베테킨(별적인)은 강보에 있을 때 할머니 캉글리씨가 길렀고 코룸(화림)에 남았다.
점차 성장하자 키르키즈(걸아길사) 황후에게 종사하였다.
부친이 졸하자 모친 장씨가 베테킨을 맞이하여 남쪽으로 왔다.
장씨가 현명하였는데 일찍이 조용하게 훈계하며 말하길
「사람으로 성공하는 자의 까닭은 두려워하는 것을 아는 것이요, 수치를 아는 것이요, 고생을 아는 것이니 이를 모른다면 곧 
  금수일 뿐이니라!
헌종(몽골 4대칸 뭉케) 4년 1254년에 베테킨으로써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여 부만호로 삼았고 수주와 영주 2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베테킨의 신장은 칠척이었고 힘이 많았으며 또한 기사에 훌륭하니 사졸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중통(몽골 5대 칸 원 세조 쿠빌라이의 #1연호) 4년 1263년에 알현하였는데 금부를 하사하였고 수주와 영주 2주의 둔전 
다루가치(달로화적)로 삼았다.
이때 주의 경계에 식인하는 호랑이가 있었는데 베테킨이 양을 포박하여 함정속에 두고 호랑이를 유인하여 죽였다.
지원(몽골 5대 칸 원 세조 쿠빌라이의 #2연호) 13년 1276년에 신양부 다루가치에 제수하였다.
신양에 또한 호랑이가 많았는데 베테킨이 말안장 위에 그물을 올리고 사냥을 나갔는데, 명을 내려 좌우는 산을 불사르게 
하였고 호랑이가 나가서 달아나자 베테킨이 그물을 던져 호랑이를 포박하니 땅에 의지하여 울부짖으니 빠르게 말을 타고 
살을 쏘아 선채로 죽였다.
[지원] 16년 1279년에 상덕로 부 다루가치에 올랐다.
때마침 동지 이명수가 난을 일으켰는데 베테킨이 단기로 가서 회유하여 투항시켰다.
조정에서 일을 듣자 이명수를 주살하였다.
[지원] 31년 1294년에 지주로 다루가치에 올랐다.
대덕(몽골 6대 칸 원 성종 테무르의 #2연호) 11년 1307년에 대주로로 옮겼는데 졸하였고 81세였다.
아들은 셋인데 부카(불화)는 첨영남광서도 숙정렴방사사다.
둘째 문규는 은덕이 있어 비서저작랑을 추증하였다.
셋째 연수는 탕음현 다루가치다.
손자 가공과 증손 권은 모두 진사였다.
 
사신은 말한다!

「옹칸은 시기하여 무리를 잃었고 열조(예수게이) 부자에게 의지하여 망한 것을 다시 보존하였는데도 

  이에 참소하는 아들의 말을 들어주어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등졌다.

  그 망한 이유를 고찰하면 모두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한 것인데 일거에 경거망동하여 목숨을 잃고 나라가 멸하여,

  모두 전철을 밟은 것이니 어찌 어리석음이 심하지 아니한가?

  구출룩은 기회를 틈타 찬탈하였는데 민심이 미처 붙지 못하였는데도 자신을 따르라 강요하였고 부당한 형벌로 핍박하니 

  자신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적들 편으로 몰아준 셈이며, 다른 무리들의 토벌의 이유를 만들어준 셈이었느니라!」


요약.

구출룩칸(쿠쉴룩칸)은 남부 나이만 군주 타양칸의 아들이다. 타양칸이 테무진에 살해당하자 구출룩은 삼촌 부이룩칸에게 

달아난다. 이후 부이룩칸마저 테무진에게 살해당하자 구출룩은 서요로 달아난다. 서요 3대 황제 아율직로고가 구출룩을 

받아들이고 부마로 삼는다. 구출룩은 흩어진 나이만 패잔병들을 모아 서요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야율직로고의 지원하에 

나이만을 규합한다. 그러나 구출룩칸는 서쪽 호라즘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서요를 분할하여 차지하기로 밀약을 맺는다.

구출룩이 야심을 드러내자 서요군이 구추룩을 공격하였고 구출룩은 패전한다. 그러나 때마침 호라즘군이 동진하여 서요군을 

격파한다. 구출룩은 야율직로고를 태상황에 올리고 자신이 황제의 위에 오른다. 본디 서요 황실은 불교를 숭상하였으나 

백성은 무슬림이 많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한편 기독교도였던 구출룩은 불교로 개종하고 백성들에게 불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한다. 구출룩이 종교 지도자 알라 앗 딘을 살해하고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자 민심 이반이 가속화 되었다.

한편 중국 정벌 중에 호라즘 정벌을 선언한 테무진은 제베를 선봉으로 서요를 평정하게 한다. 제베군이 오자 구출룩은 달아났고

제베는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다. 달아났던 구출룩은 1218년 제베에게 살해당하고 이로써 나이만과 서요는 멸망한다.

구출룩의 손자 초사는 모친 캉글리씨를 따라 몽골 중궁에서 일을 하였고 이후 몽골의 장수가 되어 용맹을 떨쳐 부만호에 오른다.

초사는 한족 여인 장씨와 혼인하였는데 장씨는 아들 베테킨을 현명하게 훈육한다. 베테킨은 원조에 출사하여 용맹을 떨쳤고 

아버지의 직위를 세습하여 부만호가 된다. 각지역의 다루가치를 역임한 베테킨은 호랑이 사냥에 능숙했다. 그의 일족은 

중원에 완전히 정착하였고 이름을 모두 한족식으로 바꿨으며 후손들은 원 과거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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