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강주호족 이야기 (1) 후삼국 역사 이야기

예전자료라 조금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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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넉달동안 연재되던 후삼국 강주호족 이야기를 마무리 짓네요. 일상 생활이 너무 바쁜지라, 짬짬히 글을 쓰는 통에 상당히 늦어졌습니다. 짧게 끝낼려고 글을 계획했는데, 이런저런 전투를 비교적 상세히 쓰다보니 글이 많이 길어졌군요.

 

지난 2007년 후삼국인물열전 900명을 작성하고, 지난 7월에 100여명을 더추가해 현재 1000여명에 대한

열전작업을 완료했는데, 앞으로 정리해야할 인물들이 200여명 더 있습니다. 올해안에 끝낼려고 했는데, 사실 힘들듯 싶네요.

내년봄에나 끝이 날듯 싶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세요.^^

 

-2009년 12월6일 길공구-

 

후삼국 인물열전 900여명 : http://cafe.naver.com/sam10/233256 / http://cafe.naver.com/goryeosa/267

후삼국 인물열전 1차 추가 100여명 : http://cafe.naver.com/sam10/233257 / http://cafe.naver.com/goryeosa/401

 

후삼국 강주호족 이야기

1부 : http://cafe.naver.com/sam10/232022 / http://cafe.naver.com/goryeosa/411

2부 : http://cafe.naver.com/sam10/232213 / http://cafe.naver.com/goryeosa/412

3부 : http://cafe.naver.com/sam10/232496 / http://cafe.naver.com/goryeosa/413

4부 : http://cafe.naver.com/sam10/233229 / http://cafe.naver.com/goryeosa/442

5부 : http://cafe.naver.com/sam10/233808 / http://cafe.naver.com/goryeosa/472

6부 : http://cafe.naver.com/sam10/234238 / http://cafe.naver.com/goryeosa/473

7부 : http://cafe.naver.com/sam10/235312 / http://cafe.naver.com/goryeosa/474

8부 : http://cafe.naver.com/sam10/237740 / http://cafe.naver.com/goryeosa/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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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920년대까지의 강주일대 호족분포도

강주(康州)는 신라9주중 하나로 오늘날 경남일대를 말합니다. 강주도독이 거주하던곳은 현 경남 진주시이고

군과 현에 태수를 임명했습니다.

진성여왕의 세금독촉으로 촉발된 후삼국시대의 혼란속에서 강주는 중앙에서 파견된 강주도독 소송(蘇淞)이 피살되고

소호족들이 난립하면서 890년부터 920년까지 신라도 백제,태봉,고려도 아닌 독자적인 세력 각축장이 되고 맙니다.

 

위 그림에도 보듯이 백제와 신라 경주의 중간에 요충지 대야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백제는 견훤왕이 건국한지 10년이 되던 901년부터 꾸준히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920년 대야성을 가까스로 함락시킬때까지 20여년 동안 대야성 남부의 강주일대는 비교적 안전지대(?)였습니다.

 

신라,백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강주일대는 서쪽으로는 순천 박영규, 동으로는 김해 소율희, 북으로는 대야성(신라의 마지막 보루)으로 둘러 쌓여 있어 소호족들의 영역다툼이 상당히 심하던 곳이였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후삼국이 시작된 889년부터 통일이된 936년까지 강주의 호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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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년 강주도독(康州都督)에 임명된 소송(蘇淞)은 최치원의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에

기록된 인물인 소은(蘇恩)의 둘째 아들이다.

(소은에 관한 후삼국인물열전은 http://cafe.naver.com/goryeosa/267 참고)

 

소씨가문은 요즘 방영하는 사극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소알천(蘇閼川)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 귀족가문 태생의 소은은 845년 국선(國仙/화랑 우두머리)이 되었으며 850년 24세의 나이로 웅주도독(熊州都督)에 임명되었다. 소은의 둘째아들 소송(蘇淞)은 877년 역시 국선이 되었으며 885년 26세의 나이로 강주도독(康州都督)에 임명되었다.

 

신라말 진성여왕의 세금독촉으로 촉발된 전국혼란은 곧 강주에도 난을 진압하라는 신라 조정의 명이 내려왔다.
890년 11월 소송은 인근 호족들을 규합해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였는데, 
이때 종군하였던 강주호족(현 경남 진주) 차윤웅(車閏雄)과 천주호족(현 경남 의령) 왕봉규(王逢規)가 작당하여 사병을 동원해 중앙에서 파견된 32세의 젊은 도독 소송을 죽이게 된다.

(차윤웅은 고려사에 윤웅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시 후삼국인물열전 참고  http://cafe.naver.com/goryeosa/267 )


소송을 죽인후 차윤웅과 왕봉규는 조정에 공문을 보내 소송이 난리중에 죽었음을 알리고
차윤웅을 신 강주도독으로 삼아 줄것을 청하니 신라조정은 이를 허락한다.

차윤웅은 강주도독이라는 직함을 얻었으며, 왕봉규는 소송의 부인이던 정효부인(正孝夫人) 김씨를 아내로 삼았다.
정효부인 김씨는 시중(侍中)을 지낸 왕족 김윤한(金允漢)의 딸이였다.


왕봉규가 강제로 정효부인을 취한 그 시점에 이미 임신중에 있었으나 왕봉규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였다.
혼인 5개월만인 891년 4월 아들 격달(格達)이 태어났으니, 왕봉규는 소송의 아이임을 알았으나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였다.
왕봉규를 아버지라 여기고 있던 왕격달(王格達)은 성인이 되자 왕봉규로 부터 유달(有達)이란 자(字)를 내려받았으며,
914년 23세에 신라조정으로부터 화랑의 칭호를 받았다.


당시에는 서쪽의 후백제가 본격적으로 동진을 시작해 경남지역 공략에 나서고 있었는데,
강주도독 차윤웅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서부지역에 성을 쌓으려 하였다.

왕격달은 강주 서부지역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성터를 물색하였고, 
곧 경남 하동 인근의 악양(岳陽)이란 곳에 660년 신라가 쌓았던 옛성터가 지리적 요충지임을 판단해
왕봉규에게 축성지를 알린다.

 

왕봉규는 강주도독 차윤웅에게 아들 왕격달을 축성의 책임자로 해줄것을 요청한다.

차윤웅은 이를 허락하고 인근 백성들을 동원해 성을 쌓을것을 명한다. 
성이 거의 완성되어 갈무렵인 916년 8월에 백제군은 대군을 이끌고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에 막혀 퇴각하였다.
이에 왕격달은 축성에 박차를 가해 916년 9월 길이 350미터, 높이 4미터, 폭 6미터의 산성을 완공하고
증산산성(增山山城)[현 고소산성(姑蘇山城)]이라 이름지었다.

 

왕봉규는 크게 기뻐하여 차윤운에게 왕격달을 하동태수(河東太守)에 임명해줄것을 청한다.
곧 하동군을 수호하는 하동태수에 임명된 왕격달은 증산산성을 근거지로 삼아 후백제의 침공을 예의 주시하게 된다.

왕격달이 증산산성의 성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모친 정효부인은 산성을 둘러보고 왕격달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며 친부 소송의 복수를 부탁한다.
또한 정효부인은 시어머니 송로부인(松路夫人) 최씨가 생존해 있으며, 할머니를 찾아 이사실을 전해달라 말하며

품어 두었던 칼로 자결한다.

이때부터 정효부인이 자결한 곳에서 자라는 대나무엔 반점이 있어, 이를 두고 정효부인의 피가 물들었다는 전설이 일대에는 전해진다.


크게 격분한 왕격달은 왕봉규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왕씨를 버리고 본성인 소씨를 쓰게 된다.

그러나 세력이 강력한 왕봉규에게 곧바로 반기를 들지는 않고 이런 사실을 숨긴채
모친의 시신을 강주(現진주)와 천주(現의령) 사이의 소문리 욱곡에 장사를 지냈다.

 

비밀리에 소씨가문을 찾던 소격달은 강주 선학산 아래에 소씨들의 종가가 있음을 알게되고 곧 송로부인 최씨를 만나게 된다.
송로부인 최씨는 대아찬을 지낸 최귀(崔貴)의 딸로, 남편 소은이 웅주도독에 임명된것도 최귀의 힘이 컸다고 한다.

송로부인 최씨는 손자 소격달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인근호족이던 친척 최유문(崔有文)을 소개시켜 주었다.
최유문은 소격달에게는 고숙(姑叔)뻘이였다.

 

증산산성에 돌아온 소격달은 증산산성의 이름을 버리고,

성명(城名)을 시어머니 고(姑)와 소씨 소(蘇)를 합해 고소산성(姑蘇山城)이라 이름짓고,

왕봉규 척결을 기치로 인근호족을 규합했다.


하동과 강주의 소호족이던 원서(元瑞), 이중인(李重仁), 안유생(安有生), 박옥헌(朴玉憲), 김수봉(金秀峰)등이 이에 동조하여
소격달의 세력은 하동군 일대와 강주 일부분을 흡수해 사병이 1천명에 육박하였다.

 

 

드디어 919년부터 소격달은 남해태수 손평조(孫平朝), 고성태수 박명훤(朴命萱), 거제태수 낙창(洛昌), 함안태수 윤선(胤宣),

천령태수 배한내(裵韓乃)와 연합해 드디어 왕봉규와 차윤웅 포위망을 완성하게 된다.

 

 

-2부에서 계속-

 

 

1부에서 이어집니다. http://cafe.naver.com/goryeosa/411

 

고소산성을 근거지로한 하동태수 소격달을 중심으로 강주호족 연합에 의한 

강주도독 차윤웅, 천주호족 왕봉규 포위망이 완성되자 차윤웅은 급히 고려에 항복을 청하였다.

 

하동태수 소격달의 근거지 고소산성(길이 350미터, 높이 4미터, 폭 6미터)

 

당시 정세는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반신라를 천명했던 태봉과 달리 고려는 신라에 유화적이였다.

고려가 건국하자 백제 또한 축하사절을 보냄으로서 백제와 고려 또한 오랜 전쟁이후 잠시나마 화친이 성립되고

920년 1월 신라 또한 예물을 고려에 보내 불가침 조약을 맺자

인근 호족들에 둘러쌓여 골머리를 쓰던 차윤웅 또한 920년 1월 아들 차일강(車一康)을 고려 황도로 보내 고려로의 귀부를 청한것이였다.

 

920년 1월 고려사 기사中

○ 강주(康州)의 장군(將軍) 윤웅(閏雄)이 그 아들 일강(一康)을 보내어 볼모로 삼게 하니, 일강에게 아찬(阿飡)을 임명하고 경(卿)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낭중 춘양(春讓)을 보내어 강주(康州 경남 진주(晉州))를 위유(慰諭)하였다.

 

고려 관리가 직접 강주도독부를 찾아옴으로써 차윤웅과 왕봉규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으며,

호시탐탐 왕봉규 척결을 노리던 소격달도 잠시 주춤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일이 서쪽에서 부터 벌어졌으니, 드디어 백제군이 동진하기 시작한 것이였다.

 

 

918년 고려가 건국하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을 보내 고려건국을 축하하였고, 일시나마 고려와 백제가 화친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고려 또한 내부결속 및 반란진압, 북방 이민족 정벌등으로 남방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순간을 노려,

백제군은 드디어 920년 10월 1만 보기병을 동원해 대야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견훤은 이보다 앞서 9월에 다시 한번 고려에 아찬(阿飡) 공달(功達)을 보내 공작선(孔雀扇)과 죽전(竹箭)을 예물로 주어

고려와 백제의 화친을 공고히 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순식간에 대야성을 함락한 백제군은 계속 경주를 향해 동진하기 시작하였고, 신라는 급히 고려에 원군을 청하게 된다.

왕건이 원군을 보내자, 비로소 백제군은 동진을 멈추고 대야성으로 회군하였다.

이때부터 고려와 백제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대야성을 공략한지 20년만에 드디어 대야성을 취한 견훤은 수미강(須彌康)을 대야성주로 삼아 본격적인

신라 공략에 나서게 된다.

 

백제가 대야성을 근거로 경상도 공략에 나서게 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일부 경북지역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를 청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922년~924년 사이에 경북지역 호족들의 귀부가 많아졌다.

이는 대야성의 수미강이 경남일대를, 문경성의 양검이 경북일대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한편, 대야성,문소성의 병력은 각각 5천정도로 짐작된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는 922년에 귀부한 진보성주 홍술(洪術)을 문소성의 양검에 대항하기 위해,

그의 식읍을 문소성 인근으로 옮기었다.(현 경남 의성)

 

 

결국 924년 7월 대야성과 문소성의 병력을 모두 동원한 백제군은 고려군의 경북지역 관문인 조물성(曹物城)을 침공한다.

왕건은 급히 왕충(王忠), 애선(哀宣) 두장군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이 1차 조물성 전투에서 고려군은 참패하고

애선은 전사한다. 허나 백제군은 조물성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되고 곧 퇴각하게 된다.

 

경북일대가 백제, 고려의 강군이 맞붙는 전장이 되자, 소격달을 비롯한 강주호족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일수가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강주도독인 차윤웅이 고려에 귀부한터라 대야성주 수미강의 움직임을 신경쓰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해가 바뀌어 925년 10월 전주성에서 기병3천을 이끌고 출전한 백제왕 견훤은 직접 조물성을 침공한다.

백제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고려왕 왕건도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참전함으로써 2차 조물성 전투가 발발한다.

당시의 전투방식으로 보면 2차 조물성 전투에 참전한 백제군은 최소 1만5천은 족히 될것으로 짐작된다.

후삼국시대의 전투방식은 중앙에 정규군이 있으며, 최전방에 여러 성이나 진에 각 3천정도의 병력을 상주시켜 호족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일정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기병위주의 중앙정규군이 빠른속도로 전장으로 움직이고, 최전방의 병력은 병참을 준비하거나, 주변호족들의 병사를 규합하기도 한다.

 

고려사절요 광종조 박수경 기록中

박수경은 성품이 용감하고 굳세며 임기응변의 지혜가 많았는데, 태조를 섬겨 원윤(元尹)이 되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자주 침략하니, 태조가 수경에게 가서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는데, 견훤의 두 번째 침략에 수경이 갑자기 기이한 계책을 써서 이를 격퇴하였다. 조물군(曹物郡)의 싸움에서 태조가 삼군(三軍)을 나누어 대상(大相) 제궁(帝弓)을 상군(上軍)으로, 원윤 왕충(王忠)을 중군(中軍)으로, 수경과 은녕(殷寧)을 하군(下軍)으로 삼았다. 싸움이 시작되자, 상군과 중군은 이기지 못하고 수경의 군사만이 이겼다. 태조가 기뻐하여 원보(元甫)로 승진시키자, 수경이 아뢰기를, “신의 형 수문(守文)이 현재 원윤인데, 신이 그 위의 벼슬을 하게 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드디어 모두 원보로 삼았다. 발성(勃城)의 싸움에서 태조가 포위를 당했는데, 수경이 힘을 다하여 싸운 덕에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경자년에 전제를 정할 때에 수경에게 특별히 밭 2백 결을 주었다.

 

(쓰다보니 여기부터 말투가 바꼈습니다.^^;)

 

2차 조물성 전투가 상당히 자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일단 왕건이 동원한 고려군은 상,중,하 3군이지요. 919년 왕건이 정규중앙군 6위를 창설하면서 정규군은 3~4만에 이르렀죠. (6위의 창설연대는 설이 많은데, 일단 936년 경에는 4만4천명까지 확충됩니다.

일단 고려사 기록을 보면 6위 창설연대는 919년 1월입니다.)

황보제궁, 왕충, 박수경, 은녕등의 고위관료들이 참전한 전투에 3군까지 동원되었다면 적어도 고려군은 1만명은 족히 되었을 겁니다. 주로 기병위주로 말이죠. 거기에 홍술을 비롯한 인근 호족의 군까지 합하면 백제군과 비슷한 1만5천명은 되었을 겁니다.

 

당시 925년 10월에는 또다른 전투가 진행중이였는데, 바로 충청지역였습니다. 북방을 평정한 유금필이 정서대장군에 임명되어 충청지역에서 백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리고 있었지요. 헌데, 고려왕이 직접 조물군에서 전투를 벌리고 있는데, 유금필이 단독으로 충청지역에서 전투를 벌릴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는 견훤이 경북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양동작전으로 충청을 선제공격한것이라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것도 서쪽 최전방인 충남 예산 임존성에서 말입니다.

 

초반 회전에서 고려군은 상,중군이 모두 무너지고 겨우 하군만이 남아 겨우 전황을 유지할 정도로 패색이 짙었습니다. 그러나 선제공격을 감행해 고려군, 특히 유금필을 오랫동안 붙잡아 놓아야 했던 임존성(충남 예산)에서 유금필은 백제군 3천을 괴멸시키고 급히 조물성으로 향하게 됩니다. 도중에 길을 가로막던 연산진성(충북 문의)의 백제 장군 길환을 전사시키고 200km 가로질러 경북 문성일대의 조물성까지 진군하게 됩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역시 유금필의 무공은 견줄자가 없군요.

유금필군이 조물성에 당도하자 양군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2차 조물성 전투와 충남 예산부터 시작된 원군 유금필의 강행군 루트(약 200km)

(그림 클릭하면 자세히 볼수 있습니다)

 

곧 고려와 백제는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화친하게 됩니다. 이때 처음으로 왕건이 견훤에게 상보(尙父)라 칭하게 되지요.

 

이로써 2차 조물성 전투는 무승부로 끝이 났지만, 실상은 백제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고려군은 중앙군 상당수가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요. 백제군은 고려군의 영향권에 있었던 경북일대의 전투는 피하고 창끝을 강주일대로 돌리게 됩니다.

 

고려군이 물러나자 마자 견훤은 전주로 곧바로 퇴각하지 않고 925년 12월 거창(居昌) 공략을 시작으로 강주일대 20여성을 함락시킵니다. 이에 거창태수 한기열(韓基烈)은 강주도독 차윤웅에게 급히 원군을 청하게 됩니다.

몇년전에는 타도 강주도독을 떠들어 대며 반기를 들었던 천령태수(現 함양) 배한내는 거창에 백제군이 당도하자 그래도 가장 큰 세력인 차윤웅과 왕봉규에 의지하게 됩니다. 차윤웅의 뒷배라면 고려밖에 없는데 고려는 이미 멀리 떠나간 상태이고, 불러도 오지 않을 님이 되어 버린셈이지요.

 

당시 1군,현이 동원할수 있는 병력은 보통 수백에서 1천명정도 되었는데, 5군태수와 비슷한 전력을 보였던 강주와 천주의 사병은

강주 3천, 천주 2천 정도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차윤웅이 왕봉규와 연합하여 거창성에 들어간직후 백제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전세가 백제군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요.

향토예비군에 가까운 사병+농민 연합군과 일국의 정규군과는 질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거창성에서 강주군이 열세에 처해다는것은 하동태수 소격달의 귀에도 들어가게 됩니다.

소격달은 휘하 장수인 원서, 이중인, 안유생, 박옥헌, 김수봉을 이끌고 고숙 최유문의 사병과 함께

남해, 고성, 거제, 함안 4군 태수군과 함께 연합하여 거창성을 향해 진군합니다. 병력은 4천~5천쯤 되었겠지요.

 

소격달이 이끄는 5군 연합군이 거창성에 당도하자 곧 백제군과 대치하게 됩니다.

 

① 백제본군 퇴각로, 거창 침공

② 강주도독+천주+함양 연합군 거창성 입성

③ 하동+남해+고성+거제+함안 5군 연합군 거창성 당도

(그림 클릭하면 자세히 볼수 있습니다)

 

진주소씨의 기록을 947년에 만들어진 동근보(東槿譜)에는 이때 호족 연합군이 백제군을 물리쳤다고 나오는데,

백제군이 패한 전투는 남김없이 사서에 적은 고려사에 기록이 없다는 점,

단지 백제군이 거창등 20여성을 함락했다고 나오는 점으로 미루워

백제군이 거창성을 포위 공격하는 와중에 강주호족군이 원군으로 오자 굳이 무리하지 않고 퇴각한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백제군이 물러나자 거창성 일대는 묘한 상황이 되고 말지요.

백제군은 원군이 온줄 알고 물러났고,

거창성에 있는 강주도독 차윤웅과 왕봉규는 백제군이 물러나자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강주호족들이 바톤을 이어 거창성을 포위하는 꼴이 되었고,

소격달을 이끄는 강주5군은 거창성과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된것이지요.

 

백제와의 공성전에서 여러번 패전한 강주도독군은 사기가 매우 떨어져 있었고

이에 비해 백제군을 물리친(?) 강주호족 연합군은 사기가 충천하였죠.

 

거창성에 있던 거창태수 한기열은 소격달과 왕봉규가 원수지간(?)임을 알고 몰래 소격달군과 내통하여 밤중에 거창성문을

열어주어 물밀듯이 호족연합군이 거창성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이와중에 왕봉규의 천주군은 낌새를 눈치채고 혈로를 뚫고 천주로 도주하게 됩니다.

 

거창성을 접수한 소격달은 아버지의 원수 강주도독 차윤웅을 참수하게 됩니다.

소격달은 거창태수 한기열의 딸 화영부인(和英夫人) 한씨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한편 도주한 왕봉규는 서둘러 강주도독부를 접수하고 자신이 강주도독임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백제에 화친을 청하는등 강성해진 백제를 후원자로 두고자 합니다.

 

한편 강주호족 연합군도 미묘한 균열이 있었는데, 강주도독 차윤웅을 살해함으로써

표면적으로 친고려 지역을 유지했던 강주가 고려로 부터 등을 돌리는 모양새가 되었으며,

서둘러 왕봉규가 천주(現의령)와 강주도독부(現진주)를 장악하고 백제와 손을 잡음으로써

백제군과 대항했던 호족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졌기 때문이였습니다.

 

-3부에서 계속-

 

PS. 소격달이 왕봉규를 부친의 원수로 여겼다지만, 과연 왕봉규도 소격달을 원수로 여겼는지는 의문이 갑니다.

      자신의 씨앗이 아님을 알면서도 27년간 친자식처럼 키워왔고, 한지역을 내주고 자립할수 있게 도움을 줬던

      왕봉규가 자기에게 반기를 든 아들 소격달을 원수로 여겼을까요?

 

 

925년 10월 강주일대에 대격변이 일어나고, 서둘러 강주도독부를 접수한 왕봉규는 본거지 천주(현 경남의령)과 강주도독부(현 경남진주)를 장악함으로써 강주도독을 자칭하게 됩니다.

 

왕봉규는 이미 전년도 924년 1월에 후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면서 스스로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라 칭할 정도로 자신감을 내비쳤는데, 이는 당시에도 강주도독에 있던 차윤웅의 세력을 이미 넘어서고 있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즉 강주도독부 영내의 소호족들을 이미 포섭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소격달의 강주호족연합군에 의해 불시에 차윤웅이 살해 당하자마자, 왕봉규가 신속히 강주도독부를 접수한것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실권은 왕봉규에게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왜, 어떻게 왕봉규가 중국정부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는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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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봉규가 후당에 사신을 보낸 924년 1월은 공교롭게도 신라조정도 후당에 사신을 보낸달이기도 합니다.

 

삼국사절요 924년 기사中

정월 (신라)왕이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도 또한 후당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신라조정은 이미 923년 7월 후당이 건국하자 마자 창부시랑(倉部侍郞) 김락(金樂)과 녹사 참군(錄事叅軍) 김유경(金幼卿)을 후당에 입조사로 보내게 됩니다. 신라는 자체적으로 전국혼란을 평정할 힘이 없었기에, 중국과의 외교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지요.

 

그러나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진성여왕 막내아들 양패(良貝)에 관한 글중에 이런내용이 나옵니다.

후삼국초기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아찬(阿飡) 양패(良貝)가 당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후백제의 군사들이 진도(津島)에서 배길을 막고 오가는 배를 검문한다고 하자 양패는 활쏘는 무사 50명을 뽑아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했습니다. 간신히 배가 곡도(鵠島/백령도)에 이르렀을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곡도에서 10여일을 묵게 되었지요. 결국 점을 치자 곡도에 한사람만 남겨놓으면 용왕의 도움으로 무사히 당나라로 갈것이라는 점괘가 나오고 무사 거타지(居陀知)가 꼽혀 거타지만 남고 나머지 일행은 당나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이 기록을 보면 후삼국 초기에도 백제는 신라와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해 해상봉쇄를 실시하였다는 점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905년 마진국 수군장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후에도 신라에 적대적이였던 마진,태봉국 덕분에 중국과의 교류가 전무하다 싶히 했습니다. 또한 중국마저 대혼란기였다는 점도 있었지요. 그러던 것이 918년 고려가 건국하고 신라와의 관계가 개선되자, 드디어 923년 7월 막건국한 후당에 사신을 보내게 됩니다.

 

신라 → 중국 사신왕래 루트

 

위 그림을 보시면 알수 있겠지만 신라가 육로에서 해로로 들어가는 초입이 바로 강주입니다. 강주에서 배를 타고 해로를 통해

순천,여수를 지나 완도,진도를 거쳐 나주,목포에 도달한후 서해연안을 따라 백령도까지 가서 서해를 건너게 됩니다.

 

신라가 중국과 교류를 하기 위해서 필수조건이 바로 강주와 나주인 셈입니다.

신라가 후당과 교류를 한 시기는 923년 7월 ~ 927년 2월까지이며,

927년 9월 공산동수전투에서 백제가 고려에 완승한후 기세를 몰아 나주를 점령하게 되는 928~935년까지는

해로를 통한 후당과의 교류 또한 어려워지게 됩니다.

단지 932년에 신라에서 마지막으로 김불(金)과 이유(李儒)를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게 되는데,

육로를 통해서인지, 해로를 통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여하튼 중국으로 가는 첫번째 관문인 강주호족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서는 신라 사신이 당나라에 갈 배도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거슬러 올라가 924년 1월 왕봉규는 신라 사신단의 편의를 봐주는 한편, 가신을 이들과 동행시켜 막대한 공물을 후당황제에게 바쳤습니다. 이때 자신의 직함을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라 칭하였지요.

 

이후 왕봉규는 후당에 사신을 파견해 자신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즉 임시 강주도독임을 알리지요.

강주는 상당히 큰 주인데, 신라말에는 강주영내에 11군 27현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주로 오월국과 교류하던 백제가 925년 4월 후당에 사신을 보낼적에 직함이 전주, 무주, 공주 군사(軍事) 직함이였습니다.

참고로 전주는 10군 31현, 무주는 14군 44현입니다. 보통 1군,현에서 뽑을수 있는 장정의 수는 수백~1천정도 되지요.

 

후당 입장에서 보면 신라9주중 3주를 차지한 견훤이나, 1주를 차지한 왕봉규나 번신만 자청한다면야,

당나라를 계승한 정통국임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을수 있는 기회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왕봉규도 비록 강주 전역을 통제할 힘은 없었으나, 강주도독이란 자리를 당나라에서 인정받았다 하면 상당히 위상이 올라갈 뿐 아니라, 강주 영내 호족들을 통제할 명분은 생기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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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925년 10월로 돌아옵니다. 거창성에서 강주도독 차윤웅을 제거한 강주호족 연합은 그길로 각자 영지로 돌아가 해산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강주전역을 통일하여 소격달을 강주도독으로 옹립할 생각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질 않았지요. 그들의 당면 과제는 영토보존이고, 자치권 확보였습니다. 그들이 연합한것은 강주내에서 자치권을 침해하는 강주도독 차윤웅에 대한 저항이였고, 강력한 백제의 침략에 공동으로 맞서 그들의 땅을 쉽게 내줄수 없다는 무력적 항거였지요.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강주는 표면적으로는 친고려 지역이였으나, 호족들이 차윤웅을 제거함으로써 고려에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왕봉규가 서둘러 강주도독부를 접수하여 임시 강주도독임을 선포하자 호족들은 각기 이해득실을 따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왕봉규가 백제에 화친을 청함으로써 강주는 친고려 지역에서 친백제 지역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지요. 백제는 강주호족을 포섭함으로써, 대야성의 방어망이 구축되는 한편, 신라로의 진격이 한결 쉬워졌으니 왕봉규의 화친제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지요.

강주관내의 호족들이 하나둘씩 왕봉규의 회유에 넘어감으로써, 거창성 전투후 2달도 지나지 않아 전세가 역전되어

반왕봉규 포위망은 반소격달 포위망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926~927년간 친백제 세력권으로 넘어간 강주

 

926년이 되자 소격달의 원군은 거창태수 한기열밖에 없었지요. 특히나 남해태수 손평조가 등을 돌림으로써 하동군은 완전히 고립되게 됩니다. 위기에 봉착한 소격달은 고숙 최유문과 상의하여, 926년 봄 고려로의 귀부를 결심합니다. 고려에 하동군 장졸 1천명과 영지를 모두 들어받쳐 고려에 귀부하겠다는 뜻을 담은 사신을 고려에 전하자, 고려왕 왕건은 크게 기뻐하고 소격달을 장군에 봉하였습니다.

고려로써는 백제의 신라침략의 교두보인 대야성을 취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고려육군과 나주 고려수군의 협공이 절실하였는데 강주를 접수하게 되면, 북쪽 육군+나주 수군+강주호족군의 양방향 협공이 가능하게 됨으로 소격달의 귀부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였지요.

 

926년 고려에 온 백제 인질 진호(眞虎)가 죽자, 백제는 고려가 죽인것이라며 화친조약을 깨며 웅주(충남일대)로 진격합니다.

왕건은 모든성에 수비령을 내리고, 성밖을 나와 싸우는것을 금지시킵니다.

 

926년 한해를 고립무원의 고소산성에서 보낸 소격달은 이해에 아들 소진흠(蘇振欽)을 얻게 됩니다. 소격달은 고려의 원군을 기대했으나, 고려는 926년에 한번도 백제에 대한 선제 공격없이 내치에만 집중하던 터라 소격달은 힘든 한해를 보내게 되었지요.

 

해가 바뀌어 927년이 되자 드디어 고려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927년 고려 용주(경북 예천) 침공 

 

고려왕 왕건은 직접 927년 1월, 1년 2개월의 침묵을 깨고 백제성인 용주성(龍州城/경북 예천)을 침공했습니다. 이때 신라도 원군을 내어, 최초의 양국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한 셈이였습니다.

 

용주성이 함락당하자, 견훤은 당황하여 전해에 죽인 고려인질 왕신(王信)의 시신을 고려에 돌려주며 불가침 조약을 지킬것을 촉구했으나 왕건은 이를 묵살하고 계속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했지요.

 

한편 신라는 용주성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곧바로 2월 후당에 병부시랑(兵部侍郞) 장분(張芬)을 보내 신라가 백제를 쳐서 이겼다고 전공을 보고했지요. 이때에도 왕봉규의 사신도 동행한 모양인데, 3월에 돌아오는 사신편에 후당조정에서는 왕봉규를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겸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이란 직함을 하사했습니다.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은 당나라 무관직으로 정3품상에 속하며, 이민족 장수에게 하사하던 관직이였습니다.

 

고려는 용주성을 함락시킨 기세를 몰아, 동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백제령을 침공했습니다.

 

927년 당시 중부지역 고려, 백제 국경 인근 세력들

(자세히 보려면 그림을 클릭하여 원본보기 누르세요)

 

927년 3월 고려왕 왕건 운주성 친정

 

925년 백제장수 형적(邢積)이 지키던 임존성이 유금필군에 의해 3천명이 괴멸되자, 927년 당시 운주성은 백제 최전방에서

고립된 상태였지요.

927년 3월 운주성을 지키던 장수는 긍준(兢俊)이였는데 고려군에 성이 완전히 포위당하자 결국 항복해 버립니다.

 

고려는 918년 개국후 신라9주중 하나인 웅주를 지키던 이흔암을 처단함으로써 웅주관내의 수많은 호족들이 백제로 돌아섰는데,

운주성 또한 반고려정서가 팽배한 지역이였지요. 비록 3월에 운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웅주 진출의 교두보를 얻었으나, 아직도 웅주관내의 지역호족들은 고려를 달갑게 생각치 않았습니다.

 

서쪽에서 왕건이 직접 운주성을 공략하는 사이, 동쪽에서도 고려군은 용주성 인근의 근품성(近品城, 근암성近巖城)을 침공합니다.

 

927년 3월 고려군 근품성 침공

 

한편 충청도와 경북일대에서 고려군과 백제군이 치열하게 교전하고 있을 무렵, 강주의 왕봉규에게 큰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후당에서 왕봉규에게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겸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을 하사한 것이지요.

 

당나라로부터 정식적으로 강주를 다스리는 권한을 임명받은 왕봉규는 곧 회답사신을 후당에 보냅니다.

이때 사신으로 간자가 통상 임언(林彦)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임언은 누구일까?

위 그림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천안의 임언이란 사람도 있지요.

 

임언은 경기도 평택의 농성(農城)에 기반을 둔 임팔급(林八及)의 9형제중 둘째아들입니다.(후삼국인물열전 참고)

1남 임양저(林良貯) : 부 임팔급이 궁예에 투항하자 신라 조정에 투신하여 중랑장(中郎將)벼슬에 있었는데 경순왕의

                             손녀딸과 혼인하였다.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려 하자 극렬 반대하다가 선산에 유배되었다.

2남 임언

3남 임희(林曦) : 진주(鎭州/충북진천) 호족세력이자 파진찬으로 농성성주 임팔급의 셋째아들로 태조원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었다. 임희(林曦)의 딸은 2대(代) 혜종(惠宗)의 비(妃)인 의화왕후(義和王后)가 되어 흥화군(興化君),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혜공주(貞惠公主)를 낳았다.

4남 임명필(林明弼) : 진주(鎭州) 호족세력이자 한찬으로 농성성주 임팔급의 네번째 아들이다. 고려건국에 공을 세워

                             태조원년 918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딸은 숙부인 임씨(潚夫人 林氏)로

                             왕건의 비가 되어 신명왕후(神明王后)로 추존되었다. 신명왕후의 소생으로는 원녕태자(元寧太子)가 있다.

5남 임적여(林積璵) : 임팔급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조 원년(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킨후 조정을 개편하였을때,

                             사무에 통달하고 공직(公職)에 종사함에 태만함이 없으며, 처결하는데 민첩하여 진실로 여러 사람의

                             뜻에 흡족하였다 하여 알찬직에서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제수받았다.

6남 임상난(林湘煖) : 평택호족 임팔급의 여섯번째 아들로 태조 원년(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킨후 조정을 개편하였을때,

                             도항사향(都航司鄕)을 제수받았다.

7남 임식(林植) : 평택호족 임팔급의 일곱번째 아들로 태조 원년(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킨후 조정을 개편하였을때,

                       한신일(韓申一)과 함께 광평낭중(廣評郎中)에 임명되었다.

8남 임득우(林得雨) : 알려진바 없음.

9남 임몽주(林夢周) : 알려진바 없음.

 

위에 보듯이 당시 임씨 가문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가문이였죠. 특히나 고려가 개국당시 3남은 병부령, 4남은 순군부령, 5남은 광평시랑, 6남은 도항사향, 7남은 광평낭중에 있을정도로 고려내에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지요.

 

그런데 삼국사기 원문에 임언(林彦)인지 임원(林遠)이라 쓰여있는지 원서를 보지 못해 알수없으나 국역삼국사절요에는 임원(林遠)이라 적혀있고, 국역 삼국사기에는 임언(林彦)과 임원(林遠)을 동시에 쓰고 있더군요.

 

그리하여 유추해 볼수 있는 것은

1. 강주도독 왕봉규가 927년 4월 후당에 사신으로 보낸 자는 임원이지 임언이 아니다.

→ 고려사에 927년 12월 임언(林彦)이 고려사신으로 후당에 간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훗날 사관이 왕봉규가 보낸

    임원과 고려에서 보낸 임언을 혼동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 임언은 임원과 동일인물이다.

→ 위에 농성호족 임팔급의 장남 임양저는 부친이 궁예에 투항하자, 신라로 가버린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2남 임언도

    형 임양저를 따라 신라에 갔을수도 있겠지요. 임언은 신라사신단으로 후당을 왕래하면서 왕봉규와 가까워졌을 수도 있고,

    신라를 떠나 강주의 큰세력 왕봉규에게 완전히 의탁하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둘다 가능성이 있는데 일단 고려사에 임언이 등장하는 때는 927년 12월 후당사신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동생들이 고려조정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에 있었는데, 형 임언은 927년에야 고려사 기록에 보인다는 점에서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 하겠지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태조의 제11비가 되는 임언의 딸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는 고려사 후비열전에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는 경주인(慶州人)이니 태수(太守) 임언(林彦)의 딸로 효성 태자(孝成太子) 임주(琳珠)와 효지 태자(孝祗太子)를 낳았다.> 고 적혀 있습니다.

 

출생지가 경주라고 나오지요. 그렇다면 거의 임언은 형 임양저를 따라 신라조정에 투신후, 왕봉규와 가까워져 그의 사신으로 후당을 다녀왔고, 좀있음 언급될 고려군의 강주침공에서 동생들의 막강한 뒷배경에 의해 고려조정에 재임용되고, 그의 주특기를 살려 후당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천안의 태수에 임명되었으며 딸이 태조왕건과 혼인하여 제11비가 되었다고 결론내릴수 있겠군요.

 

허나 확실치 않으니 일단은 위그림에서는 천안에 기반을 둔자를 임언이라 적어 넣겠습니다.^^;

참고로 천안은 925년 고려가 백제를 침공할 목적으로 술사 예방(藝方)의 건의에 따라 대규모 군사주둔지의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930년 8월 완공되어 천안도독부를 두어 초대도독으로 황보제궁을 임명했습니다.

10만명의 군사를 주둔시킬수 있는 고정(鼓庭/군사훈련소)을 설치하여 일리천 전투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3부에서 끝을 낼려고 했는데, 쓸데없이 글이 길어지고 있네요. 다음 4부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4부내용 : 왕봉규의 몰락→소격달의 상경→견훤의 대반격→강주의 배반→절치부심 소격달→운주전투대승→통일

               →박술희편에서다→낙향→태부임명

 

 

2주간 출장을 갔다 온 터라, 다시 글을 쓰는데 감이 많이 떨어졌네요.

그럼 3부에 이어 927년 3월 강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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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대적인 백제령 침공에 따라 서쪽 충청도의 운주성, 동쪽 경북의 근품성이 고려에 함락됩니다. 고려군이 1년2개월의 침묵을 깨고 대대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하자, 강주에서 고립무원의 시절을 보내던 소격달도 고려에 원군을 청하게 됩니다.

 

고려왕 왕건은 소격달의 원군요청에 응해 나주에서 주둔중인 고려 해군장 영창(英昌), 능식(能式)에게 강주 침공령을 내립니다.

드디어 927년 4월 목포항을 떠난 고려수군은 돌산(突山), 이산(伊山), 노포(老浦), 평서산(平西山)을 침공합니다.

 

 

백제관내의 돌산을 함락한 고려수군은 곧장 남해로 진격해 이산,노포,평서산을 함락시켜 많은 포로와 군마를 포획합니다.

특히나 이산(伊山)은 남해 손평조의 거성이기도 하였지요. 손평조는 본시 신라국의 모체가 된 사로국 6부족중 3번째 부족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구례마(俱禮馬)의 후손이기도 하였지요.

게다가 돌산은 소격달과 최유문의 공동 조상인 사로국 6부족중 2번째 부족인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소벌도리(蘇伐都利)의 거점이기도 하였으니 800년간 이어진 손씨 소씨 동맹은 이때 깨어지게 된 셈입니다.

 

고려사절요 927년 4월 기사中
여름 4월에 해군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ㆍ능식(能式) 등을 보내어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강주(康州) 하돌산(下突山) 등 네 고을을 공격하게 하였다.

 

삼국사절요 927년 4월 기사中

고려에서 해군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능식(能式) 등으로 하여금 수군[舟師]를 이끌고 가서 강주(康州)를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이산(伊山)․노포(老浦)․평서산(平西山)․돌산(突山) 등 네 고을로 군사를 옮겨 그곳의 인물(人物)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927년 1월~8월 사이 고려군의 움직임

 

위그림에서도 알수 있듯이 1년2개월 동안 모든 제성(諸城)에 수비령을 내려 침묵하고 있던 고려군은

단번에 격전지였던 충청도와 경북지역을 침공한후, 수군을 동원해 강주를 점령하고 최종 목적지인 대야성을 공격함으로써,

백제의 신라침공 루트를 차단코자 하였습니다.

 

이 작전이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워 진다면 경북,경남의 모든 호족들을 손아귀에 넣을수 있었으며,

또한 반고려 정서가 팽배했던 청주이남 충청도 지역에 전력을 동원할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셈입니다.

 

다시 강주로 돌아가서 남해를 함락한 고려수군은 곧장 하동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소격달,최유문군과 합류합니다.

동원된 병력규모를 대략 짐작해 보면, 고려수군은 해군장군이 2명 동원된것으로 미루워 2천~3천.

소격달 1천, 최유문 수백 정도로 추산되며, 당시 강주도독 왕봉규 휘하의 병력은 3천~4천 정도로 짐작됩니다.

 

한편 남해가 고려수군에 의해 함락된후 강주관내 소호족들은 중립을 취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만약 소호족들이 왕봉규와 연합했다면, 고려군이 필시 이들을 응징했을 터인데 사서에 남해의 군사들만 잡아간것으로 미루워 고려수군+하동군과 왕봉규군과의 교전에는 개입하지 않은듯 싶습니다. 사세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소호족들의 행동은 당시 한반도의 대부분의 호족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요. 저는 일리천 전투전까지 후삼국 시대에 벌어진 전투는 거의다 기세싸움이다라고 정의 내리고 싶네요.

 

한번의 전투에 국운의 전부를 거는 싸움이 아닌, 승세를 이용해 세력을 확대하는 전쟁양상이 후삼국 초기부터 말기까지의 지속되었던 것이지요. 이는 중앙정권이 절대적인 군사력, 경제력을 보유했던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지요.

당시 고려나 백제의 경우 중앙군은 각기 3~4만을 보유했으나, 넓게 펼쳐진 전장에 골고루 병력을 분산배치하여

수도 송악과 전주에는 1만정도의 국왕직속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러던 것이 전장이 점차로 축소되고 집중화 되면서 양국의 군사력이 총동원되는 일리천 전투에 이른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점에서 강주와 대야성 공략은 고려에 있어 삼한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왕건의 군사적 결단이였습니다.

 

927년 4월 강주도독 왕봉규 멸망

 

927년 4월 고려+소격달 연합군(5천정도로 추산)은 강주도독부를 침공하여 드디어 왕봉규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947년 소격달에 의해 만들어진 진주소씨 족보인 동근보(東槿譜)에 의하면 이때 소격달이 왕봉규를 죽였다고 나오지요. 두사람은 부자의 인연으로 시작하여 원수로 끝이 났으니 후삼국의 혼란이 낳은 비극이라면 비극이겠지요.

 

4월 당시에 왕건은 직접 군을 이끌고 웅주일대를 공략하고 있었는데 이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최유문(崔有文)을 강주도독에 임명하고 원보 진경(珍景)을 파견하여 최유문을 감시(?)하게 하지요.

 

강주도독부를 점령한 고려군은 곧 최종 목표인 대야성을 남북 양방향으로 공격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927년 7월 대야성 함락

 

927년 7월 백제의 대야성를 지키고 있던 장수는 추허조(鄒許祖) 였습니다.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의 의형제로 연출된 추허조는 백제 왕자 수미강(1남 신검이란 설과 4남 금강이란 설이 각기 있음) 후임으로 대야성를 지키고 있던 만큼 백제국 내에서도 상당히 능력있는 장수였던듯 싶습니다. 5천정도의 백제 정예군을 보유한 대야성은 927년 7월 고려 중앙군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김락(金樂)이 이끄는 고려 육군, 영창과 능식이 이끄는 고려수군, 소격달을 위시한 강주호족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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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대야성을 공격한 고려육군의 병력수는 얼마나 될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고려는 개국당시 태봉의 17관등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단 17관등을 9등급으로 줄여 정,종을 두었습니다.

고려초는 문무의 관직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는데 고려조정 자체가 군사정권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였지요.

허나 일리천 전투직전까지의 관직 동향을 살펴보면 주로 대상(大相) 이하 관직에서 군을 움직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일리천 전투 병력을 토대로 대략적인 계급별 지휘병력은 다음과 같이 짐작할수 있겠습니다.

 

<일리천 전투시 고려군 병력동원도 총87500명(정규중앙군 43000+호족연합군35000+북방기병9500)>

좌군 기병 1만 [대상 견권3000+박술희3000+황보금산3000]+[원윤 강유영1000]
좌군 보병 1만 [원윤 능달2000,기언2000,한순명2000,흔악2000]+[정조 영직1000,광세1000]

 

우군 기병 1만 [대상 김철2500,홍유2500,박수경2500]+[원보 연주1500]+[원윤 훤량1000]

우군 보병 1만 [원윤 왕삼순3500,준량3500]+[정조 영유1000,길강충1000,흔계1000]

 

중군 친위대 3000 [원윤 정순(부관 정조 애진)1000]+[원윤 종희(부관 정조 견훤)1000]+[김극종+원보 조간1000]

중군 북방기병 9500 [대상 유금필5000]+[원윤 관무2500,관헌2000]
중군 호족연합 기병 2만[명주호족군3000/대광 왕순식(김순식),왕렴(김장렴),왕예(김예)][운주호족군 대상 긍준]

                                [원보 인일][기타 충청,패서,경기호족등]


후위원병 호족연합 보기병15000 [대상 공훤,원윤 능필,장군 왕함윤 기병300+호족연합군14700]

 

내용을 살펴보면 계급별로 인솔병력이 각기 상이함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는 후삼국 당시 고려군은 계급별로 일정한 병력을 배분받는 방식이 아니라, 출신성분(왕족등) 및 호족들의 세력에 맞게 또한 보병을 통솔하느냐, 기병을 통솔하느냐에 따라 제각각 달랐기 때문이였지요. 또한 후삼국 당시 고려군은 군사정권의 성격이 강했던 만큼 6품 원윤만 되어도 대장군이라 불리웠습니다.

이러던 것이 광종~성종조를 거치면서 무관들의 직위가 상대적으로 내려가고, 품계에 따른 지휘병력의 규정이 확실해 지면서

6품 원윤직은 낭장 정도의 직위로 내려가게 되지요.

오늘날로 따지면 후삼국당시의 6품 투스타 사단장이 고려중기에는 6품 중령 대대장급으로 내려갔다고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겁니다.^^ 

 

즉 일리천 당시의 계급을 현대군 계급으로 따져보면

대광(4성장군) > 대상(3성장군) > 원보(2성장군) > 원윤(장군)

 

이를 토대로 알기쉽게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후삼국
(문,무관)
후삼국지휘병력
(대략)
고려중기
(무관)
고려중기지휘병력
(평균)
현대군
 
1품삼중대광    
중대광    
2품대광    
정광    
3품대승 상장군3000   군단장
좌승 대장군3000   사단장
4품대상   3000(상장군급)장군1000   장군
원보   1000~3000   
5품정보 중랑장500   대령
6품원윤   1000~2000(대장군급)낭장200   중령
좌윤    
7품정조   500~1000(장군급)별장200   소령
정위    
8품보윤 산원200   대위
9품군윤 교위50   중위
중윤 대정25   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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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927년 7월 대야성을 공격한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김락(金樂)이 이끄는 고려 육군의 병력은 대략 5천~6천정도로 짐작이 되는군요. 이를 토대로 대야성을 침공한 고려연합군의 총병력은 대략 1만~1만4천쯤 되겠습니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추허조의 병력을 5천 정도로 짐작하는데,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대야성은 그만 삼방향 공격에 무너지고 맙니다.

 

 

 

물론 4월에 강주에 들어온 고려수군은 일시 본거지 나주로 돌아갔던것으로 보여지지만, 대야성을 공략하기 위해 강주진압이라는

사전작업을 진행한것으로 보아 7월 당시에는 고려수군 또한 대야성 전투에 참전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고려에 의해 강주도독으로 임명된 최유문이 소격달을 비롯한 여러 강주호족들을 인솔해 공성전에 참전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2배 이상 병력이 투입되지 않았다면 백제의 정예 중앙군 5천이 버티던 난공불락 대야성이 그리 쉽게 낙성되지는 않았겠지요.

 

고려사절요 7월 기사中

7월 무오일에 원보(元甫) 재충(在忠)ㆍ김낙(金樂) 등을 보내어 대량성(大良城 경남 합천(陜川))을 쳐서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 명을 사로잡고 그 성을 부수고 돌아왔다.

 

특이한 점은 고려군이 대야성(대량성)을 함락한후 성을 부수었다는 점입니다. 어렵게 취한 난공불락의 성을 부수었다?

쉽게 납득이 가질 않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완전히 부숴 버리는게 고려로써는 합당한 조치였습니다.

분명히 공성전에서 백제군은 30여명만 사로잡힐 정도로 치열하게 항전하였을 것이며, 이와중에 성벽이 상당수 손상되었을 겁니다.

고려군 입장에서 보면 대야성은 백제군이 강주일대와 상주일대, 그리고 궁극적으로 경주를 압박하는 백제군의 전초기지였지요.

 

대야성 같은 거대한 성이 없었다면 백제가 복종하지 않은 호족들이 산재한 경남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선뜻 배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고려로써도 주전선인 경북일대와 충청일대에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서도 병력 배치가 쉽지 않은 대야성은 그다지 필요없는 성이였을 겁니다. 인근 호족들의 귀부만 받아낸다면 자연적으로 수비는 호족들의 제성(諸城)에 일임하는 편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부서진 대야성을 복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기도 하겠구요.

 

<927년 문경일대 성과 고려군의 움직임>

 

 

<927년 7월 문경일대 백제성과 고려성 현황>  

 

본시 927년 이전까지는 문경은 완전히 백제 영향력하에 있었으나, 927년 1월 노고산성,황장성(작성),용주성, 3월 근품성이 함락되고, 8월에 정조(正朝) 제선(涕宣)에게 2대(500명)의 병력으로 배산성(拜山城)을 축성함으로써, 문경의 동쪽을 거짐 함락하게 됩니다. 이로써 고려는 황도 송악으로 부터 강주까지 완벽히 길이 뚫리게 된셈이였습니다.

 

이렇듯 927년 벽두부터 벌어진 고려군의 침공전은 상당한 성과를 이뤄 고려왕 왕건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왕건은 어찌나 기뻤던지, 갓 함락한 강주일대를 순행하는 과감성을 보이기도 하였지요.

 

 

4월에 웅주성을 직접 공략한 왕건은 웅주성주 홍기에 막혀 웅주성 공략에 실패하였지만, 황도로 회군하지는 않고 청주(혹은 충주)등지에서 머문듯 합니다. 만약 황도로 회군하였다면 강주 순행로가 강공훤(공훤)의 영향하에 있던 기주(영주)를 거쳐 용주, 근품성 루트로 갔을 것이고, 고사갈이성을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4월 웅주성 공략에 실패한 왕건은 친위대를 이끌고 청주(충주) → 괴산 → 문경세재로 순행루트를 잡았을 것으로 추측되지요. 강주로 가는 또다른 길인 청주 → 매곡성 → 삼년산성 → 상주 루트는 백제군에 의해 완벽히 막힌 상태이기도 하였습니다.

 

<강주 순행 예상 루트 1,2,3>

① 황도에서 강주까지 갔다면 : 단산(단양) → 기주(영주) → 용주(예천) → 근품 → 문경 (X)

② 문경세제를 넘어갔다면 : 청주 → 괴산군 → 고사갈이성 → 문경 (O)

③ 백제령을 넘어갔다면 : 청주 → 매곡성 → 삼년산성 → 상주 → 문경 (X)

 

 

8월 친위대를 이끌고 문경으로 향하던 왕건에게 낭보가 당도합니다. 백제장수 흥달이 지키던 고사갈이성을 막 지나던 순간이였지요. 보통 자기 영내에 적군이 지나갈때는 공격하거나, 농성하거나 양자택일인데 흥달은 아들 준달(俊達)을 보내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게 됩니다. 역시 사세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후삼국의 전형적인 호족의 태도를 보이지요. 이때 고사갈이성에 배치된 백제 병사와 관리들도 모조리 고려에 투항하게 됩니다. 본시 고사갈이성을 그냥 지나치려했던 왕건은 뜻밖의 선물에 크게 기뻐하며 흥달에게는 청주(淸州)의 식읍을 더하고, 세아들에게도 각기 식읍을 하사하지요.


문경에 당도한 왕건군은 년초부터 축성작업에 돌입했던 배산성(拜山城)을 돌아보고, 정조 제선에게 군사 500을 주어 지키게 하였지요.

그후 왕건은 느긋하게 배산성 → 근품성 → 의성 → 성주를 거쳐 부서진 대야성터를 돌아봤을 것이고 친위대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강주도독부에 당도했겠지요.

 

강주도독부에 도달한 왕건은 곧 강주도독 최유문과 하동태수 소격달의 극진한 환대를 받게 되는데,

강주의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소격달임을 알고 있던 왕건은 소격달을 휘하에 거둬들여 같이 황도로 개선하게 됩니다.

제가 볼땐 인질인듯 한데, 여하튼 소격달은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군 장교직을 맡은듯 합니다.

 

한편 927년 들어 나날이 기쁜일만 계속되고 있는 왕건의 기쁜 얼굴은 채 한달도 되지 않아 분노로 일그러지게 되게 됩니다.

견훤이 결코 당하고만 살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였지요.

또한 강주의 운명도 풍전등화 신세에 직면하게 되는 크나큰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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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글이 길어져 5부로 넘어가게 되었네요. 진짜 5부에는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2009년 9월13일 길공구-

 

P.S) 틈나면 최근 연구했던 몇몇 일들에 관한 글도 쓰도록 하겠습니다.

1. 궁예가 명주에 처음으로 입성했을때 명주군왕은 김순식이 아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명주관내 여러 호족들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궁예와 김순식의 상호 이익적인 관계

2. 오다련군의 본명은 오희 (이미 예전에 한번 쓴적이 있지요)

    장화왕후의 부친 오희와 혜종조 요직에 올랐던 오희의 세아들

3. 허월의 본명은 김영길

    허월로 알려진 김영길과 전국 각지로 흩어진 그의 형제들

 




927년 1월부터 8월까지 백제를 포위공격하듯 계속된 고려군의 충청,경북,경남일대 침공전은 표면적으로 고려의 압승이였습니다.

 

서쪽 최전방이던 임존성,운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충청권 교두보 마련

중앙북쪽 최전방이던 청천성,고사갈이성을 함락,확보함으로써 조령 확보

최대격전지였던 문경 동쪽 근품성등을 함락함으로써 죽령 확보

대야성과 마리성을 함락함으로써 강주일대 확보

 

8개월 동안의 눈부신 전공을 즐기고자 직접 고려왕은 유유히 청주 → 문경 → 성주 → 진주까지 친위군을 이끌고 순행하면서

아마 삼한통일의 대업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927년 8월 당시 고려 영향권

 

그러나 실상 문경 이하 동남쪽 땅은 고려군의 위세에 눌려 호족들이 일시 귀부하였다고는 하나,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땅이였고

충청도는 고려군에 완강히 저항하는 강력한 호족들이 산재했고,

강주는 너무 멀어, 대야성 이북의 전황에 따라 언제든지 깃밧을 뒤집어 버릴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지요.

 

충청,경북,경남일대의 호족들을 모조리 제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제왕과의 한판대결에서 재차 압승을 거둬

고려군이 완전히 백제군을 압도한다는 화룡정점을 찍어야만 비로소 대업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8개월동안 견훤은 일체 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질 않았습니다. 북쪽과 동쪽에서 연일 제성들이 함락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도 견훤은 미동조차 하질 않았습니다. 놀고 있었던 것일까요!

 

백제왕 견훤은 냉정하게 전황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북쪽은 웅주성을 비롯한 충청권 호족들이 완강히 고려에 대항하고 있는 터라 크게 걱정될것이 없었으며, 여차하면 친위군과 전북일대의 병력을 동원해 언제든 진격할수 있었지요.

강주 또한 무주(전남일대) 관내의 병력을 동원하여 압박을 가하면, 고려깃발을 단숨에 내려버릴수 있었지요.

 

견훤이 가장 예의 주시하는 것은 고려군이 경북일대로 진격하는길, 바로 죽령과 조령이였습니다.

죽령과 조령이 모두 모이는 곳이 바로 문경일대였지요. 문경만 다시 차지할수 있다면 마음놓고 아래 땅들을 요리할수 있었지요.

 

927년 9월 백제군 진군로

 

드디어 927년 9월, 전주성에서 친위대를 이끌고 출전한 견훤은 곧장 문경일대의 근품성을 공격했습니다.

거창,대야성,강주일대가 고려측으로 넘어간터라, 백제군의 진군로는 전주에서 영동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김천에서 부터 북상하여 근품성을 침공하였거나, 매곡성, 삼년산성을 넘어 상주를 거쳐 근품성을 침공하였을 겁니다.

 

백제 정규군이 문경일대를 공격할것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도 짐작가능한 일이였습니다. 그리하여 문경에 여러성을 배치해 백제군의 침공을 저지하려 하였지요. 그러나 날을 갈고 올라온 백제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였는지 근품성은 함락당하고 견훤은 근품성을 불질러 버립니다.

 

곧바로 백제군은 남하를 시작합니다. 역시 대야성이나 강주일대를 노리는 형국이였습니다. 백제군이 낙동강을 따라 남하하면서 동수(桐藪/달성군)에 이르자, 견훤은 갑자기 전군의 말머리를 동으로 향하게 합니다. 통상은 달성에서 서남쪽으로 진군하며 인근성들을 함락, 항복을 받아내면서 대야성을 거쳐 거창,강주일대로 진격하는게 일반적인 군사상식이였지요.

 

달성에서 동진한다는것은 곧 경주로 진격한다는 뜻이며, 이는 백제군에게는 엄청난 결단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단 강주,경북일대가 고려군의 수중에 있었고, 기병위주의 친위군을 이끌고 온 백제군의 원군은 인근에 존재치 않았습니다.

만약 계속 동진하게 된다면 군량확보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친고려 호족들이 각기 앞길을 막는다면 퇴로확보도 여의치 않았고

거기에 고려 정규군이 들어닥치게 되면 그야말로 적의 수중에 갇히게 되는 셈이였지요.

 

이런 리스크를 두고서도 군사적 모험을 감행한 견훤의 목적은 바로 신라국 응징이였습니다.

 

견훤은 900년 10월 전주성에 입성하면서 드디어 자신이 백제국왕임을 만방에 선포합니다. 이때 이렇게 말하였지요.

"백제는 나라를 세워 6백여 년을 전해왔는데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聯合)하여 쳐들어와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비록 부덕(不德)하나 의자왕(義慈王)의 해묵은 원한(寃恨)을 신설(伸雪)하고자 한다."

 

의자왕의 해묵은 원한을 신설한다함은 백제국의 정통후계자로써, 원수국 신라왕을 처단하겠다는 뜻이지요.

이는 백제국의 가장 원대한 대내명분이며, 백제국 건국이념이기도 하였지요.

 

또한편으로는 자꾸만 고려와 가까워지는 신라에 일침을 가함으로써,

표면적으로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에 대항한다는 불쾌한 사슬고리를 끊어 버릴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경남북 호족들에게, 백제군이 마음만 먹으면 그곳이 어디라도 쳐들어가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힘의 표출이기도 하였지요. 표면적으로 경남북 호족들은 신라의 녹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충격은 배가 될수 있었지요.

 

덤으로 서라벌을 들쑤시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려왕을 최대한 적진에서 멀리 끌어들임으로써, 한방에 일격을 가해

고려왕의 숨통을 끊어 버릴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하였지요. 어찌보면 이게 가장 큰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최전방에서 양국의 국왕이 대치한 전투는 쉽게 결판이 나질 않지요. 혹 전투에서 이기더라도 추격할라 치면, 적왕의 퇴각로가 완벽히 확보되기 때문에, 적성들을 일일히 함락하면서 쫒아갈수도 없는 노릇이고 혹 적의 제성들을 무시하고 왕을 쫒더라도, 적의 아가리에 목을 들이미는 형국이 되어 오히려 더 위험해지기도 하지요. 후에 언급될 청주전투에서 이런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여하튼 견훤은 대단한 모험을 감행한 셈입니다.

쉽게 속된말로 풀어보면

"급소에 주먹 한방 먹이고 급히 도망가면서

<나 잡아봐라~ 나 지금 네친구 혼내러 간다~

잘봐봐, 나 지금 네구역에 들어와 있어.

어때 여기서 한판 붙어볼까? 손해볼꺼 없자나,

난 지면 도망갈 길도 없어, 어때 땡기지! 열받지!

빨리 와서 한판 붙자고!>"

 

백제왕이 적진을 헤치고 서라벌로 향한이유

1. 백제국 건국이념 달성을 통한 내부사기 진작

2. 고려와 신라 동맹 차단

3. 경상도 호족에게 힘과시

4. 고려왕을 끌어들여 처단

 

백제왕 견훤은 무진주를 점령한 이후 결코 무리한 전쟁은 벌이지 않을정도로 신중한 사람이였습니다.

892년 무진주(광주,전남일대)를 점령한후, 전주성(전북일대)에 입성한 때가 900년 이였습니다.

무진주는 14군 44현으로 총동원할수 있는 장정이 5만~6만에 이르렀지만, 결코 무력으로 전주성에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호족들을 회유하고 포섭하여, 전주관내의 10군 31현이 모조리 항복을 청할때까지 결코 서두르지 않았지요.

결국 8년만에 전주관내를 순행하며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평화적으로 전주성에 입성하여 백제국을 천명하였지요.

 

궁예가 왕건을 앞세워 경기,강원,충청권을 단시간내에 점령한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입니다.

이점이 백제와 태봉의 차이점이기도 하였지요. 백제는 관내 호족들을 서서히 회유,포섭하여 스스로 머리를 숙이게 하여

백제라는 국명으로 지역민들에게 백제유민 의식을 발동시켜 강력한 내부 통치체제를 완성할수 있었지요.

반면에 태봉은 힘으로 주변호족들을 굴복시킨탓에, 항시 호족들의 배반에 신경쓸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제가 호족들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는 백제 왕족들이 백제영내 곳곳에 도독으로 파견되었다는 점입니다.

반면 고려는 통일후에도 왕족들의 식읍이 송악근처에 국한되어 있었지요.

백제가 고려에 비해 영토와 인구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한 까닭은 이에 기인합니다.

(물론 나주의 배반은 예외로 하겠습니다.)

 

견훤은 전라도를 제외한 웅주,강주,상주일대에서도 결코 무리한 영토확장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견훤이 후방 퇴로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적진으로 뛰어든것은 이제까지의 견훤의 행보와는 걸맞지 않는 일이였으나,

결코 즉흥적인 판단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견훤에게는 지난 8개월 동안의 연전연패를 만회하고자 목숨을 건 도박을 건셈이였지요.

도박이라고 하지만 견훤은 상당히 자신이 있었는가 봅니다.

 

동수에서 말머리를 돌려 서라벌로 향한 백제군은 곧 고울부성에 당도합니다.

백제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신라는 이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평시라면 분명히 백제군은 동수에서 서진하여 대야성쪽으로 진군하였을것인데, 갑자기 동진한다는것은 곧 서라벌로 온다는 것을 알아챈것이지요.

이에 경애왕은 연식(連式)을 고려에 급파하여 급히 원군을 청하지요.

 

이에 고려왕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고려사절요

왕이 시중 공훤(公萱)ㆍ대상(大相) 손행(孫幸)ㆍ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이르기를, “신라가 우리와 화호(和好)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제 급한 일을 당하였으니 구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 공훤 등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는데,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자기 신라의 도성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공산동수 전투의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1만병은 어디서 출병한 병사인가?

둘째는, 만약 1만병이 고려 황도에서 출병하였다면 왜 왕건이 직접 내려가지 않았는가?

셋째는, 공산동수전투 당시 1만 병력은 대체 어디로 간것인가?

 

이제부터 그 의문점을 개인적인 의견으로 풀어 보겠습니다.

 

우선 시중 공훤에 대해서 알아보지요. 후삼국인물열전 1000여명을 조사하면서 고려사에 공훤(公萱)으로 기록된

공훤의 본성이 강씨(康氏)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공훤이 고려사외에 사적에 실린예는 여엄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塔碑)에서 찾아볼수가 있습니다.

909년 당나라에서 나주로 귀국한 여엄대사는 곧 소백산에 은거하게 됩니다.

당시 강공훤은 소백산맥 아래 기목진(基木鎭/기주/경북 영주) 지역 호족이였지요.

강공훤은 고려개국후 여엄대사를 고려왕에게 천거하게 되고, 나주 귀국당시부터 인연을 맺은 고려왕은 여엄대사를 위해

경기 양평에 보리사(菩提寺)를 지어주기도 합니다.

 

기목진(기주)는 현 경북 영주로 고려 황도에서 경북 일대로 통하는 또하나의 길인 죽령의 관문입니다.

이곳은 고려가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되는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였지요. 그만큼 중요한 곳이기에 나주에 전시중 구진을 보냈듯이

청주에 시중 김행도를 보냈듯이, 기주에는 강공훤을 보냈습니다. 물론 시중이라는 직함이 막중한 만큼 기주에 항시 거주했을 가능성 보다는 황도에 거주하면서, 비상시에는 수시로 기주에 거주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927년 당시 강공훤의 관직은 시중(侍中)이였으며, 929년 고창전투(경북 안동), 936년 일리천전투에서는 대상(大相),

통일후에는 기주(基州) 제군사(諸軍事) 상국(上國)에 임명되었지요.(기주는 940년 기목진 → 기주 변경)

 

여기서 제군사(諸軍事)라는 것이 중앙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가 지방에 주둔하면서 유사시 인근 호족들의 군사들을 끌어모아 그군을 통솔하는 자리입니다.
918년 고려가 세워졌을 당시에도 시중 김행도가 충청도 호족들의 배반을 토벌하기 위해 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가 되어 아주(牙州 현 아산)에 내려간적도 있었지요. 상국(上國)이란 나라의 재상을 뜻하구요,. 
즉, 기주 제군사 상국이란 말은 기주 인근의 지방호족들의 군사들을 총괄 지휘하는, 중앙에서 임명된 재상이란 뜻이지요.

일리천 전투당시에도 공훤은 경북일대 호족연합군 15000을 통솔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결론은 시중 강공훤은 기주(경북 영주) 지역 호족으로, 고려조정에서 시중직에 있었으며 비상시에는 기주인근 호족들을 총괄 지휘하는 제군사(諸軍事)였다는 점입니다.

 

그럼 다시 앞으로 돌아가 고려사절요 원문을 살펴보겠습니다.

 

侍中公萱大相孫幸正朝聯珠等 : 왕이 시중 공훤, 대상 손행, 정조 연주등에게 이르기를

曰 新羅與我同好已久 : 왈 신라가 우리와 화호한지가 오래 되었는데

今有急不可不救 : 지금 급한일을 당하였으니 구하지 않을수 없다.

公萱等以兵一萬赴之 : 공훤등을 파견하여 (백제군을 쫒아) 1만병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는데

未至萱聞之 : (1만군이) 이르기전에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猝入新羅王都 : 갑자기 신라왕도로 들어갔다.


謂 이르기를

遣 파견하여

 

여기서 3가지 경우를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1. 고려 황도에서 직접 시중 강공훤에게 중앙군 1만 병력을 주어 서라벌로 보냈다.

2. 황도에서 시중 강공훤을 기주로 파견해 그곳 고려진과 인근 호족군을 인솔케 하여 백제군을 쫒게 했다.

3. 기주에 제군사로 나가 있는 강공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그곳 고려진과 인근 호족군을 인솔케 하여 백제군을 쫒게 했다.

 

1번의 경우는 오류가 있습니다. 고려 황도에는 언제든지 출동 가능한 1만명 가량의 기병이 있었습니다.

굳이 1만 병력을 먼저 보내고, 왕이 기병을 모집해 늦게 출병할 정도로 고려가 느긋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2번의 경우 일단 謂(이르기를) 이란 단어는 사자의 입을 통해 할수도 있겠으나

뒤에 왈(曰)이란 단어가 있음으로 해서 조정 회의에서 직접 왕건이 강공훤에게 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직접 왕명을 들은 강공훤은 대상 손행과, 정조 연주와 함께 몇몇 호위병만 이끌고 기주로 내려갔겠지요.

그런데 2번의 경우도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대상 손행과 정조 연주의 존재지요.

앞서 4부의 일리천 전투 병력동원도를 살펴보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띕니다.

http://cafe.naver.com/goryeosa/442 참고)

바로 보병의 총지휘자는 100% 원윤(6품 대장군급)이고, 대상(4품 상장군급)은 거의다 기병을 통솔한다는 점이지요.

4부에서 언급했듯이 대상이 인솔하는 평균 병력수는 3천정도이고, 정조(7품 장군급)는 500~1천 정도지요.

그렇다면 손행과 연주가 인솔하는 병력은 기병에다가 수는 4천정도 된다고 봅니다.

각군을 실질적으로 인솔하는 손행과 연주가 과연 강공훤과 함게 몇몇 호위병만 이끌고 기주로 내려갔을까요?

아니면 고려 황도에서 강공훤이 보병5천, 손행과 연주가 기병 5천 총 1만을 이끌고 기주로 내려갔을까요?

왕건은 나머지 황도 인근에 있는 기병을 급히 모았을까요?

 

3번의 경우가 제가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가능성일듯 싶습니다.

일단 왕건은 급보를 받고, 급히 사자를 기주에 제군사로 나가있는 강공훤에게 보냅니다.

"신속히 휘하 병력을 인솔해 백제군을 추격하라! 내가 곧 기병5천을 이끌고 내려가겠다"

강공훤은 즉각 기주인근 고려진에 주둔중인 고려 중앙군 손행과 연주가 이끄는 기병5천과 호족연합군을 끌어모아

1만명을 만들어 안동,의성을 통하거나 낙동강을 따라 남하하면서 백제군을 추격합니다.

 

927년 9월 고려군 남하도

 

저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앞서 말한 공산동수전투 미스테리 1,2번을 설명해 줄수가 있겠습니다.

 

1. 1만병은 어디서 출병한 병사인가? → 기주인근에서 출병한 병사이다.

2. 만약 1만병이 고려 황도에서 출병하였다면 왜 왕건이 직접 내려가지 않았는가? → 1만병이 황도에서 출병한것은 아니다.

   왕건은 중앙기병을 이끌고 최대한 빨리 직접 내려오려 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3번째 의문점 <공산동수전투 당시 1만 병력은 대체 어디로 간것인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진정 신라내에 친백제 세력이 있어, 백제군의 향도노릇을 해 박씨왕을 제거하고 김씨왕을 세웠던 것일까요? 저는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워 신라내에 친백제 세력이 있었다는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고 봅니다.

이문제 또한 다음편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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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길어져, 부득히 6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약속을 못지켜 죄송합니다.

반드시 6부에는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6부내용 : 백제군 서라벌 침공 → 공산동수전투 → 백제 강주함락(최유문의 배신) → 소격달 절치부심

             → 운주전투(소격달 참전해 큰공세움) → 일리천 전투 → 소격달 대장군이 되어 박술희편에 서다

             → 왕규, 왕식렴의 난 → 소격달 낙향 → 소격달 태부에 임명되다.

 

P.S) 6부에는 공산동수전투에서 전사한 8장군중 후삼국인물열전을 제작하면서 알게된 6인과 나머지 2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요.

 

 

-2009년 9월25일 길공구-

 

 

1부 : http://cafe.naver.com/goryeosa/411

2부 : http://cafe.naver.com/goryeosa/412

3부 : http://cafe.naver.com/goryeosa/413

4부 : http://cafe.naver.com/goryeosa/442

5부 : http://cafe.naver.com/goryeosa/472

 

후삼국 호족들의 각축장이던 강주(康州/현 경상남도) 그리고 소격달,왕봉규 6부입니다.

이번편은 공산전투편을 상세히 다룬덕에 굉장히 글이 길어질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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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5부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8개월동안 침묵하던 견훤은 경북 문경일대의 근품성을 함락한후 남하하여 대구 달성에 도착하게 됩니다. 달성에서 서진하여 대야성,거창,강주로 진군했어야할 백제군은 갑자기 동진를 개시하여 서라벌로 향합니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고, 왕건은 시중 강공훤에게 1만병을 동원해 백제군을 추격하라 지시하는 한편

직접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황도에서 출병합니다.

 

결국 백제군은 고울부(高鬱府/경북 영천)를 거쳐 서라벌에 입성하게 됩니다. 이때 경애왕은 포석정(鮑石亭)에서 비빈(妃嬪),종척(宗戚),공경대부(公卿大夫),종관(從官),악공(樂工),궁녀(宮女),사녀(士女)들을 대동하고 유람(遊覽)과 연회(宴會)를 베풀다가 백제군의 습격을 받았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여 현대의 일부학자들은 [포석정에서 나라를 위한 제를 지내고 있었다/신라조정내에 친백제 세력이 있었다/박씨왕과 김씨왕족들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경애왕은 친백제 인사들로 인해 백제의 침공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등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약간은 다른 의견도 있다고 봅니다.

1. 경애왕은 비상시국에 포석정에 왜 갔는가?

2. 신라내에 박씨왕을 제거하고자 백제를 끌어들인 친백제 왕족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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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분명히 경애왕은 백제군이 경주의 관문인 고울부성에 당도하자, 급히 고려에 원군요청의 사자를 보내게 됩니다.

즉 당시가 비상시국임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 다급한 상황에 포석정에 가서 유람과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지요.

 

허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시 신라조정이 관할하는 영토는 단지 경주에 불과했습니다. 명목상으로만 나라의 왕도일뿐, 군사도 변변찮게 있질 못했습니다. 즉 백제군이 온다한들 경애왕이 할수 있는게 딱히 없었다는 이야기지요.

게다가 대야성이 무너진 920년 부터 백제군은 수시로 경,남북 일대에 출병하면서 경주의 서남쪽 인근까지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920년에는 일시적으로 소율희의 영역이던 진례성(進禮城)까지 진군하기도 하였으며, 925년에도 2차 조물성 전투후 달성을 거쳐 거창등으로 진군하기도 하였지요. 즉 견훤이 경주를 침략할 결단을 내렸다면 진작에 경주에 진군했을 겁니다. 허나 5부에서도 언급했듯이 견훤은 결코 서두르는, 모험을 거는 사람이 아니였지요.

 

즉 경애왕은 딱히 할수 있는 방법이라곤 고려에 사신을 보내는 것뿐, 설마 견훤이 왕도를 넘보겠는가 하는 안일한 판단을 한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극도로 불안해 떠는 주위 사람들을 위로할 요량으로 포석정에 행차한것은 아닐련지 추측해 봅니다.

 

게다가 공산전투이후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신 문구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致使王之至尊,枉稱子於足下,尊卑失序,上下同憂,以謂非有元輔之忠純>

.........지존한 왕이 욕되이 족하에게 아들이라고 일컬었으니 존비(尊卑)가 차례를 잃게 되었으므로 상하가 함께 근심하여, '큰 보필(輔弼)의 충성이 없으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하게 할 수 있으리오.' 하였소. 내 마음은 숨겨둔 미움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임에 간절하므로, 조정을 구원하여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붙들려고 하였소. 그런데 족하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와 같은 후한 은혜를 잊어서,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사르며 대신을 학살하고........

 

<경애왕이 견훤에게 아들이라 일컬었다! 그런데 견훤 그대는 천지와 같은 후한 은혜를 잊고 경애왕을 죽였다!>

 

경애왕이 견훤에게 아들이라 일컬은 시점이 견훤에게 끌려간 시점인지, 아니면 혹 견훤의 경주 입성전은 아닌지,

문구를 몇차례 읽어봐도 정리가 잘 안되더군요.

하여 견훤의 왕도 입성전에 경애왕이 견훤에게 어떤 경로를 통해 아들이라 자청한것은 아닐까 하는 가정하에 글을 써보겠습니다.

 

경애왕이 즉위한해는 924년 8월입니다. 당시 견훤은 남부의 대야성 확보후에 경북 문경일대에서 고려군의 진격로를 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견훤은 교전국이였던 고려에도 사신을 통해 보물과 방물을 보내는등, 군사적인 적대관계와는 별개로 국가간 예의를 중시하였습니다. 그런 견훤이 신라왕이 등극하였는데 사신을 보내지 않을 까닭이 없지요.

하여 924년 8월 경애왕 등극부터 2차 조물성 전투가 발발한 925년 10월까지 백제와 신라가 서로 사신을 왕래하였을것으로 짐작됩니다. 물론 실질적인 화친관계는 아니었으나, 겉으로는 서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 견훤의 나이는 예순에 가까웠으나, 경애왕은 40대 중후반에서 50대 초반이였지요. 경애왕의 나이는 사서에 외제라고 적혀있는 김부(경순왕)의 나이에서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881년생인 김부가 924년 당시 43세 였음으로, 외가 사촌형이였던 경애왕은 40대 중반~50대 초반으로 추측하지요.

2차 조물성 전투당시 40대 후반이던 왕건이 50대 후반이던 견훤에게 상부(尙父)라 칭했듯, 경애왕 또한 견훤에게 상부라 칭한것은 아닐까 추측합니다.

 

만약 견훤의 경주입성후 겁에 질린 경순왕이 견훤에게 아버지라 불렀다면, 왕건이

<"신라왕께서 그대를 아버지라 부르신것은, 위아래가 엉망이 된셈이니 내 기필코 충정으로 이를 바로잡겠다"고 결심했는데 견훤 그대는 왕으로부터 천지와 같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어찌 왕성으로 쳐들어가 임금을 해칠수가 있느냐?>

며 순차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겁니다. 충정으로 존비의 위차를 바로잡겠다는 의미는 바로 927년 1월부터 시작된 왕건의 반격전의 명분인 셈이지요.

 

실제로 925년 2차 조물성 전투이후 고려와 백제가 화친하자 경애왕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견훤은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하여 거짓이 많으니 화친(和親)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합니다.

 

또 926년 백제군이 인질 진호의 죽음을 계기로 본격적인 고려령 침공전에 돌입하자, 또한번 경애왕은 고려에 사신을 보냅니다.

"견훤이 (2차 조물성 전투직후 화친) 맹서(盟誓)를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 번 북을 울려 병위(兵威)를 떨치신다면 견훤은 반드시 절로 패망할 것입니다."

 

게다가 927년초에는 용주성 전투에서는 신라왕은 고려에 원군을 보내기도 합니다.

 

"견훤은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것은 분명 925년까지는 신라와 백제간의 일정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즉 결론은 이렇습니다.

924년 즉위한 경애왕에게 견훤은 축하사절을 보내 교류를 시작했을 것이며, 겉으로는 국왕을 호위해 주겠다며 안심하라고 말했겠지요. 경애왕은 비록 난신이지만, 신라 인근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견훤에게 상부라고 표현하며 잘지켜달라고 화답하였을 겁니다.

허나 견훤은 지속적으로 경,남북 일대를 공략해 들어갔고, 이에 경애왕은 극도로 분노한듯 싶습니다. 하여 고려와 백제가 화친하자, 견훤은 못믿는 자라며 화친하지 말고 싸우라고 하는등 전쟁을 부추기지요. 게다가 고려가 본격적으로 백제령을 침공하자 원군까지보내며 친고려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이에 견훤은 경애왕 응징을 결심하게 된것이지요.

즉 견훤의 서라벌 입성은 이런 저런 원인들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국왕시해라는 비극이 발생한 셈이였습니다.

 

이가정을 토대로 위의 두가지 의견중 하나의 결론을 내겠습니다.

1. 경애왕은 비상시국에 포석정에 왜 갔는가?

→ 경애왕은 백제군이 고울부성까지 진군했다는것을 알았으나, 딱히 방비할 방법이 없었으며, 설마 존왕을 수차례 표명했던 견훤이 서라벌로 들어올줄은 몰랐다. 아니 들어오지 않기를 바랬다. 이에 불안을 떠는 주변사람들을 대동하고 스스로 마음도 추스릴겸, 그들의 마음도 위로해줄겸 포석정에 행차했다.

 

 

포석정은 또한가지 생각한게 있는데, 혹 포석정에서 견훤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려고 했던것은 아니였을까요?
지리적 위치도 영천에서 경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조금만 가면 포석정이니,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경애왕이 선택할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견훤을 예우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왕비,후궁,공경대신들을 대동하고 포석정에 행차한것은 아닌지 생각이 드네요.
개인을 위한 연회였다면 굳이 왕비와 후궁까지 데려갈 이유는 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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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문제로, 과연 신라에 친백제 왕족들이 있었느냐에 대한 의문입니다.

만약 친백제 왕족들이 있었다면 김씨왕족들 이겠지요. 헌데 박씨왕을 옹립한 세력은 바로 김씨왕족 출신의 김예겸(金乂謙)입니다.

김예겸은 880년 국정문란의 책임을 지고 시중에서 사직한 인물로, 효공왕 말년에 다시 정권을 쥐어 최고관직인 각간에 오르게 됩니다. 911년 효공왕이 승하하자 이간(伊干/17관등중 2위) 박문원(朴文元)의 아들 박경휘(朴景暉)를 옹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신라조정은 왕족아닌 사람이 드물정도로 고위관직의 대부분을 김씨왕족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동의없이 박씨왕이 옹립되는것은 사실상 힘들었지요. 게다가 이시기 신라는 거의 국가라 볼수 없을정도로 일개 1군,현정도의 세력에 불과했습니다.

비록 명주호족 김순식의 숙부인 청도 김식희(金式希)나 추화산성의 손긍훈(孫兢訓), 농성호족출신의 임양저(林良貯)등이 신라를 구원하겠다고 서라벌의 방패막이가 되기도 하였으나, 경주에 세금을 내는 군현은 거의 없었지요.

이런 이름뿐인 왕국의 왕성에서 과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내분이 심했을까요? 권력이란게 실체하지 않는 허울뿐인 권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김씨왕이니, 박씨왕이니 서로를 죽일듯이 정쟁을 했을까요?

또한 박씨왕들은 모두 김씨왕족들과 혈연으로 뭉쳐져 있는 관계입니다. 박씨 경애왕과 김씨 경순왕은 외가 사촌형제입니다. 게다가 경순왕의 왕비 소원왕후는 박씨왕족 박광우(朴光佑)의 딸로 박씨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지목하는 백제를 끌어들였다고 주장하는 김씨 왕족들은 실상은 모두 혈연으로 박씨왕족과 결합된 이들입니다.

 

또한 927년이후 8개월동안 표면적으로 경,남북 일대는 고려의 영향력이 막강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대야성마저 고려군에 의해 함락되어 한마디로 대세가 고려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신라 김씨 왕족들이 견훤과 손을 잡을 이유가 있을까요?

견훤의 힘을 빌려야 박씨왕을 제거할수 있을만큼, 박씨왕의 세력이 강했던 것일까요?

얼마 되지 않지만, 신라의 병사들은 모두 김씨왕족들이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신라조정의 최고 관직을 쥐고 있던 자들도 김씨 왕족들입니다. 이들이 뭐가 아쉬워 적대적인, 게다가 대세도 아닌 견훤을 끌여들여 과연 박씨왕을 제거하려고 하였을까요?

 

또한 많은 분들이 박씨왕이 들어선 15년동안 내분이 심했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표면적으로 15년동안 사서에 나타난 반란기록은

918년 일길찬(一吉飡) 현승(玄昇)의 반란 딱 한번뿐입니다. 오히려 박씨왕이 들어서기전 말기 김씨왕의 통치기간에 훨씬 반란기록이 많습니다. 헌정계(憲貞系)와 균정계(均貞系)로 나뉘어 서로 죽고죽이는 피비린내나는 정쟁속에 후삼국이 등장하였고, 국왕의 국정문란죄를 핑게로 일어난 반란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박씨왕이 옹립되던 신라는 겨우 경주 1주만을 다스리는 도시왕국이 되었으며, 더이상 권력이란것이 존재치 않는 그런 쓰러져 가는 쿠테타가 의미없는 망국일 뿐이였지요.

 

또 견훤이 서라벌에 입성후에 포석정에서 신라 고위대신들을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견훤과 신라권신간 사전 상호 합의설은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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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신라에 친백제계 인사들이 있었든, 없었든 견훤은 서라벌에 입성해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많은 인물(人物)을 끌고 퇴각을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고려에서 원군이 온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겠지요.

 

이들이 맞붙을 전장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바로 현재의 대구일대였지요. 그럼 공산동수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아래 그림을 보시죠.

 

고려 VS 백제 1,2차 교전

 

고려군 후퇴와 3차 교전

 

4차교전인 공산전투에서 고려군 궤멸 / 왕건의 홀연단신 도주로

 

전체적으로 이 3장의 그림이 당시 교전상황을 말해줍니다. 당시 고려군과 백제군의 교전상황은 사서에는

 

고려사 927년 9월 기사中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 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을 빼앗고 전야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이렇게만 나옵니다. 허나 현재에도 그당시의 전투에 관한 지명과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 하여 모든 지명의 연관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본결과 위그림과 같은 고려군과 백제군의 동선을 그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순차적으로 공산전투가 어찌 돌아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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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군 VS 백제군 1,2차 교전

 

우선 5부에서 언급한대로 시중 강공훤이 이끄는 병력 1만은 기주(영주)를 출발하여 백제군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견훤이 서라벌에 들어간 직후에 진군을 멈췄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미 서라벌로 들어가 상황이 끝난터라, 강공훤이 독단적으로 백제군과 싸울 이유가 없었지요. 황도에서 정예기병 5천이 남하하고 있는데 굳이 각개격파의 빌미를 제공할 필요는 없었지요.

이에 사학자 몇몇 분은 1만병이 공산전투 이전에 백제군에 의해 궤멸되었다고 하시던데,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시일이 너무 촉박하기 때문이지요. 만약 1만병이 공산전투이전에 궤멸되었다면 그 장소는 영천이 되어야 맞는데, 영천은 견훤군과 왕건군의 주력이 처음으로 맞붙은 은해사에서 10km 이내에 있습니다. 서라벌에서 나와 은해사까지는 고작해야 40km입니다. 고작 1~2일만에 도착할 거리에 전장이 두곳이라는것은 말이 되지 않고, 그렇게 싸웠다면 강공훤은 중죄중에 중죄겠지요.

만약 공산전투 이전 강공훤군 격파설이 맞으려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공산전투 이전 고려 1만병 격파설이 성립하려면

 

하여 저는 칠곡(대구 북구 학정동)에서 강공훤군과 왕건군의 합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강공훤군이 왕건이 오기전에 백안동을 거쳐갔을 확률이 없다는 점이 이 가능성을 더 높혀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백안동 이야기는 조금후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강공훤이 이끄는 병력은 1만이였습니다. 병력구성은 일단 주로 기병을 이끌었던 대상 관직의 손행과 연주의 병력은 기병 3~5천으로 추산되며, 이들은 기주 인근의 고려진에 주둔중이였겠지요. 강공훤은 인근에서 호족들의 병력 5~7천을 끌어모아 총1만병을 이끌고 백제군을 추격했습니다. 그들이 칠곡(대구 북구 학정동)에 다다르자 서라벌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전해듣고 강공훤은 이곳에서 왕건의 친위군을 기다립니다. 강공훤과 합세한 고려군은 총1만5천에 이르렀습니다. 기병의 비율은 1만 가까이 되었지요.

 

고려군 무태 → 백안동 진군로

 

고려군은 칠곡을 거쳐 오늘날 무태(無怠)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무태는 이곳을 지나면서 왕건이 군사들에게 태만하지 말고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혹은 고려군이 2차 교전후 퇴각하면서 태만하지 말고 빨리 발걸음을 해 도망치자고 해 무태이촉족(無怠以促足) 이란 설도 있습니다. 또다른 설은 왕건과 신숭겸이 이곳을 지나가면서 밤늦게 길쌈을 하는 아낙네들을 보고 동직조이무태(動織組而無怠), 일을 함에 있어 게으르지 않다고 하여 무태란 설도 있습니다.

 

또 왕건군이 오늘날 연경(硏經)을 지나면서 어떤 마을사람이 경서를 읽고있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여 이마을은 경서를 연구한다 하여 연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고려군이 무태, 연경을 지나던 시각은 오전이라고 추측합니다.

 

(위에 동직조이무태 설에 의하면 늦은 밤이 될수도 있습니다만, 매복지를 서라벌과 칠곡사이의 한가운데 은해사로 잡은점등을 미루워 이른 아침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칠곡(대구 북구 학정동)에서 왕건이 매복한 은해사, 금호면까지는 대략 35km,

서라벌에서 은해사,금호면(경북 영천 금호읍)까지는 대략 45km쯤 되기 때문입니다.

대략 10km의 여유를 두고 왕건은 매복지를 은해사로 정한것이지요.

당시 후삼국 보기병이 하루에 진군할수 있는 거리는 30~70km 정도로 추산합니다.

제가 15년전에 공수특전부대에서 군생활을 할당시 산길,논길로 100km를 딱 26시간만에 주파했던 기억이 나네요.

기병의 비중이 많았던 고려군은 칠곡에서 은해사까지 꽤 빠른 속도로 진군했을 것이고 오후 3~4시경에는 은해사에 도착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반면에 서라벌에서 많은 인물을 포획한 백제군의 진격속도는 상당히 느렸을 것으로 파악되지만, 고려군의 반격을 예상했던 견훤이니 만큼 포획한 인물은 소수병력으로 후방에서 천천히 오게 하고 주력군은 상당히 빠른속도로 영천을 향해 진군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두 주력군이 맞붙은 은해사에 맨먼저 도착한 군은 오후 3~4시 경의 고려군이였을 겁니다. 이때 백제군은 5km~10km 인근에서 금호면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겠지요.

 

일단 앞으로 돌아가 고려군은 이른 아침에 무태와 연경을 지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진군하다가 드디어 백안동에서 백제군과 처음으로 교전하게 됩니다.

당시 백안동에는 백제 첨병 수십과 동화사 승병 1천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대체 동화사 승병 1천은 왜 고려의 앞길을 막은 것일까요? 후삼국 당시 이근방에는 파계사와 동화사의 큰절이 있었는데

특히 동화사(桐華寺)는 친백제계 사찰이였습니다. 그 연유는 150년전으로 돌아가 백제율종(百濟律宗)을 이어받은 금산사의 진표(眞表) 대사가 크게 깨우침을 얻고 팔공산 동화사에게 진표율종(眞表律宗)를 개창함으로써 시작됩니다. 뿌리가 백제계 종파인만큼 후삼국당시 견훤을 지지했던 것이지요. 고려사 병지에 동화사의 승병 1100여명을 수시로 동원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하여 동화사의 승병은 대략 1천정도로 추산합니다. 일설에는 파계사도 고려군의 앞길을 막았다는데, 그렇게 되면 많게 잡아 2천정도의 승병이 백안동에서 고려군을 맞이한 셈입니다.

 

그런데 고려15000 vs 백제 첨병+동화사 승병+(파계사 승병) 1천~2천의 전투는 아주 싱겁게 끝이 나고 맙니다.

공산전투후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삼국유사 견훤편中

桐藪 今桐華寺 望旗而潰散 : 동수 지금의 동화사 는 깃발만 바라보고 도망쳐 흩어졌고

 

즉 1만5천의 대병을 본순간 1천정도의 동화산 승병들은 우루루 무너져 산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이지요.

일단 동화사 승병들이 산에서 내려와 백안동에서 고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백제군의 정보망이 고려군의 움직임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는 이야기이겠지요. 이는 고려군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하니 실상 매복이나 요격등은 불가능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1만명 이상의 대병들이 움직이는데, 게다가 이동로도 뻔하고 곳곳에 첨병이 배치되어 있는 판국에

드라마처럼 <여기에 매복한다~ 불화살과 돌덩이를 쏴대며 돌격하라~> <앗 매복이다~ 후퇴하라~>는 성립되기 힘든 전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전장으로 선택한곳은 죄다 넓디 넓은 평원이였으니 말입니다.

 

여하튼 동화사 승병은 우루루 산으로 도망쳤고, 같이 있던 백제 첨병도 이사실을 견훤에게 알리기 위해 급히 동쪽으로 말을 몰았을 겁니다. 삼국유사에 동화사 승려 석충(釋沖)이 고려왕 왕건에게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고 하는데, 이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수 없으나 급하게 군을 이끌고 가는 고려군을 생각해 보면 훗날의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유있게 동화사 승병을 물리친 고려군은 진군을 계속합니다. 백제군의 정보망에 노출됐다는것을 알아챈 왕건은 군의 진격속도를 높혀 서둘러 은해사로 달려갔을겁니다.

 

고려 vs 백제 2차교전(주력군)


 

 

은해사입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4시경으로 추측합니다. 은해사 입구에 임시로 진을 친 왕건은 곧 군사회의를 열고, 백제군의 위치확인, 백제군을 요격할 장소 등 구체적 작전을 짯을겁니다. 그리고 지금의 외촌 면사무소 등지의 사각에 병력을 배치하고 백제군을 기다립니다. 아마 백제군이 동강을 건너는 직후에 적의 측면을 공격할 요량이었던듯 싶습니다. 황혼이 지는 6~7시경에 드디어 백제군의 선봉이 지금의 금호면에 도착합니다. 아마 고려군이 없었다면 이곳에 진을 치고, 하룻밤을 자고 갔을지도 모를 노릇이겠지요.

 

당시는 음력 9월 중순을 넘은터라, 벼는 대부분 추수되었고 논바닥은 바짝 말라있던 상태였습니다. 고려군의 움직임을 모를리 없는 견훤왕도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였을 터이지요. 점심도 든든히 먹었을 것이고 군의 사기도 신경쓰면서 곧 교전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병사들에게 주지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 깊숙히 들어와 신라왕을 죽이고 마음껏 신라왕도에서 약탈을 자행한터라 병사들의 사기는 상당히 올라가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말하듯이 매복과 역매복의 전술도 펼쳐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겠습니다. 만약 역매복이라면 일부 병력을 후방으로 빼 적의 좌익 측면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을듯 하네요.

 

백제군이 역매복을 하였다는 가정하에 가정해본 백제군 별동대 기습로

 

2차 교전에서 고려군은 수세에 밀리게 됩니다. 진형이 흐트러지자 곧 고려군은 퇴각명령을 내립니다. 좌익부터 동강과 산사이의 평지를 급히 도주했을 것이고 이에 비례하여 고려군은 길게 늘어지게 됩니다. 급하게 퇴각하던 왕건은 은해사 초입의 한 언덕에 올라 속속 태조지앞에 허겁지겁 도주해 오는 아군을 진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을 겁니다.

이곳에서 군을 수습하고 임시 군사회의를 열었던 곳이라 하여 이봉우리의 지명이 태조지(太祖指)가 되었다 하는데 자세한 곳을 알수가 없고, 단지 은해사 초입이라고만 알려져 있더군요.

태조지에서 임시로 군사회의를 연 왕건은 본군의 피해없는 퇴각을 위해 후위 방어를 맡을 장수를 선택했을 것이고,

남은 장수가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을 사수하여 본군의 퇴각시간을 조금이나마 벌어주었을 것입니다.

이 장수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아마 8장군중 한명이 될듯 하네요. 8장군에 대해서 뒤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급하게 퇴각하는 고려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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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군 후퇴와 살내 3차교전

 

 

고려군은 아주 급하게 현 지묘동 위에 있는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뒤에서는 백제군이 추격나팔을 불며 급하게 추격하였지요.

하여 이 고개를 나팔고개라고 지명이 붙었습니다.

역시 고려왕 왕건이 퇴각중에 왕산에 올랐다고 하여 이산의 이름은 왕산(王山)이라 이름이 붙었습니다.

 

 

계속 후퇴를 거듭하던 고려군은 드디어 살내에서 전열을 가듬듬고 반격준비를 시작합니다.

혹은 살내에서 고려증원군이 합류했을것이라는 설도 있더군요.

여하튼 고려군을 추격하느라 역시 길게 늘어졌던 백제군의 선봉도 살내에서 고려군의 반격을 받고 주춤하게 됩니다.

곧 백제군의 본군이 도착하게 되고 양군은 살내에서 재차 대치하게 됩니다.

 

나팔고개 → 왕산 → 살내까지의 고려군 퇴각로

 

고려군과 백제군의 제3차 교전장소인 살내천

 

이 살내는 오늘날 서변천하류로 큰강인 금호강이랑 만나는 지점입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폭이 좁아 물살이 쎄다하여 저탄(猪灘)이라 기록하였으며, 고려군과 백제군이 서로쏜 화살이 내에 가득찼다 하여 살내천이라 이름 지어졌습니다. 한문으로는 전탄(箭灘/화살이 쌓인 여울)이라고 불리더군요.

 

그럼 여기서 잠깐 시간변화에 대해 알아보지요.

오후 6,7시경에 와촌,금호면 일대에서 2차교전을 시작한 양군은 아마 오후 8~10시까지 격전을 벌렸을 것입니다.

오후 10시경부터 퇴각을 개시한 고려군은 태조지부터 살내까지 약 30km 거리를 급히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뒤쳐지면 죽는 급박한 퇴각길에서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말을 몰거나 뛰었을테니, 새벽녘에는 살내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살내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고려군은 그곳에서 말을잡든, 인근 고을에서 양식을 착출해오든 혹은 원군이 왔던간에

급히 밥을 해먹고 속속 도착하는 고려 패잔병을 수습했을 겁니다. 와촌벌판에서의 전투에서, 추격전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더라도

1만명정도로 추산되는 백제군을 이곳 살내에서 일시 몰아부쳤던 기세로 보아 고려군도 족히 1만명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한편 고려군을 추격하느라 길게 늘어진 백제군도 속속 살내천에 도달해 감히 도강하지 못하고 본군이 도착하길 기다렸겠지요.

곧 백제 본군이 도착하고 양군은 살내를 두고 치열한 화살싸움을 하게 됩니다.

 

일단 먼저 도강한 고려군이 상당히 유리한 입장이였지요. 물살이 쎈터라 백제군이 도강하고자 한다면 큰돌을 놓던가, 교각을 설치하던가 해야하는데 이걸 고려군이 가만히 놔두지 않겠지요. 이게 아니다면 멀리 북쪽의 산을 넘어 우회하는 방법도 있긴한데 이렇게 되면 진형이 흐트러질 위험성이 높았지요.

또한 위그림에서 보듯이 고려군은 살내 서쪽에 진을 펼쳤는데, 쫒아온 백제는 살내천에 의해 진형이 둘로 갈린 상태였지요.

지형적으로 고려가 왜 살내에서 반격을 시도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왕건 또한 지형지물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는데 도가 튼 사람이기 때문이였죠.

게다가 또한가지 먼저 기다리는 고려군은 일시 휴식도 취하고 배도 채웠을 터이지만, 밤새 고려군을 쫒아온 백제군은 상당히 배가 고픈 상태였겠지요.

 

하여 견훤은 일시 후퇴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 후퇴는 고려군을 궤멸시키고자 하는 술책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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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차교전 공산전투

 

공산일대에서 고려군 추격개시, 복현동에서 백제군 매복 기습작전 개시

 

견훤군이 살내에서 퇴각하기 시작하자, 고려군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도강하여 추격을 개시합니다.

백제군은 해가 뜰무렵 퇴각을 개시해 무태 → 연경 → 공산까지 퇴각한후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오늘날 불로동 → 지저동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허나 이는 유인책이였지요. 지리적으로 불리한 살내에서 싸우기 보다 고려군을 유인하여 매복을 통해 적의 허리를 끊어 버리는 작전을 짜게 된것이였습니다.

 

고려군은 백제군의 후미를 쫒아 현 불로동까지 추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불로동의 지명의 의미는 조금 후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고려군이 금호강을 따라 지저동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때 복현동(伏賢洞)에서 매복한 백제의 군사가 비교적 물이 얉은

신암 5동일대의 금호강을 도강해 고려군의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복현동(伏賢洞)은 견훤의 군사가 매복(埋伏)했다하여 복현동, 권훤념이란 지명이 되었습니다.

 

매복작전에 걸린 고려군

 

게다가 도주하던 백제 본군도 말머리를 돌려 반격을 시작합니다. 고려군은 앞뒤로 허리가 짤려 전면 선봉은 백제 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우측과 후방은 백제 기습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우왕좌왕 허둥대기 시작하지요.

통상적인 진군상태에서 매복기습작전을 당한게 아니라, 급하게 백제군을 추격하는 와중에 기습을 당한터라 군의 동요상태는 한층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왕건은 패색이 짙어지자 급히 퇴각명령을 내리고 공산까지 퇴각을 합니다.

 

공산에서 완전히 포위당한 고려군

 

고려군을 현 지묘동 왕산앞까지 몰아붙인 백제군은 곧 포위섬멸전에 돌입합니다. 고려군은 완전히 독안에 든 쥐였으며 도망칠 곳은 좁다란 산을 기어올라 뿔뿔히 흩어져 도망가는 길밖에 없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좁고 험준한 산길로 도망쳐보았자, 얼마 가지 못해 백제군의 추격에 모조리 척살당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패배는 기정사실이였으며, 이제 남은 병사는 1천도 채되지 않았겠지요. 이에 신숭겸과 김락등은 마지막 묘안을 짜냅니다. 바로 고려왕 왕건을 이 사지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습니다. 만약 오늘 이 전투에서 왕건이 백제군에 사로잡히거나, 목숨을 잃는다면 고려는 사직자체가 흔들려 최악의 경우 망국의 길로 들어설수도 있는 절대절명의 위기였습니다.

하여 국왕을 탈출시킬 묘안을 짜낸 곳이라 하여 이곳의 지명은 지묘동(智妙洞)이라 이름 지어졌지요.

 

고려군의 최후의 돌격과 파군재에서 괘멸 진행도

 

신숭겸과 김락이 최후의 돌격을 준비하는 동안 국왕 왕건은 변복을 하고 홀연단신으로 지묘동 북동쪽 산으로 기어올라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남쪽으로 도주합니다. 북쪽으로 향할경우 곧바로 백제군의 추격을 받기 쉬웠기 때문에 왕건은 백제군의 허를 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건은 곧장 남쪽으로 도주하지는 않았습니다. 죽음으로 자신을 지켜줄 여러 장수와 군졸들의 최후를 직접 보기 위해서인지 현재의 독암서당이 있는 산으로 기어올라가 파군재가 보이는 바위에 숨어 전황을 지켜보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왕의 복장을 한 신숭겸과 김락은 각기 부대를 이끌고 혈로를 뚫어 돌격을 개시합니다. 아마 고려국왕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몇 장수들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고려병사들은 신숭겸을 국왕으로 알고 모두 마지막 희망을 쫒아 혈로를 뚫었겠지요.

 

그러나 고려군은 채 1km도 가지 못하고 드디어 오늘날 파군재 삼거리에서 모조리 궤멸되고 맙니다. 그 모습을 300m도 채안되는 독암 바위에서 왕건은 눈물을 흘리며 지켜 보았겠지요.

 

고려군사가 모두 파군된 언덕이라 하여 이름 붙혀진 파군치(破軍峙)/파군재 (재는 당시 왕도 개성의 사투리로 언덕이란뜻)

고려왕 왕건이 홀로 앉은 바위라 하여 독암(獨巖)/독좌암(獨坐巖)

 

그러나 신숭겸과 김락은 아직 죽은게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기마대장들 답게 끝까지 저항을 계속 했습니다.

 

신숭겸의 최후

 

신숭겸은 파군재에서 모든 고려군사가 괘멸하고 김락이 남쪽으로 도주하자, 방향을 선회해 북쪽으로 말을 몰고 갑니다. 거의 홀연단신으로 백제군을 뚫고 지나가던 신숭겸도 결국 현재의 고려장절신공순절지지(高麗 壯節申公殉節之地)가 세워진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당시의 병사들이 신숭겸을 고려왕으로 알고 신숭겸의 목을 베어 창에 꿰고 갔다는 말로 미루워, 당시 백제군내에는 고려왕을 생포 또는 척살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던듯 싶습니다. 병사들에게 적왕의 목이란 거의 최고수준의 포상이 기다리고 있던 터라, 앞다퉈 신숭겸을 쫒았던 모양입니다.

왕건은 신숭겸이 전사한곳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신숭겸의 명복을 빌었지요.

 

한편 파군재에서 고려군이 궤멸되고, 북쪽으로 신숭겸이 도주하자 김락은 그 틈을 이용해 계속 남하합니다.

하지만 김락도 얼마 가지 않아, 부상이 심하였던지 산속으로 도주하게 됩니다.

 

김락의 전사

 

백제군은 공산전투 당시 김락의 시신을 찾지 못한듯 싶습니다. 워낙 관심이 고려 국왕으로 분한 신숭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김락을 끝까지 추적하지는 못한듯 싶습니다. 그러나 김락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결국 미리사앞에서 쓰려져 죽게 됩니다.

 

김락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역시 공산전투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신에 나와 있습니다.

 

927년 12월 고려사 기사中

月內,左相金樂,曝骸於美利寺前 : 이번달(12월)에는 좌상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들어냈고

 

그런데 고전번역원이나 많은 서적에서 이를 오역하는 덕에 많은 혼란이 있게 됩니다.

 

고전번역원의 고려사절요 국역中

(12월)이달 안에 좌상(左相) 김낙(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쓰러져 죽었으며

 

또한 동사강목의 안정복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고 김락의 죽음을 12월로 생각해

견훤의 서라벌 입성을 11월로 보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동사강목 927년 기사中

동11월 진훤이 왕을 포석정(鮑石亭)에서 시해하고 문성왕(文聖王)의 후손 김부(金傅)를 세워 왕을 삼은 다음,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가니, 고려가 구원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또 인터넷에 떠도는 국역된 삼국유사에서는 역시 김락의 전사를 12월로 적어 놓았더군요.

 

국역 삼국유사中

또 이달(12월) 안에는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戰死)했소

 

삼국유사 원본中

月內, 左將 金樂 曝骸 於 美利寺 前, : 월내에는 좌장 김락이 미리사앞에서 해골을 들어냈으며

 

이렇듯 김락의 죽음에 대한 오역으로 인해 공산전투가 12월에 벌어진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일부 사학자들이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앞뒤 정황상, 또한 견훤이 왕건을 추격하기 위해 들판에 쌓아둔 벼를 불살랐다는 기록으로 미루워 한겨울인 음력 12월이 아니라, 늦가을인 음력 9월이 공산전투가 벌어진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김락의 해골이 발견된것이 산중 미리사 앞인것을 생각해보면 부상을 입고 도주중인 김락이 산을 올라 미리사까지 갔다가 쓰러져 그자리에서 죽은걸로 생각됩니다. 공산전투 직후 견훤은 왕건을 추적하기 위해 공산일대를 쥐잡듯이 수색하였으며, 결국 12월초에 미리사앞에서 찾은 시신이 김락의 시신임을 알게 된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미리사는 현재 그 위치를 알수 없으나 제 짐작으로는 위그림의 장소가 아닐까 얼핏 짐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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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홀연단신 왕건 도주

 

다시 시간변화를 살펴보지요. 새벽녘에 살내에서 반격전을 시도했던 고려군은 아침무렵까지 살내천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화살싸움을 벌인듯 합니다. 곧 해가 뜨자 백제군은 살내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공산으로 퇴각을 개시합니다. 아침 8~9시부터 추격전을 개시한 고려군은 7km가량을 추격하여 오전 11시쯤에 지저동까지 추격하게 됩니다. 오전 11시 복현동에서 매복한 백제군이 측면을 기습하자 고려군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치열한 교전끝에 퇴각명령을 내린 왕건은 오후 2~3시쯤 지묘동까지 밀리게 됩니다. 포위망을 구축하고 급하게 몰아쳐 오는 백제군을 따돌리기 위해 왕건이 변복을 하고 도주를 시작한때는 오후 3시경이 되겠지요. 3시부터 동쪽으로 크게 돌아 독암에 올라갔을때는 오후 5시쯤. 끝까지 시간을 벌고 있던 신숭겸과 김락이 최후의 돌격전을 감행한 시각은 역시 오후 5시경. 드디어 해질무렵 신숭겸은 석양을 뒤로하며 숨을 거두었고, 김락도 초저녁에 미리사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 했습니다.

시간변화는 왕건이 도주하면서 들린 지역의 지명을 통해 얼추 유추가 가능합니다. 허나 위에 언급한 시간은 제가 짐작한것이지,

실제일지 아닐지는 그때 살았던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할듯 하네요.

 

자그럼 절체절명의 위기 고려국왕 왕건은 대체 어떻게 혈로를 뚫고 무사히 황도로 돌아갈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제부터 알아보겠습니다만, 정말 글이 너무너무 길어져 부득히 하게 다음편으로 넘기고자 합니다.

 

매번 약속을 못지켜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원래는 이글의 주제인 강주호족관련글을 위주로 쓰려 하였는데,

이 공산전투는 대충 넘기기가 아쉬워 부득히 굉장히 상세하게 글을 쓰게 되었네요.

 

다음 7부에는 정말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2009년 추석에 길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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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8장군에 대한 글을 깜박할뻔 했네요.

일단 제가 2년전에 후삼국인물열전 900여명을 조사하면서 알아낸 바있는

8장군중 6인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호의(扈義), 전의갑(全義甲), 전이갑(全以甲), 전락(全樂)은 거의 확실한듯 싶습니다.

 

나머지 2인에 대해서는 최근에 조금 생각하고 알아본바 유력한 인물 둘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김철(金哲)과 손행(孫幸)입니다. 저는 김락의 동생으로 김철(金鐵)[공산전투 직후 태조에 의해 특별히 원윤으로 승진, 후에 대상까지 벼슬이 올라 일리천 전투에서 우익을 맡음]만을 생각했는데 고려사를 살펴보다 다음의 기록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고려사 열전 윤소종(尹紹宗)편中

在太祖時,金樂金哲,尙不得與六功臣之列

윤소종이 말하기를 "상벌은 나라의 최대 권한이니 함부로 내릴 것이 아닙니다. 우리 태조는 40년간 정벌하였는데도 공신이라고 부르는 자가 6명이었습니다. 김락(金樂), 김철(金哲)은 태조 대신에 죽었으나 그래도 6공신의 대열에 들지 못하였습니다."

 

김철(金哲)이 김락의 또다른 동생인지는 알수 없으나, 당시 공산전투에서 유독 형제들이 많이 참전한것으로 미루워, 같은 부대에 형제장수들이 배속이 많이 되어 있던 모양입니다. 하여 김철(金哲)도 김락의 형제중 한명으로 김락(金樂),김철(金哲),김철(金鐵)

3형제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김락(金樂),김철(金哲)은 공산에서 전사한것으로 보구요.

 

나머지 1인은 처음에 저는 동국여지승람에 모사태조 하였다가 견훤과 싸워죽었다는 김홍술(金洪術/金弘述)도 포함되지 않나 생각했는데, 만약 의성의 홍술과 김홍술이 동일인물이라면 당시 홍술은 2년후에나 전사함으로 8장군은 아닌듯 싶습니다.

 

하여 확실치는 않지만 단지 공산전투에 참전했을것으로 생각되는 앞서 말한 1만병을 거느린 공훤,손행,연주중에

공훤과 연주는 일리천 전투에 참전하지만 손행은 그이름이 더이상 사서에 나오지 않는점 때문에 손행이 2인중 1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대상정도의 벼슬을 지낸 손행이 일리천 전투에 참전치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이기 때문이지요. 왕건은 신임한 무장은 끝까지 믿어주는 군주였기에 손행이 더이상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그가 공산에서 전사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하여 제가 조사한바 공산에서 전사한 팔공신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호의(扈義),전의갑(全義甲),전이갑(全以甲),전락(全樂),김철(金哲),손행(孫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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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인물열전 1100여명中


김철(金鐵) 고려

고려의 개국공신 김락의 동생으로 김락이 공산전투에서 전사하자 태조가 애통해하여 김철을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일리천 전투에 벼슬은 대상으로 홍유, 수향(守鄕),왕순(王順),준량(俊良)과 함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우익(右翼)을 맡았다.

 

김철(金哲) 고려
중화김씨(中和 金氏)의 시조로 신라 문성왕의 5세손이다. 당악김씨(唐岳 金氏)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김락(金樂)의 동생이며, 김철 또한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본향은 순천(順天/평남 순천)이였으나 후에 중화(中和/평남 중화)로 나왔다. 중화는 고려초에 서경에 편입되어, 형 김락과 함께 서경개척에 공을 세웠다. 927년 9월 공산전투에서 형 김락과 함께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호의(扈義)/호원보(扈元甫) 고려

(?~927) 신평호씨(新平扈氏)의 시조이며, 고려 태조 1년 건국에 공을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고,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년)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 견훤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희개(禧開)라 시호(諡號)를 받았다. 배현경,신숭겸, 복지겸, 홍유, 유금필와 함께 6태사로 불리운다.

전의갑(全義甲) 고려(정선호족)
( ?~927 ) 정선호족 전우상(全禹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형 전이갑과 더불어 정선의 두영웅으로 불리었다. 형 전이갑(全以甲)과 더불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호위하다 전사했다. 죽산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강(忠康)이다.

 
전락(全樂) 고려(정선호족)
(?~927 ) 고려의 장수로 환성군 전섭의 16대손이며 천안 전씨의 시조이다. 전이갑의 사촌 동생으로 삼사 좌복야에 임명되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호위하다 전사했다. 천안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전이갑(全以甲) 고려(정선호족)
( ?~927 ) 정선호족출신으로 자는 자경(子經), 호는 도원(桃源),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고려 개국 때 태사공(太師公)으로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선전씨의 중시조이며 정선군 전휘선(全諱宣)의 7세손 전우상(全禹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라면서부터는 용모가 빼어나고 지용이 절륜하여 문사에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동생 전의갑과 더불어 정선의 두영웅이라 불리었다. 태봉의 기랑(騎郞)일때 왕건을 만났는데 왕건이 그 임물됨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세상의 영웅이라 삼수의 창생들이크게 구제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그후 왕건을 왕으로 모시고 고려를 세우니 무우년(戊牛年)에 양주(楊洲)를 정벌하여 평정하고 경신년(庚申年)에 광주,청주를 정벌하여 적을 전멸하고, 병인년에 견훤을 상주에서 몰아 내고 그 땅을 개척하였으며 정묘년에 또 견훤을 나주에서 대파하여 진을 설치하고 돌아오니 그때에 태조(왕건)의 이름이 크게 떨치어 조정과 백성이 모두 그를 따르게 되었다.태조3년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므로 신라의 사신 금율이 와서 도와줄 것을 간청하여 태조가 전이갑과 신숭겸에 명하여 구원케하니 견훤이 그 소문을 듣고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이때 전이갑이 신숭겸에게 이르기를 견훤이 강폭해서 항상 변방의 우환꺼리가 되니 이 기회에 그를 전멸시킴이 좋겠다 하고 그를 끝까지 쫓아 추격하니 그의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견훤만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태조8년에 태사에 임명되었으며 태조10년에 다시 견훤과 달성 공산 오동나무 숲에서 격전하다가 드디어 패하여 궁지에 몰리었다.견훤이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므로 사태가 위급한지라 신숭겸이 태조와 옷을 바꾸어 입어 왕을 탈출시키고 전이갑은 동생 전의갑, 사촌동생 전락과 더불어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후 태조가 크게 슬퍼하시며, 전이갑에게 정선군(旌善郡) 봉호와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내리고 후손에게는 조세와 각종 국가의 부역(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신숭겸(申崇謙)/능산(能山) 고려

신숭겸(申崇謙)의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니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 10년에 태조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과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어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였는데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대장으로 있었는데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가 그의 전사를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동생 신능길(申能吉), 아들 신보(申甫) 및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을 모두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손행(孫幸) 고려
고려의 대상(大相)으로 태조10년 9월 백제가 고울부를 점령하고 경주에 다다르자, 신라는 급히 연식(蓮式)을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태조이 명을 받고 손행은 시중 공훤(公萱)과 더불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갔으나 때가 늦어 신라 황도는 이미 점령된 후였다. 이에 태조가 급히 기병 5천을 더해 원군으로 내려오자, 공산에 합류하여 견훤과 대결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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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의성현(義城縣) 편中

사직단은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3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김홍술(金洪術)의 모습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와 비슷했는데, 백제의 견훤(甄萱)과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다. 이에 여기에서 제사지낸다.” 한다.

 

 

마지막 7부를 기대해 주십시요. 명절 잘보내시구요. ^^


덧글

  • 깜찍한 늑대개 2021/09/28 15:15 #

    소격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정확이 어느 사료에 등장하는 건가요? 고려사에는 소격달의 이름만 1번 등장하고 그외에 다른 기록은 없더군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없어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금석문에 있는 건가요? 너무너무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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