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에 비길만한 무쌍난무 한희유(韓希愈) 고려 역사 이야기

고려사 열전 한희유 中

총평 : 
전형적인 돌격무장 + 의리를 중시하는 호남 +  + 융통성 없음 + 왕에게 무조권적인 충성(헌데 팽당함) + 
창의 달인 + 말 매우 짧음 + 성격 불같으면서도 쿨함


고려사절요 1291년 5월 기사中

○ 갑진일에 적의 정예 기병대가 군용(軍容)을 정비하고 다시 와서 대진(對陣)하였다. 나만대대왕(那蠻歹大王)이 대전에 미처 참가하지 못한 것을 분하고 유감스럽게 여겨 그들과 교전하려 했다. 적진의 용사 한 사람이 아군을 쏘는데 쏘는 대로 아군이 넘어지자, 한희유(韓希愈)가 창(槍)을 가누어서 말을 달려 적진 속에 돌입하니,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용사를 잡아 목을 베어서 그 머리를 창 끝에 매달아 보이니, 적이 모두 전의를 상실했다. 대군을 휘몰아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드디어 회군하여 석파역(石破驛)에 머물렀다.

→ 의형제 인후(印侯/귀화 몽고인)가 1250년생임으로, 한희유는 이때 당시 나이 4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추측됨



한희유는 가주(嘉州)의 아전이었는데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하였으며 대담하고 지략이 있었다. 
일찍이 시골 사람들과 불 놓는 사냥을 하였는데 한희유는 말을 몰아 불 속으로 드나드는 것이 마치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 한희유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장부가 적군의 진을 무너뜨리고 돌격함에 있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거늘 이것쯤이야 놀랄 것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처음에 대정(隊正)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여러 번 조동되어 대장군이 되었다. 김방경을 따라 진도와 탐라를 토벌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전공을 세웠으며 일본 정벌 때에는 김방경이 한희유를 선봉으로 나아가게 하였더니
육박전이 벌어지자 한희유는 맨 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쳤는데 손이 상해서 피가 흘렀으나 용기를 내어 적 수명의 목을 베었다.

충렬왕 때 부 지밀직사사로 임명되었다. 왕이 내안(乃顔) 대왕이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의 정벌을 원조하려고 준비하였는데 한희유에게 호두 패(虎頭牌-호두금패)를 주어 그를 우익군 만호로 삼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출발하였다가 황제가 이미 내안을 사로잡고 정벌 사업을 끝내었다는 것을 알고 돌아왔다. 그 후 황제는 한희유에게 쌍주 금패(雙珠金牌)를 주었으며 장전 만호(帳前萬戶)의 벼슬을 주었다. 

당시 원나라 사절로 왔던 장수지(張守智)가 하루는 한희유에게 묻기를 "성(省)이 지금 무엇으로 개칭되었소?"라고 하니 
"첨의부라고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추밀원은 무엇으로 고쳤소?"라고 물으니  " 모르겠다 " 라고 대답하였다. 
장수지는 또  "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재상이 되었는가? " 라고 물으므로  " 군공이 있어서다 " 라고 말하니 장수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후 판 밀직 사사, 판삼사사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내안의 무리인 합단(哈丹)이 침입하여 오자 원나라에서는 설도간과 나만대(那蠻햵) 대왕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나누어 인솔하여 와서 원조하게 하였다. 우리 군대가 먼저 설도간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하여 마침내 연기(燕岐)에서 합단을 격파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적들의 정예로운 기병 부대가 다시 와서 상대하여 진을 치게 되었다. 나만대는 늦게 도착하여 연기의 싸움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그들과 싸우려고 하였다. 

적들 가운데 용사 한 사람이 있어 활을 당겨 쏘기만 하면 매번 우리 군사 한 사람씩 넘어지곤 하였다. 
한희유는 1장 8척이나 되는 긴 창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적진에 돌입하니 적들이 놀라 한쪽으로 밀리므로 그 용사를 움켜잡고 나와서 베어 죽이고 그의 머리를 긴 창에다 걸어 적에게 보였더니 적들의 기가 꺾이었다. 이때에 대군이 급히 나아가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들 가운데 노적(盧的-즉 老的. 합단의 아들)의 부자 등 2천여의 기병이 포위를 뚫고 달아 났으므로 회군하여 석파역(石破驛)에 와 있었다.

(중략)

 한희유는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소박하고 정직하였으며 글은 잘 하지 못하였다. 그의 집은 가난해서 여러 번 다른 사람에게서 꾸어다 먹는 생활을 하였다. 왕이 사냥할 때마다 따라 가서 짐승들을 쏘아 맞춘 일이 있어서 상으로 말을 받았으나 그것 역시 자신이 기르지 아니 하고 매번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인후는 처음 그를 형으로서 섬겼다. 한 번은 그의 집에 가서 보고  " 아! 내 형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하단 말인가! " 라고 하고 왕에게 요청하여 곡물 수백 곡(斛)을 그에게 주도록 하였더니 한희유는 스스로  " 나는 희유(希愈)가 아니라 유유(有愈)로 되었다 " 라고 말하였다.
인후의 문객(門客) 배정지(裴廷芝)가 법을 위반하였을 때 한희유가 그를 법에 비추어 다스리려고 하니 인후가 말하기를 '내 덕을 잊어 버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한희유가 성을 내어 옆에 찼던 칼을 뽑아 가지고 인후를 눈 주어 보면서 앞으로 다가갔다. 중찬 홍자번(洪子藩)이 그 자리에 앉았다가 배정지에게 여러 번 눈짓하여 그 칼을 빼앗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후는 달아났고 한희유는 그를 따랐으나 잡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어느 날에 배정지가 한희유의 집에 가서 사과를 한즉 한희유가 말하기를 '앞서 번에는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하마터면 인후를 죽일 뻔하였다'라고 하였다.

 한희유의 문객 유보(柳甫)가 한희유가 사랑하는 기생과 통하였는데 한희유는 그 사실을 알고 유보를 꾸짖으니 유보가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당신을 따라 전장에 나가서 침식을 돌보아 준 공로가 있는데 지금 기생 하나 때문에 갑자기 나를 버리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더니 한희유가 웃어 버리고 그 자리에서 그 기생을 유보에게 주어 버렸다.

한희유는 평상시 늙어서도 활, 화살, 갑옷을 수선하기를 마치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는 때와 같았다. 매양 달이 밝은 밤이면 긴 창을 잡고 닫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힘이 아직도 쓸 만하다'라고 하였다. 왕이 다시 왕위에 오른 이래로 왕유소(王惟紹), 송린(宋璘) 등이 실권을 잡고 왕의 부자를 이간시키었는데 한희유는 자기가 병사로부터 승진하여 위품이 재상에까지 이르렀으므로 왕이 베풀어 준 은덕을 감사하게 생각하여 왕의 뜻을 따르려고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옳은 말로 충고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선왕은 한희유가 왕유소, 송린의 패거리라 하여 반감을 품고 있었다. 
한희유가 죽자 그의 아들 한검(儉)을 가주(嘉州)에다 귀양 보내었다. 한검은 그 아우들인 한적 한우(祐)와 함께 모두 관직이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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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게 미움받음
고려사절요 1299년 1월 기사中
봄 정월에 만호 인후(印侯)ㆍ김흔(金忻)과 밀직 원경(元卿) 등이 마음대로 군사를 동원하여 만호 한희유(韓希愈)를 체포하였다.
(중략)
왕이 합산과 함께 희유 등을 국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아니하여 순마소에 가두었는데, 일영은 도망쳐 버렸다. 왕이 합산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모두 닷새 동안 희유 등을 국문하니, 다만 영주와 인검만이 거짓으로 자복하였으며, 또 희유 등을 사흘동안 국문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1306년 7월 기사中
첨의중찬 한희유(韓希愈)가 원 나라에서 졸하였다. 한희유는 성품이 소박하고 도량이 넓으며 활쏘고 말달리는 것을 잘하고 담력이 있었다.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진도(珍島)ㆍ탐라(耽羅)ㆍ일본을 토벌하였는데 매번 전공이 있었다. 집에는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서 자주 남에게 빌리고 꾸었다. 일찍이 왕을 수행하여 사냥을 나갔는데 쏠 때마다 반드시 맞추니 왕이 말을 하사하였더니, 그것도 집에서 기르지 아니하고 남에게 주었다. 그는 평상시에도 전진(戰陣)에 있을 때와 같이 활과 화살을 다루고 갑옷과 투구를 손질하였다. 나이는 비록 늙었으나 달밤에는 매양 긴 창을 잡고 달리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말하기를, “나의 힘은 아직 쓸 만하다."하였었다.


후손 팽당함
고려사절요 1307년 8월 기사中
8월에 고 중찬 한희유(韓希愈)의 아들 검(儉)을 가주(嘉州 평북 박천군(博川郡) 가산면(嘉山面))로 귀양보냈는데 아전의 신역은 면제시켰다. 한희유는 본래 가주의 아전이었다. 왕이 복위하자 왕유소 등이 권력을 부려 왕의 부자를 이간하였는데, 한희유는 군졸에서 출신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다 하여 스스로 왕의 은덕에 감격해서 오직 왕의 뜻이면 순종할 뿐이고 조금도 간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전왕은 한희유가 왕유소와 송인의 무리에 붙었다고 하여 매우 감정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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