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막기문(松漠紀聞) 국역 1부(여진의 유래) 금사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북송의 마지막 두 황제 휘종과 흠종이 금으로 끌려간 후, 북송은 멸망하였는데요.
남송의 홍호(洪皓)가 금에 파견되어 휘종과 흠종의 반환을 교섭하였는데,
일이 틀어져 금에서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겪고 들은 것을 <송막기문>이라는 견문록 형식으로 집필하였습니다.
<송막기문>은 후에 홍호가 죽은 후 아들 홍적(洪適)이 교간(校刊)하고 홍준(洪遵)이 보유(補遺/보태어 채움)하여
1156년 간행하였습니다.
송사/요사/거란국지 연재가 끝나 틈틈이 송막기문도 국역해 보고자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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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漠紀聞
女真即古肅慎國也,東漢謂之挹婁,元魏謂之勿吉,隋唐謂之靺鞨。
開皇中,遣使貢獻,文帝因宴勞之。
使者及其徒起舞於前,曲折皆為戰鬭之狀。
上謂侍臣曰:
「天地間乃有此物,常作用兵意。」
其屬分六部,有黑水部,即今之女真。
其水掬之則色微黑,契丹目為混同江。
其江甚深,狹處可六七十步,闊處百餘步。
唐太宗征高麗,靺鞨佐之,戰甚力。
駐蹕之敗,高延壽、高惠真以眾及靺鞨兵十餘萬來降,太宗悉縱之,獨坑靺鞨三千人。
開元中,其酋來朝,拜為勃利州刺史,遂置黑水府,以部長為都督、刺史,朝廷為置長史監之。
賜府都督姓李氏,訖唐世朝獻不絕。
五代時始稱女真。
後唐明宗時,嘗寇登州渤海,擊走之。
其後避契丹諱,更為女直,俗訛為女質。
居混同江之南者謂之熟女真,以其服屬契丹也,江之北為生女真,亦臣於契丹。
後有酋豪受其宣命為首領者,號「太師」。
契丹自賓州混同江北八十餘里建寨以守,予嘗自賓州涉江過其寨,守禦已廢,所存者數十家耳。
송막(松漠/소나무 사막)의 기문(紀聞/들은 바를 기록함)
여진(女真)은 곧 옛 숙신국(肅慎國)이며, 동한(東漢)이 읍루(挹婁)라 일컬었으며,
원위(元魏)가 물길(勿吉)이라 일컬었고, 수당(隋唐)은 말갈(靺鞨)이라 일컫었다.
개황(開皇/수 1대 황제 고조 문제 양견의 #1연호) 중(中)에, 견사(遣使/사신을 보냄)하여 공헌(貢獻/조공을 바침)하였으며,
문제(文帝/고조 양견)가 이로 인(因)하여 연로(宴勞/잔치를 열어 위로함)하였다.
사자(使者)와 더불어 그 도(徒/무리)가 앞에서 기무(起舞//일어나 춤을 춤)하였는데,
곡탁(曲折/굽히고 꺾음)이 모두 전투(戰鬭)의 형상(狀)이었다.
상(上/임금, 수문제)가 시신(侍臣/임금을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천지간(天地間)에 곧 이런 물건(物)이 있어, 용병(用兵)의 뜻을 상작(常作/항상 만듦) 하는구나!」
그 속(屬)을 6부(部)로 나누었는데, 흑수부(黑水部)가 있었으니, 곧 지금(今)의 여진(女真)이다.
그 물을 국(掬/움켜 쥠)하면 곧 색(色)이 미흑(微黑/거무스름함)하니,
글단(契丹/거란)이 혼동강(混同江)이라 목위(目為/여김, 간주함)하였다.
그 강(江)은 심심(甚深/심히 깊음)하니, 협처(狹處/좁은 곳)는 가(可)히 60~70보(步)이고, 활처(闊處/넓은 곳)는 백여보(步)이다.
당(唐) 태종(太宗)이 고려(高麗)를 정벌(征)하였는데, 
말갈(靺鞨)이 (고구려를) 보좌(佐)하여, 심력(甚力/매우 힘을 씀)하여 싸웠다.
주필(駐蹕/임금의 행차가 잠시 멈춘 곳)의 패배(敗)로,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真)이 중(眾/무리)과 더불어 말갈병(靺鞨兵) 십여만(十餘萬)으로 내항(來降/항복하여 옴)하니,
태종(太宗)이 실종(悉縱/모두 풀어줌)하였는데, 오직 말갈(靺鞨) 3천인(人)만 갱(坑/구덩이에 묻음)하였다.
개원(開元/당 6대 황제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2 연호) 중(中/713년~741년)에,
그 추장(酋)이 내조(來朝/입조)하니, 배(拜/벼슬을 줌)하여 발리주자사(勃利州刺史)로 삼고,
마침내 흑수부(黑水府)를 설치(置)하고, 부장(部長/부족장)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로 삼았으며,
조정(朝廷)에서 장사(長史)를 설치(置)하여 감독(監)하였다.
부(府)의 도독(都督)에게 이씨(李氏) 성(姓)을 하사(賜)하였으며, 
당(唐) 세조(世朝)에 이르기까지 헌상(獻)을 부절(不絕/끊이지 않음)하였다.
오대(五代) 시(時)에 비로소 여진(女真)이라 칭(稱)하였다.
후당(後唐) 명종(明宗) 시(時)에, 일찍이 등주(登州) 발해(渤海)를 구(寇/침범함, 노략질함)하니,
격주(擊走/공격하여 쫓아냄)하였다.
그 후(後)에 글단(契丹/거란)의 (7대 황제 흥종興宗 야율종진耶律宗眞) 휘(諱)를 피(避)하여,
경(更/고침)하여 여직(女直)으로 하였으며, 속인(俗)이 와전(訛)하여 여질(女質)이라 하였다.
혼돈강(混同江)의 남(南)에 거주(居)하는 자(者)를 일컫기를 숙여진(熟女真)이라 하고,
이로써 그 글단(契丹/거란)에 복속(服屬)하였으며,
(혼동강) 강(江)의 북(北)은 생여진(生女真)이라 하는데, 역(亦)시 글단(契丹/거란)에 신복(臣)하였다.
후(後)에 그 선명(宣命/임금의 명령)으로 수령(首領)으로 삼아 제수(受)한 추호(酋豪/추장)가 있었는데,
「태사(太師)」라 호칭(號)하였다.
글단(契丹/거란)이 빈주(賓州)에서부터 혼동강(混同江) 북(北)쪽 80여 리(里)까지 건채(建寨/성책을 세움)하여 
이로써 수(守/지킴)하였는데, 
번번이 빈주(賓州)로부터 섭강(涉江/강을 건넘)하여 그 채(寨/성채, 목책)를 과(過/지나 감)함을 여(予/인정함, 허락함)하여,
수어(守禦/막아 지킴)를 이미 폐(廢)하니, 소존자(所存者/아직 남아 있는 자)가 수십 가(家) 뿐이었다.

*주필산(駐蹕山) : 당 태종이 645년 고구려를 정벌할 당시에, 안시성 인근의 산에서 
                         고연수와 고혜진의 고구려군을 격파한 후에 
                         자신이 머물던 산을 주필산이라 개명하고 파진도를 그리고 기념비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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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계속. 길공구

P.S) 본 글은 동의하에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고요.^^

덧글

  • 역사관심 2015/02/18 15:08 #

    궁금하던 사료인데 정말 고맙습니다.
  • 길공구 2015/02/18 15:22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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