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선전포고 당시 누르하치의 병력 현황 누르하치 관련 기타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누르하치는 1583년 거병 당시 갑옷 13벌과 병력 100 명이 전부였으나
10년도 채 안된 1593년에는 병력이 수천으로 늘어났으며, 
1593년 9부족의 3만 포위망을 격파한 후에는 더욱 세가 증가하여
1595년 말 신충일은 누르하치 성을 방문하고 그의 병력이 기병 1만, 보병 5천 합하여 1만 5천이나 된다고
선조에게 보고하였지요.
이후 더욱 여진 통일전쟁에 매진한 누르하치는 1613년경에는 최소 4만 명을 운용하였으며,
7대한을 하늘에 고하고 명에 선전포고한 1618년에는 약10만 명을 운용하였습니다.
기병은 약 6만, 보병은 4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누르하치가 아골타와 다른 점은, 누르하치는 각 부족을 공격하여 점령하면
그 부족민을 거의 모두 본거지로 끌고 온다는 점이지요.
하여 당시 누르하치에게 소속된 여진인은 거의 허투알아 인근에 거주하였습니다.
또한 누르하치는 명을 침공하면서 여진족에 대한 노비해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여진족은 철저한 계급 사회였으며 이는 누르하치 당대에 계속된 모양입니다.
반면에 아골타는 대요전쟁을 개시하면서 여진족의 노비해방과 신분상승을 부르짖었고,
오걸매 또한 이를 계승하였지요.

맹안모극 vs 팔기군 성립초기 계급 간략 비교 http://cafe.naver.com/booheong/108201
각종 사서의 팔기군의 시초 http://cafe.naver.com/booheong/107924
아골타의 당근 "노비해방"  http://cafe.naver.com/booheong/82859
오걸매<우리 여진족에 더이상 노비는 없다> http://cafe.naver.com/booheong/83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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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13년 6월 → 최소 4만

a. 후금 최초의 사서인 구만문 만문원당/구만주당

(구만문) 만문원당/구만주당 1613년 6월10일 기사中
juwan  i   inenggi duin tumen cooha  genebi kaci
주-안 이 이넝이  두인 투먼    초오하 거너피 카치
10     의 날       4     만      군대    가서   포위하고

→ (누르하치가) 6월 14일 4만 군대가 가서 포위하고는

b. 만문원당을 신만문으로 다시 만든 만문노당

만문노당 1613년 6월10일 기사中
juwan  i   inenggi duin tumen cooha  genefi kaci
주-완 이 이넝이  두인 투먼    초오하 거너피 카치
10    의  날        4     만     군대    가서   포위하고
→ (누르하치가) 6월 14일 4만 군대가 가서 포위하고는


c. 홍 타이지 재위 초 태조전적도를 기반으로 만든 만주실록

만주실록 한문본 1613년 9월6일 기사中
太祖於九月初六日領兵四萬征葉赫

태조(太祖)가 9월(月) 초(初) 6일에, 병(兵) 4만(萬)을 이끌고 엽혁(葉赫)을 정벌(征)하였다.


만주실록 만문본 1613년 9월6일 기사中
taidzu  kundulen han  uyun biyai    ice      ninggun de 
타이쭈 쿤두런    한    유윤  비야이 이처     닝운      더 
태조    현명한    임금  9     월의   새로운   6일       에 

duin tumen cooha  be gaifi       yehei   gurun be dailame  juraka
두인 투먼    초오하 버 가이피    예허이 구룬   버  다이라머 주라카
4      만     군대    를 인솔하여 예허의 나라   를  토벌하러 출발했다.

→ 태조 쿤두런 한이 9월 6일에, 4만 군대를 인솔하여 예허국을 토벌하러 출발했다.






2. 대명 선전포고 후 1618년 4월 → 약 10만

a. 후금 최초의 사서인 만문원당 4월13일 기사에는
    하늘에 7대한을 고하고 10만 병을 이끌고 대명 선전 포고함

만문원당 1618년 4월13일 기사中
tere nadan amba korode dain deribume jakun gvsai   juwan tumen cooha ilibi 
터러 나단  암바   코로더 다인 더리부머 자쿤  궈사이 주완   투먼    초오하 일이비
그    7     큰      원한에 전쟁 시작되어  8     기의    10      만      군대   일어나서

duin biyai juwan ilande  tasha   inenggi meihe   erinde hecenci tucibi 
두인 뱌이 주완   일안더 타스하 이넝이   머이허 어린더 허천치   투치비
4     월의 10     3에    호랑이  날        뱀      시에    성에서   나가서

geren coohai    ejete   beise  ambasai      baru hendume 
거런   초호하이 어저터 버이서 암바사이     바루 헌두머
여러   군대의    주인들 패자    대신들에게  바로 말하였는데

→ 그 7대 원한으로 전쟁이 시작되어 8기의 10만 군대를 일으켜
    4월 13일 임인일 사시(09시~11시)에 성에서 나와
    여러 군대의 주인들인 패자(貝子)와 대신(大臣)들에게 바로 말하기를

b. 무황제실록에는 4월13일에 2만 병으로 출정식을 하고 칠대한을 하늘에 고함

태조무황제 실록 1618년 4월13일 기사中
戊午,天命三年。
四月十三壬寅,巳時,帝將步騎二萬征大明,臨行,書七大恨告天曰:
무오년(戊午/1618년) 천명(天命/후금 1대 황제 누르하치의 #1연호) 3년(1618년)
4월 13일 임인일(壬寅) 사시(巳時)에, 
제(帝/누르하치)가 장차(將) 보기(步騎) 2만(二萬)으로 대명(大明)을 정벌(征)하고자,
임행(臨行/출발할 때가 됨)하여 칠대한(七大恨)을 써서 하늘에 고(告)하여 말하길


c. 무순 함락 후, 4천 병으로 무순성을 파괴하였고,
    6만 병으로 30만 명의 포로를 허투알아로 옮기게 하고
    누르하치는 21일 직접 4만 병을 이끌고 명나라 성 20리 근방으로 영을 옮김

만문원당 1618년 4월16일 기사中
bigande coohai    ing hadabi doloci  wajiraku  gvsin tumen oljibe   dubede dendeme ilibi
비간더   초오하이 잉  하다비  도로치 와지라쿠  궈신  투먼    올지버  두버더  던두머    일이비
들판에   군대의    영  세우고  수많은 노획한     30     만      포로를  끝에     나누어    꾸리고


만문원당 1618년 4월20일 기사中
tere  olji   gamarade ninggun tumen coohabe faksalabi unggihe.
터러 올지 가마라더   닝운     투먼   초오하버 팤살아비   웅이허.
그    포로 가져감에   6         만      군대를    분별하여   보냈다.

han i  beye    duin tumen cooha gaibi      fakcabi  ing gurime julesi  asabi   jase jakade deduhe
한  이 버예    두인 투먼   초오하 가이비    팤차비    잉 구리머 주러시 아사비 자서  자카더 더두허
한  의 자신은  4     만     군대    인솔하고 분별하여 영 옮겨    앞으로 움직여  변경 곁에    유숙하였다.


만주실록 한문본 1618년 4월16일~21일 기사中
令歸其拆城兵四千亦至
遂令兵六萬率降民及所得人畜前行歸國
帝與諸王大臣領兵四萬
移營復臨明國邊安營
二十一日帝回兵

영(令)하여 그 (무순성을) 탁성(拆城/성을 부숨)하라 맡긴 병(兵) 4천(千)이 역시(亦) 이르자

마침내 병(兵) 6만(萬)으로 하여금 항민(降民/항복한 백성)과 더불어 소득(所得)한 인축(人畜/사람과 가축)을 인솔(率)하여
전행(前行/앞으로 나아감)하여 귀국(歸國)하게 하였다.
제(帝/누르하치)는 제왕(諸王) 및 대신(大臣)과 더불어 병(兵) 4만(萬)을 거느리고
이영(移營/영을 옮김)하여 다시 명국(明國)의 변경(邊) 안영(安營)에 임(臨/직면함, 대면함)하였는데,
21일에 제(帝)가 회병(回兵/회군)하였다.


만주실록 만문본 1618년 4월16일~21일 기사中

fuxun xo hecen be efule   seme werihe duin minggan cooha isinjiha   manggi
푸슌  쇼 허천    버 어푸러 서머  버리허 두인 밍안     초오하 이신지하 망이
푸슌  쇼 성       을 부수라 하여  남긴    4    천        군대    도달한    뒤에

ninggun tumen cooha be dahabuha boigon i  niyalma baha olji   be gamame
닝운     투먼   초오하 버 다하부하  보이곤 이 냘마     바하  올지 버  가마머 
6         만     군대    를 항복한     집      의 사람     얻은  포로 를  가지고
 
juleri    jurambufi boode  unggihe
주러리 주람부피  보오더 웅이허
앞서    출발하고  집에    보냈다.

han i beye beise        ambasa     duin tumen cooha be gaifi 
한 이 버예 버이서       암바사      두인 투먼   초오하 버 가이피
한 이 몸소 패자(貝子) 대신(大臣)  4     만     군대    를 가지고

ing gurime daiming gurun i  baru genefi  jasei  hanci   ing iliha
잉  구리머 다이밍  구룬 이 바루 거너피 자서이 한치    잉  일이하
영  옮겨    대명     국   의 바로 가서    변경의 가까운 영  세웠다.

→ 무순성을 부수라 하여 남긴 4천 군대가 도착한 후에
   6만 군대에게 투항한 가호의 백성과 포획한 포로를 가지고 앞서 출발시켜 본거지(허투알아)로 보냈다.
   누르하치가 직접 (패륵/버이러을 포함한) 버이서(패자) 및 대신과 함께 4만 군대를 가지고
   명의 다음 국경으로 진을 옮겨 상황을 주시하였다.





3. 결론

→ 후금의 사서에 따르면 1618년 대명 전쟁 직전 누르하치의 8기군은 약 10만 명이었습니다.
    이후 만주실록 이후의 사서에서는 살이호(사르훠/sarhv) 전투를 부각시키기 위해
    명의 병력은 부풀렸고, 후금의 병력은 축소시켰으며
    살이호 전투까지 후금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기록하였으나
    조선의 기록 등을 살펴보면 살이호 전투까지 후금군의 피해는 2~3만 명이 살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허를 합병하고 요동을 잠식하면서 누르하치의 병력은 크게 증강하였고
    1619년에서 2년도 지나지 않아 병력은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십수만에 이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 조선의 기록에는 더욱 자세하게, 여러 루트를 통해 후금의 시대별 병력 규모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음에 소개해 볼까 합니다.

    간단하게 당시 후금에 포로로 잡힌 강홍립은 기병6만에 보명3만
    이민환 8기 360니루 9~10만
                 요동 침공 후 병력 증강 총14만=기병8만+보병6만
                 요동 점령 후 병력 증강 총20여만=기병10만+보병도 비슷
    역관 하세국 8기 여진병 9만, 한족병 1만
    1621년 후금에 사신으로 간 무관 정충신은 8기군, 총 병력 96000 명, 기병4~5만. 보병 2~3만. 공성병 2~3만
    광해군 파악 8~9만 
    후금에서 탈출한 황덕영, 여진 자칭 9만
    조경남 총 8만=기병6만+보병2만, 요동침공 후 5~6만으로 줆

→ 반면에 1619년 명이 파악한 누르하치의 병력은 약 6만이었으며, 조선에도 이와 같이 통보하고
    명10만+조선13000+예허1만 총 12만으로 4로 병진하면 10일 안에 끝장을 낼 수 있다고 오판하였지요.

-2부 조선에서 파악한 후금의 병력 편에 계속됩니다^^
-끝. 길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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