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조총병으로 명 장창병 2만을 상대하다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누르하치의 건주위가 조총에 관심을 둔 내용이 기록된 사서는
제가 접하기로는 1595년 누르하치성을 방문한 조선 무관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건주위의 추장들은 신충일에게 조총의 위력에 대해서 여러 질문을 하였지요.

조총은 만주어로 miyocan [묘찬(o) 미요찬(x) 미오찬(x)] 혹은 miyoociyang [묘오챵] 혹은 miyoocan [묘오찬] 입니다.
후금의 기록에는 조총을 한어로 창포(槍炮/鎗砲)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만주어로 miyori 는 짧은 시간을 초(秒)를 뜻하는데, 이와 관련이 있나 모르겠네요.

만주병이 거의 대규모의 조총병과 마주한 것은 역시 제가 살펴본 바로는 1613년 9월 예허와의 전쟁에서입니다.
당시 누르하치는 4만 병을 이끌고 예허를 쳐들어 갔는데, 
예허는 명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명은 1천 조총병을 파견합니다.

태조 무황제 실록 1613년 9월 기사中
遂遣游擊馬時楠、周大歧,帶槍炮手一千,衛夜黑二城。
마침내 (명나라가) 유격(游擊) 마시남(馬時楠)과 주대기(周大歧)를 보내,
창포수(槍炮手) 1천을 대동(帶)하고, 야흑(夜黑/예허)의 2성을 위(衛/지킴)하였다.

만주실록 1613년 9월 기사中
遂遣遊擊馬時楠周大岐帶鎗砲手一千衛葉赫二城
마침내 유격(遊擊) 마시남(馬時楠)과 주대기(周大岐)를 보내 
창포수(鎗砲手) 1천을 대동(帶)하고 엽혁(葉赫/예허)의 2성을 위(衛/지킴)하였다.

태조 고황제 실록 1613년 9월 기사中
遂遣游擊馬時楠、周大岐、率練習火器者千人。守衛葉赫二城。
마침내 유격(游擊) 마시남(馬時楠)과 주대기(周大岐)를 보내, 연습(練習)한 화기(火器)를 가진 자(者) 천 명을 인솔(率)하여,
엽혁(葉赫/예허)의 2성을 수위(守衛/호위하여 지킴)하였다.

이후 누르하치가 대명전쟁을 본격화한 1618년 4월 13일 이후입니다.
10만 병력을 이끌고 무순성을 손쉽게 점령한 누르하치는 30만의 포로를 6만 병으로 허투알아로 옮기게 하고,
나머지 4만 주력군을 이끌고 명의 국경 근처로 갑니다.
4월21일에 누르하치는 회군하였는데, 
무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명군 장승음(張承廕)이 1만군을 이끌고 쫓아옵니다.
이 장승음군은 거의 전원이 말을 타고 있었으며 역시 대량의 대포와 총포도 휴대하여 왔습니다.
누르하치는 그냥 회군하려 하였으나 홍타이지가 <두려워 도망치는 것으로 알 것이다> 하여 교전을 주장합니다.
이에 전군을 돌려 다시 장승음군을 포위합니다.
장승음은 산에 참호를 파고 대포와 총포로 방어태세를 취하지요.

<만주실록 1618년 4월 삽화도中>
후금군이 거의 최초로 맞붙은 명의 조총+대포군

4만의 정예 후금군이 돌격하자 장승음 군은 궤멸하였고, 이 전투에서 후금은 말 9천, 갑옷 7천, 모든 병기를 획득합니다.

이후 1619년 살이호(사르후-오/sarhv) 전투에서 역시 명과 조선의 대규모 조총병을 격파하고
수많은 조총을 획득하게 됩니다.

<만주실록 1619년 살이호 전투 등 삽화도中>
<그림을 클릭하시고 원문 보기를 누르세요>









살이호 전투까지만 하여도 만주병에 조총병에 대한 기록이나 삽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량의 총포를 획득한 상태였습니다.
헌데 1621년 3월에 드디어 조총병을 운용하기 시작합니다.
누르하치는 1621년 3월 심양을 공격하였고, 당시에 심양에는 7만의 명군이 조총과 대포로 무장하였으나
결국 7만 명군이 모두 전멸하고 심양성은 함락되었습니다.
당시에 명은 용맹하다는 사천(四川)의 보병(步兵) 2만을 동원하여 진책(陳策)에게 심양을 구원하라 하였지요.
당시 사천의 병력은 모두 보병으로 장창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었지요.
하니 누르하치는 드디어 방패+조총을 선봉으로 내세워 안전하게 사천군을 공격하라 명합니다.
방패+조총으로 앞세우고, 곧장 4 구-오사(gvsa/기)를 동원해 돌격하여 2만 사천군을 모두 죽입니다.
조선의 만포첨사 무관 정충신이 1621년 경에 누르하치를 방문하고
파악한 병력은 일전에 소개해 드린 것처럼 1기당 12000여 명 정도였습니다. 
즉 4구-오사면 대략 4~5만 가량입니다.

누르하치 팔기군의 규모-2부 1621년 9만6천(정충신의 보고서) http://cafe.naver.com/booheong/109673

이 전투의 삽화도는 고화질인 1928년 출간본의 영인본이 손상되어 있으며
1986년 영인본은 화질이 좋질 않고, 1930년 영인본은 역시 화질이 좋질 않습니다.

<만주실록 1621년 3월 태조파진책영도(太祖破陳策營圖)> 1986년 영인본




<1930년 영인본>

고화질 <1928년 영인본>


왼편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이며, 오른쪽이 명의 사천군입니다.

방패차와 조총을 쏘고 있는 모습니다. 오른쪽의 명이 들고 있는 주력은 장창입니다. 조총이 아닙니다.
즉 후금의 기마병을 상대하고자 장창 부대를 배치한 것이지요.
이에 누르하치는 조총을 앞세워 사천군을 공격하다가
많은 수의 기마병을 투입하여 끝장을 본 것이지요.

→ 즉 대명 전쟁을 개시한지 3년 만에 드디어 조총병을 운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조총의 위력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만주 기마병이 방패차의 전진을 무시하고
    곧장 사천군으로 돌격하자, 뒤에서 보고 있던 누르하치도 후속 병력을 계속 투입하라 명하였습니다.

<만문 만주실록 1621년 3월 기사中>
daiming gurun i tscuwan i bai juwe tumen yafahan cooha be cen ts'e gebungge dzung bing guwan gaifi
다이밍 구룬 이 스추-완 이 바이 주-워 투먼 야파한 초오하 버 천 쳐 거붕어 쭝 빙 구완 가이피
대명 국 의 스추-완 의 지방 2 만 걸어온 군대 를 천 쳐 라는 쭝 빙 구-완 인솔하고
대명국의 사천 지방 2만 보병을 진책이라는 총병관이 인솔하고

(중략)
gala de gemu cuse mooi fesin i ilan da golmin gida golmin jangkv dacun loho jafahabi
갈아 더 거무 추서 모-오이 퍼신 이 이란 다 골민 기다 골민 장쿠-오 다춘 로호 자파하비
손 에 모두 대 나무의 손잡이 의 3 다 긴 창 긴 칼 예리한 도(刀) 잡았다.
(사천병이) 손에 모두 대나무 손잡이의 (길이) 3다의 장창과 장검과 장도를 잡았다.

(중략)
tere cooha be genggiyan han sabufi
터러 초오하 버 겅옌 한 사부피
그 병사 를 총명한 임금 보고
그 (장창/장검/장도로 무장한 사천의) 병사를 겅옌한(누르하치)이 보고는

ici ergi duin gvsai cooha be olbo sejen kalka be ganafi elhei bireme dosifi afa
이치 어르기 두인 구-오사이 초-오하 버 올보 서전 칼카 버 가나피 얼허이 비러머 도시피 아파
오른 쪽 4 구-오사의 군대 를 마고자 수레 방패 를 가지고 안전히 충격하여 진입하여 싸움을걸어라
우익의 4기의 군대에게 마고자를 두른 방패차를 가지고 안전하게 전진하면서 전투하라



★ 1621년 3월 vs 사천군 요약
   
    → 장창으로 무장한 사천군 2만을 상대하기 위해 누르하치는 방패+조총병을 선봉에 세웠으나
        만주 8기 중 4기가 곧장 돌격하여 사천군을 궤멸시켰다.


사천군을 궤멸시킨 누르하치군은 계속 명군을 공격하였는데요.
누르하치는 계속 이 방패+조총병을 써먹고 싶었나 봅니다.

누르하치는 곧장 심양성 인근에 주둔하다가 구원 온 명군을 공격하였는데요.
이때 명군의 장수가 동중귀(董仲貴)였습니다.

이 부분 역시 고화질 영인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주실록 1621년 3월 태조파동중귀영도(太祖破董仲貴營圖)>


여기서 오른쪽 방패+조총을 앞세운 군이 누르하치의 만주병입니다.

<만문 만주실록 1621년 3월 기사中>
manju gurun i cooha sejen kalka faidafi bireme dosifi
만주 구룬 이 초-오하 서전 칼카 파이다피 비러머 도시피
만주 국 의 군대 수레 방패 행열하고 충격하여 진입하고
만주국의 군대가 방패차를 배열하고 충격하여 진입하였으며


이후 누르하치는 공성전에 조총을 꾸준히 사용하게 됩니다.

<만주실록 1626년 11월 태조솔병영원도(太祖率兵攻寧遠圖)>





흔히들 누르하치의 만주병을 냉병기 시대 최후, 최강의 강병이라고들 하더군요. 
조선의 일부 여진과 접촉했던 인물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후금의 활은 사거리가 조선의 활보다 사거리가 보잘것없어
주로 30보 이내에서 쏜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비나 물 등의 기후조건에 강한데 반면에, 
조선활은 실전에서 날이 덥거나 비가 오면 아교가 풀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며
조선의 무장들은 멀리서 과녁 맞히는 것을 즐겨 하는데, 이는 실전에서는 의미 없는 일이다고 하더군요.
어떤 글에는 <적이 날이 좋은 날만 쳐들어 오는가? 과녁처럼 우두커니 서있단 말인가?> 이라면서
조선군의 활 쏘는 방법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한 만주군의 기마돌격전을 목격한 이민환은 책중일록에
만주병의 장기는 엄청나게 빠른 기마돌격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민환은 책중일록에 만주의 기병이 조선군이 조총을 재장전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돌격해와 모두 쳐죽였다고 기록하면서
만주병을 대적해 야전에서 싸우기보다는 성에 의지해 조총으로 상대해야 한다고 보고서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 길공구의 누르하치와 조총 결론

→ 요동 침공 후 만주병은 대량의 조총을 얻었으나, 
    만주병들은 조총에 의지하기보다는 기마 돌격을 주로 하였다.
    누르하치는 야전과 공성전에 방패+조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끝-






덧글

  • 푸른별출장자 2015/03/14 01:04 #

    저런 목격담을 1621년에 보고 조정에 정보를 전했을 것인데

    1637년 쌍령 전투에서 4만의 조선 총병이 허무하게 만주족 기병들에게 깨졌다는 것은...

    전혀 학습효과나 대비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는...

    하기야 뭐 지금이라고...
    엉터리 무기 달아 놓고 돈 챙긴 인간들이 최고위급들이니... 뭐...
  • 迪倫 2015/03/15 11:35 #

    상세한 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영악한 사냥꾼 2019/03/11 20:32 #

    조총이 아니라 삼안총일 겁니다. 그림을 보니까 총구 3개 있네요. 한번에 총탄 세 발 날리긴 하는데, 총신의 길이가 짧아서 사거리가 아주 짧아요. 화승총이 40보인데, 삼안총은 10~15보 내외일 겁니다.

    명나라 주력화기가 호준포 (초경량 야전용 대포), 불량기 (자모포 분리로 엄청난 연사속도), 그리고 삼안총이었죠.

    여진족 활은 주로 목궁이라서 사거리가 60~70보이고 살상력 감안하면 그 절반 정도 되었겠죠. 조선의 최고활인 흑각궁은 장전으로 100보, 편전으론 200보 날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흑각궁의 재료수급이(물소뿔) 너무 힘들어서 정작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죠. 또 편전은 전문궁수나 날릴 수 있는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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