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는 홍이포에 맞지 않은듯싶습니다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통설에 누르하치가 1626년 1월 벌어진 영원성 전투에서 홍이포에 맞아 부상을 당해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심한 경우에는 영원성 전투에서 전사했다고도 하더군요.

우선 영원성전투는 1626년 1월에 벌어진 전투이고,
누르하치는 1626년 8월11일에 68세로 사망합니다.
이 6개월 동안 누르하치는 전과 다름없는 정벌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626년 4월4일에는 누르하치가 직접 군을 이끌고 몽고 칼카 부족 원정길에 나섭니다.
누르하치는 직접 군을 이끌고 한달여 동안 이 원정을 총지휘합니다.

또한 5월19일에는 몽고의 코르친 부족의 오오바 훵 타이지가 찾아오자
직접 당자에 고두배(절)을 한 이후에 성 10리 밖으로 나가 맞이합니다.
이때 오오바와 고두배를 행할 때 의자에 앉아 있던 누르하치가 직접 걸어나가 오오바와 포옹까지 합니다.
이후 연회까지 성대하게 베풀지요.
6월6일에는 누르하치는 오오바와 친히 결맹의식까지 치르고, 이후에도 계속 연회를 직접 주관합니다.
6월10일 오오바가 돌아가자, 누르하치도 역시 대신들을 이끌고 야외에서 유숙까지 하며 오오바를 전송해 줍니다.


후금의 사서에 나온 누르하치의 사망원인은 병사입니다.
후금의 사서에 따르면 1626년 7월23일 누르하치는 몸이 좋지 않아 청하의 온천으로 요양을 갑니다.
이곳에서 13일간 요양한 누르하치는 말을 타기도 힘이 들어 배를 타고 심양성으로 향합니다.
이어 심양성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병사합니다.
누르하치가 온천에 갔다는 점에 미루워, 노환에 따른 등창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진첩선(陳捷先/천제셴/1921~1982) 선생은 저서 <노이합적(努爾哈齊) 사진(寫眞/있는 그대로 옮겨 놈)>.
(국내에는 얼마 전에 <청 제국의 건설자>라고 번역이 되어 출간되었지요)
에서 누르하치가 과연 영원성에서 부상을 당하였는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진첩선 선생은
<근대 역사학자들은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죽었다는 설은 하나같이 믿지 못할 설에 불과하다>고 본다며
누르하치의 전투 중 부상설은 좀 더 많은 믿을 만한 자료가 더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우선 진첩선 선생은 영원성 전투의 부상설에 대해 3가지 사료를 열거하였는데요.
제가 이를 사서에서 찾아보고 발번역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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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말 청초 장대(張岱/1597~1667)가 쓴 사서 석궤서후집

석궤서후집(石匱書後集) 권(卷) 제(第) 11 원숭환(袁崇煥) 열전(列傳) 中
丙寅,北騎四十萬逼寧遠城,城中戍守數千人,兵勢單弱;
城外有紅炮數門,無敢發者。
崇煥事急,敕唐通判親自發炮。
凡放紅大炮者,必於數百步外掘一土塹,火著線,即翻身下塹,可以免死;
唐通判不曉其法,竟被震死。
炮過處,打死北騎無算;
並及黃龍幕,傷一裨王。
北騎謂出兵不利,以皮革裹尸,號哭奔去。
捷聞,上大喜。
拜崇煥為都察院右僉都御史,巡撫遼東;
尋晉兵部右侍郎。
遼東人謠曰:
『苦了唐通判,好了袁崇煥
(1626년 1월 22일) 병인일(丙寅)에, 북기(北騎/북쪽 기병, 후금군) 40만(萬)이 영원성(寧遠城)을 핍박(逼)하였는데,
성중(城中)의 수수(戍守/수비하는 군사)는 수천인(數千人)이었으며, 병세(兵勢)가 단약(單弱/외롭고 약함)하였다.
성외(城外)에 홍포(紅炮/홍이포) 수문(數門)이 있었는데, (명군 중에 후금군이 두려워) 감히(敢) 발사(發)하는 자(者)가 없었다.
원숭환(崇煥)이 사급(事急/일이 급함)하자, 칙(敕/꾸짖음)하여 당통판(唐通判)이 스스로 발포(發炮/포를 발사함)하게 하였다.
무릇 홍대포(紅大炮)를 방포(放)하는 자(者)는, 필히(必) 수백보(數百步)의 외굴(外掘)의 한 토참(土塹/흙 구덩이)에서
불이 도화선(線)에 붙으면, 곧 구덩이 아래로 번신(翻身/몸을 뒤집음)하여야, 가(可)히 이로써 면사(免死/죽음을 면함)한다.
당통판(唐通判)이 그 방법(法)을 불효(不曉/이해하지 못함)하여, 마침내 진사(震死/진동에 의해 죽임)를 피(被/당함)하였다.
포(炮)가 떨어지는 곳마다, 타사(打死/맞아 죽음)한 북기(北騎/북쪽 기병, 여진병)가 무산(無算/헤아릴 수 없음)하였다.
더불어 (포탄이) 황룡(黃龍)의 군막(幕)에 이르자, 한 비왕(裨王/소국의 왕, 왕의 보좌관)이 상(傷)하였다.
북기(北騎)가 출병(出兵)이 불리(不利)하다 일컫고, 피혁(皮革/가죽)으로써 과시(裹尸/시체를 감쌈)하고는,
호곡(號哭/목놓아 슬피 욺)하고는 분거(奔去/달아나 감)하였다.
첩문(捷聞/승전보를 아룀)하니, 상(上/임금, 명 15대 황제 희종, 천계제)이 대희(大喜/크게 기뻐함)하였다.
배(拜/벼슬을 줌)하여 원숭환(崇煥)을 도찰원우첨도어사(都察院右僉都御史)로 삼고, 
요동(遼東)을 순무(巡撫/돌아다니며 위로함)하게 하였다.
거듭하여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에 진(晉/나아감)하였다.
요동(遼東) 사람이 요(謠/웃음, 노래함, 헐뜯음)하며 말하길
『고생(苦)은 당통판(唐通判)이 하고, 호강(好)은 원숭환(袁崇煥)이 한다!』

→ 홍이포의 포탄이 황룡의 군막에 떨어져 한 명의 비왕(裨王)이 상하였다.
   여진병들이 가죽으로 시체를 감싸고는 슬피 울면서 달아났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한 명의 비왕(一裨王)>이란 점입니다.
   누르하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비왕, 즉 왕족 중 한 명이란 뜻으로 보입니다.
   또 한가지 <황룡의 군막(黃龍幕)>입니다.
   일전에 팔기군에 대해서 알아본 적이 있었는데요.

누르하치 팔기군의 규모-2부 1621년 9만6천(정충신의 보고서) http://cafe.naver.com/booheong/109673
명 선전포고 당시 누르하치의 병력 현황 http://cafe.naver.com/booheong/109652
맹안모극 vs 팔기군 성립초기 계급 간략 비교 http://cafe.naver.com/booheong/108201
각종 사서의 팔기군의 시초 http://cafe.naver.com/booheong/107924

1615년부터 1625년까지 8기군의 주요 인물 현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1615년 후금사서의 8기군 기주>
1615년 확립된 팔기군주인8기기주(궈사어전)
누르하치정황기 
양황기 
다이샨정홍기 
양홍기 
아민정람기 
망월타이양람기 
홍타이지양백기 
두두정백기 
 
<1621년 조선 정충신의 보고서에 따른 8기군 기주>
1621년 정충신의 보고서
팔기군 현황
주인 기주(궈사어전)
누르하치정황기대사
양황기아두
다이샨정홍기탕고대
양홍기보을지사
홍타이지양백기동구어부
망월타이양람기모한나리
아민정람기자송합
두두정백기양고유

<만주실록에 기록된 1621년 경 8대 패륵(버이러) 및 패자(버이서)>

 1. 다이샨(daixan) → 누르하치의 2남
 2. 아민(amin) → 슈르하치의 2남
 3. 망월타이(mangvltai) → 누르하치의 5남
 4. 홍 타이지(hong taiji) → 누르하치의 8남
 5. 더거러이(degelei) → 누르하치의 10남
 6. 지르가랑(jirgalang) → 슈르하치의 6남
 7. 아지거(ajige) → 누르하치의 12남
 8. 요토(yoto) → 다이샨의 장자


<1624년경 후금 왕족들의 서열>
※ 4대 버이러
   1. 다이샨 → 암바 버이러
   2. 아민 → 버이러
   3. 망월타이 → 버이러
   4. 홍 타이지 → 버이러

※ 버이서/타이지
   5. 아바타이 → 타이지
   6. 더거러이 → 타이지
   7. 자이상워 → 타이지
   8. 지르가랑 → 타이지
   9. 아지거 → 타이지
   10. 두두 → 타이지
   11. 요토 → 타이지
   12. 쇼토 → 타이지
   13. 사하랸 → 타이지

<1626년 5월 몽고 칼카 부족 정벌전 참전한 8기군 기주급>
   1. 다이샨
   2. 아민
   3. 홍타이지
   4. 지르가랑
   5. 아지거
   6. 요토
   7. 쇼토
   8. 사하랸

정황기, 양황기 2기는 누르하치의 직속부대입니다.
1621년 조선에서 파견된 정충신이 보고한 정황, 양황기의 기주는 각각 대사와 아두입니다.
현재로서는 대사와 아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여하튼 누르하치 직속부대 정황/양황기의 핵심 군막에 홍이포의 포탄이 떨어졌을 확률이 있을듯합니다.
하여 누르하치의 친족 중 한 명이 포탄에 맞았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누르하치가 영원성에서 홍이포의 포탄을 맞았다는 가장 큰 기본이 이 자료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확인해 보니 이는 명실록에 정확히 기사가 나와 있더군요.
누르하치가 포탄에 맞은 것이 아니라, 왕자 한 명이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실록 희종(熹宗) 1626년 2월1일 기사中
天啟六年二月甲戌朔
(중략)
兵部尚書王永光奏
據山海關主事陳祖苞塘報
二十四五兩日虜眾五六萬人力攻寧遠
城中用紅夷大炮及一應火器諸物
奮勇焚擊前後傷虜數千
內有頭目數人酋子一人遺棄車械鉤梯無數已
천계(天啟/명 15대 황제 희종의 #1연호) 6년(六年/1126년) 2월 초하루 갑술일(甲戌)에,
(중략)
병부상서(兵部尚書) 왕영광(王永光)이 주(奏/아룀)하였다.
산해관(山海關) 주사(主事) 진조포(陳祖苞)가 당보(塘報/적의 동태를 살펴서 알림)한 것을 근거(據)하면,
24일~25일 양일(兩日)에 노중(虜眾/오랑캐 무리) 5~6만인(人)이 영원(寧遠)을 역공(力攻/힘써 공격함)하였는데,
성중(城中)에서 홍이대포(紅夷大炮)와 더불어 모든 화기(火器)의 제물(諸物/여러 물건)을 사용(用)하여,
분용(奮勇/용감하게 떨쳐 일어남)하여 분격(焚擊/불사르고 공격함)하였으며,
전후(前後)로 노(虜/오랑캐) 수천(數千)이 상(傷)하였는데, 
그 안에는 두목(頭目) 수인(數人)과 추자(酋子/누르하치의 아들) 1인(人)이 있었나이다.
유기(遺棄/남기고 버림)한 차계(車械/수레와 병기)와 구제(鉤梯/갈고리와 사다리)는 무수(無數/수 없이 많음)하였습니다.

→ 희종에게 바치는 상주문에 추장의 아들 1인이 상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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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 요동경략 고제의 보고서

→ 병부상서 왕영광의 보고서에 이어 이틀 후인 2월3일에 요동경략 고제의 보고서가 또 올라옵니다.


명실록 희종(熹宗) 1626년 2월3일 기사中
丙子經略高第報
奴賊攻寧遠炮斃一大頭目
用紅布包裹眾賊抬去放聲大哭
병자일(丙子/2월3일)에 경략(經略) 고제(高第)가 보고(報)하였다.
노적(奴賊/누르하치, 후금)이 영원(寧遠)을 공격(攻)하였는데, 한 대두목(大頭目)이 포폐(炮斃/대포로 죽음)하였나이다.
홍포(紅布/붉은 포)를 사용(用)하여 포과(包裹/써서 감쌈)하고는,
중적(眾賊/도적 무리)이 방성대곡(放聲大哭/목을 놓아 크게 욺)하여 대거(抬去/들어 올려 가버림)하였나이다.

→ 포를 맞아 죽은 자가 대두목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누르하치는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역시 누르하치의 친족 중에 한 명이 포탄을 맞은 것으로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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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시 영원성에 와 있던 조선 역관 한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인용《일월록》中
○ 우리나라 역관(譯官) 한원(韓瑗)이 사신을 따라 명 나라에 갔다가 마침 숭환을 만났는데, 
숭환이 기뻐하며 사신에게 한원을 빌려 달라고 청하여 자기 진(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 때문에 한원이 그 전투를 목견하였는데, 숭환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비록 알 수 없었으나, 
군중(軍中)이 매우 고요하고, 숭환이 두세 명의 막료들과 서로 한담을 나눌 뿐이었다. 
적이 습격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숭환이 가마를 타고 망루(望樓)로 가서 
한원 등과 함께 옛 역사를 논하고 글을 이야기할 뿐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대포 한 방을 쏘니 포성이 천지를 뒤흔들므로 한원이 무서워서 머리를 들지 못하자, 
숭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적이 왔다.” 하였다. 
곧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니 적병이 들에 가득히 몰려오는데 성 안에서는 전혀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그날 밤 적이 외성(外城)에 들어왔는데, 대개 숭환이 미리 외성을 비워두고 적을 유인한 것이다. 
적이 병력을 합쳐 성을 공격하자 또 대포를 쏘니 성 위에서 일시에 불을 켜 천지를 환히 비추고 화살과 돌을 함께 떨어뜨렸다. 
싸움이 바야흐로 치열해지자 성 안에서 성첩(城堞) 사이마다 매우 크고 긴 나무궤를 성 밖으로 밀어 냈는데, 
반은 성첩에 걸치고 반은 성 밖으로 내놓으니 궤 속에 실상 갑사(甲士)가 엎드려 있다가 궤 위에 서서 내려다 보면서 
화살과 돌을 던졌다. 
이렇게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성 위에서 마른 풀과 기름과 솜 화약을 함께 던지니 
얼마 후에 땅 속에 묻었던 포(砲)가 크게 폭발하여 성 밖에서 안팎으로 흙과 돌이 두루 날아 흩어졌다. 
불빛 속에서 오랑캐들을 바라보니 무수한 인마(人馬)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가 어지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로써 적은 크게 꺾여 물러갔다. 
이튿날 아침 적의 대열이 큰 들판 한쪽에 마치 잎사귀처럼 뭉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숭환이 곧 예물을 갖추고 한 사람의 사자를 보내 인사하기를,
 “노장(老將 누루하치)이 천하를 횡행한 지 오래 되었는데, 오늘 나에게 패전당했으니 아마도 운수인가 보다.” 하였다. 
이때 누루하치는 먼저 중상을 입었는데, 이에 이르러 숭환에게 예물과 명마(名馬)를 갖추어 답례하고
다시 한번 싸울 기약을 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분통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 《일월록》

→ 당시 영원성에 있던 조선역관 한원이 누르하치가 부상을 당한 것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누르하치가 죽은 후에야 누르하치가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죽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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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가지 사료, 장대의 석궤서후집/요동경략 고제의 보고서/조선 역관 한원의 들은 이야기가
진첩선 선생이 <다른 사람들이 누르하치의 영원성 부상 및 사망 의견>의 근거 사료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석궤서호집은 누르하치가 아닌 비왕 
고제의 보고서는 역시 누르하치가 아닌 대두목 → 같은 명실록의 기사에는 추장의 아들 
조선 역관 한원은 누르하치 사후에 들은 이야기
이겠네요.

반면 주유쟁(朱維錚) 선생의 저서 주출중세기(走出中世紀)에서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는 대목도 흥미롭습니다.
《走出中世紀》不僅說荷蘭人的紅夷大炮入了毛文龍麾下,還說:
「危急中,率軍前來增援的毛文龍,用紅夷大炮轟擊八旗馬隊,打得滿兵馬仰人翻,連努爾哈赤也中炮負傷,不治而死。」

<만주실록 삽화도中>






대명전쟁이후 승승장구하며 끝없이 규모를 키워온 누르하치가
마음먹고 13만의 병력으로 겨우? 수천~2만이 지키는 영원성을 호언장담하며 공격하였으나
크나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면서 생긴 화병에 노환이 겹치면서
등창이 왔고, 이에 병사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대포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면 곧바로 이어진 1달간의 몽고 칼카부 원정이나,
코르친부 오오바 영접/전송/유숙을 설명하기 힘들듯합니다.
명실록에도 엄연히 누르하치가 아닌 왕족급이 대포를 맞았다고 기록하였는데 말입니다.

추후에 영원전투 부상설을 확실하게 입증시킬 흥미로운 사료를 찾아 보았으면 좋겠네요.^^



덧글

  • oldman 2015/06/01 22:28 #

    저도 홍이포에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여러가지 정황상 화병에 더 가까운 듯 싶네요.
    좋은 자료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RuBisCO 2015/06/06 04:32 #

    하기야 누르하치가 아이언맨도 아니고 통짜 쇳덩어리 포탄을 직격으로 맞았으면 그자리에서 삼도천 특급열차를 탔겠지요.
  • 영악한 사냥꾼 2019/03/11 20:38 #

    같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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