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틈틈이 후금 누르하치의 일대기와 그 선조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데요.
오늘은 후금과 청나라의 사서에 기록된 누르하치 선대의 기록이 혼동과 오류가 많고,
실상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거하여, 분명하게 선대를 추적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아래의 글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듯합니다.
누르하치의 선조 먼터무가 이성계 부하질 하던 년도 추정 http://cafe.naver.com/booheong/110554
세종 누르하치의 6대조 먼터무 암살을 지시하다. http://cafe.naver.com/booheong/110549
청태조의 6대조 맹가첩목아 명의 회유를 거부하고 조선을 섬기다 http://cafe.naver.com/booheong/88457
후금 만주 족보도(영고탑 패륵) 및 각 사서별 이름 http://cafe.naver.com/booheong/110908
요 며칠간 읽은 사서와 책 및 인터넷 글들에 관한 잡다한 내용 http://cafe.naver.com/booheong/109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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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의 건주위는 후금과 청의 사서에 명나라가 만주를 오인하여 건주라 하여 생긴 명칭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조무황제실록 中
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
南朝誤名建州。
그 나라를 만주(滿洲)라 정호(定號/이름을 정함)하니, 이에 (애신각라 포고리영웅이) 그 시조(始祖)이다.
[남조(南朝/명나라)가 건주(建州)로 오명(誤名/이름을 오인함)하였다]
만주실록 中
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
【南朝誤名建州】
그 나라를 만주(滿洲)라 정호(定號/이름을 정함)하니 이에 (애신각라 포고리옹순이) 그 시조(始祖)이다.
[남조(南朝/명나라)가 건주(建州)로 오명(誤名/이름을 오인함)하였다]

실상 누르하치의 선조에 관해서는 후금이나 청의 사서 보다도 조선왕조실록에 더욱 상세한 기록이 있지요.
조선왕조실록에는 누르하치의 6대조 맹가첩목아(먼터무/멍터무)의 부족은
원나라가 매조공로을 위해 여진(철리) 오국부 지역에 설치한 3성 부족 중 하나인 오도리 부족이며,
먼터무의 부친은 동휘후(童揮厚)/동휘호(童揮護)이고 모친은 야오거(也吾巨)/야오거(耶烏居)입니다.
오도리 부족은 만주어로 3을 뜻하는 이란(ilan), 즉 3성 의란 지역에서 대대로 살다가 몽고족의 침략이 거세지자
1367년경 3성 중 하나인 호리개(건주위 초대 도독인 이만주의 선조 부족) 부족이 의란현에서 먼저 남하하였고,
1372년경에는 먼터무의 오도리 부족도 남하하여 돈화현 인근에 정착하였습니다.
이후 올적합의 침략을 받아, 1385년경 먼터무는 고려의 동북방 장수 이성계의 후원하에 부족민 180여 호를 이끌고
알목하/오음회(조선 회령) 지역으로 이주하여, 이성계의 휘하에서 왜구 토벌 등의 전공을 세웠습니다.
<먼터무 오도리 부족의 이동 경로>

조선이 개국하고 먼터무는 한양에 입조하고 명의 회유를 거부하기도 하였으나,
태종 이방원과의 사이가 나빠지자 먼터무는 명에 입조하여 건주 좌위 도독에 임명되고
당시 건주위 도독이었던 파저강의 이만주 인근의 봉주로 1411년 부족민을 이끌고 서진하게 됩니다.
1423년 봉주에 몽고족의 침략이 거세지자, 다시 먼터무는 조선에 아들 동권두을 입조시키고 다시 조선을 섬기고 싶다고 청하며
부족민 523호를 이끌고 회령(오음회)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1433년 4월 파저강의 건주위 도독 이만주를 토벌하기 위해 조선 세종은 1만 5천의 보기병을 동원하면서
총사 최윤덕에게 먼터무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명에 입조하여 되돌아오던 먼터무와 길이 어긋나 실패하게 됩니다.
1433년 10월 올적합 양목답올의 한족 납치 사건으로 명 사신 배준이 군사 160명으로 오음회를 방문하였고,
양목답올과 먼터무의 갈등으로 7성 야인 800명을 동원한 양목답올에 의해 먼터무가 피살당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후 먼터무의 이복동생인 판차(범찰)와 먼터무의 아들 동산은 명에 입조하였고, 판차가 건주 좌위 도독에 임명 받습니다.
이후 조선은 오도리 부족 인근에 회령진과 석성을 축성하였고,
1437년 5월에는 함길도 도절제 김종서가 세종의 명을 받고 은밀히 오도리 부족 토벌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판차는 조선이 오도리 부족을 몰살시킬 것이라 부족민을 협박하여
1440년 4월 부족민 168호를 이끌고 파저강의 이만주에게 의탁하게 됩니다.
판차가 도주한 것을 알아챈 김종서는 급히 군사를 몰아 오음회를 공격하였고,
남아있는 부족민을 고문하여 판차의 도주로를 파악하였고,
이어 급하게 판차를 추격하여 50명을 빼앗아 오음회로 되돌아옵니다.
이후 먼터무의 아들 동산과 범찰이 건주 좌위 자리를 놓고 대립하였고,
1442년 명은 건주 좌위를 분리시켜 범찰을 건주 우위 도독, 이후 동산을 건주 좌위 도독에 임명하였으며,
이후 건주 좌위의 세계가 이어져 누르하치대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렇게 누르하치 선대의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으나,
반면에 누르하치 대에는 이전 선대의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여러 착오가 있었지요.
우선 후금과 청의 사서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3성 만주 백성의 반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애신각라 포고리옹순이 3성 지역에 정착하여 만주국의 어전(주인) 및 버이러(패륵)가 된 후,
후손이 만주 백성을 괴롭혀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후손 판차만이 탈출하였다.
판차의 후손인 누르하치의 6대조 먼터무가 선대의 복수를 하고 건주위 도독이 되어 허투알아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는 1372년경 오도리 부족이 몽고족의 침략에 의해 3성 지역에서 남하한 것.
먼터무가 조선을 버리고 명에 입조하여 건주 좌위 도독에 임명된 것.
몽고족의 침략이 거세지자 다시 조선에 의탁하여 오음회(회령)으로 되돌아온 것.
양목답올과의 분쟁으로 먼터무가 피살당한 것.
판차와 동산이 김종서의 추격을 피해 허투 알아 지역으로 이주한 것.
즉 문서가 없이 구전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누르하치의 선대의 기록이 불분명하게 얽혀
후금과 청의 사서에 기록된 것은 아닐까 싶네요.
누르하치 이후 청나라가 <누르하치 이전 150년 전의 선대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또한 조선인조차도 접할 수 있는 자가 극소수에 불과하였기도 하였고요.
조선왕조실록에는 후금과 청의 사서에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은
누르하치의 6대조 먼터무의 부모와, 먼터무의 이복동생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먼터무의 이복동생들의 후손들은 계속 회령 지방에 남아 조선을 섬기고, 서서히 조선인이 되어 갔습니다.
<만주실록 삽화도 中>
<그림을 자세히 보실 분은 그림을 클릭하시고 원문보기를 누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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