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일설에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 진출하고, 두만강을 건너 누르하치의 여진족과 싸웠다는 말도 있던데요.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시겠지만, 실상 가등청정이 함경도를 점령하고, 두만강을 건너 싸웠던 여진족은
동해여진의 하나인 노토(老土) 부족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 7월1일 기사中
(가등청정이) 그리고는 마침내 군사를 인솔하여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깊숙이 노토 부락(老土部落)까지 들어가
성(城)을 공격하니 호인(胡人)이 사방에서 일어나 요격하여 사졸(士卒)들의 사상자가 많았다.
이에 진로를 바꾸어 종성(鍾城)의 문암(門岩)을 경유하여 강을 건너 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에 차례로 들어갔다가
해변의 협로(峽路)를 따라 경성(鏡城)으로 돌아왔다.
1592년 당시 누르하치의 세력은 당시 본거지였던 퍼알아 인근으로 국한됩니다.
병력은 1만 이내의 수천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누르하치의 파병 제안은 허풍? http://cafe.naver.com/booheong/112831
한편 노토부족은 조선의 최동북단 회령과 경성 사이를 근거로 하는 부족으로
두만강 일대에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400년 경으로 짐작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8월1일 기사中
회령 부사(會寧府使) 박종남(朴宗男)이 치보하기를,
‘수상 도추장(水上都酋長) 노토(老土)가 그의 휘하인 개락지(介落之)를 시켜 진고(進告)하기를,
「올아적(兀阿赤)이 노토(老土)를 들어오도록 초치하였다.
그러자 노토가 답하기를,
『우리는 조상 이래 대대로 조선을 받들어 오면서 2백여 년 동안 무사히 살아왔다.
그런데 올아적이 무슨 일로 나를 부른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는 곧 성을 쌓아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올아적이 쳐들어 올 경우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가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노토부족를 위시한 두만강 인근의 여진족 병력의 규모는 다음 기사가 참고가 될듯싶네요.
조선왕조실록 1599년 6월29일 기사中
함경 감사 윤승훈(尹承勳)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북병사(北兵使) 오응태(吳應台)를 대동하고 육진(六鎭)에 도착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었는데,
연회에 참석한 번호(番號)의 수가 무려 7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계미년 간에 이탕개(尼湯介)가 침략해 왔을 때 번호 등은 전혀 와서 참여하지 않았다 하는데,
이제 보건대 육진의 번호들이 노토(老土)와 통모(通謀)하지 않은 것은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온성(穩城)에서 연회를 베풀던 날에 추장 등이 모두 무릎을 꿇고 진정하기를
‘몇년 동안 서울에 조회를 못했으니 올해는 허락해 달라.’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중국군 10만 명이 왜적을 정벌하러 나와 왜적을 모두 섬멸하고 현재 나라 안에 있다.
회군하여 돌아간 뒤에는 즉시 너희들이 서울로 조회 오는 것을 허락할 것이니, 우선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더니, 추장 등이 다시 호소하기를
‘사세가 과연 그렇다면 서울에 조회할 수는 없겠지만 의립(衣笠)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원컨대 진상(進上)하여 상을 받게 해 달라.’ 하므로,
신이 이 한 가지 일을 마땅히 조정에 품신하여 결정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사신은 말한다. 오랑캐는 마음이 흉칙하고 교활하여 언제 변란을 일으키고 속일지 알 수 없으니,
비록 연향에 참가했다고 한들 어떻게 그들이 노토(老土)와 통모(通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의심할 것 없다고 한 윤승훈이야말로 오활하다 하겠다.
수신(帥臣)이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천박하니, 뒷날 변경에 환란이 생길까 우려된다.
청의 사서에 기록된 당시 동해여진은 크게 다음 3 부족입니다.
악집부(渥集部), 와이객부(瓦爾喀部), 고이객부(庫爾喀部)
이 중에 노토 부족이 어느 부족인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할듯싶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노토부족은 두만강 일대에 거주하는 여진부족 중 가장 강대한 세력 중에 하나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노토부족은 1600년 4월경에 선조의 북벌 결행으로 약 4천의 조선군사가 노토부족을 급습하였고,
조선 관리의 보고에 의하면 노토부족민 약 1만 명이 학살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세력이 크게 줄어듭니다.
선조의 북벌에 관한 내용은 추후에 따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세력이 줄어든 노토부족을 위시한 동해여진을 호시탐탐 노리던 것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였습니다.
반면에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영향권을 두고 누르하치와 대립하던 세력은 울아의 부잔타이였습니다.
조선에서는 울아의 부잔타이를 홀온(忽溫)이라 통칭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노을가적의 건주위↔노토부족의 노토↔홀온의 부자타(浮者他)/하질이(何叱耳)
의 세력 다툼의 기록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와 있습니다.
홀온(忽溫)은 청의 사서에 기록된 호륜국(扈倫國)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호륜국은 다른 말로 해서여진이라 칭하며, 소속된 부족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라부(烏喇部), 합달부(哈達部), 엽혁부(葉赫部), 휘발부(輝發部)
흔히 말하는 당시 여진5국, 즉 만주국을 제외한 울아국,하다국,예허국,호이파국 이 속한 해서여진을 뜻하지요.
여하튼 1592년 경 노토부족과 누르하치의 건주위는 별 관계가 없던 상태였습니다.
동해여진이 누르하치에게 복속되기 시작한 년도는 대략 1607년 이후이고, 이나마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1635년 홍타이지대에 이르러서야 완전 복속이 이루워집니다.

뭐 왜놈들이 노토놈들을 공격해?
ㅋㅋ 나야 땡큐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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