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 정몽주를 죽이고 충신으로 만들다. 기타 역사 이야기

이방원 일당이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이 개국하자 정몽주는 사서에 간신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원이 왕이 되자 곧장 정몽주에 대한 복권이 논의되었고

이후의 사서에서는 충신의 표본이 되었지요.

이후에는 조선이 개국하기 전 일천년에 걸쳐 대유(大儒)는 오직 정몽주만 있었을 뿐이다는 평을 듣게 되지요.



1. 조선이 개국하고 간신으로 기록되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1392년 7월 18일 기사中

또 그 신하 정몽주(鄭夢周) 등이 간사한 계책을 몰래 이루어 난(亂)의 발단을 일으키고자 하여,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1392년 10월 9일 기사中

또 정몽주 등이 국권(國權)을 마음대로 부려 대간(臺諫)을 몰래 부추겨 화란(禍亂)을 부채질하여 

장차 내 몸에까지 화를 미치게 하려고 꾀했는데, 

이에 항거하는 소장(疏章)을 올려 정몽주와 그 당여(黨與)들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간사한 계획을 와해(瓦解)시켜 오늘날이 있게 하였으니, 그 충성심은 칭찬할 만하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1392년 11월 19일 기사中

또 고려 왕조의 정몽주 등이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대간(臺諫)을 몰래 꾀어서 

충량(忠良)을 모함하여 해치려고 하던 즈음에, 내가 그 때 말에서 떨어져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간사한 무리들의 화가 거의 장차 나에게 미치려 하였으나, 

곧 병졸을 훈련하여 나를 호위하고 그 간사한 모의를 저지시켰으니, 그 공이 크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1392년 12월 16일 기사中

또 몸소 사냥하여 와서 하례(賀禮)를 하려고 하던 차에,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초막(草幕)에 누워 있었는데, 

간신(姦臣) 정몽주(鄭夢周)는 전하께서 비호해 준 사람인데도 

자신이 총재(冢宰)가 되어 손수 정권을 잡고는, 왕씨의 뜻을 맞추어 대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신과 정도전·남은을 전하의 심복(心腹)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틈을 타 계책을 부려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어 먼저 내쫓고, 다음에 전하를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2. 태종 이방원이 정몽주를 복권시키다.


조선왕조실록 태종1년 1401년 1월 14일 기사中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권근(權近)이 상서(上書)하였다.

(중략)

가만히 보건대, 전조(前朝)의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본래 한미(寒微)한 선비로 

오로지 태상왕의 천발(薦拔)의 은혜를 입어서 대배(大拜)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이 어찌 태상왕께 후히 갚으려고 하지 않았겠으며, 

또 재주와 식견의 밝음으로써 어찌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돌아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왕씨(王氏)의 위태하고 망하는 형세를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자기 몸이 보전되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섬기던 곳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아서 생명을 잃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절(大節)에 임(臨)하여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통(韓通)이 주(周)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송 태조(宋太祖)가 추증(追贈)하였고,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원 세조(元世祖)가 또한 추증하였습니다. 

정몽주가 고려(高麗)를 위하여 죽었는데, 오늘에 홀로 추증할 수 없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태종1년 1401년 11월 7일 기사中

고려 문하 시중(門下侍中) 정몽주(鄭夢周)에게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에게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증직(贈職)하였으니,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권근(權近)의 말을 좇은 것이었다.



3. 태종 이방원 <정몽주의 호방(豪放)함은 비길 데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2년 1402년 4월 3일 기사中

임금이 말하기를,

정몽주(鄭夢周)는 향생(鄕生)으로서 장원이 되어 호방(豪放)함이 비길 데 없었다.

하니, 이응이 대답하였다.

정몽주 같은 분은 중국에도 드뭅니다.”



4. 세종 <정몽주는 충신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12년 1430년 11월 23일 기사中

또 말하기를,

“길재(吉再)의 절조는 포창할 만하다. 정몽주(鄭夢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니, 순이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신이 그가 충신이란 말은 들었습니다마는, 춘추관(春秋館)에서 이에 대한 공문을 보내 온 것이 없고, 성상께서도 명령하시지 아니하여, 신은 감히 청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몽주(夢周)의 일은 태종께서 그가 충의를 위하여 죽은 줄을 아시고 벌써 포창하고 상을 내리셨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있느냐. 충신의 대열에 기록함이 옳다.


조선왕조실록 세종13년 1431년 11월 11일 기사中

경연에 나아가 정몽주와 길재를 《충신도》에 넣으라 하였다

임금이 설순에게 이르기를,

시중 정몽주(鄭夢周)는 죽기까지 절개를 지키고 변하지 않았으며, 주서 길재(吉再)는 절개를 지켜 마음을 변하지 않고 상소해서 물러가기를 청했으니, 

찬술(撰述)한 《충신도(忠臣圖)》안에 모두 얼굴을 그리고 찬(贊)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5. 고려 5백 년간 진정한 충신은 정몽주!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 1450년 12월 3일 기사中

정사를 보았다.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 등이 아뢰기를,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는 것은 강상(綱常)을 굳게 하는 것이니, 

 정치를 하는데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고려 5백 년간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는 충절이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옛날 우리 태종(太宗)께서는 권근(權近)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정몽주를 추시(追諡)하시었고, 

 길재를 복호(復戶)하시었고, 그 아들을 모두 봉작(封爵)하시었습니다. 

 세종(世宗)께서도 또 길재를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로 추증(追贈)하였고, 

 정몽주도 이미 시호하였습니다. 

 청컨대 길재에게 작위(爵位)를 더하고 또 시호를 주어서 절의를 권려(勸勵)하소서.”


조선왕조실록 성종 9년 1478년 6월 3일 기사中

동부승지(同副承旨) 김계창(金季昌)이 아뢰기를,

“임금은 절의(節義) 있는 선비를 소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평시에 의임(倚任)하지 않으면 위란(危亂)할 때에 수용(收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임금이 소식(蘇軾)에게 묻기를, ‘절의 있는 선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니, 소식이 대답하기를, ‘평시에 할 말을 다하고 극간(極諫)하는 자는 절의 있는 선비이고, 아부하며 순종하는 자는 간신(奸臣)입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진실로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절의 있는 선비는 세상에 많지가 않습니다. 

고려(高麗) 5백 년에 오직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2년 1481년 9월 20일 기사中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전한서(前漢書)》를 강(講)하다가 ‘소무(蘇武)가 흉노(凶奴)에게 사로잡혔지만, 항복하지 아니하였다.’는 데 이르러, 참찬관(參贊官)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절의(節義)의 선비는 세상에 항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려(高麗)는 5백 년 동안 오직 정몽주(鄭夢周) 한 사람뿐이었으니, 

 그 후손[後裔]을 마땅히 녹용(錄用)해야 합니다.”

하였다.



6. 조선 이전 일천년에 대유자는 정몽주뿐!


조선왕조실록 선조4년 1571년 6월 18일 기사中

유희춘이 이황(李滉)의 《심경(心經)》을 읽고 논하였다.

“그 논설이 매우 정밀하다. 

 도(道)를 들은 대유(大儒)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지경에 이를 수 있겠는가. 

 참으로 우리 동방(東方)에 정포은(鄭圃隱) 뒤의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2년 1610년 9월 5일 기사中

5현을 문묘 종사하는 일로서 교서를 내리다

(중략)

우리 동방을 돌아보건대 나라가 변방에 치우쳐 정학(正學)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은 일이 드물었다. 

기자(箕子)에 의해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가르침이 펼쳐져 예의의 방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 시대의 준재들도 사장(詞章)의 누습(陋習)을 벗어나지 못했고,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천 년 동안에 겨우 포은(圃隱) 한 사람을 보게 되었을 뿐이었다.

(중략)

또 판중추원사 허조(許稠)의 말로 아뢰기를,

“본조의 개국 초기를 당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일지라도 천명과 인심의 향배(向背)를 

 모두 알았사온데, 정몽주같이 어질고 밝은 사람으로서 어찌 이를 모르리오마는, 

 그 지조를 고치지 않고 끝내 신자(臣子)의 절의를 지켰던 것이니, 

 만약 조정에 있는 자들이 모두가 몽주의 그 마음을 가진다면 충의로운 신하라고 일컬어야 

 옳을 것입니다. 몽주의 후예를 특별히 탁용하여 그 절의를 권장케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땅히 이를 쓸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 정종본(鄭宗本)이 이미 수령이 되었고, 

 장자인 정종성(鄭宗誠)도 또한 현관이 되었은즉, 무어 급급(汲汲)하게스리 발탁해 옮기랴.”

하였다.



※ 정몽주가 마음만 바꿔 먹었다면 개국공신이 되었을 것!


조선왕조실록 성종7년 1476년 8월 13일 기사中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가 말하기를,

(중략)

고려[前朝] 말기의 정몽주(鄭夢周)는 태조(太祖)에게 간택되어서 지위가 정승(政丞)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 당시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한 번 마음만 바꾼다면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설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정몽주는 끝내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義)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덧글

  • 개성공단 폐쇄 2016/02/03 16:09 #

    저런 이방원도 명나라 황제가 처녀를 보내라고 하자,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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