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과 108 염주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일전에 누르하치가 앉아 있을 때는 늘 염주를 굴린다는 것을 소개해 드렸는데,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의 경우 대략 4품 이상의 관리의 경우에는 

108개의 구슬이 있는 염주를 반드시 목에 건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강희제가 후사를 정할 때 자신의 염주를 윤진(胤禛/옹정제)에게 주어 그 뜻을 밝혔다고 하네요.

그 염주는 순치제가 강희제에게 물려준 것이라고 하니, 혹 누르하치의 염주가 이때까지 이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정조 때 무오연행록에서는 중과 같이 염주를 멨는데 변발까지 하고 있으니 매우 우습다는 기록도 보이네요.

또한 조선 북청에서 오래된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여진인의 시체로 보이는데, 목에 염주를 걸고 있었다고 합니다.


늘 염주를 굴리는 자비로운 누르하치 http://cafe.naver.com/booheong/131545



계산기정 제5권 부록(附錄) 의복(衣服) 中

조회 때 문관, 무관은 수주(數珠 염주(念珠))를 목에 거는데 그 수는 108개다. 

동주(東珠)가 상등이고, 산호가 그다음이며, 그 나머지는 품계에 따라 조절한다. 

격자(格子)의 소주(小珠) 및 변발(辮髮 땋은 머리)의 끝에 달린 주패(珠貝)도 또한 품절(品節)이 있고, 

또 말의 주락(珠絡)으로 관품(官品)을 구별하니, 그것을 마척흉(馬踢胷)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 경종 2년 1722년 12월 17일 기사中

원접사 김연이 강희제가 후사를 정하고 임종하였음을 호조 판서 이태좌에게 말하다

“강희 황제(康熙皇帝)가 창춘원(暢春苑)에 있을 때 병세가 극심해지자,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각로(閣老) 마제(賢齊)를 불러서 말하기를, 

 ‘제4자(第四子) 옹친왕(雍親王) 윤진(胤禛)이 가장 현철(賢哲)하니, 

 내가 죽은 뒤에 세워서 사황(嗣皇)을 삼고, 윤진의 제2자(第二子)는 영웅의 기상(氣像)이 있으니, 

 반드시 봉하여 태자(太子)를 삼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임금을 바꾸지 못하는 도리와 천하를 평치(平治)하는 요체를 윤진(胤禛)에게 훈계하겠다.’ 

하고, 머리와 목에 걸었던 염주(念珠)를 벗어서 윤진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순치 황제(順治皇帝)께서 임종(臨終)하실 때 짐(朕)에게 준 물건이다. 

 이제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니, 너는 그것을 알라.’ 하고, 

또 이르기를, 

 ‘폐태자(廢太子)인 황장자(皇長子)는 성행(性行)이 불순(不順)하니, 

 전례(前例)에 의하여 구수(拘囚)하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주어서 그 몸을 마치게 하고, 

 폐태자의 제2자(第二子)는 짐이 매우 사랑하였으니, 그를 특별히 봉하여 친왕(親王)을 삼도록 하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서거하였다 합니다. 



무오연행록 정조 23년 1799년 1월 1일 기록中

앉는 방석과 띠돈[銙]과 메는 염주(念珠)가 또한 다 품수(品數)를 좇아 따르니

방석은 이리 가죽과 띠돈은 옥판(玉板)과 염주의 산호는 가장 높은 품수이니, 

염주는 중이 메는 모양과 같이 108개의 구슬을 꿰었으며, 

작은 구슬로 꿰어 또한 걸었으니 문장(文章)으로 귀천(貴賤)을 표한 의사가 분명하나, 

다만 꼭뒤 변자(辮子 머리를 땋아 길게 뒤로 늘인 것)에 조회 때면 또한 구슬을 달았으니 

극히 우스워 뵈더라. 



문견잡기(聞見雜記) 中

염주(念珠)는 곧 밀화(蜜花)ㆍ청강석(靑剛石) 따위의 물건으로 수효가 108이나 되는데 

혹은 목에 걸고 혹은 두어 구슬을 팔뚝에 건다.



임하필기 춘명일사(春明逸史) 여진(女眞)의 옛 무덤 中

북청부(北靑府) 지역에 오래된 옛 무덤이 하나 있는데, 

매우 커다랗게 생겨 사람들이 다들 이상하게 여겼다. 

마을 사람이 스스로 자기 선조(先祖)의 무덤이라고 하더니 어느 날 다른 산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가서 그것을 보니, 무덤 안에 시신(屍身)이 있었는데 

그 복색(服色)이 호족(胡族)의 차림새였다. 

일곱 겹의 상의(上衣)가 혹은 청색(靑色)이고 혹은 흑색(黑色)이었으며, 

염주(念珠)가 걸려 있고 얼굴에는 수염(鬚髥)이 많았는데 꼭 살아 있는 모습 같았다.

체구(體軀)가 매우 장대한 걸 보니 틀림없이 여진 때의 사람으로 500년이 못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완전(完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행록(燕行錄) 일기(日記) 숙종 39년 1월 23일 기록中

그리고 문, 무 4품 이상 관원은 전마(拴馬 청 나라 때 관병(官兵)에게 갈라 주던 관마(官馬))의 발과 

가슴에 수주(數珠)를 걸었다. 


<누르하치가 41세 때 굴리던 염주>

 



-끝-



덧글

  • 해피사자 2016/04/15 16:39 #

    불심으로 대동단결(?) 인가요...
  • 영악한 사냥꾼 2019/03/11 20:53 #

    여진족은 본시 샤머니즘을 믿었는데, 고위층은 (좀더 수준 높은) 불교를 믿었다고 하더군요.

    정치적으로도 그 편이 북방민족과(몽골, 티벳) 일치감을 다지는데 좋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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