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 간신/반신 열전 4편 대초황제 장방창(張邦昌) 송사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틈틈이 송사의 간신(姦臣)과 반신(叛臣) 열전을 번역해 보고자 합니다.


연재 예정 인물

채경(蔡京)곽약사(郭藥師)동관(童貫)채변(蔡卞), 채유(蔡攸), 채소(蔡翛), 채화(蔡崈)

조량사(趙良嗣), 장각(張覺), 황잠선(黃潛善), 왕백언(汪伯彥), 진회(秦檜)

장방창(張邦昌), 유예(劉豫), 묘부(苗傅), 유정언(劉正彥)


1편 송사 간신열전 채경 http://cafe.naver.com/booheong/98808

2편 송사 간신열전 곽약사 http://cafe.naver.com/booheong/103206

3편 송사 환자열전 동관 [방랍 포함] http://cafe.naver.com/booheong/85702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5%AE%8B%E5%8F%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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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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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邦昌,字子能,永靜軍東光人也。

舉進士,累官大司成,以訓導失職,貶提舉崇福宮,知光、汝二州。

政和末,由知洪州改禮部侍郎。

首請取崇寧、大觀以來瑞應尤殊者增製旗物,從之。

宣和元年,除尚書右丞,轉左丞,遷中書侍郎。

欽宗即位,拜少宰。

金人犯京師,朝廷議割三鎮,俾康王及邦昌爲質于金以求成。

會姚平仲夜斫金人營,斡離不怒責邦昌,邦昌對以非出朝廷意。

俄進太宰兼門下侍郎。

既而康王還,金人復質肅王以行,仍命邦昌爲河北路割地使。

初,邦昌力主和議,不意身自爲質,及行,乃要欽宗署御批無變割地議,不許;

又請以璽書付河北,亦不許。

時粘罕兵又來侵,上書者攻邦昌私敵,社稷之賊也。

遂黜邦昌爲觀文殿大學士、中太一宮使,罷割地議。

其冬,金人陷京師,帝再出郊,留青城。

明年春,吳開、莫儔自金營持文書來,令推異姓堪爲人主者從軍前備禮冊命。

留守孫傅等不奉命,表請立趙氏。

金人怒,復遣開、儔促之,劫傅等召百官雜議。

衆莫敢出聲,相視久之,計無所出,乃曰:

「今日當勉強應命,舉在軍前者一人。」

適尚書員外郎宋齊愈至自外,衆問金人意所主,齊愈書「張邦昌」三字示之,遂定議,以邦昌治國事。

孫傅、張叔夜不署狀,金人執之置軍中。

王時雍時爲留守,再集百官詣秘書省,至即閉省門,以兵環之,俾範瓊諭衆以立邦昌,衆意唯唯。

有太學生難之,瓊恐沮衆,厲聲折之,遣歸學舍。

時雍先署狀,以率百官。

御史中丞秦檜不書,抗言請立趙氏宗室,且言邦昌當上皇時,專事宴遊,党附權奸,蠹國亂政,社稷傾危實由邦昌。

金人怒,執檜。

開、儔持狀赴軍前。

邦昌入居尚書省,金人趣勸進,邦昌始欲引決,或曰:

「相公不前死城外,今欲塗炭一城耶?」

適金人奉冊寶至,邦昌北向拜舞受冊,即偽位,僭號大楚,擬都金陵。

遂升文德殿,設位御床西受賀,遣閤門傳令勿拜,時雍率百官遽拜,邦昌但東面拱立。

外統制官、宣贊舍人吳革恥屈節異姓,首率內親事官數百人,皆先殺其妻孥,焚所居,謀舉義金水門外。

範瓊詐與合謀,令悉棄兵仗,乃從後襲殺百餘人,捕革並其子皆殺之,又擒斬十餘人。

是日,風霾,日暈無光。

百官慘沮,邦昌亦變色。

唯時雍、開、儔、瓊等欣然鼓舞,若以爲有佐命功雲。

即以時雍權知樞密院事領尚書省,開權同知樞密院事,儔權簽書樞密院事,呂好問權領門下省,徐秉哲權領中書省。

下令曰:

「比緣朝廷多故,百官有司皆失其職。

  自今各遵法度,御史台覺察以聞。」

見百官稱「予」,手詔曰「手書」。

獨時雍每言事邦昌前,輒稱「臣啟陛下」,邦昌斥之;

勸邦昌坐紫宸、垂拱殿,呂好問爭之,乃止。

邦昌以嗣位之初,宜推恩四方,以道阻先赦京城,選郎官爲四方密諭使。

金人將退師,邦昌詣金營祖別,服柘袍,張紅蓋,所過設香案,起居悉如常儀,

時雍、秉哲、開、儔皆從行,士庶觀者無不感愴。

二帝北遷,邦昌率百官遙辭于南薰門,衆慟哭,有僕絕者。

金師既還,邦昌降手書赦天下。

呂好問謂邦昌曰:

「人情歸公者、劫于金人之威耳,金人既去,能復有今日乎?

  康王居外久,衆所歸心,曷不推戴之?」

又謂曰:

「爲今計者,當迎元祐皇后,請康王早正大位,庶獲保全。」

監察御史馬伸亦請奉迎康王。

邦昌從之。

王時雍曰:

「夫騎虎者勢不得下,所宜熟慮,他日噬臍,悔無及已。」

徐秉哲從旁贊之,邦昌弗聽,乃冊元祐皇后曰宋太后,入御延福宮。

遣蔣師愈齎書于康王自陳:

「所以勉循金人推戴者,欲權宜一時以紓國難也,敢有他乎?」

王詢師愈等,具知所由,乃報書邦昌。

邦昌尋遣謝克家獻大宋受命寶,復降手書請元祐皇后垂簾聽政,以俟復辟。

書既下,中外大說。

太后始御內東門小殿,垂簾聽政。

邦昌以太宰退處內東門資善堂。

尋遣使奉乘輿服御物至南京,既而邦昌亦至,伏地慟哭請死,王撫慰之。

王即皇帝位,相李綱,徙邦昌太保、奉國軍節度使,封同安郡王。

綱上書極論:

「邦昌久典機政,擢冠宰司。

  國破而資之以爲利,君辱而攘之以爲榮。

  異姓建邦四十餘日,逮金人之既退,方降赦以收恩。

  是宜肆諸市朝,以爲亂臣賊子之戒。」

時黃潛善猶左右之。

綱又力言:

「邦昌已僭逆,豈可留之朝廷,使道路目爲故天子哉?」

高宗乃降御批曰:

「邦昌僭逆,理合誅夷,原其初心,出於迫脅,可特與免貸,責授昭化軍節度副使、潭州安置。」

初,邦昌僭居內庭,華國靖恭夫人李氏數以果實奉邦昌,邦昌亦厚答之。

一夕,邦昌被酒,李氏擁之曰:

「大家,事已至此,尚何言?」

因以赭色半臂加邦昌身,掖入福寧殿,夜飾養女陳氏以進。

及邦昌還東府,李氏私送之,語斥乘輿。

帝聞,下李氏獄,詞服。

詔數邦昌罪,賜死潭州,李氏杖脊配車營務。

時雍、秉哲、開、儔等先已遠竄,至是,並誅時雍。

장방창(張邦昌)은, 자(字)는 자능(子能)이고, 영정군(永靜軍) 동광인(東光人)이다.

진사(進士)로 거(舉/관직을 일으킴)하였고, 누관(累官/여러 번 관직이 오름)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는데,

훈도(訓導/교육 담당 관직)로써 실직(失職)하였고, 제거숭복궁(提舉崇福宮)으로 폄(貶/관직이 깎임)하였고,

광주(光)와 여주(汝) 2주(州)의 지주(知/지방 장관)가 되었다.

정화(政和/북송 8대 황제 휘종의 #4 연호) 말(末)에, 지홍주(知洪州)를 거쳐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 개(改/관직을 고침)하였다.

숭녕(崇寧/북송 8대 황제 휘종의 #2 연호)과 대관(大觀/북송 8대 황제 휘종의 #3 연호이래(以來)로

서응(瑞應/임금의 어진 정치에 하늘이 감응하여 나타낸 상서로운 징조)이 우수(尤殊/더욱 남다름)한 것을 취(取)하길 

수청(首請/주동자가 되어 청함)하여, 기물(旗物)을 증제(增製/더욱 만듦)하게 하니, 따랐다.

선화(宣和/북송 8대 황제 휘종의 #6 연호) 원년(元年/1119년)에, 상서우승(尚書右丞)에 제수(除)되었고,

좌승(左丞)으로 전(轉/관직을 옮김)하였고,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천(遷/관직을 옮김)하였다.

흠종(欽宗)이 즉위(即位)하자, 소재(少宰)로 배(拜/관직을 받음)하였다.

금인(金人)이 경사(京師/수도 개봉)를 범(犯)하자, 조정(朝廷)이 삼진(三鎮)의 할양(割)을 의논(議)하였는데,

강왕(康王)과 더불어 장방창(邦昌)으로 하여금 금(金)에 인질(質)로 하여 이로써 구성(求成/성공을 바람)하였다.

때마침 요평중(姚平仲)이 금인(金人)의 영(營)을 야작(夜斫/야습)하였는데,

알리부(斡離不/종망, 금 태조 아골타의 #2남)가 노(怒)하여 장방창(邦昌)을 책(責/꾸짖음)하니,

장방창(邦昌)이 조정(朝廷)의 뜻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대답(對)하였다.

얼마 안 있어 태재(太宰) 겸(兼) 문하시랑(門下侍郎)으로 진(進/관직이 오름)하였다.

이윽고 강왕(康王/남송 1대 황제 고종, 휘종의 #9남 조구)이 귀환(還)하였는데, 

금인(金人)이 다시 숙왕(肅王/휘종의 #5남 조추)을 이로써 대신하여 인질(質)로 삼았다.

이에 명(命)하여 장방창(邦昌)을 하북로(河北路) 할지사(割地使)로 삼았다.

처음에, 장방창(邦昌)이 화의(和議)를 주력(力主/힘껏 주장함)하였는데,

불의(不意/뜻밖에)로 신자(身自/자신)가 인질(質)이 되자, 행(行)함에 이르러,

곧 흠종(欽宗)이 어비(御批/황제의 결재)에 서명(署)하여 할지(割地)의 의논(議)이 

무변(無變/변함이 없음)함을 요구(要)하니, 불허(不許)하였다.

또 새서(璽書/옥새가 찍혀 있는 문서)로써 하북(河北)을 부(付/줌)하길 청(請)하였는데, 

역시(亦) 불허(不許)하였다.

이때 점한(粘罕/종한, 금 태조 아골타의 사촌 살개의 아들)의 병(兵)이 또 내침(來侵)하였는데,

상서(上書/상소를 올림)하는 자(者)가 장방창(邦昌)을 사적(私敵)으로 공격(攻)하여,

사직(社稷)의 적(賊)이라 하였다.

마침내 장방창(邦昌)을 관문전(觀文殿) 대학사(大學士)와 중태일궁사(中太一宮使)로 삼아 출(黜/내침)하였고,

할지(割地)의 의논(議)을 파(罷)하였다.

그 겨울에, 금인(金人)이 경사(京師/수도 개봉)를 함락(陷)하였고, 

제(帝/흠종)가 재차(再) 출교(出郊/성 밖으로 나옴)하였고, 청성(青城)에 유(留/머무름)하였다.

명년(明年/다음 해, 1127년) 봄에, 오개(吳開)와 막주(莫儔)가 금(金)의 영(營)으로부터 문서(文書)를 지(持)니고 왔는데,

이성(異姓/다른 성씨)의 추천(推)을 감당(堪)하도록 하여 인주(人主/임금)로 삼는 자(者)를

군전(軍前/금나라 군영)으로 데려와 책명(冊命/책봉 명령)의 예식(禮)을 준비(備)하게 하였다.

유수(留守) 손부(孫傅) 등(等)이 봉명(奉命/명을 받듦)하지 않았고, 

표(表)를 올려 조씨(趙氏)를 세울 것을 청(請)하였다.

금인(金人)이 노(怒)하여, 다시 오개(開)와 막주(儔)를 보내 재촉(促)하였고,

손부(傅) 등(等)을 겁박(劫)하고 백관(百官)을 소집(召)하여 잡의(雜議/잡다하게 의논함)하게 하였다.

무리가 감히(敢) 출성(出聲/소리를 냄)하지 못하였는데, 상시(相視/서로 바라봄)가 오래되었으나,

계책(計)이 나오는 바가 없었는데, 이에 말하길

「금일(今日) 응명(應命/명령에 응함)하라 면강(勉強/억지로 시킴)을 당(當)하니,

  군전(軍前/금나라 군영)에 있는 자(者) 1 인(人)을 천거(舉)하자!

마침 상서원외랑(尚書員外郎) 송제유(宋齊愈)가 외부(外)에서부터 이르렀는데,

무리가 금인(金人)의 의중(意)이 누구를 주(主/임금)로 세우려는지 묻자,

송제유(齊愈)가 「장방창(張邦昌)」석자(字)를 서(書/글을 씀)하여 보이니,

마침내 정의(定議/의논하여 정함)하였고, 장방창(邦昌)으로써 국사(國事)를 통치(治)하게 하였다.

손부(孫傅)와 장숙야(張叔夜)가 서장(署狀/장부에 서명함)하지 않으니,

금인(金人)이 집(執/사로잡음)하여 군중(軍中)에 두었다.

왕시옹(王時雍)은 이때 유수(留守)가 되어, 백관(百官)을 재집(再集/다시 모임)하여 비서성(秘書省)에 예(詣/다다름)하였는데,

이르니 곧 비서성(省)의 문(門)을 폐(閉)하고, 병(兵)으로써 환(環/둘러쌈)하였고,

범경(範瓊)을 시켜 유중(諭衆/무리를 타이름)하여 이로써 장방창(邦昌)을 세웠는데, 

중의(衆意/무리의 뜻)가 유유(唯唯/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함)하였다.

태학생(太學生)의 난(難)이 있었는데, 범경(瓊)이 저중(沮衆/무리를 막음)할까 두려워,

여성(厲聲/언성을 높여 큰 소리를 지름)하며 절(折/꾸짖음)하고, 학사(學舍)로 견귀(遣歸/돌려보냄)하였다.

왕시옹(時雍)이 먼저 서장(署狀/장부에 서명함)하였고, 이로써 백관(百官)을 인솔(率)하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진회(秦檜)가 부서(不書/글을 쓰지 않음)하고는,

항언(抗言/항의하여 말함)하여 조씨(趙氏)의 종실(宗室)를 세울 것을 청(請)하였고,

또 말하길 장방창(邦昌)은 상황(上皇/휘종) 당시(時)에,

오로지 연유(宴遊/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놂)만 하였는데, 

권간(權奸/권세가 있는 간신)의 당(党)에 부(附/붙음)하여,

두국(蠹國/나라에 좀이 됨)하고 난정(亂政/정치를 어지럽힘)하였고,

사직(社稷)이 경위(傾危/형세가 위태로움)함은 실(實)로 장방창(邦昌) 때문이다 하였다.

금인(金人)이 노(怒)하여, 진회(檜)를 집(執/사로잡음)하였다.

오개(開)와 막주(儔)가 지장(持狀/장부를 지님)하여 군전(軍前/금나라 군영)에 부(赴/다다름)하였다.

장방창(邦昌)이 상서성(尚書省)에 입거(入居/들어와 거주함)하였는데,

금인(金人)이 권진(勸進/제위에 오르라 권함)을 재촉(趣)하자,

장방창(邦昌)이 비로소 인결(引決/책임을 지고 자결함)코자 하였는데,

혹자(或)가 말하길

「상공(相公)이 성외(城外)에서 앞서 죽지 않았는데, 

  지금(今) 일성(一城/수도 개봉)을 도탄(塗炭)에 빠트리고자 합니까?」

마침 금인(金人)이 책보(冊寶/옥책과 금보)를 봉(奉/받듦)하여 이르니,

장방창(邦昌)이 북향(北向)하여 배무(拜舞/절하여 하례함)하고 수책(受冊/책봉을 받음)하였고,

곧 위위(偽位/가짜 제위에 오름)하였고, 대초(大楚)라 참호(僭號/참람 되게 호칭함)하였고,

도읍(都)을 본떠 금릉(金陵)이라 하였다.

마침내 문덕전(文德殿)에 올라, 

어상(御床/임금의 수라상)을 설위(設位/자리를 베풀어 만듦)하여 사방(西)으로 수하(受賀/하례를 받음)하였고,

합문(閤門/편전의 앞문)에 보내 전(傳)하여 배(拜/절함)하지 말라 하였는데,

왕시옹(時雍)이 백관(百官)을 인솔(率)하여 거배(遽拜/급히 절함)하니,

장방창(邦昌)이 단지(但) 동면(東面/동쪽으로 향함)하여 공립(拱立/두 손을 맞잡고 섦)하였다.

외통제관(統制官)과 선찬사인(宣贊舍人) 오혁(吳革)이 

이성(異姓/다른 성씨)에게 굴절(屈節/절개를 굽힘)함을 치(恥/치욕으로 여김)하여,

내친사관(內親事官/궁내 관서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 수백인(數百人)을 수솔(首率/주동자가 되어 인솔함)하여,

모두 그 처노(妻孥/처자식)를 먼저 죽이고, 소거(所居/집)를 분(焚/불사름)하고,

금수문(金水門) 바깥에서 거의(舉義/의거)하기를 모의(謀)하였다.

범경(範瓊)이 거짓으로 더불어 합모(合謀/함께 모의함)하였는데, 영(令)하여 모두 병장기(兵仗)를 기(棄/버림)하게 하였고,

곧 뒤쫓아 후습(後襲/뒤에서 기습함)하여 백여인(百餘人)을 살해(殺)하였고,

오혁(革)과 더불어 그 아들을 체포(捕)하여 모두 죽였으며, 또 십여인(十餘人)을 사로잡아 참(斬)하였다.

이 날에,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렸으며, 일훈(日暈/햇무리)이 무광(無光/빛이 없음)하였다.

백관(百官)이 참저(慘沮/비탄에 잠기어 의기소침함)하였는데, 장방창(邦昌) 역시(亦) 변색(變色/얼굴색이 변함)하였다.

오직 왕시옹(時雍)과 오개(開) 및 막주(儔)와 범경(瓊) 등(等)만이 

흔연(欣然/마음이 흐뭇함)하고 고무(鼓舞/기뻐서 춤을 춤)하였는데,

그런 뒤에 좌명(佐命/임금이 될 사람을 보좌함)의 공(功)이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곧 왕시옹(時雍)을 권지추밀원사(權知樞密院事)로 삼아 상서성(尚書省)을 거느리게 하였고,

오개(開)는 권동지추밀원사(權同知樞密院事), 막주(儔)는 권첨서추밀원사(權簽書樞密院事),

여호문(呂好問)은 권령문하성(權領門下省), 서병철(徐秉哲)은 권령중서성(權領中書省)으로 삼았다.

하령(下令/영을 내림)하여 말하길

「자주 조정(朝廷)이 다고(多故/변고가 많음)한 연유(緣)로, 

  백관(百官)과 유사(有司)가 모두 그 직(職)을 실(失/잃음)하였다.

  지금(今)부터는 각각(各) 법도(法度)를 준수(遵)하고,

  어사대(御史台)는 각찰(覺察/감찰)하여 이문(以聞/임금에게 아룀)하라.」

보아하니 백관(百官)에게「여(予/나)」를 칭(稱)하였고, 

수조(手詔/손수 조서를 씀)는 「수서(手書/직접 씀)」라 말하였다.

오직 왕시옹(時雍)이 매번(每) 장방창(邦昌) 앞에서 언사(言事/나랏일을 말함)하기를,

번번이「신(臣)이 폐하(陛下)에게 계(啟/아룀)한다.」칭(稱)하니, 장방창(邦昌)이 척(斥/물리침)하였다.

장방창(邦昌)에게 자신전(紫宸)과 수공전(垂拱殿)에 앉으라 권(勸)하였는데, 여호문(呂好問)이 싸워,

곧 저지(止)하였다.

장방창(邦昌)이 사위(嗣位/임금 자리를 이어받음)의 초기(初)임으로,

편의(宜)로 사방(四方)을 추은(推恩/은혜를 베풂)하였는데,

도조(道阻/길이 막힘)으로써 먼저 경성(京城/수도 개봉)을 사면(赦)하였는데,

낭관(郎官)을 선발(選)하여 사방(四方)의 밀유사(密諭使/은밀하게 보내는 회유 사신)로 삼았다.

금인(金人)이 장차(將) 퇴사(退師/회군)하려 하였는데, 

장방창(邦昌) 금영(金營)에 예(詣/이름)하여 조별(祖別/송별연을 엶)하였고,

자포(柘袍/황제의 어복)를 입었고, 홍개(紅蓋/황제의 일산)를 장(張/베풂)하였고,

향안(香案/향로와 향합을 놓는 어전용 탁자)을 화설(過設/지나치게 베풂)하였고,

기거(起居/거주)함이 모두 상의(常儀/평상시의 궁중의 예식)와 같았는데,

왕시옹(時雍), 서병철(秉哲), 오개(開), 막주(儔)가 모두 종행(從行/따라 옴)하였는데,

사서(士庶/사대부와 백성)와 관자(觀者/보는 자)가 감창(感愴/가슴에 사무쳐 슬픎)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제(二帝/휘종과 흠종)이 북천(北遷/북쪽으로 옮김)하였는데, 

장방창(邦昌)이 백관(百官)을 인솔(率)하고 남훈문(南薰門)에서 요사(遙辭/멀리서 아룀)하였고,

무리가 통곡(慟哭)하였고, 복절(僕絕/쓰러져 죽음)하는 자(者)도 있었다.

금사(金師/금나라 군대)가 이윽고 귀환(還)하자, 

장방창(邦昌)이 수서(手書/손수 글을 씀)를 내려 천하(天下)를 사(赦/사면함)하였다.

여호문(呂好問)이 장방창(邦昌)에게 일컬어 말하길

「인정(人情)이 공(公)을 따른 것은 금인(金人)의 위엄(威)에 겁(劫/위협함)하였을 뿐이니,

  금인(金人)이 이윽고 가버렸으니, 능히(能) 금일(今日)에 회복(復)할 수 있지 않겠소?

  강왕(康王/휘종의 #9남 조구)이 거외(居外/외부에서 거주함)함이 오래되었으니,

  무리가 귀심(歸心/사모하여 마음으로 붙좇음)하는 바이니,

  어찌 추대(推戴)하는 것이 어렵겠소?」

또 일컬어 말하길

「지금(今)의 계책(計)으로 하는 것은, 당연히(當) 원우황후(元祐皇后)를 영(迎/맞이함)하고,

  강왕(康王/휘종의 #9남 조구)에게 급히 대위(大位/제위)를 정(正/바로잡음)하길 청(請)하고,

  보전(保全)을 서획(庶獲/얻기를 바람)해야 하오.」

감찰어사(監察御史) 마신(馬伸) 역시(亦) 강왕(康王/휘종의 #9남 조구)을 봉영(奉迎/받들어 맞이함)하길 청(請)하였다.

장방창(邦昌)이 따랐다.

왕시옹(王時雍)이 말하길

「대저 기호(騎虎/호랑이에 탐)한 자(者)의 기세(勢)는 내릴 수가 없는데,

  마땅히 숙려(熟慮/곰곰이 생각하거나 궁리함)해야 하는 바,

  타일(他日/다른 날)에 서제(噬臍/후회해도 이미 늦음)하며, 후회(悔)해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다.」

서병철(徐秉哲)이 방찬(從旁/곁에서 따름)하여 찬동(贊)하였으나, 

장방창(邦昌)이 불철(弗聽/들어주지 않음)하였고,

곧 원우황후(元祐皇后)를 책봉(冊)하여 송태후(宋太后)라 말하고, 

연복궁(延福宮)에 입어(入御/왕후가 궁 안으로 들어감)하였다.

장사유(蔣師愈)에게 재서(齎書/서신을 줌)하여 강왕(康王/휘종의 #9남 조구)에게 보내 자진(自陳/스스로 해명을 늘어 놈)하였다.

「금인(金人)이 추대(推戴)를 면순(勉循/억지로 강요함)하는 소이(所以/까닭)로,

  일시(一時)적인 권의(權宜/임시적인 편의)로 국난(國難/나라의 위태로운 고비)을 

  이로써 서(紓/늦춤)하고자 하였을 뿐,

  감히(敢) 다른 뜻이 있었겠나이까?」

강왕(王)이 장사유(師愈) 등(等)에게 순(詢/물음, 상의함)하여, 

자세히 소유(所由/이유, 말미암은 바)를 알았고, 곧 장방창(邦昌)에게 보서(報書/회답으로 보내는 편지를 씀)하였다.

장방창(邦昌)이 잇달아 사극가(謝克家)를 보내 대송수명보(大宋受命寶/송 태조의 옥새)를 헌상(獻)하였고,

다시 수서(手書/손수 글을 씀)를 내려 원우황후(元祐皇后)에게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청(請)하였고,

이로써 복벽(復辟/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을 사(俟/기다림)하였다.

서신(書)이 이윽고 내려오자, 중외(中外/조정과 민간)가 대열(大說/크게 기뻐함)하였다.

태후(太后)가 비로소 내동문(內東門)의 소전(小殿)에 어(御/거둥함)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장방창(邦昌)이 태재(太宰)로써 내동문(內東門) 자선당(資善堂)에 퇴처(退處/물러나 머묾)하였다.

잇달아 견사(遣使/사신을 보냄)하여 승여(乘輿/임금이 타는 수레)와 복어(服御/어복)의 물건(物)을 

받들어 남경(南京)에 이르렀고,

얼마 안 있어 장방창(邦昌) 역시(亦) 이르자, 

복지(伏地/땅에 엎드림)하고 통곡(慟哭)하며 청사(請死/죽음을 청함)하였는데,

강왕(王)이 무위(撫慰/위로하고 어루만짐)하였다.

강왕(王)이 황제(皇帝)의 위(位)에 즉위(即)하자, 이강(李綱)을 재상(相)으로 삼았고,

장방창(邦昌)을 태보(太保)와 봉국군(奉國軍) 절도사(節度使)로 사(徙/관직을 옮김)하였고,

동안군왕(同安郡王)에 봉(封)하였다.

이강(綱)이 상서(上書/상소를 올림)하여 극론(極論/엄하게 논함)하길

「장방창(邦昌)은 오랫동안 기정(機政/정치)를 전(典/종사함, 맡음)하였고,

  관재(冠宰/재상)로 발탁(擢)하여 사(司/맡음)하였나이다.

  국파(國破/나라가 망함)하였는데도 재물(資) 모으기에 이롭다(利) 생각하였으며,

  군욕(君辱/임금이 치욕을 당함)하였는데도 양(攘/훔침)하여 영예(榮)로 생각하였나이다.

  이성(異姓/다른 성씨)으로 건방(建邦/나라를 세움)한지 40 여일이며,

  금인(金人)이 이윽고 물러남을 틈타, 

  바야흐로 항사(降赦/사면령을 내림)하여 이로써 수은(收恩/은혜를 모음)하였나이다.

  이는 마땅히 여러 시조(市朝/시정과 조정)를 사(肆/시험함)함이니,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징계(戒)로 삼으소서.」

이때 황잠선(黃潛善)도 좌우(左右)와 똑같았다.

이강(綱)이 또 강언(力言/강하게 말함)하길

「장방창(邦昌)은 이미(已) 참역(僭逆/참람 되게 반역함)하였는데,

  어찌 조정(朝廷)에 남길 수가 있으며, 

  도로(道路/여러 지역)로 하여금 고(故/옛) 천자(天子)라 목위(目爲/여김, 간주함)하겠나이까?」

고종(高宗)이 곧 어비(御批/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비답)를 내려 말하길

「장방창(邦昌)이 참역(僭逆/참람 되게 반역함)하였으니, 

  주이(誅夷/모조리 죽임)함이 이합(理合/이치에 합당함)하나,

  원래(原) 그 초심(初心)이, 박협(迫脅/협박)에서 나왔으니,

  특별(特)히 면대(免貸/사면)를 베푸는 것이 옳으니,

  소화군(昭化軍) 절도부사(節度副使)로 책수(責授/꾸짖어 관직을 깎아 내림)하고,

  담주(潭州)에 안치(安置/유배 보냄)하라!」

처음에, 장방창(邦昌)이 참람(僭)하게 내정(內庭/임금이 사적인 생활을 하는 궁궐의 내부)에 거주(居)하였는데,

화국정공부인(華國靖恭夫人) 이씨(李氏)가 수차례(數) 장방창(邦昌)에게 과실(果實/과일)을 봉(奉/받듦)하였는데,

장방창(邦昌) 역시(亦) 후답(厚答/후하게 보답함)하였다.

어느 저녁에, 장방창(邦昌)이 피주(被酒/술에 취함)하였는데, 이씨(李氏)가 포옹(擁)하며 말하길

「대가(大家/대감),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는데, 어떤 말이 필요할까요?」

이로 인(因)하여 자색(赭色/검붉은 흙 같은 빛깔) 반비(半臂/짧은 겉옷)로써 장방창(邦昌)의 몸에 가(加/입힘)하였고,

복녕전(福寧殿)에 액입(掖入/부축하여 들어감)하였고, 

밤에 양녀(養女/수양딸) 진씨(陳氏)를 식(飾/꾸밈, 단장함)하여 이로써 진(進/올림)하였다.

장방창(邦昌)이 동부(東府)로 환(還/돌아옴)함에 이르러, 이씨(李氏)가 사송(私送/사적으로 전송함)하였고,

승여(乘輿/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의 자리)를 어척(語斥/말하여 드러냄)하였다. 

제(帝/고종)이 듣고는, 이씨(李氏)를 하옥(下獄)하였고, 사복(詞服/자복함)하였다.

수(數)차례 장방창(邦昌)의 죄(罪)에 관한 조서(詔)를 내렸고,

담주(潭州)에서 사사(賜死/죽음을 하사함)하였고, 

이씨(李氏)는 장척(杖脊/척추를 때리는 형벌)하고 차영(車營/송의 전차부대)의 업무(務)에 배(配/종사함, 짝지움)하게 하였다.

왕시옹(時雍), 서병철(秉哲), 오개(開), 막주(儔) 등(等)은 먼저 이미 원찬(遠竄/먼 곳으로 유배 보냄)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왕시옹(時雍)과 나란히 주살(誅)하였다.


*대송수명보(大宋受命寶)

  : 송 태조 조광윤이 사용한 옥새이다.

    남송 고종은 중흥(中興)이란 글귀를 추가하여 대송수명중흥지보(大宋受命中興之寶)이란 옥새를 사용하였다.


*화국정공부인(華國靖恭夫人) 이춘연(李春燕)

 : 휘종의 후궁으로 화국정공부인(華國靖恭夫人)에 봉해졌으나, 

   북송 멸망 후 금은 장방창을 대초황제, 이씨를 황후에 임명하였다.

   이씨는 장방창에게 술을 접대하고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고, 양녀 진씨를 시중들게 하였다.

   후에 고종이 장방창에게 죽음을 내리고, 이춘연에게는 장형을 내렸다.

   일본 위키백과에는 병졸과 결혼시켰다고 하나 이는 송사 원문의 배(配/종사함, 짝지움)를 오역한 것으로 생각되며,

   고종은 이씨에게 척추를 때리는 장척을 내리고 군영에서 잡일을 보게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죽었다.

https://ja.wikipedia.org/wiki/%E6%9D%8E%E6%98%A5%E7%87%95_(%E5%AE%8B)



장방창은 자는 자능이고 영정군 동광인이다.

진사로 급제하여 여러 번 관직이 올라 대사성에 이르렀는데 훈도(교육)을 잘못하여 

제거숭복궁으로 관직이 깎이고 광주와 여주 2주의 지주(지방관)가 되었다.

정화(1111년~1118년) 말에 지홍주를 거쳐 예부시랑에 올랐다.

숭녕(1102년~1106년)과 대관(1107년~1110년) 이래로 휘종은 상서로운 물건을 구하였는데 

장방창을 주도로 하여 많이 구하도록 하니 장방창이 따랐다.

1119년에 상서우승에 제수되고 상서좌승으로 옮겼다가 중서시랑이 되었다.

흠종이 즉위하자 소재에 임명되었다.

금나라 군이 수도 개봉을 공격하자 조정이 3진의 할양을 의논하였는데 

강왕(남송 1대 황제 고종, 휘종의 #9남 조구)과 더불어 장방창을 금에 인질로 보내 이로써 성공을 바랐다.

때마침 요평중이 금군의 영을 야습하였는데 알리부(종망, 금 태조 아골타의 #2남)가 노하여 장방창을 꾸짖으니

장방창이 요평중의 공격은 조정의 뜻이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안 있어 태재 겸 문하시랑으로 관직이 올랐다.

이윽고 강왕이 돌아왔는데 금은 다시 숙왕(휘종의 #5남 조추)를 강왕을 대신하여 인질로 삼았다.

처음에 장방창이 화의를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뜻밖에 자신이 인질이 되자,

인질로 가기 전에 흠종에게 할지의 의논이 변함이 없다는 조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하였는데 흠종은 불허하였다.

또 하북을 금에 주자는 문서에 옥새를 찍어 달라 청하였으나 역시 불허하였다.

이때 점한(종한, 금 태조 아골타의 사촌 살개의 아들)의 병력이 또 공격하여 오니

어떤 자가 상소를 올려 장방창을 사적으로 공격하며 사직의 적이라고 하였다.

마침내 장방창을 관문전 대학사, 중태일궁사로 삼아 내쳤고 할지의 의논을 멈췄다.

그 1126년 겨울에 금나라 군이 수도 개봉을 함락하였고 흠종이 재차 성 밖으로 나가 청성에 머물렀다.

다음 해 1127년 봄에 오개와 막주가 금의 군영으로부터 문서를 지니고 왔는데

이성(다른 성씨)을 임금으로 추천하여 금나라 군영으로 데려와 책봉의 예식을 행하라 하였다.

유수 손부 등이 명을 받들지 않고 표를 올려 조씨를 세워 줄 것을 청하였다.

금나라 사람이 노하여 다시 오개와 막주를 보내 재촉하였고 손부 등을 겁박하고 백관을 소집하여 잡다하게 의논하게 하였다.

백관이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로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하여 계책이 나올 바가 없었는데 이에 말하길

   <오늘 명령에 따르라며 억지로 시킴을 당하였으니 금나라 군영에 있는 자 1 인을 천거하자!>

마침 상서원외랑 송제유가 성밖으로부터 이르렀는데 백관이 금나라 사람의 의중이 누구를 임금으로 세우려는지 묻자

송제유가 <장방창> 석자를 써서 보였니 마침내 의논이 정하여져서 장방창에게 국사를 통치하게 하였다.

손부와 장숙야가 장부에 서명하지 않으니 금나라 군이 군중으로 사로잡아 갔다.

왕시옹은 이때 유수가 되어 백관을 다시 모이게 하여 비서성에 이르러 곧 비서성의 문을 폐하고 군사로 둘러싸고는

범경을 시켜 백관을 설득시켜 이로써 장방창을 세웠는데 백관이 아무 말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였다.

태학생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범경이 백관을 막을까 두려워 언성을 높이고 큰소리를 쳐서 꾸짖고 학사로 돌려보냈다.

왕시옹이 백관을 인솔하여 먼저 장부에 서명하였다.

어사중승 진회가 서명하지 않고는 항의하며 조씨의 종실을 세울 것을 청하였고

또 말하길 장방창은 휘종 당시에 오로지 잔치를 베풀어 놀기만 하였고 권세가 있는 간신의 당에 붙어

나라의 좀이 되었고 정치를 어지럽혔으니 사직이 위태로워진 것은 실로 장방창 때문이다 하였다.

금나라 사람이 노하여 진회를 사로잡아갔다.

오개와 막주가 장부를 지니고 금나라 군영에 이르렀다.

장방창이 상서성에 들어와 거주하였는데 금나라 사람이 제위에 오르라 재촉하자

장방창이 비로소 책임을 지고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혹자가 말하길

   <상공은 성밖에서도 앞서 죽지 않았었는데 지금 수도 개봉을 도탄에 빠트리고자 합니까?>

마침내 금나라 사람이 옥책과 금보를 받들어 이르니 장방창이 북쪽을 향하여 절하고 책봉을 받아

곧 가짜 제위에 오르고는 대초라 참람되게 호칭하였고, 도읍을 본떠 금릉이라 하였다.

마침내 문덕전에 올라 수라상을 베풀어 사방의 하례를 받았는데

편전의 합문에 보내 백관은 절하지 말라 전하였는데 왕시옹이 백관을 인솔하여 급히 절하니

장방창이 단지 동쪽을 바라보며 두 손을 맞잡고 서있었다.

외통제관 겸 선찬사인 오혁이 다른 성씨에게 절개를 굽히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

궁내 관리 수백 명을 이끌고 모두 그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집을 불사라 금수문 밖에서 의거하기로 모의하였다.

범경이 거짓으로 함께 모의하였는데 영을 내려 모두 병장기를 버리게 하고는

곧 뒤쫓아 기습하여 100여 명을 살해하였고 오혁과 더불어 그 아들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으며

또 10여 명을 사로잡아 참하였다.

이 날에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렸으며 햇무리가 빛이 없었다.

백관이 비탄에 잠기어 의기소침하였는데 장방창 역시 얼굴색이 변하였다.

오직 왕시옹, 오개, 막주, 범개 등만이 마음이 흐믓하고 기뻐서 춤을 췄는데 곧 좌명공신(개국공신)이 될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곧 왕시옹을 권지추밀원사로 삼아 상서성을 거느리게 하였고, 오개는 권동지추밀원사, 막주는 권첨서추밀원사

여호문은 권령문하성, 서병철은 권령중서성으로 삼았다.

영을 내려 말하길

   <자주 조정이 변고가 많았던 연유로 백관과 유사가 모두 그 직분을 잃었다.

    지금부터는 각각 법도를 준수하고 어사대는 감찰하여 아뢰라.>하였다.

보아하니 백관에게 <나>라 칭하였고 조서는 <수서(직접 글을 씀)>라 말하였다.

오직 왕시옹만이 매번 장방창 앞에서 나랏일을 말할 때 번번이 <신이 폐하께 아뢰나이다> 칭하니 장방창이 물리쳤다.

왕시옹이 장방창에게 자신전과 수공전에 오르라 권하였는데 여호문이 왕시옹과 다퉈 곧 멈추게 하였다.

장방창이 제위에 오른 초기라 편의로 사방에 은혜를 베풀었는데 지방으로 가는 길이 막혀

먼저 수도 개봉에 사면령을 내렸고 낭관을 선발하여 사방에 은밀하게 회유 사신을 보내려 하였다.

금나라 군이 장차 회군하려 하자 장방창이 금나라 군영에 이르러 송별연을 베풀었는데,

황제의 어복을 입었고 일산을 썼으며 향로를 과도하게 하며 모두 궁중의 예식과 같았다.

왕시옹, 서병철, 오개, 막주가 모두 따라왔는데 사대부와 백성으로 보는 자들이 가슴에 사무쳐 슬프지 않은 자가 없었다.

두 황제 휘종과 흠종이 북쪽으로 끌려갔는데 장방창이 백관을 인솔하고 남훈문에서 멀리서 아뢰니,

백관이 통곡하였고 쓰러져 죽는 자도 있었다.

금나라 군대가 이윽고 돌아가자 장방창이 수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령을 발표하였다.

여호문이 장방창에게 일컬어 말하길

   <인정이 공을 따른 것은 금인의 위엄에 겁을 먹었을 뿐이고 금나라 군대가 이윽고 가버렸으니

    능히 금일에 다시 황실을 회복할 수 있지 않겠소?

    강왕이 외부에 거주한지 오래되어 무리가 마음으로 붙좇는 바이니 어찌 추대하는 것이 어렵겠소?>

또 일컬어 말하길

   <지금의 계책으로 말하자면 마땅히 원우황후를 맞이하고 강왕에게 급히 제위를 바로잡아 달라 청하여

    보전하여 얻기를 바라야 하오.>

감찰어서 마신 역시 강왕을 받들어 맞이하길 청하니 장방창이 따랐다.

왕시옹이 말하길

   <대저 호랑이 등에 탄 자의 기세는 내릴 수가 없는데 마땅히 숙려해야 하는 바이거늘,

    다른 날에 후회해도 이미 늦고 다시 어찌할 수가 없다.>

서병철이 곁에서 왕시옹에 말에 찬동하였으나 장방창은 들어주지 않았다.

곧 원우황후를 책봉하여 송태후라 말하고 영복궁에 들어가게 하였다.

장사유에게 서신을 주어 강왕에게 보내 스스로 해명을 늘어놓기를

   <금나라 사람이 추대를 억지로 강요하는 까닭으로 일시의 편의로 국난을 늦추고자 하였을 뿐

    감히 다른 뜻이 있었겠나이까?>

강왕이 장사유 등에게 물어보아 상세한 사정을 알아보았고 곧 장방창에게 답서를 썼다.

장방창이 잇달아 사극가를 보내 태조의 옥새인 <대송수명보>를 헌상하였고

다시 수서를 내려 원우황후에게 수렴청정을 청하였고 이로써 강왕이 제위에 오르길 기다렸다.

제위에 오르겠다는 강왕의 서신이 내려오자 조정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태후가 비로소 내동문의 소전으로 거둥하여 수렴청정을 하였다.

장방창은 태재로 내동문 자선당에 물러나 머물렀다.

잇달아 사신을 보내 임금의 수레와 어복의 물건을 받들어 남경에 이르게 하였고

얼마 안 있어 장방창 또한 남경에 이르렀다.

장방창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죽음을 청하였는데 강왕이 위로하였다.

강왕이 황제에 즉위하자 이강을 재상으로 삼았고 장방창을 태보, 봉국군 절도사로 관직을 옮기게 하였고

동안군왕에 봉하였다.

이강이 상소를 올려 극하게 논하길

   <장방창은 오랫동안 정치를 하여 재상으로 발탁되었었나이다.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재물 모으기를 이롭다 생각하였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였는데도 제위를 훔치길 영예로 생각하였나이다.

    다른 성씨로 나라를 세운지 40 여일인데, 금나라 군이 이윽고 물러나자 감히 사면령을 내려 은혜를 베풀었나이다.

    이는 마땅히 조정과 여러 백성을 시험한 일이니

    난신적자의 징계로 삼으소서!>

이때 황잠선을 비롯한 좌우가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이강이 또 강하게 말하길

   <장방창은 이미 참람 되게 반역하였는데 어찌 조정에 남길 수가 있겠나이까?

    여러 지역으로 하여금 옛 천자라 여기게 하겠나이까?>

고종이 곧 비답을 내려 말하길

   <장방창이 참람 되게 반역하였으니 모조리 죽이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겠으나

    본래 그 초심이 협박에서 나온 것이니 특별히 사면을 베푸는 것이 옳다!

    소화군 절도부사로 관직을 깎고 담주에 안치(유배 보냄)하라!>

처음에 장방창이 참람 되게 궁궐의 내부에서 거주하였는데 휘종의 후궁인 화국정공부인 이씨가

수차례 장방창에게 과일을 베푸니 장방창 역시 후하게 보답하였다.

어느 저녁에 장방창이 술에 취했는데 이씨가 포옹하며 말하길

   <대감!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는데 어떤 말이 필요할까요?>

이로 인하여 어복인 자색 겉옷을 장방창의 몸에 입히고 복녕전에 부축하여 들어갔다.

밤에 수양딸 진씨를 단장시켜 장방창에게 올렸다.

장방창이 아침에 동부로 돌아가려 하자 이씨가 사적으로 전송하였고 임금의 수레를 대령하게 하였다.

황제(고종)이 듣고는 이씨를 하옥하여 자복하게 하였다.

수차례 장방창의 죄에 관한 조서를 내렸고 결국 담주에서 사사(죽음을 내림)하였다.

이씨는 장척(척추를 때리는 장형)을 때리고 군영의 잡무에 종사하게 하였다.

왕시옹, 서병철, 오개, 막주 등은 이미 먼저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이에 이르러 왕시옹과 나란히 주살하였다.


P.S)제가 볼 때에는 장방창은 참 이도저도 아닌 인물로 보입니다.

    억지로 제위에 올라왔으면 확실하게 입장을 정리하였어야 하는데

    황제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사면령을 내리고, 어복을 입고 일산을 썼으며

    두 임금이 금군에 의해 끌려가는데도 궁중에서 술을 마시고 취했으며

    휘종의 측실과 예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였고, 궁중에서 여인과 동침까지 하였습니다.

    게다가 강왕이 남경에서 근왕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옥새를 바치고 원우황후를 옹립하여 수렴청정하게 하였고

    스스로 강왕에게 달려가 엎드려 죽음을 청하기도 하였지요.

    설령 황제에 오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더라고 40여 일 동안 제위에 있던 인물을

    고종이 처형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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